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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릭 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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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데릭 존슨(Derrick Johnson)
생년월일 1971년 9월 11일 ([age(1971-09-11)]세)
국적 미국
출신학교 버지니아 유니온 대학교 (Div.II)[1] (1990~1994)
포지션 센터
신체사이즈 205.4cm, 111kg
KBL 소속팀 원주 나래 블루버드 (1998~1999)
원주 TG 엑써스 (2002~2003)
서울 삼성 썬더스 (2003~2004)

1. 개요2. 대학시절 ~ KBL 입성 이전3. KBL에서의 선수생활4. 근황5. 관련 문서

1. 개요

KBL 초기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 시절, 압도적인 파워와 골밑 장악력으로 KBL판 샤킬 오닐로 불렸던 외국인 센터.

2. 대학시절 ~ KBL 입성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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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NCAA Division II 소속 버지니아 유니온 대학교에 입학한 데릭 존슨은 입학 첫해부터 팀의 주전 센터를 차지, 팀을 컨퍼런스[2] 우승과 1991년 NCAA Div.II 토너먼트 4강으로 이끌었고, 존슨은 컨퍼런스 올해의 신인을 수상한다. 다음시즌 존슨은 NCAA Div. II 2nd Team에 이름을 올리며 활약을 이어갔고, 존슨의 골밑 장악 덕분에 버지니아 유니온은 91-92 시즌 컨퍼런스 우승은 물론 NCAA Div.II 결승까지 올라 Bridgeport 대학교를 100:75로 대파하고 1992년 NCAA Div.II 우승을 차지한다.[3] 이후 더이상의 우승은 없었지만 존슨은 졸업반이던 93-94 시즌 NCAA Div.II 1st Team과 USA Today NCAA Div.II 올해의 선수를 수상하며, DiV.II 최고의 빅맨 중 하나로 이름을 날린다.[4]

하지만 정통센터 치고는 단신(6-9)인데다 고작 Div.II에서만 놀던 데릭 존슨이 글렌 로빈슨, 제이슨 키드, 그랜트 힐, 주완 하워드 등 당시 NCAA의 슈퍼스타들이 대거 참가한 1994년 드래프트를 뚫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이후 하부리그인 CBA[5]의 Tri-City Chinook에 입단해 한시즌을 보낸 뒤, 해외리그로 눈을 돌려 브라질, 아르헨티나, 폴란드 리그 등에서 활약한다.

27세이던 1998년 존슨은 KBL 외국인 선수 트라이아웃에 지원하여 2라운드 2순위(전체 12순위)로 전 시즌 준우승팀인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에 지명되었고, 이후 KBL 최초의 빅딜로 떠들썩했던 98년 허재 트레이드에 포함되어[6] 곧바로 원주 나래 블루버드로 이적하게 된다. [7]

3. KBL에서의 선수생활

3.1. 원주 나래 블루버드 (1998~1999)

2시즌전 원년시즌, 팀을 챔프전 결승까지 이끌었던 스타 윌리포드를 과감히 포기하며[8] 데려온 데릭 존슨은, 윌리포드에 비해 압도적인 높이(205.4cm)와 파워(111kg)를 선보이며 98-99 시즌 초반 원주 팬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98-99 시즌 외인센터 중 최장신인데다[9] 탄탄한 하체에서 나오는 힘과 점프력으로 골밑에서 자리만 잡으면 바로 덩크를 꽂는[10] 샤킬 오닐스런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즌초반 원주 팬들에게 KBL 첫 우승을 기대하게 했지만, 이후 골밑 포스트업 위주의 단조로운 공격패턴이 금세 파악된데다 느린 스피드와 좁은 수비범위 등의 약점이 드러나면서 금세 위력이 반감되었고, 초반 임팩트에 비해 다소 평범한 스탯(18.8득점-8.1리바-1.4어시-2.16 블록)만 남기고 만다. 더군다나 98-99 시즌 당시 원주 나래의 Best 5[11] 구성 상 빅맨이 존슨 한명뿐이라, 상대팀 4번을 184cm의 토니 해리스[12]와 스몰포워드 양경민이 번갈아가며 막아야 했고, 존슨의 느린 스피드 탓에 도움수비가 되지 않아[13] 조니 맥도웰, 클리프 리드, 전희철 등 괜찮은 4번이 있는 팀을 만나면 골밑을 탈탈 털리곤 했다.[14] 공격면에서도 아쉬운점이 많았는데, 일단 골밑에서 잡으면 무조건 한골[15]이란 느낌이었지만, 일단 골밑에서 멀어지면 위력이 반감되는데다 더블팀, 트리플팀에도 고집스럽게 골밑을 파고드는 독불장군식 플레이, 속공가담이나 스크린 플레이는 기대조차 할수 없는 등... 화려함에 비해 실속은 떨어지는 편이었다.[16]

