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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마라도나/클럽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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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2.1. 1976년2.2. 세계 최고의 선수로 거듭나다
3. CA 보카 주니어스4. FC 바르셀로나
4.1. 1982/83 시즌4.2. 1983/84 시즌
5. SSC 나폴리
5.1. 1984/85 시즌5.2. 1985/86 시즌5.3. 1986/87 시즌5.4. 1987/88 시즌5.5. 1988/89 시즌5.6. 1989/90 시즌5.7. 1990/91 시즌
6. 세비야 FC
6.1. 1992/93 시즌
7.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
7.1. 1993/94 시즌
8. CA 보카 주니어스
8.1. 영웅의 마지막

1. 개요

디에고 마라도나의 클럽 경력을 서술하는 문서다.

2.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

파일:마라도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jpg

2.1. 1976년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와 제휴한 유소년팀 로스 세볼리타스에서 처음 마라도나를 발굴하고 지도하던 유소년 코치 프란시스코 코르네효는 마라도나를 성인팀에 데뷔시킨다는 말을 듣자 빼앗긴 감독의 심정을 완벽하게, 하지만 다소 극적으로 묘사했다.
강도를 당한 기분이었다. 대안도 없이 그를 내줄 수밖에 없는 폭력적 강도질이었다. 다이아몬드 원석을 거의 완벽한 보석으로 다듬어낸 예술가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보석의 사소한 부분까지 모조리 알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누군가가 그 가치도 모르고 나처럼 애정도 없으면서 그 보석을 돈으로 사버렸다.
프란시스코 코르네효
축구 신동의 이른 데뷔는 예견된 일이었다. 그는 로스 세볼리타스에 입단 후 이후 몇 년 동안 팀은 모든 대회를 휩쓸었고 디에고는 무시무시한 유망주로 이름을 날렸다. 1군의 문을 두드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성인팀이 마라도나를 원한다는 소식을 전한 이는 아르헨티노스의 이사 중 하나인 엑토르 마조니였다. 코르네효는 디에고에게 "너는 어디로도 가지 않을 거야"라고 고함을 지르며 "이 아이는 너무 작아! 너무 어리다고! 그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당신들한테 책임을 물을 거야. 아직 준비도 안 됐는데 당신들이 이 아이의 선수 경력을 위협하는 거야"라며 불같이 화를 내었다.

감독은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다. 분위기가 뜨거워져 당장 주먹다짐이라도 벌어질 듯했다. 정작 마라도나 본인은 그다지 걱정하지 않았다. 프리메라에서 뛸 수 있다는 생각에 이미 두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1976년이었다. 그해 초 아르헨티노스 1군 감독 호세 카를로스 몬테스는 당시 15세였던 로스 세볼리타스의 작은 보물을 주목하게 됐다. 이론적으로 디에고가 프로로 뛰려면 유소년 팀에서 다섯 시즌을 보내야 했다. 그렇지만 몬테스는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신동을 발탁했다.
조만간 때가 오리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빨리 올지, 그리고 그토록 고통스러울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디에고와 작별을 좀 더 미루고 싶었다. 디에고가 1군으로 승격했을 때는 그를 팔아버린 것 같은 고통과 공허함을 느꼈다.
프란시스코 코르네효 (마라도나가 성인팀으로 발탁된 당시를 회상하며)
아무리 넘치는 잠재력을 지닌 선수라 해도 너무 빨랐다. 이사회는 마라도나가 아카데미의 위의 연령대 팀에서 경험을 쌓는 동시에 리저브팀에서 출전 기회를 쌓게 했다.

디에고의 어두운 면이 드러나기 시작할 즈음 1군 데뷔 기회가 다가왔다. CA 벨레스 사르스필드와의 리저브 경기 중 심판 판정에 격하게 반응해 퇴장당한 마라도나는 5경기 출장 정지 징계를 받았다. 하지만 징계가 운명의 날이 도래하는 건 막지 못했다. 경기력 부진으로 고전하던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는 상황을 반전시킬 불꽃이 필요했다. 부랴부랴 17세 이하 팀의 친선전 2경기까지 만들어 디에고의 출장 정지 경기 수를 채운 뒤, 몬테스는 1976년 10월 20일에 열릴 타예레스 데 코르도바와의경기에 그를 내보내기로 결정했다. 자신의 16살 생일을 열흘 앞둔 마라도나의 나이는 15세 11개월 20일이었다.

경기가 열리는 날 아침 9시, 디에고는 홀로 기차를 탔다. 아버지는 공장 근무를 마치고 135번 버스에 뛰어올랐다. 아르헨티노스의 홈구장까지 2시간이 걸리는 탓에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도착했다. 매일 반복되는 여정이었지만 이날은 약간 달랐다. 마라도나는 스테이크와 감자 요리를 먹고 잠시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깬 그에게 16번 유니폼이 건네졌다. 데뷔전을 치르게 될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마라도나가 등번호 10번을 달지 않은 몇 안 되는 경기 중 하나였다.

아르헨티노스의 타예레스전 공식 티켓 판매는 7577명이었다. 그러나 축구 신동의 첫 프로 데뷔를 보려는 팬들 수십만 명이 몰려들었다. 아르헨티노스 시절 마라도나의 팀 동료였던 리카르도 파예라노는 이 날을 회상하며 "아르헨티나 사람들은 다들 '나도 갔었어'라고 말했다"라고 농담했다. 실제 관중 수는 평소의 두 배 정도였다. 그가 뛰었던 유소년 팀 로스 세볼리타스는 140경기 연속 무패를 기록하며 전국적 유명세를 얻었다. 이미 마라도나에 관한 소문은 팬들 사이에서 구전되었고 모두가 그를 직접 본 것은 아니어도 알고 있었다.

아르헨티노스가 0:1로 끌려가자 몬테스는 허공에 대고 “꼬마야, 네가 알고 있는 걸 해. 할 수 있다면 알까기를 해 봐라”라고 주문했다. 마라도나는 꼬마라고 소리를 듣고, 주위를 둘러봤지만 어린 선수가 많지 않았다. 자신한테 하는 얘기라고 짐작하였고 몸을 풀기 시작한 지 30초 만에 루벤 히아코베티와 교체되어 경기에 들어갔고 아르헨티나 리그의 역대 최연소 출전 기록을 경신했다.
내가 평범한 열다섯 살짜리와 교체된 게 아니었어서 다행이다. 후반전이 계속되는 동안 벤치에 앉아 있었다. 디에고가 뛰는 걸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그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고 있었다. 지금은 내 이름이 어떤 식으로든 마라도나의 경력과 연결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루벤 히아코베티
디에고의 공식적인 첫 플레이는 알까기였다. 투지 넘치는 수비수 후안 도밍고 카브레라가 희생양이었다. 경기장에서 '오~'하는 동요가 느껴졌다. 마라도나는 곧 값진 교훈을 익혔다. 카브레라가 마라도나의 턱을 팔꿈치로 가격했기 때문이다.

후반전 초반에 교체로 투입되자마자 일방적으로 밀리던 경기 양상을 단숨에 반전시켜 다음날 아르헨티나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는데, 그의 실력을 잘 알고 있던 동료들은 오히려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는 당시 교체 멤버로 출전했지만 뛸 듯이 기뻤다고 회상했다.
그날 나는 손으로 하늘을 만지는 느낌을 받았다.
디에고 마라도나

2.2. 세계 최고의 선수로 거듭나다

며칠 뒤인 11월 14일, CA 산 로렌소와의 경기에서 5경기 만에 그는 1부 리그 데뷔골을 기록한다. 그 당시에나 지금이나 CA 산 로렌소가 아르헨티나를 대표하는 5대 빅클럽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기록이었다. 아르헨티노스가 3:2로 앞서던 후반전에 디에고가 교체투입됐다. 87분 골키퍼 루벤 루칸히올리가 지키던 골문을 열었고, 경기 종료 전 두 번째 골까지 성공시켰다. 골은 헌납한 루칸히올리는 자신이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했음을 감지하였고 그는 그 공과 공을 잡았던 장갑을 기념으로 간직했다.

