이름 | 레지널드 타운센드(Reggienald Townsend) |
생년월일 | 1974년 5월 24일 ([age(1974-05-24)]세) |
국적 | 미국 |
출신 학교 | 세인트 조셉 대학교 |
포지션 | 센터 |
신체 사이즈 | 198cm, 120~145kg |
등번호 | 33[1], 1[2], 55[3] |
KBL 소속팀 | 청주 SK 나이츠(1997~1998) 원주 삼보 엑써스(1999~2000) 대전 현대 걸리버스(2000~2001) |
1. 개요
미국의 前 농구 선수.KBL의 2번째 시즌인 1997-98 시즌에 신생팀 청주 SK에 창단 멤버로 입단하였으며, 이후 원주 삼보, 대전 현대 등에서 대체 선수로서 활약하였다.
득점력이나 3점슛 능력이 상당히 출중했고 의외로 농구 센스도 탁월했으나 득점 원툴 플레이어라는 느낌이 강했으며 역대 외국인 선수들중에서 너무 발이 느린 선수라[4] 국내 빅맨과 동시 기용이 사실상 불가능해서 타운젠드 원 포스트에 빠른 가드들 위주의 기용법만 가능했는데 문제는 타운젠드가 키도 작은데다 탄력이 너무 없고 애시당초 골밑 플레이어도 아니어서 수비에서 매번 족족들이 뚫리기 일쑤였다.
프로필상 체중이 120kg였지만 워낙 살이 잘 찌는 체질이라 매번 입국만 하면 135kg를 찍고 왔는데 대전 현대에서 대체용병으로 왔을 땐 워낙 대체용병감이 없어서 부랴부랴 데려왔지만 이 때 몸무게가 145kg를 찍어버려 신선우 감독과 구단 관계자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물론 결과는 백코트도 안 될 정도로 걸어다니는 수준. 그런데도 슛능력만은 죽지 않았다.
무지막지하게 생긴 외모와 다르게 몹시도 순하고 인성도 훌륭한 선수였다.
2. 대학시절 ~ KBL 입성 이전
대학시절 기록1992년 Atlantic 10 컨퍼런스 소속의 세인트 조셉 대학교에 입학한 타운젠드는 신입생 시절 여느 루키들과 마찬가지로 벤치에서 출전하며 2년 선배이자 에이스 버나드 블런트(전 창원 LG)의 활약을 지켜보기만 했었으나, 2학년이던 93-94시즌 버나드 블런트가 심각한 무릎부상으로 1년 유급하면서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출전시간이 늘어났다. 3학년때는 팀의 주전센터로 뛰며 94-95 시즌 평균 14.7점-5.7리바로 유급에서 돌아온 4학년 블런트를 제치고 팀내 득점 1위(컨퍼런스 득점 9위)를 차지한다. 4학년때도 14.8점(팀내 1위, 컨퍼런스 8위)-6.4리바의 괜찮은 성적을 올렸지만, 타운젠드가 뛰던 시절 세인트 조셉 대학교는 컨퍼런스 중위권 수준이라 늘 간발의 차로 NCCA 토너먼트 진출 티켓을 놓쳤고, 블런트와 마찬가지로 대학시절 한번도 3월의 광란 무대를 밟아보지 못한채 졸업한다.[5][6]
졸업 후 97년 KBL 드래프트에 지원한 타운젠트는 1라운드 6순위로 신생팀 청주 SK 나이츠에 지명되어, 한국 무대에 첫발을 내딛었다.