정규리그를 4위로 마친 원주 나래는 6강 플레이오프에서 창원 LG를 만났고, 존슨은 정규리그에 비해 나아진 집중력을 보여주며 1, 2차전 연속 더블더블(1차전 18점-13리바, 2차전 22점-10리바)을 기록하며 맹활약, 상대적으로 골밑 무게감이 약했던[17] 창원 LG를 3:0으로 가볍게 격파한다. 그러나 이후 4강 플옵에서 만난 디펜딩 챔피언 대전 현대는 그 유명한 -- 트리오에 맥도웰-재키 존스 콤비까지 있는 팀이었고, 리그 유일의 싱글포스트 팀이었던 원주 나래는 존슨이 1차전과 3차전에 두차례 30득점을 올렸음에도 불구, 맥도웰(25점-16.7리바)과 재키 존스(21.3점-10.7리바)를 막지못하면서 0:3으로 광탈하고 만다.

플레이오프 들면서 다소 나아진 경기력을 보여주었던 탓에 존슨은 다음 시즌에도 함께 갈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으나, 3시즌 연속 우승실패(?)라는 명목[18]으로 최명룡 감독과의 재계약을 포기하면서 존슨의 재계약도 불발되었다. 수비적 약점에도 불구 확실한 골밑 장악력이라는 무기가 있어 재계약이 유력했으나, 98-99 시즌 도중 팀에 추가 보너스를 요구하는 등 불화를 일으키고 이로 인한 태업 의혹이 있어 퇴출되었다는 말이 있었다.

3.2. 원주 TG 엑써스 (2002~2003)

존슨을 떠나보낸 후, 원주 나래→원주 삼보→원주 TG삼보로 이름을 바꾸는 3시즌 동안 99-00시즌 6강 진출을 마지막으로 2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탈락하며 어느새 리그를 대표하는 약체팀으로 전락한다. 특히 01-02 시즌에는 1순위 외인 안드레 페리를 뽑고도 조나단 비어봄→해리 리브즈→찰스 맨트→파트릭 은공바로 이어지는 외인 수난사를 겪는 통에 리그 9위까지 추락했고, 어느덧 37세가 된 허재의 은퇴무대는 이렇게 초라해지는가 싶었.....으나, 2002년 신인드래프트에서 특급 신인 김주성을 뽑는 반전이 일어났고, 원주 TG삼보는 이어진 외인 드래프트에서 3시즌 전 마지막 영광의 시절을 함께했던 데릭 존슨을 아직 신인인 김주성의 보디가드로 데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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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격적인 헤어스타일[19]