그리고,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 전국에서 주목하는 초신성이자 유망주 축구선수가 되어있었다. 상대 수비수들은 위험한 태클과 팔꿈치, 머리를 날리면서도 그를 막지 못했고 꼬마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줬다. 한번은 무릎을 세게 맞은 후 의식을 잃었고 바이러스 감염까지 걸렸다. 주사기로 관절의 피를 제거해야 했고 항생 치료와 28일간의 깁스를 거친 후에야 완치됐다. 그 후 팀 동료들은 경호원처럼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그라운드에서 항상 싸움을 벌였고 부상을 입히려는 선수들도 줄어들었다.
이 세상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수비수 전원을 제치고 골을 넣었다. 두 번씩. 매일.
리카르도 파예라노 (아르헨티노스 시절 마라도나의 동료)

디에고가 리저브팀에서 훈련한 탓에 1군 선수들은 그와 함께 뛰고 싶다면서 조급해 하였고, 프리메라의 모든 팬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된 그는 곧바로 스타덤에 올랐다. 그리고, 18살의 어린 나이에 팀의 주장을 역임하면서 본인은 리그 최우수 선수에 등극하였고 1976년부터 1981년까지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 총 166경기 116골 65도움을 기록했다.

본격적으로 1군에서 경기한 1977년 19골을 터트렸고 1978년 리그에서 26골을 넣으면서 메트로폴리타노 득점왕을 차지했다. 1979년에는 자국 양대 리그에서 모두 득점왕과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발롱도르 수상자 케빈 키건을 누르고 유럽 언론 구에린 스포르티보가 선정한 올해 최고의 선수를 차지한다. 1980년에도 그는 자국 양대 리그 득점왕과 팀 창단 최초의 리그 준우승을 이끌었고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지쿠를 누르고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상 2연패에 성공한다. 마라도나의 경력에서 때묻지 않은 가장 사랑스러운 시절이었다.

아르헨티노스 주니어스에서 있었던 가장 유명한 일화는 1980년 11월 8일 CA 보카 주니어스전이었다. 마라도나는 어린 시절부터 보카 주니어스의 열성적인 서포터였고 반드시 뛰기를 원했던 클럽이었다. 하지만 그가 그들을 먼저 겸손하게 만들기 전에는 아니었다. 중립 지역인 CA 벨레스 사르스필드의 홈구장 에스타디오 호세 아말피타니 열린 경기에서 당시 보카 주니어스의 '미친 개'로 불리던 골키퍼 우고 가티는 마라도나를 도발하고 자극하기 위해서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너무 부풀려진 선수다. 이제 거품이 빠질 것이다" 라고 발언을 하였고, 이 말을 전해들은 마라도나의 팀 동료 호르헤 시에트르스피예르는 마라도나에게 "저 녀석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어야 한다. 더도 말고 2골만 넣어라!!" 라고 말했는데 이에 마라도나는 다음과 같이 응수한다.
2골? 아니야. 4골 넣고 이길거야.
디에고 마라도나. 우고 가티의 발언에 응수하면서 한 발언.

경기 전 우고 가티의 발언은 마라도나를 고무시켰고 진짜로 4골을 넣으면서 약속을 지켰다. 보카 주니어스와의 경기에서 4골을 집어넣으면서 5:3 승리를 이끈 것이다.

3. CA 보카 주니어스

파일:마라도나 보카 주니어스 1981.png

3.1. 1981년

1981년,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를 넘어 세계적인 축구 스타였다. 세계의 수많은 팀들이 그의 영입을 노렸고 CA 리버 플레이트가 팀의 최고 연봉을 약속하며 그에게 영입 제안을 했으나 디에고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을 보내고 있지만 평소 자신이 뛰고 싶었던 아르헨티나 명문 클럽 중 하나인 CA 보카 주니어스에 이적하기를 원했고 결국 임대 형식으로 이적하게 된다.

그는 신기에 가까운 드리블과 패스, 생애 첫 엘 수페르클라시코에서 2골을 넣으며 3:0 승리를 이끄는 등 보카에 완벽하게 적응해 나갔다. 그러나 실력으로 문제 없었던 보카에서의 생활에서 암초를 만난다. 당시 감독이었던 실비오 마르솔리니와의 불화였다. 마라도나는 개인의 압도적인 기량으로 필드 곳곳에 영향을 미치는 플레이를 하였지만 마르솔리니는 자신이 지시한 역할만을 수행하길 원했다.

불화 속에서 마라도나는 훈련만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마라도나의 훈련을 본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었다. 우리는 물론 필드의 선수들까지 경악했다. 그는 하프 라인부터 시작해 조금씩 드리블하더니 어느새 골문 앞에서 득점을 성공시켰다.
오라시오 본 지오반니 (당시 보카 주니어스 수석 코치)
마라도나는 자신의 현 위치에 불만을 표하며 팀을 떠나겠다는 선언하자 보카의 서포터즈 '브라바 데 보카'는 공식 성명을 냈고 결국 마르솔리니 감독은 마라도나에게 자유로운 움직임을 허용하며 프리롤 역할을 맡긴다. 당시 아르헨티나 언론은 브라바 데 보카가 감독을 협박했다며 비난했고 마라도나는 이와 같이 말하며 팬들을 지지했다.
나는 누구보다 우리의 12번 선수를 잘 안다. 그들을 모욕하는 것은 나를 모욕하는 거다. 만약 우리의 12번이 모욕당한다면 나에게 볼을 달라. 내가 이것에 대해 정확히 대답하겠다.
디에고 마라도나
파일:boca champion.jpg
보카의 우승을 보도하는 엘 그라피코
이런 저런 일에도 마라도나가 이끄는 보카는 리그를 잘 순항하며 프리메라 디비시온 토르네오 메트로폴리타노에서 우승한다. 보카의 팬들은 필드로 내려와 마라도나와 함께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나시오날에서는 벨레스 사르스필드와의 8강전에서 패배하며 떨어지고 말았다. 당시 경제적으로 흔들리던 보카가 돈을 충당하기 위해 수많은 친선 경기를 치렀고 이에 선수들의 피로가 누적되었기 때문이다.
파일:external/lh3.googleusercontent.com/maradona_rummenigge.jpg
발롱도르 수상자인 루메니게와 함께 1981년에 돈 발롱에서 보도한 특집기사
마라도나는 1981년 보카 주니어스에서 28골을 기록했고 지쿠, 호베르투 파우캉, 소크라치스같은 세계 최고의 선수들과 경쟁하며 남아메리카 올해의 축구 선수 2위에 선정된다. 또한 당시 축구인들은 이미 마라도나를 유럽의 왕이라 칭송받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에 대적하는 남미 최고의 스타로서, 각 대륙을 대표하는 라이벌로 인식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역시 발롱도르 2연속 수상자인 케빈 키건과 함께 마라도나를 세계 축구의 탑3로 보도한 기사들이라든지, 새로운 요한 크루이프이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라고 평가한 축구인들도 있었다. 이 당시의 마라도나는 고작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까지의 소년이었으니, 실로 펠레와 크루이프의 후계자라 할 만했다.

3.2. 1982년

1982년 1월 섬머 토너먼트가 열렸고 마라도나는 보카에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스페인에서 열릴 월드컵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당시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 전쟁과 군부 정권의 독재로 인한 부정부패로 국민들의 삶은 더욱더 피폐해져 갔고 경제 위기가 드리워져 보카의 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보카는 유소년팀에 대한 지원을 대폭 축소하고 이에 디에고는 자신의 사비를 털어 팀 재정을 지원하고 시간이 날 때마다 보카 유소년팀을 방문해 음식, 옷, 장비를 선물하며 다양한 선행을 하였다. 그러나 보카는 결국 마라도나를 매각하기로 결정한다.

4. FC 바르셀로나

파일:마라도나 바르셀로나.jpg

4.1. 1982/83 시즌

마라도나의 새로운 행선지는 아르헨티노스 시절부터 그를 노렸던 FC 바르셀로나였다. 그의 생애 첫 유럽 무대 진출이었다. 바르셀로나는 마라도나를 빨리 영입하고 싶어 누네스 회장을 포함한 고위직 인사들이 직접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방문하는 열의를 보였고 이적료는 300만 파운드로, 당시 최고 이적료 기록을 경신했다.