3. KBL 시절
3.1. 청주 SK 나이츠 (1997~1998)
신생팀 진로 카스[7] 농구단을 인수한 청주 SK는 창단 준비 미흡으로 인한 스카웃 참패로[8] 그나마 대학시절 이름이 알려진 선수는 손규완(경희대, F, 186cm), 윤제한(명지대, F,192cm)이 전부일 정도였다. 팀 전원이 무명 출신 신입생들로 구성된 팀에서 타운젠드는 시즌 전경기[9]에서 평균 39분 12초라는 엄청난 출장시간을 감수해야했고, 27.4점-11.4리바-2.4어시의 기록을 올리며 97-98 시즌 공헌도 전체 2위에 오른다.[10] 포인트가드였던 뉴올리언즈 대학교 출신의 드와이트 마이베트(180.3cm)[11]도 득점에 치중하며 두 선수가 번갈아가며 40점씩 이상 올리는 날이 많았으나, 이들과 함께 부동의 주전으로 출전했던 손규완과 윤제한도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라 경기마다 기복이 심했고, 나머지 선수들은 타팀 식스맨들에 비해서도 실력이 한참 떨어졌던 탓에 청주 SK는 당연하게도 시즌 최하위로 떨어진다. 더군다나 팀내에 빅맨이라곤 타운젠드와 192cm의 윤제한이 전부라, 타운젠드가 파울트러블이라도 생기면 쓸 선수조차 없었다.[12] 다행히 시즌 중반 부산 기아로부터 전수훈(195cm)을 트레이드해 오면서 그나마 타운젠드에게 숨통이 트이긴 했으나 팀성적에 반등까지는 없었다.시즌 종료 후 청주 SK는 서장훈과 호흡을 맞출 파워포워드형 외인을 원했고,[13] 스피드에 약점이 있던 타운젠드는 재계약에 실패했다.
3.2. 원주 삼보 엑써스 (1999~2000)
청주 SK와의 재계약 실패 후 타운젠드는 이후 KBL 외인 드래프트에서 2년 연속 낙방하지만, 99-00 시즌 원주 삼보의 2라운드 외인 브라이언 리스가 태도 불량(!!)으로 퇴출되면서 교체선수로서 2시즌만에 KBL에 입성한다.전 시즌의 데릭 존슨에 비해 높이는 많이 낮지만 워낙 농구센스가 좋아 공수 양면에서 존슨보다 오히려 공헌도가 높았고, 기존의 주전멤버 신기성 - 허재 -
이 시즌 타운젠드는 신무기로 3점을 장착(경기당 0.5개, 성공률 37.3%)한데다 골밑에서 상대 타이밍을 뺏는 기술이 더욱 발전하여, 공격에 있어서만큼은 최고 센터 서장훈이 상대하기 가장 까다로운 외인으로 뽑을 정도였다. 하지만 120~130kg에 달하는 체중탓에 스피드가 너무도 느렸고, 당연히 점프도 낮아 도움수비 후 블록슛 같은건 기대하기 힘들었다. 당시 원주 삼보는 리그 중위권팀들을 상대로는 괜찮은 성적을 거뒀지만, 양강이었던 대전 현대(조니 맥도웰-로렌조 홀), 청주 SK(서장훈 -
그리고 너무 느린 기동력 때문에 타운젠드를 기용하는 상태에서는 정경호를 기용했다간 매경기 속공 20개는 허용할 상황이라 둘을 동시 기용하는 건 꿈도 못꾸었다. 왜냐하면 정경호도 발 느리기로는 크블에서 손꼽혔기 때문(...). 그래서 타운젠드 기용시에는 정경호는 무조건 벤치만 데울수 밖에 없던 이유. 이럴때는 궁여지책으로 정통 3번인
리그 3위권을 순항하던 타운젠드와 원주 삼보는 그러나 시즌 중반 타운젠드가 종아리 근육부상을 당하며 11경기 자리를 비우게 되고, 평균 22.7점-9.0리바-2.6-2.6어시를 올리던 타운젠드의 공백을 채우지 못하면서 원주 삼보는 리그 4위로 시즌을 마친다. 리그 5위 안양 SBS와의 6강 플레이오프에서 타운젠드는 부상 전에 비해 부족한 활약을 보였고, 상대팀의 수비형 센터 데릴 프루(200cm)와 윤영필을 상대로 골밑에서 밀리면서 1승 3패로 업셋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3.3. 대전 현대 걸리버스 (2000~2001)
조니 맥도웰-장신 외인[15]의 조합으로 3년 연속 챔피언결정전에 올랐던 대전 현대 신선우 감독은, 00-01 시즌 갑자기 토털바스켓볼로 팀 컬러 전환을 시도했고[16], NCAA 스타 출신 스윙맨 데이먼 플린트(195cm)를 조니 맥도웰의 짝으로 데려온다. 이바람에 겨우 194cm의 맥도웰이 센터로 뛰면서 무스타파 호프(200.7cm),코트 왕복만 해도 헐떡거릴 정도의 몸상태에도 불구, 특유의 센스를 바탕으로 1차전 원정경기에서 3점슛 2방 포함 18점 12리바를 기록, 디펜딩 챔피언 서울 SK에 80:76로 아쉽게 패하며 2차전을 기대하게 했으나, 대전 홈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매치업 상대였던 서장훈에게 32점 10리바를 내주며 팀의 0:2 탈락을 막지 못했다.