어느덧 31세의 고참급이 된 데릭 존슨은 다혈질이던 예전과 달리 좀더 경기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3시즌전보다 오히려 기록이 상승했고[20] 원주 TG삼보도 디펜딩 챔피언 대구 동양, 강동희-김영만이 재회한 창원 LG와 치열한 우승경쟁을 펼친다. 기동력과 높이를 모두 갖춘 김주성의 존재 덕분에 존슨은 자신이 가장 잘하는 골밑 1:1 파워농구(!!)에 집중할 수 있었고, 수비에서도 존슨이 상대 빅맨을 파워로 제압한 후 도움수비 천재 김주성이 블록하는 수비로 원주 TG삼보는 리그 최강의 높이를 자랑할 수 있었다. 대학시절 이후 오랜만에 포인트 가드로 전환한 노장 허재의 경기조율 아래 김주성-존슨의 더블 포스트와 데이비드 잭슨-양경민의 외곽슛, 식스맨 김승기, 신종석까지 활약하면서 리그에서 순항하던 원주 TG삼보였지만 정규리그 6경기를 남기고 있던 2월 말 기둥센터 존슨이 어깨부상 악화로 플레이오프를 앞두고 시즌 아웃되는 비상사태를 만나게 된다. 존슨은 시즌 초반부터 오른쪽 어깨 탈구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시즌 막판 뼈조각이 인대를 압박하면서 더이상 뛸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결국 플레이오프를 코앞에 둔 상황에서 미국으로 출국하고 만다.

이에 전창진 감독은 중국 리그에서 뛰다 퇴출된 장신센터 리온 데릭스를 급히 대체 외인으로 데려오는데, KBL판 샤킬 오닐이던 데릭 존슨에 비해 골밑 장악력은 떨어졌지만 게임을 읽는 능력이 뛰어난 데릭스가 오면서 수비 로테이션과 볼 흐름이 오히려 좋아졌고, 특히 '시어머니' 스타일이던 존슨이 나가면서 갑자기 개인기 발휘가 늘어난 데이비드 잭슨이 플레이오프 들어 마법과 같은 플레이를 보여준 덕분에 원주 TG삼보는 그토록 원하던 챔피언 결정전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새옹지마?

3.3. 서울 삼성 썬더스 (2003~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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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 시즌 외인 드래프트에서 낙방한 존슨은, 서울 삼성 썬더스에 선발되었던 외국인선수 로니 이포드(199cm)가 개인사정을 이유로 귀국하면서, [21] 이포드의 대체 외인으로 서울 삼성에 합류, 두시즌 연속 KBL에서 뛰게 된다.[22] 당시 29세로 선수로서 최전성기를 보내던 국보급 센터 서장훈의 파트너로 낙점된 존슨은, 스피드 저하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 하니발-서장훈[23]과 함께 위력적인 트윈타워를 구축하면서 서울 삼성의 개막 6연승을 이끌었고, 1라운드를 8승 1패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으로 마무리했다. 하지만 전 시즌 부상 이후 체중이 늘어나 있었던 존슨[24]은 1라운드에서 다소 오버페이스 한 탓인지 매 경기 후 무릎에 물이 차는 부상으로 점차 컨디션이 저하되었고, 평균 20점 이상 해주던 존슨이 2라운드 들어 10점대로 부진하면서 서울 삼성도 2라운드에서 3승 6패로 무너지며 팀 순위가 5위까지 추락한다. 이에 김동광 감독은 부진에 빠진 존슨을 전 시즌 여수 코리아텐더의 돌풍을 이끌었던 빅맨 안드레 페리로 교체했고[25], 한국을 떠난 존슨은 KBL 무대를 마지막으로 32세의 나이에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4. 근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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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농구부 코치로 활동 중이다.

2003년 버지니아 주 리치몬드 시의 토마스 제퍼슨 고교 농구부 코치 시절, 아끼던 제자가 총격사건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동시기 뛰던 외국인 선수중 마르커스 힉스 & 에릭 이버츠와 함께 식성이 말도 못하게 까다로운 외국인 3대장중 한명이었다. 셋다 또이또이 했지만 힉스는 구단 식단을 거부하고 지독한 편식을, 이버츠는 구단과 국내 선수들이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한국 음식을 단호히 거부했다면, 데릭 존슨은 버거킹 & 맥도날드 조차 미국 현지거랑 맛이 너무 다르다며 거부해서 구단 관계자들의 혈압을 올리는데 일조했다. 재미있게도 이 입짧은 3인방의 KBL 커리어는 성공적이었다는것. 데릭 존슨은 성적으로는 약간 애매하지만 TG의 우승에 일조를 하긴 했으므로 커트라인에 들어갈수 있다.