마라도나는 스페인에서 열릴 월드컵을 준비하기 위해 시즌 시작보다 빨리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그러나 월드컵에서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이며 탈락의 고배를 받아들이고 시즌을 준비한다. 1982년 8월 4일 SV 메펜과의 친선 경기에서 바르사 데뷔전을 치렀고 그는 페널티 킥으로 데뷔골도 터트렸다. 경기는 0:5 완승이었다.

출발이 마냥 좋았던 것은 아니었다. 시즌 시작 전에 열린 조안 감페르 트로피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팀도 1. FC 쾰른과의 경기에서 승부차기에 패배하며 4위에 그쳤다. 바르사 팬들은 마라도나의 기량을 의심했고 그는 누네스 회장을 찾아가 앞으로 잘 할 수 있다 자신했다.

1982년 9월 4일, 마라도나는 발렌시아 CF와의 리그 개막전에서 첫 공식 경기를 치렀다. 첫 공식 경기에서 골을 넣었지만 팀은 2골을 내주며 패배했다. 그러나 2라운드 레알 바야돌리드 CF와의 경기에서도 골을 넣으며 3:0 승리를 거둔 것을 시작으로 팀은 무패 행진을 거두며 리그를 순항했고 마라도나 또한 에이스로서 리그 13경기 6골로 기록하며 좋은 흐름을 이어갔다. UEFA 컵 위너스컵에서도 5골을 기록했는데 그 중 FK 츠르베나 즈베즈다전에서 하프 라인부터 시작해 수비수 1명을 따돌린 뒤 골키퍼 스테아노비치의 키를 넘기는 환상적인 로빙골을 기록하며 레드 스타 팬들의 경악과 박수를 얻어냈다.
파일:레드 스타전 마라도나.gif
환상적인 로빙골
내 인생 최고의 득점이 있다면 바로 레드스타전 골이다.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일원으로 각국을 상대로 터트린 골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당시 베오그라드 팬들의 응원은 지금도 감사하다.
디에고 마라도나
그러던 중, 그는 간염에 걸리며 3개월 동안 결장하는 악재를 맞이 하게 된다. 에이스의 잃은 바르사는 흔들리며 리그 무패 행진은 깨졌고 UEFA 컵 위너스컵 또한 탈락하고 말았다. 이에 이사회는 우도 라텍 감독을 경질하고 세자르 루이스 메노티를 선임했다. 마라도나는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전에서 복귀, 시즌 마지막까지 총 5골을 기록하며 활약했지만 팀은 우승팀 아틀레틱 클루브에게 승점 6점 뒤진 4위에 머무른다.
파일:마라도나 코파-델- 레이-우승.jpg
코파 델 레이 트로피와 함께
리그는 끝이 났지만 아직 코파 델 레이와 코파 데 라 리가[1]가 남아 있었다. 바르사는 당시 두 대회 모두 결승에 진출해 있었고 공교롭게도 결승전은 모두 엘 클라시코였다. 사라고사의 에스타디오 라 로마레다에서 열린 코파 델 레이 결승전, 마라도나는 골은 기록하지 못했지만 바르사는 빅토르 무뇨스와 마르코스 알론소 페냐[2]가 골을 기록하며 1:2로 승리, 우승을 차지한다.

이어서 1983년 6월 26일, 코파 데 라 리가 결승 1차전이 열렸다. 이 날 마라도나는 프란시스코 호세 카라스코의 골로 한 골 앞서던 57분, 하프 라인에서 공을 잡아 드리블하며 골키퍼 아구스틴을 제친 후 뒤에서 태클하던 수비수 호안 호세를 농락한 뒤 득점에 성공하며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기립박수를 이끌어낸다.[3] 그러나 내리 2골을 내주며 무승부로 1차전을 마친다.
카라스코는 하프 라인에서 나에게 공을 줬고, 골키퍼를 피해 후안 호세가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는 골 포스트에 그의 을 터트렸고 나는 그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고 나중에 우리는 용서를 구했다.
디에고 마라도나
이어진 캄 노우에서 열린 2차전에서 마라도나는 전반 19분, 페널티 킥으로 선제골을 넣으며 2:1로 승리하며 우승컵을 들게 된다. 간염으로 인해 고생했지만 팀 내 득점 1위와 전체 평점 1위에 올랐고, 두 개의 타이틀을 따내며 시즌을 잘 마무리 하며 마라도나는 스페인 축구의 위대한 스타 중 한 명으로 등극하게 된다.

4.2. 1983/84 시즌

바르셀로나에서 2번째 시즌을 맞이하고, 마라도나는 초반부터 악재를 만난다. 1983년 9월 24일, 캄 노우에서 열린 아틀레틱 클루브과의 리그 4라운드 경기에서 4:0으로 승리했지만 59분에 마라도나는 '빌바오의 도살자' 안도니 고이코에체아[4]에게 악질적인 태클을 당해 왼쪽 발목 골절과 인대 파열 판정을 받으며 들것에 실려가게 된다. 대승이었지만 기자들과 외신은 당시 결과에는 아무 흥미가 없었다. 단지 마라도나의 상태였다.

이 부상은 마라도나의 선수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었고, 수술은 장시간 진행되었다. 그의 주치의는 회복에 6개월 이상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수술 후 아르헨티나로 돌아가 재활 치료로 하던 마라도나는 예정보다 빠른 4개월만에 필드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복귀전인 세비야 FC와의 경기에서 2골을 넣으며 부상을 털어버리고 다시 날아오를 준비를 마쳤고 선수 생명을 위태롭게 했던 아틀레틱 클루브와의 경기에서도 2골을 넣으며 복수에 성공한다.

하지만 2년 연속 결승에 오른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 대형 사고가 터졌는데,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던 아틀레틱 클루브와 바르셀로나의 결승전에서 아틀레틱 선수들은 고이코에체아를 중심으로 마라도나에게 백태클을 포함 집중 태클을 가했고 경기는 엔디카의 골로 아틀레틱이 우승한다. 사건은 경기 후에 일어났는데 90분 내내 아틀레틱의 비신사적인 태클에 당하던 마라도나와 슈스터가 아틀레틱 선수들을 향해 킥을 날리며 집단 난투극으로 번진 것이다. 이 사건은 유럽 전역에 라이브로 중계되었고 스페인 축구 협회는 마라도나에게 3개월 출장 정지를 내렸다. 아틀레틱 팬들은 자신들의 홈구장 에스타디오 산 마메스에서 경기할 날을 기다리겠다며 이를 갈게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시즌 무렵부터 마라도나의 사생활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그가 코카인을 흡입하기 시작한 것은 이 시점이었으며, 여자 스캔들도 자주 터졌다. 바르샤 수뇌부는 계속해서 기행을 저지르는 마라도나에게 지쳤으며, 마라도나 역시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스페인 생활에 염증을 느끼며 이적을 결심한다.

바르샤 시절의 마라도나는 라보나 킥, 플립 플랩, 마르세유 턴 등 화려한 스킬과 드리블, 천재성이 번뜩이는 패스와 센스, 무서운 프리킥과 준수한 득점력으로 이름을 떨쳤었다. 특히 세계적인 라이벌 더비인 엘 클라시코에서 마라도나는 매번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였고, 경기당 스탯은 약 1.0517 정도로 역시 최고 수준이었다.

그러나 냉정하게 보면, 스탯이나 플레이만 보고 바르셀로나 시절의 마라도나가 당시 최고의 선수라 불리기엔 조금 무리가 있었다. 당시 들어 올린 트로피가 고작해야 코파 델 레이와 코파 델 라 리가 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프로 선수에게 중요한 경기 출장 횟수도 간염과 부상으로 인해 그렇지 많지 않다. 다만 그라운드를 밟았다 하면 엄청난 플레이를 보여주었는데, 두 시즌만 뛰고서도 바르셀로나 팬들이 투표한 역대 바르셀로나 베스트11에 선정었을 정도였다.[5]

그리고 강등권이었던 세리에 A의 나폴리가 이 기회을 놓치지 않고 역대 최고액[6] 690만 파운드를 부르며 마라도나는 신화의 땅 이탈리아로 건너간다.