00-01 시즌의 초 단기 KBL 알바(플옵 2경기)를 마치고, 타운젠드는 선수 생활을 완전히 접었다. (사실상 99-00 시즌 이후 은퇴 상태로 봐야..)
3.4. 여담
- KBL 초창기 일부 외국인 선수들이 계약위반 보이콧[18], 야반도주[19]나 동료 선수들을 무시[20]하는 등 안좋은 인상을 남겼던 것에 반해, 레지 타운젠드는 인성이나 팬서비스에서 깔 게 없는 수준이었다. 청주 SK 시절 경기 전 국민의례 시 국내 선수들처럼 가슴에 손을 얹기도 했고, 꼴찌를 벗어나지 못하는 팀에서도 동료 선수들과 친분을 쌓으며 화목한 팀 분위기를 이루었다. 원주 삼보 엑써스 시절엔 덩크 성공 후 두 손을 크로스하여 팀의 닉네임인 "X"를 표시하기도 했고, 바스켓카운트 득점하고 팔굽혀펴기를 하는 등 다양한 세리머니로 관중들을 즐겁게 했다. 그리고 다른 외국인 선수들이 국내선수들을 위협하는 행위를 서슴치 않을때 타운젠드는 상대 수비가 거칠게 수비해도 허허 웃어넘길 정도로 천성이 착한 사람이었다.
- 또한 KBL 출범 이후 역대 어떤 외국인 선수보다도 한국어 실력이 뛰어났다. 세인트 조셉 대학 시절 언어학을 전공했으며, 자신은 어떤 외국어든 배우려고 노력한다고. 청주 SK 시절 "한국말 잘하는 KBL 외인선수"라는 주제로 스포츠뉴스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유창한 한국말로 동료에게 전화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했다. 원주 삼보 시절엔 한국말이 좀더 늘어 경기 시작전 관중과 취재진에게 한국어로 인사하기도 했고, 경기가 없는 날이면 혼자서 서울 시내 백화점을 쇼핑했다고 한다.
- 원주 삼보 시절 KBL 올스타로 선발된 타운젠드는 올스타전에서 역대급 팬서비스로 모든 관중을 깜짝 놀라게 한다. 당시 하프타임 공연은 한창 인기상승 중이던 god가 나와 댄스곡 '애수'를 불렀는데, 선수들과 함께 벤치에서 공연을 지켜보던 타운젠드는 간주부터 갑자기 코트에 난입하여, 마치 god 백업댄서인듯 '애수'의 안무를 완벽하게 따라했다.[21]
- 은퇴 후 미국에서의 직업이 청소년 상담사였다.