5. 관련 문서



[1] 버지니아州 리치먼드에 있는 흑인 대학교로, 선배로는 시카고 불스뉴욕 닉스의 터프한 빅맨 찰스 오클리가, 후배로는 NBA 올해의 수비수 4회에 빛나는 "빅벤" 벤 월러스가 있다.[2] Central Intercollegiate Athletic Association (CIAA)[3] 데릭 존슨은 토너먼트 MOP(Most Outstanding Player)와 Best 5에 선정된다.[4] 존슨이 졸업한 1994년, 2년제 커뮤니티칼리지를 졸업한 벤 월러스가 버지니아 유니언에 편입하게 된다.[5] Continental Basketball League[6] 원주 나래 Get: 허재, 데릭 존슨 ↔ 부산 기아 Get: 정인교, 제이슨 윌리포드[7] 당시 각 팀의 에이스를 맞바꾸는 트레이드도 처음이었지만, 외국인 선수 간의 트레이드 도한 데릭 존슨↔제이슨 윌리포드가 처음이었다. 무려 농구대통령이 영입되는 트레이드였음에도, 초반에는 프랜차이즈 스타 정인교제이슨 윌리포드에 대한 애정이 컸던 원주팬들의 반발이 상당했었다.[8] 1997 원년시즌의 윌리포드(194cm)는 확실히 KBL 최고 빅맨이었나, 2m대 외인들이 대거 입성하기 시작한 97-98 시즌 윌리포드는 뛰어난 기량에도 불구, 절대적인 높이에서는 밀리는 모습을 보였고 상대팀 토종 빅맨들(ex> 정재헌)의 악의적인 파울과 심판의 묵인으로 점점 신경질적으로 변해가며 원년만한 위력을 보이진 못했다. 애초에 산업은행, 한국은행 출신 무명선수들로 이루어진 원주 나래로서는 강팀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 체질개선이 필요했고, 윌리포드 외에도 2년전 영광의 주역이었던 정인교, 강병수와 바로 전시즌 신인왕 주희정을 과감하게 정리하면서 슈퍼스타 허재를 비롯해 김승기, 양경민 등 중앙대 출신 스타들을 트레이드로 데려온다.[9] 국내선수 포함하면 서장훈(207cm)에 이어 2위였고, 3위는 창원 LG의 아미누 팀버레이크(203cm), 공동 4위는 대전 현대재키 존스청주 SK의 숀 재미슨(이상 202cm)였다.[10] 98-99 시즌 덩크슛 1위 (평균 2.18개)였고, 1경기에 덩크 9개를 꽂은 날도 있었다.[11] 신기성(180cm, PG)-토니 해리스(184cm, G)-허재(188cm, SG)-양경민(193cm, SF)-데릭 존슨(205.4cm, C)[12] 워싱턴 주립대 출신의 가드로, KBL에서는 98-99 1시즌만 뛰면서 평균 21.3득점-6.7리바-3.5어시의 준수한 기록을 남겼고, 정규시즌 경기 중 22m 짜리 초장거리 버저비터를 성공시키도 했다. 브라질 리그에서 뛰던 2007년 갑작스럽게 실종되었고, 2주 후 사체로 발견되어 팬들에게 충격을 안겼다.[13] 워낙 높이가 있다보니 블록 능력 자체는 괜찮아서 98-99시즌 평균 블록 2.16개로 리그 2위였다. 1위는 2.46개의 재키 존스(청주 SK)[14] 골밑 수비구멍을 메우기 위해 토종빅맨 정경호(202cm, C)와 신인 신종석(193cm, SF)의 출전시간이 확 늘어났고, 이 덕분에 정경호는 99년 FIBA 아시아선수권 국가대표팀에 서장훈의 백업센터로 선발, 2~4번을 가리지 않고 출전했던 신종석은 98-99시즌 신인상을 수상한다.[15] 시즌 필드골 성공률이 자그만치 63.3%였다. 전부 골밑슛 아니면 덩크였다는 뜻;;;. 참고로 잡으면 무조건 덩크만 한다고 느껴졌던 샤킬 오닐올랜도 매직 2년차 시절 필드골 성공률이 59.9%다.