5. SSC 나폴리

파일:diegomaradona-cropped_18ny1lq77l0sg1lwo10f03ugkg.jpg

5.1. 1984/85 시즌

이탈리아 세리에 A는 당시 세계 최고의 리그였다. 그러나 마라도나의 선택은 다소 의외였는데 유벤투스 FC, AC 밀란, AS 로마,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등 부유하고 역사를 가진 강팀들 대신 승점 1점 차이로 겨우 강등을 면한 가난하고 별볼일 없는 역사를 지닌 SSC 나폴리였다. 나폴리의 3대 명물 베수비오 항구에서 코라도 페를레노 나폴리 구단주와 회동한 마라도나는 입단 계약서에 서명하였고 정식으로 나폴리 선수가 되었다.

마라도나의 이적은 유럽에서 가장 가난한 도시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 선수를 영입이라 칭해졌고 나폴리 시민들은 세계적인 축구 스타의 입단에 극도로 흥분된 모습을 보였다.
평화를 기대해요. 바르셀로나에는 없던 평화요. 그리고 존중을 바랍니다.
디에고 마라도나
바르셀로나 생활 동안 선수생명이 위험할뻔한 태클, 장기 부상, 코카인 흡입 및 콜걸들과의 염문 등 각종 루머에 시달리던 마라도나는 인터뷰에서 바르셀로나에 없었던 존중과 평화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1984년 7월 5일, 입단식이 열렸다. 입단식 도중 한 기자가 돌발 질문을 하는데,
마라도나가 카모라를 아는지 궁금합니다. 다 그들 돈으로 돌아가는 것을 아는지? 심지어 축구도요.
입단식 도중 한 기자의 돌발 질문
그 질문을 들은 페를레노 회장은 발끈했고 나폴리는 이번 계약을 위해 그 희생을 했다며 그 기자를 퇴장시킨다. 당시 나폴리에는 이탈리아 3대 마피아인 카모라가 정치, 경제, 문화 등 나폴리 도시 전 부문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훗날 마라도나가 카모라에게 코카인과 유흥을 제공받으며 몰락한 것을 보면 상당히 묘하고 어찌보면 혜안과 같은 질문이었다.
이날 마라도나의 나폴리 입단식을 보기 위해 당시 역대 최고인 6만 5천명의 관중들이 스타디오 산 파올로에 운집한다.[7] 당시 부유한 북부 이탈리아 팀들은 가난한 남부 이탈리아 팀들을 멸시하였고 나폴리가 북부 팀으로 원정 경기를 올때 상상도 못할 지역차별[8]과 야유를 퍼부었다. 그런 상황에서 나폴리 팬들에게 팀의 간판급 스타가 되어줄 인물이었던 마라도나는 입단식부터 특별한 존재였다.

엘라스 베로나 FC와의 세리에 A 개막전, 마라도나는 분전했지만 나폴리는 3:1로 패배하였고 이탈리아 데뷔전은 좋지 않게 끝났다. 이어지는 경기에서도 이기기 위해 노력했지만 팀은 좋지 않은 모습만을 보여줬고 시즌이 진행되는 동안 나폴리는 강등권 언저리에 머무를 뿐이었다. 마라도나는 나폴리는 잠재력이 있다고 믿었지만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였고 자신 또한 거칠고 빠른 이탈리아 축구에 적응하기 위해 리듬을 갖추기 시작했다.

마라도나는 리그에 적응하기 시작했고 14골을 넣으며 득점 3위에 올랐으며 나폴리의 순위는 저번 시즌보다 3단계 오른 8위였다. 또한 마라도나는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 코리에레 델로 스포르트, 투토스포르트, 구에린 스포르티보 4개 매체가 교차검증이 돼서 합산한 평점 1위 선수에게 수여하는 구에린도르를 수상하며 첫 시즌만에 세리에 A 최고의 선수에 등극한다.
네, 나폴리로 오길 잘했어요. 정말 행복해요. 팀이 강해지도록 매일 노력하고 있어요. 와보니 강등만 피할 생각이더군요. 올해는 다를 겁니다.
디에고 마라도나 (바르셀로나보다 나폴리에서 더 잘 지내는 것 같다는 인터뷰어의 말에)
팀과 자신으로서 유의미한 성과를 냈지만 단지 중위권에 만족하지 않았던 마라도나는 나폴리에서 첫 시즌 후 인터뷰에서 행복하지만 팀은 강등만 피할 생각이라고 다음 시즌을 다를 것이라 말하며 다음 시즌을 예고한다.

5.2. 1985/86 시즌

84년 강등을 간신히 면했던 나폴리는 마라도나를 영입하고 8위까지 올라갔지만, 여전히 우승권하고는 거리가 있던 상황이었다. 마라도나는 팀이 강해지도록 노력하고 있었고 나폴리는 전 시즌 2경기를 뛰며 1부 리그에 데뷔한 유망한 수비수인 치로 페라라를 본격적으로 1군에 올렸고 리그 득점왕 출신인 브루노 지오르다노[9]를 영입했다. 그리고 팀은 개막전 승리를 시작으로 좋은 흐름을 이어갔다.

1985년 11월 3일, 미셸 플라티니를 중심으로 세리에 A와 유로피언 컵을 제패한 유럽 최강팀 유벤투스와의 경기가 산 파올로에서 열렸다. 당시 나폴리를 포함 남부의 팀들은 유벤투스를 포함한 북부팀들에 비해 선수진과 경기력의 격차가 컸고 북부와 남부 간의 뿌리깊은 지역차별로 인해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 중 나폴리는 유럽에서도 빈민층에 속한 도시였기에 더욱더 멸시를 받았다.
들도 뛴다. 나폴리인들이 온다. 콜레라 환자들, 지진의 제물. 절대 씻지도 않지. 나폴리 쓰레기! 나폴리 콜레라! 이탈리아 전체의 수치! 나폴리인들아 열심히 일해라. 마라도나를 위해 열심히 몸을 팔아야 할 테니! 없애버려! 없애버려! 불로 쓸어버려! 베수비오 화산아 저들을 불로 없애버려라!
유벤투스 서포터즈 (나폴리와의 경기에서)
나폴리인들은 '이탈리아의 아프리카인'이더군요. '하층민들', '무식쟁이들'. 북부 도시로 원정을 갔는데 가는 곳마다 씻으라고 써있더군요. 너무 싫었어요. 모두 인종 차별주의자였죠. 저도 이탈리아의 일부인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디에고 마라도나
파일:마라도나 유벤투스 1985.gif
나폴리의 승리를 이끄는 마라도나
그리고 이 날 빗속에서 열리는 혈투속에 마라도나는 유벤투스를 상대로 엄청난 활약을 선보이며 나폴리의 승리를 이끈다. 후반 72분, 마라도나의 프리킥 골이 결승골이 되며 1:0으로 승리한 것이다. 동료들은 그를 껴안으며 승리의 기쁨을 누렸다.
파란색이죠. 나폴리 시민을 위한 파란색. 나폴리에 살지 않는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취급을 당했는지 상상도 못할 거예요. 그랬기 때문에 시민들은 이번 승리를 누릴 자격이 있어요.
유벤투스전 승리 후 이번 골은 무슨 색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나폴리 관중들이 팀의 승리에 흥분한 결과 다섯 명이 기절하고 두 명이 심장마비를 일으킬 만큼 이 승리는 그동안 멸시받던 나폴리에게 특별하게 다가왔으며 마라도나는 단지 공 잘 차고 팀의 에이스로 경기를 승리하는 축구 스타를 넘어, 가난하고 멸시받는 나폴리 시민들의 자존심 그 자체로 등극한다.