그저 빛운젠드
4. 관련 문서
[1] 청주 SK 시절[2] 원주 삼보 시절[3] 대전 현대 시절[4] 이에 견줄 수 있는 느림보 용병은 원년 현대의 '라펠 맥길버리'와 신세기 빅스 출신 '요나 에노사' 정도.[5] 같은 컨퍼런스 소속 최강팀 매사추세츠 대학교는 센터 마커스 캠비와 루 로(전 서울 SK)의 활약으로 타운젠드가 3학년이던 94-95 시즌 전국 8강(Elite Eight), 이듬해는 4강(Final Four)까지 올랐다.[6] 사실 KBL 초창기에 온 외국인 선수들 대부분은 상대적으로 무명대학 출신이라, NCCA 토너먼트 경험이 있는 선수가 드물었고, 심지어 NCCA Div. II, III 대학 출신도 많았다. 예외적으로 초창기 외인중 토너먼트 경험이 있던 선수로는 94-95 시즌 전국 8강(Elight Eight)까지 올랐던 제이슨 윌리포드와 2차례 토너먼트에 나가본 에릭 이버츠가 있다.[7] 당시 카스 맥주를 내놓은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라, 명칭을 이따구로 지었다;;;[8] 신생팀 창단혜택으로 서장훈이 있는 연세대학교를 우선협상 학교로 지명했으나, 2년전 미국 유학으로 인해 서장훈의 졸업이 1년 미뤄지게 되었고 대학시절 출전기회가 거의 없었던 신석(F), 김승관(G)만 창단 첫해부터 합류했다. 같같은 신생팀 경남 LG 세이커스가 고려대학교를 지명, 양희승, 박재헌, 박훈근, 박규현 등 좋은선수를 대거 합류시킨데 반해, 서장훈 하나만 보고 우물쭈물대던 청주 SK는 서장훈-양희승에 이은 랭킹 3위 추승균마저 대전 현대에 뺏겼고, 손규완(경희대, F, 186cm), 윤제한(명지대, F,192cm) 정도만 겨우 건진 후, 당시 농구부 해체를 결정한 하위권팀 홍익대학교의 졸업예정자 및 재학생들(배길태(G, 182cm), 전일우(G, 182cm), 홍창의(G, 182cm) 등)로 겨우 엔트리를 채운 상태였다. 여기에 시즌 개막 전 대전현대의 후보 포워드 김광은(191cm)을 데려온게 전부였다.[9] 당시는 5라운드 45경기였다.[10] 1위는 원주 나래의 제이슨 윌리포드, 3위는 대전 현대의 조니 맥도웰[11] 97-98 시즌 24.2점-5.9리바-2.9어시-1.65스틸[12] 홍익대 출신 최경훈(196cm), 단국대 출신 양준호(197cm) 등이 있었지만 정말 엔트리만 채운 수준이었다.[13] 하지만 98-99 시즌 데려온 선수는 정통센터에 가까운 숀 재미슨(200cm)이었다.[14] NCAA Div.II 미주리웨스턴 대학교 출신의 공격력이 좋은 포워드였다. 99-00 시즌 전경기 출전하여 21.4점-8.6리바-3.4어시의 준수한 활약을 펼쳤다. 이후 00-01 시즌 드랲은 낙방. 01-02 시즌에는 서울 삼성 아티머스 맥클래리의 대체 선수로 와서 7경기를 뛰었고, 이때 좋은 경기력을 보여준 덕분에 같은 시즌 전주 KCC 이지스 클라이드 앨리스와 완전 교체되면서 합류, 01-02 시즌 막판 전주 KCC의 10연승을 이끌며 "토탈바스켓"의 중심으로 활약한다. 하지만 해당 시즌이 끝나고 동료 재키 존스와 마약인 해시시를 흡입한게 밝혀져 재키 존스와 함께 KBL에서 영구히 퇴출되었다.[15] 97-98 제이 웹(201cm), 98-99 재키 존스(202cm), 99-00 로렌조 홀(203cm)[16] 사실 여기에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 로렌조 홀을 재계약하려고 했으나 그의 무지막지한 폭력적인 플레이때문에 나머지 9개 구단이 홀을 재계약할시 가만 안있겠다고 벼르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래서 로렌조 홀은 계약 포기란 형식으로 KBL을 떠날수 밖에 없었다. 본인은 억울해했지만 로렌조 홀의 폭력적인 수비는 아무리 시대를 감안해도 선을 너무 세게 넘었던게 사실이다.[17] 조성원과의 트레이드로 장신 포워드 양희승(195cm)까지 합류한 상태였다.[18] ex. 빌리 맥카프리(대우 제우스)[19] ex. 그레그 콜버트(대구 동양)[20] ex. 래리 데이비스(안양 SBS)[21] 당시 2000년 KBL 올스타전은 SBS가 중계했는데, 농구 인기가 없어서인지 이 깜짝 이벤트가 거의 화제가 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