[16] 하이라이트만 보면 원맨속공에서의 덩크 장면이 많은데, 거의 90%는 백코트 안하고 상대팀 코트에 있다가 역습 상황에서 받아먹기였다.;;;;; (허재신기성이 동시에 패스를 뿌려주는 팀이라 가능한...)[17] 98-99 시즌 주전으로 도약한 박훈근(195cm)과 장신의 아미누 팀버레이크(203cm)가 있었으나, 전 시즌 보다는 확실히 약해진 전력이었고 플레이오프도 에이스 버나드 블런트의 맹활약 덕분에 겨우 올라왔다.[18] 한국은행, 산업은행의 무명선수들을 이끌고 준우승으로 이끈게 겨우 2시즌 전이고, 이 전력을 가지고 3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준우승-6강-4강)을 이루었던 감독이다. 당연히 부당한 인사란 말이 많았고, 이후 원주 나래는 김주성의 입단 전까지 서서히 약체로 추락하고 만다.[19] 이 헤어스타일은 05-06 시즌 서울 삼성의 오예데지의 일시 대체용병이였던 쉘리 클락이 보여주게 된다.[20] 98-99 시즌 18.8점-8.1리바-1.4어시-0.45스틸-2.16블록-3.50턴오버 → 02-03시즌 18.9점-10.9리바-1.0어시-0.69스틸-2.21블록-2.42턴오버[21] 공식 발표는 개인 사정이었으나, 기량 미달로 인한 퇴출이란 설이 많았다.[22] 서울 삼성은 외인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로 선발했던 쉘리 클락(199cm)이 트라이아웃 직후 뒷돈을 요구하다 현장에서 바로 퇴출되는 바람에, 곧바로 3라운드 추가선발을 통해 빅맨 랜스 윌리엄스(200cm)을 뽑은 상태였다. 2라운드에서 뽑은 로니 이포드가 데릭 존슨으로 교체된 후, 훈련 이틀만에 랜스 윌리엄스가 2개월짜리 손목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베테랑 외국인선수인 로데릭 하니발을 데려왔고, 결국 시즌 개막도 하기 전에 총 3번의 외국인선수 교체를 해야 하는 불운을 겪는다.[23] 존슨과의 호흡을 위해 비시즌 동안 무려 14kg을 감량, 기량에 물이 오른 상태였다. 주성타를 맞기 전이라 운동능력도 상위권이던 시절.[24] 111kg → 122kg[25] 안드레 페리의 영입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당초 03-04 시즌 개막 직전 마르커스 힉스를 부상으로 잃은 대구 오리온스에서 페리를 먼저 낙점했지만, 페리가 이미 터키 2부리그 팀과 계약 중이었던 바람에 터키 리그 종료 후 3라운드부터 오리온스에 합류하기로 합의한 상태였다. 그러나 마침 같은 시기에 서울 삼성에서 존슨의 대체 외인으로 페리를 낙점하면서 두 팀 간에 분쟁이 붙었고, 결국 KBL에서 대구 오리온스의 사전 합의를 인정하지 않고 전 시즌 순위(대구 오리온스 준우승, 서울 삼성 5위)가 낮은 서울 삼성의 손을 들어주면서 페리는 서울 삼성과 계약하게 된다. 그러나 페리 합류 이후에도 서울 삼성은 서장훈 원맨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면서 6강 플레이오프에서 인천 전자랜드에 1:2로 패했고, 서장훈의 FA 합류에도 2년 연속 4강에도 못간 김동광 감독은 경질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