유벤투스 전 승리 후 거의 모든 나폴리인들이 마라도나의 사진을 원했고 그 중 일부는 침대 위 예수 사진 옆에 두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중에는 마피아 카모라 조직의 줄리아노 가문이 있었고 자신들이 나폴리에서 마라도나를 보호해 준다는 이유로 접근하게 된다. 훗날 마라도나를 파멸로 이끌게 되는 시작이었다.

나폴리는 시즌 말까지 좋은 흐름을 계속해서 이어나갔고 최종 순위 3위에 오르게 된다. 이탈리아 축구의 판도는 뒤집어졌고 장족의 발전이었다. 또한 다음 시즌 유럽 대륙 클럽 대항전인 UEFA 컵까지 참가하게 되는 성과를 이루게 된다.

5.3. 1986/87 시즌

마라도나는 이탈리아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했지만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주는 세계 최고의 선수였고 발롱도르 3연패와 세리에 A, 유로피언 컵을 들어올린 유럽의 왕 미셸 플라티니와 라이벌로 인식되고 있었다. 그리고 1985/86 시즌 후 열린 멕시코 월드컵에서 엄청난 활약으로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끈 마라도나는 세계 축구의 유일한 왕으로 등극하였고, 마라도나에게 남은 것은 이제 나폴리의 우승이었다.

나폴리 또한 스쿠데토를 위한 야망을 불태웠고 US 아벨리노에서 뛰던 신성 페르난도 데 나폴리와 우디네세 칼초에서 뛰며 9골을 터트리며 준수한 활약을 보인 공격수 안드레아 카르네발레 등을 영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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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왕 미셸 플라티니와의 만남
마라도나는 핵심적인 선수로 팀에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며 승리에 기여하였고, 나폴리는 9라운드 유벤투스전에서 3:1 대승을 거두며 1위에 올라섰다. 마라도나가 오고나서 처음으로 1위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이다. 이제는 방심하지 않고 좋은 흐름을 계속해서 이어나가는 게 중요했다.
이게 제가 처음부터 바랐던 나폴리예요.
디에고 마라도나
마라도나는 강등을 피할 걱정만 하던 동료 선수들의 생각을 바꿔냈고, 이제는 단지 유벤투스나 밀란을 이기는 걸로는 부족해졌다. 모든 팀을 이겨야 했고 목표는 우승이었다. 나폴리 팬들은 이런 기분은 처음이라며 흥분하였고 우승을 염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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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의 승리를 결정짓는 골
나폴리는 계속해서 이겨나갔고 27라운드에서 밀란을 만났다. 우승을 향한 중요한 길목에서 전반 33분 카르네발레의 헤딩골로 나폴리가 앞서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43분 지오르다노가 문전으로 롱볼을 올려주었고 아름다운 터치로 공을 잡아낸 마라도나는 줄리오 누시아리 골키퍼를 제쳐낸뒤 골문으로 공을 집어넣으며 추가골을 성공시켰다. 마라도나는 격렬히 기뻐하며 동료들과 세리머니를 나눴다. 후반 79분, 밀란의 피에트로 파올로 비르디스[10]가 추격골을 넣었지만 그 후 골을 터지지 않았고 경기는 종료되었다. 마라도나의 골은 결승골이 되었다.

그야말로 축제였다. 이제 나폴리의 우승은 가까워져 있었다. 1987년 5월 10일, 29라운드 ACF 피오렌티나와의 리그 마지막 홈경기가 열렸다. 나폴리 팬들은 나폴리의 사상 첫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는 현장을 목격하기 위해 산 파올로에 모여들었다. 홈팬들의 열광적인 응원속에 경기가 시작되었고 전반 29분, 마라도나의 패스를 받은 카르네발레가 2:1 패스를 통해 피오렌티나 문전으로 침투하며 그대로 공을 골문에 집어넣었다. 경기는 1:1로 종료되었고 나폴리는 창단 61년만에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했다.[11]

마라도나는 기쁨에 취해 경기장을 뛰어다녔고 선수들은 부둥켜 안으며 우승의 기쁨을 누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으로 내려왔고 마라도나는 동료들과 트랙을 크게 뛰어다니며 팬들과 우승 세리머니를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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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Y DE ITALIA
이탈리아의 왕
제 인생 최고의 순간이에요. 왜냐하면... 우승을 몇 번 했지만 문제는 아르헨티나에서 우승한 적은 없다는 거죠. 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우승에 함께할 기회를 뺏겨서 그래서 이번 우승이 제겐 가장 의미 있어요. 제 집이죠. 의심할 여지 없이.
우승 후 트랙을 돌때 어떤 기분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바르셀로나 시절에 개인으로서 화려한 드리블과 개인기, 천재성이 보이는 패스로 게임을 풀어나가는 포워드였다면, 나폴리에서는 화려한 플레이는 자제하고 팀 플레이와 플레이메이킹 위주로 게임을 풀어나가며 마라도나는 나폴리의 가장 핵심적인 선수로서 좋든 나쁘든 경기의 중요한 상황에 늘 개입했고 거의 유일하게 경기를 바꿀 수 있었던 선수였다.[12] 그리고 이번 우승으로 감히 그를 의심하던 사람들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마라도나가 다른 누구보다 월등한 최고의 선수라는 것을 말이다.
E NON SANNO CHE SE SO PERSO
이걸 못 보고 죽다니
나폴리의 우승 후 공동묘지에 걸린 글귀
나폴리는 광란의 도가니였다. 사상 첫 세리에 A 우승이자 1975/76 시즌 코파 이탈리아 우승 이후 12년 만의 우승은 나폴리를 구원하였고 도시 전체는 엄청난 즐거움으로 파랗게 물들었다. 우승의 열기는 두 달 동안 계속되었으며 시민들은 높은 기대에 부응한 마라도나를 외치며 그를 찬양했다. 북부 팀들에 비해 별볼일 없었던 역사를 지닌 나폴리에게 마라도나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었다.
포르첼라, 나폴리 만세! 마라도나와 영원하라!
마라도나를 찬양하는 나폴리 시민들
파일:copa-italia-1987.jpg
코파 이탈리아 우승
세리에 A를 제패하였고 이제 마라도나와 나폴리에게는 코파 이탈리아가 남아있었다. 그는 7골을 터트리며 나폴리를 결승에 진출시켰고, 6월 아탈란타 BC와의 결승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열린 1,2차전에서 합계 4:0으로 우승하며 더블을 달성했다. 우승을 노리는 강팀이라고 할 수 없는 전력의 아르헨티나와 나폴리[13]를 이끌고 월드컵과 세리에 A를 연속으로 우승한 마라도나는 말 그대로 수호성인, 신, 절대적인 존재로 등극한다.

이 시즌 마라도나에게도 옥의 티가 있는데, UEFA컵 1라운드에서 툴루즈에게 승부차기를 실축하며 탈락했다.

5.4. 1987/88 시즌

마라도나에 대해선 나쁘게 말할 수 없죠. 그를 욕한다면 신을 욕하는 건데 저 위에 계신 신을 욕할 수 없잖아요?
나폴리에 우승을 안겨준 마라도나에 대한 팬의 생각
나폴리 시민들은 자신들을 선택하고 우승을 내려준 마라도나를 처럼 여겼고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다. 마라도나가 가는 길에는 항상 소동이 일어났으며 나폴리 시민들이 따라붙어 길에서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공연이나 영화, 쇼핑도 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한번은 혈액검사를 했는데 간호사가 그의 혈액을 가져다가 성 제나로 성당[14]에 놓아두기도 했다. 한마디로 신격화 된것이다.

그야말로 나폴리의 신으로 등극한 마라도나는 나폴리의 모든 것을 바꿔났다. 마라도나로 인한 성적 향상을 물론 동료 선수들의 마음가짐부터 달라졌고, 그가 오기전 강등권에 머물던 팀은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영입 당시 마라도나를 데려오기 위해 구단의 재정은 바닥나버렸지만 시청률, 관중수의 증가로 금세 몇배로 돌아왔다.
파일:마지카 결성.jpg
Ma-Gi-Ca
역사적인 첫 세리에 A 우승 후 나폴리는 그 자금으로 좋은 선수들을 영입하며 전력 강화에 성공한다. 단지 순수한 축구 실력을 제외하더라도 나폴리의 전력을 급상승시키는 데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대표적으로 1987/88 시즌, 브라질 리그에서 볼라 지 오로[15]를 수상한 공격수 카레카를 영입하며 마지카(Ma-Gi-Ca)라인[16]을 결성한다.

마지카의 한 축인 지오르다노가 부진하였지만 마라도나와 영입생 카레카의 활약에 나폴리는 3라운드부터 1위 자리에 올라섰고 내려오지 않은채 리그를 질주한다. 리그 2연패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실상 세리에 A 우승 결정전인 밀란과의 28라운드. 당시 밀란 감독 아리고 사키는 마라도나를 막아내기 위해 압박축구를 고안해낸 천재 감독이었고, 선수진 또한 마르코 판바스턴, 루드 굴리트를 포함 실력 있는 선수들로 가득한 호화로운 구성을 자랑했다. 첫 맞대결에서 대패한 경험이 있는 나폴리로서는 이 대결에서 패하게 되면 2위로 내려앉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고 36분, 밀란의 비르디스가 선제골을 터트린다. 마라도나도 지지않고 전반 종료 직전인 45분 프리킥을 성공시키며 동점을 만드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후반전, 비르디스와 반바스턴의 연속골이 터졌고 카레카가 한 골을 만회했지만 2:3으로 아쉽게 패배하고 만다.

중요한 길목에서 무너진 나폴리는 2위로 내려앉았고 승점 3점 차이로 밀란에게 우승 트로피를 내주고 만다. 유로피언컵에서도 레알 마드리드 CF에 패해 떨어졌고, 코파 이탈리아도 8강에서 토리노 FC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무관이었지만 마라도나는 15골로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하였고 코파 이탈리아에서도 득점왕을 달성하며 득점왕 더블을 달성했다. 나폴리 팬들은 여지껏 경험해보지 못한 팀의 활약에 여전히 지지를 보냈다.

5.5. 1988/89 시즌

나폴리에서 맞이하는 5번째 시즌, 변함없이 마라도나는 나폴리를 이끌었고 주인공이었다. 리그 6라운드 유벤투스를 난투전끝에 3:5로 잡아내며 기세가 오른 상황에서 7라운드 디펜딩 챔피언 밀란을 만났다. 1987/88시즌 밀란과의 2번의 맞대결에서 패배 하며 우승컵을 내준 마라도나는 이 경기에서 설욕전을 노렸다.
파일:마라도나 밀란 골 1988-89.gif
마라도나의 헤더 선제골
산 파올로에는 나폴리를 응원하는 팬들로 가득찼고 이윽고 경기가 시작됐다. 전반 42분, 공을 잡은 마시모 크리파가 밀란 문전으로 침투하는 마라도나에게 롱볼로 건네주었고, 골키퍼와 1:1 상황에서 헤더로 마무리하며 1:0으로 앞서나간다.[17]

3분 후, 다시 한번 밀란 쪽으로 넘어온 롱볼을 프랑코 바레시와의 경합에서 이겨내고 잡아낸 마라도나는 카레카에게 헤더로 연결했고, 카레카가 그대로 슛을 때리며 2:0 스코어를 만든다. 후반전에도 조반니 프란시니와 카레카가 연속골을 기록했고 밀란은 비르디스가 만회골을 기록했지만 승부를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결과는 4:1 대승이었고 마라도나는 머리로만 2골을 만들어내며 설욕에 성공했다.

나폴리는 리그에서 꾸준히 상위권에 랭크하며 우승을 노렸지만 로타어 마테우스안드레아스 브레메를 영입한 인테르가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우승컵을 들어올리는데 실패한다.[18]
1989년, UEFA 준결승전의 바이에른 뮌헨전을 앞둔 마라도나의 워밍업 장면.
"1989년 4월, 뮌헨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한 명의 선수가 시합 전에 워밍업을 하고 있었다. 바이에른 뮌헨 팬들 모두가 야유를 퍼붓는 와중에 그는 축구화 끈도 제대로 묶지 않은 상태에서 걸으면서 리프팅을 시작, 몸 전체 부분을 사용하며 볼을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이 다루었다. 그것을 본 팬들은 야유를 멈췄다. 야유를 퍼붓다 멈춘 그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이름은 디에고 마라도나. 적의 팬들까지 포로로 잡을 수 있는 천재는 어쩌면 앞으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 칼 하인츠 빌트 (키커 부편집장), UEFA컵 준결승전의 바이에른 뮌헨전을 보고 난 뒤의 증언.

비록 리그 우승은 놓쳤지만, 마라도나와 나폴리에게는 UEFA컵이 남아있었다. 유럽 대회에서는 힘을 발휘하지 못했던 마라도나였지만 이번은 달랐다. 8강에서 유벤투스, 4강에서 바이에른 뮌헨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결승전에 진출하였고 상대는 VfB 슈투트가르트였다. 홈에서 열린 1차전, 17분에 마우리지오 가우디노에게 골을 헌납하며 끌려갔지만 마라도나는 페널티 킥 골과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경기를 역전시켰고 2:1로 승리한다.

네카어슈타디온에서 열린 원정 2차전, 알레망의 선제골로 앞서 나갔지만 위르겐 클린스만이 만회골을 터트리며 승부는 다시 원점이 된다. 동점의 균형을 깬 것은 역시 마라도나였다. 39분 코너킥 상황에서 마라도나가 문전으로 올린 공을 클린스만이 막아냈지만 헤더로 다시 한번 올려주었고, 페라라가 침투하며 골을 만들어냈다. 후반전에 들어서도 62분 슈투트가르트 문전 쪽으로 올라온 공을 잡아낸 마라도나가 그대로 카레카에게 패스, 카레카가 침착하게 골문에 집어넣으며 1:3으로 앞서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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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컵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마라도나
슈투르가르트도 물러서지 않고 2골을 넣으며 동점을 만들었으나 경기는 종료되었고, 합계 5:4로 승리하며 나폴리는 UEFA컵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창단 이후 역사상 처음으로 들어올리는 유럽 대항전 트로피였다.[19] 동료들은 마라도나를 얼싸안으며 우승의 기쁨을 나눴다.

나폴리에게 영광을 가져다주며 모든 것을 다 이루었던 마라도나는 당시 사생활이 없는 나폴리 팬들의 광적인 응원과 관심, 언론에 지쳐있었고 좀 더 조용한 곳에서 은퇴를 원했다. 그리고 UEFA컵 결승 직후 마라도나는 이적을 원한다는 폭탄 선언을 하게 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말할 자유가 있었어요. 덜 부담스러운 리그에서 뛰고 싶다고. 하지만 제가 나폴리 선수라면 공 대신 마라도나의 엉덩이를 차주겠어요. 아주 세게요.
파올로 가림베르티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마라도나의 발언은 이탈리아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코라도 회장은 어떻게든 그를 잡아두고 싶었다. 마라도나는 회장이 원한다면 계속 경기를 뛸 것이라고 인터뷰하며 이적 이슈는 가라앉게 된다.

5.6. 1989/90 시즌

파라다이스 호텔로 갔어요. 식사를 하고 객실로 들어갔죠. 마라도나가 화장실을 들락거리더군요. 샴페인을 마셔서 그러려니 했죠. 하지만 다른 걸 했다는 걸 알았어요.
제나로 몬투오리 (나폴리 울트라)
마라도나가 코카인에 취해있다는 것은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한 코카인은 구하기 쉬운 나폴리에서 더 심해졌고 결국 중독되어 갔다. 일요일 경기가 끝나면 친구들과 클럽에 술을 마시러 갔고 코카인을 하면서 수요일까지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목요일부터 다음 경기를 위해 몸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이 매번 반복되었다.

마피아 카모라의 보스 줄리아노는 마라도나에게 마약과 여자 등 향락을 제공하는 인물이었고 그는 점점 그들의 소유물이 되어갔다. 마라도나는 코카인에 의해 조종당했고 그게 그의 약점인 것을 알았던 줄리아노는 중독을 통해 그를 통제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였다. 나폴리의 가장 유명한 마라도나도 거대 세력인 카모라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

마라도나의 몸은 마약, 거친 태클 등으로 인해 점점 망가져갔고 개인 트레이너 페르난도 시뇨리티는 그를 걱정하며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는 약점을 드러낼 수 없었다. 코라도 회장은 그 문제가 신문에 도배되지 않기를 바랐고 해결하려고 많이 애썼지만 당시 엄격하지 않았던 도핑 테스트도 다른 사람의 것으로 대신하면서 피해갔다.

어찌됐든 마라도나가 있는 나폴리는 계속 이겨나갔다. 6라운드 US 크레모네세와의 경기에서 리그 첫 골을 넣은 것을 시작으로 오렌지 삼총사의 밀란, 주세페 자니니의 로마, 게르만 삼총사의 인테르와의 3연전에서 모두 골을 집어넣었고 치열한 경쟁속에 나폴리는 리그 초반부터 1위로 순항하기 시작했다.
파일:마라도나 볼로냐 골1990.gif
1위를 탈환하는 마라도나의 골
32라운드까지 마친 시점에서 나폴리와 밀란은 우승 경쟁을 하고 있었고 승점은 47점으로 같았으나 골득실로 인해 밀란이 앞서고 있는 상황이었다. 나폴리로서는 반드시 남은 두 경기를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밀란이 베로나와의 원정 경기에서 패배하였고 볼로냐 FC 1909 원정 경기에서 마라도나는 골을 포함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나폴리는 2:4로 승리, 1위를 탈환한다.

SS 라치오와의 세리에 A 마지막 경기, 승점 1점만 더하면 우승인 상황에서 전반 7분, 마라도나가 프리킥 상황에서 킥을 올려주었고 마르코 바로니가 헤딩골을 터트린다. 이 골은 결승골이 되었고 그대로 경기가 종료되며 마라도나와 나폴리는 두 번째 세리에 A 우승을 달성하면서 스쿠데토를 차지한다. 코카인에 중독되어 방탕하게 살면서도 별 중의 별들만 모여있는 세리에 A를 두번이나 제패하면서 그는 여전히 나폴리의 절대적인 신앙이자 최고의 선수, 영웅임을 보여주었고 그 누구도 그것을 특별히 문제삼으려고 하지 않았다.
리그 두번째 우승이라니 정말 너무나 기뻤어요. 마라도나를 안 보내길 잘했어요.
페를라노 코라도 (나폴리 회장)

그리고, 나폴리의 세 번째 세리에 A 우승은 33년이 지난 2023년이 되어서야 달성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디에고 마라도나는 이미 세상을 떠나면서 나폴리의 세 번째 우승을 지켜보지 못했다.

5.7. 1990/91 시즌

1990년 월드컵이 이탈리아에서 열렸고 마라도나는 월드컵에 대한 열의를 보이며 몸을 만들었다. 당시 마약 문제가 심각했지만 축구에 대한 강한 열의에 잠시 마약을 끊을 수 있었다. 대회가 개막하였고 마라도나는 경기가 열리는 이탈리아 전역에서 적대적인 반응을 받았다. 세리에 A에서 뛰는 동안 나폴리를 제외한 다른 팀 팬들에게 공공의 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4강에서 이탈리아와 결승을 두고 자신의 신전 산 파올로에서 맞붙게 되었다. 마라도나는 그동안 멸시를 보내고 무시한 이탈리아보다 나폴리에서 6년을 보내고 함께한 자신을 응원해달라며 인터뷰하였다. 나폴리 팬들은 마라도나와 이탈리아 사이에서 혼란에 빠졌고 이탈리아 여론은 남북부 사이의 분쟁을 이용하여 남미 팀을 응원해달라는 마라도나의 발언을 듣고 분노로 들끓었다.

경기 날이 밝았고 나폴리의 이탈리아 관중들의 생각은 분명해졌다. 아무리 마라도나가 나폴리의 신, 자신들에게 영광을 안겨다 준 존재라 해도 응원하는 팀은 자신들의 조국 이탈리아였다. 경기는 연장전을 넘어 승부차기로 넘어갔고 로베르토 도나도니의 실축 속에 마라도나가 키커로 나섰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진심으로 조국의 결승 진출을 원하고 있었지만 득점하면 이탈리아와의 유대는 영원히 깨질 듯했다. 마라도나는 침착하게 득점에 성공했고 골키퍼 세르히오 고이코체아가 이탈리아의 마지막 키커 알도 세레나[20]의 슛을 선방하면서 아르헨티나는 결승에 진출했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꼬이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반발은 정말 강했으며 더이상 아무도 그를 옹호하지 않았고 언론, 사법당국, 세무당국 모두가 적이 되었다. 라 레푸블리카 신문의 설문조사에서 정치인, 독재자를 포함한 모든 유명인 중 가장 싫어하는 사람으로 마라도나가 뽑혔고 언론들은 그를 악마, 역겨운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나폴리의 영웅에서 한순간에 이탈리아의 악마로 추락한 것이다.
파일:마라도나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 1990.jpg
나폴리에서의 마지막 트로피
이탈리아 관중들의 야유 속에 열린 서독과의 결승에서 패배하고 월드컵을 준우승으로 마무리한 마라도나는 나폴리에 복귀했다. 시즌 전 수페르코파 이탈리아나에서 유벤투스를 상대로 5:1로 대승하며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리그가 개막하고 술과 마약, 절제가 없는 나태한 사생활, 거친 태클로 인한 몸 상태, 여론의 적대적인 감정은 마라도나를 스쿼드에서 자주 빠지게 만들었다. 그는 지쳐보였고 크리스마스 파티에서도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이탈리아에서의 마지막이 보이는 듯 했다.
마약 밀거래 조사과정에서 도청된 통화기록을 통해 나폴리 축구선수 마라도나가 마약과 성매매 요청을 했을 수도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1991년 2월 14일, 나폴리 헌병대 본부
그리고 카모라의 마약공급책이 마라도나와 통화한 내용이 그가 자주 출몰하던 호텔 근처에서 잠복수사하고 있던 경찰 도청에 의해 걸리게 되고, 마라도나의 마약 소지와 취급에 대한 조사가 곧바로 시작되었다. 이미 도시의 모두가 알고 수군대던 일이 도청에 의해 수면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약물 중독자, 매춘 등 더럽고 한심한 추문이 돌아다녔고, 마라도나는 유례 없는 몰락을 겪었다.

마라도나를 혐오하던 사람들은 그의 파멸을 원했고, 그는 매춘부들에게 코카인을 권유한 이유로 '거래 목적의 마약 소지' 혐의로 기소되었으며 20년 형이 선고되었다. 당연하게도 카모라 줄리아노 가문과 그의 관계는 세상의 주목을 받았고, 수사관과 치안판사들이 목을 조여오고 있음을 느낀 카모라 측은 이용가치가 없어진 마라도나를 외면했다.

마라도나가 언론의 관심 속에 법원에 도착하였다. 그에게는 끔찍한 재판이었고 검사는 아주 가혹했다. 혐의를 통해 마라도나는 1년 2개월의 집행유예와 벌금 5백만 리라를 수용했다. 마라도나는 예상보다 나폴리를 일찍 떠날 수 있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회는 마치겠다는 말로 마무리했다.

1991년 3월 17일, 25라운드 SSC 바리와의 경기에서 잔프랑코 졸라가 골을 넣으며 1:0으로 승리 하였고, 종료 후 그는 도핑검사를 위해 소환되었다. 의무 규정이 된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과는 끔찍했다. 금지 약물 흔적이 발견되었고 당연하게도 그의 골치아픈 사생활과 연관되어 있었다. 그는 6개월 동안 선수 생활이 박탈될 위기에 처했다.

그가 마약에 중독된 것을 알았던 모든 사람들에게 코카인 양성 반응은 놀라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실세들은 거기서 마라도나를 끝장낼 기회를 보았다. 도핑 검사 결과에 대한 처벌은 1992년 6월 30일까지 1년 이상의 자격 박탈이었다. 영광을 안겨다 준 영웅의 초라한 몰락이었다. 출전 금지는 이탈리아에서 처음 당하는 일이었고, 곧이어 FIFA에 의해 전세계에 적용되었다.
힘들었어요. 나폴리에 처음 갔을 땐 85,000명이 절 환영해줬는데 떠날 땐 완전히 혼자였죠. 조용히 떠났어요. 소란 떨지 않았죠.
디에고 마라도나
도핑 검사 결과 후 나폴리 구단에서는 코라도 구단주를 포함하여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마라도나는 짐을 정리한 뒤 영광의 시절을 뒤로한 채 이탈리아를 떠났다.

6. 세비야 FC

파일:external/sevilla.eldesmarque.com/maradona_debut_opt.jpg

6.1. 1992/93 시즌

코카인 복용과 관련, FIFA로부터 전세계에 적용되는 15개월간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던 마라도나는 징계가 풀린 뒤 복귀할 클럽을 찾고 있었고 레알 마드리드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가 관심을 보였지만 9월 자신의 은사 카를로스 빌라르도 감독이 있는 세비야 FC로 이적했다. 바르셀로나 시절 이후 8년만의 라리가 복귀였다.

빌라르도는 마라도나의 기량이 여전히 스페인에서 통할 것이라 생각하였고 이 때문에 세비야는 징계 기간 때부터 그와 접촉하며 입단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마라도나 또한 이탈리아를 떠나 새로운 무대가 필요했고 자신의 인사가 있는 세비야는 최적의 선택지였다.[21]

당시 세비야는 디에고 시메오네, 다보르 슈케르와 훗날 단장이 되는 몬치가 있었고 마라도나의 합류는 팀을 더 강하게 할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마라도나는 10㎏를 감량하며 새로운 팀의 성공에 열의를 보였고 시즌 초반 상위권에 들며 시너지의 효과를 봤다.

하지만 마라도나와 세비야의 관계가 식는 사건 하나가 터지는데 아르헨티나 대표팀은 1993년 2월 19일과 24일에 열리는 브라질덴마크의 경기에 그와 시메오네를 출전시키고 싶었고 세비야는 이에 거절 의사를 밝혔다. 마라도나는 세비야의 거절 의사를 무시하고 시메오네와 아르헨티나로 향하게 되고 이후 다시 몸관리를 게을리 하며 살이 찌는 등 열정을 잃은 모습을 보인다.

결국 리그에서 세비야는 빌라르도의 바램과는 다르게 7위에 그쳤고 마라도나는 총 29경기 6골을 기록하며 딱히 성공적이지 못한 스페인 생활을 마무리 했다.[22]

7.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

파일:마라도나 뉴웰스 올드 보이스.png

7.1. 1993/94 시즌

세비야를 떠난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에 복귀했고 보카 주니어스 이적을 원했지만 이뤄지지 않았고 CA 뉴웰스 올드 보이스에 입단했다. 1993년 9월 13일 4만명의 팬 앞에서 입단식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뉴웰스에서의 기간은 짧았다. CA 인데펜디엔테와의 경기에서 데뷔한 마라도나는 12월에 열린 우라칸전에서 근육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고 이후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결국 여름에 입단하여 이듬해 1월까지 약 반년간 활동하며 5경기 출장 기록을 남기며 뉴웰스 생활을 마무리했다.[23]

뉴웰스를 1년 만에 떠난 이유에는 언론의 집중 보도도 컸다. 당시 마라도나는 커리어 내내 자신의 모든 것을 뽑아내려했던 언론과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고 유명한 공기총 위협 사건도 이때 터졌다. 집 근처를 배회하던 기자 2명에게 공기총으로 협박을 한 것이다.

8. CA 보카 주니어스

파일:마라도나 1995 보카 주니어스.jpg

8.1. 영웅의 마지막

1994년 미국 월드컵[24]에 출전한 마라도나는 그리스전에서 골을 터트리며 조별 리그부터 아르헨티나팬들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나이지리아전 이후 실시된 도핑 테스트에서 에페드린 양성 반응으로 두경기 만에 월드컵 도중 귀국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FIFA는 그에게 15개월 출장 정지를 내렸고 이에 마라도나는 현역 은퇴를 결심하고 라싱 클루브 지휘봉을 잡지만 4개월간 2승 6무 3패라는 참담한 성적을 기록한다. 다행히도 축구선수로서 마라도나의 마지막 이미지는 월드컵에서의 퇴출이 아니었다. 1년 후인 1995년 고향팀 CA 보카 주니어스가 도움의 손길을 뻗었고 입단하며 선수 생활을 이어갈수 있었다.

그리고 1995년 9월 30일 대한민국월드컵 유치 홍보 계획의 일환으로 열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보카 주니어스와의 경기에 출전하며 첫 복귀전을 치뤘다. 월드컵에서의 약물 복용으로 출장정지 징계를 받은 후 나선 첫 공식전이었고, 카를로스 메넴 당시 아르헨티나 대통령도 정상회담 겸 경기 관전으로 내한했기 때문에 세계적인 관심을 끌기도 했다.

전반 41분, 코너킥으로 카를로스 맥 앨리스터[25]의 골을 도우며 도움을 올리며 성공적으로 첫 공식전을 마쳤다. 이후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지만 조국에서 행복하게 선수 생활 말년을 보냈고 1997년 10월 25일 리버 플레이트와의 원정 경기 2:1 승리를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하며 자신의 21년 프로 경력을 마친다.
파일:마라도나 은퇴.jpg
영웅의 마지막
축구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한 스포츠다. 당신이 축구에 관련한 실수를 했다고 하더라도 축구에 대해 미안해 할 필요는 없다. 축구는 모든 것을 정화하는 스포츠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간 실수를 정말 많이 했다. 하지만 축구만큼은 더럽히지 않았다.
디에고 마라도나 (은퇴사)
은퇴 후, 2001년 11월 11일 라 봄보네라에서 세계 올스타팀과 아르헨티나 대표팀과의 경기로 공식 은퇴경기를 가졌다. 수많은 선수들이 그의 마지막 경기를 배웅하기 위해 참석했고 경기장을 떠난 후 4년만에 공식 경기에 선 마라도나는 이 경기를 위해 20kg를 감량했다. 그는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페널티 킥 2골을 넣으며 팀의 6:3 승리를 이끌었고 항상 자신을 응원하고 지지했던 팬들 앞에서 마지막을 고했다.

[1] 스페인의 리그컵. 대회 포화 등 클럽들의 반발로 4년 하고 바로 폐지되었다.[2] 피오렌티나와 첼시에서 뛰었던 마르코스 알론소 멘도자의 아버지. 공교롭게도 아들 마르코스 알론소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2022-23 시즌에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된다.[3] 마라도나 외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퍼포먼스에 대한 기립 박수를 받은 선수는 요한 크루이프, 호나우지뉴, 알레산드로 델피에로,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지미 존스톤(셀틱 소속으로 1967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고별 경기에서 받았다.)까지 단 6명 뿐이다.[4] 더 타임스 선정 역대 가장 악명높은 수비수 1위에 선정된 선수. 절대로 '공을 향한 태클'은 하지 않는 선수로 이름을 떨쳐 마라도나 이외에도 수많은 선수들의 무릎과 발목을 부러뜨린 악한이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한국전에서 2번째 골을 넣은 스페인 선수와는 동명이인이다.[5] 히바우두도 떨어졌다.[6] 당시 이적료 2위였던 위르겐 클린스만보다 2배 이상 많았다.[7] 현재 역대 2위의 기록. 역대 1위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세운 레알 마드리드 입단식의 7만 5천명.[8] '이탈리아의 하수구' 등이 있다.[9] 1978/79 시즌 19골로 세리에 A 득점왕에 올랐고 나폴리에서는 3시즌을 뛰었다. 마지카 라인의 한축이나 첫 시즌 빼고는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다.[10] 17골로 1986/87 시즌 득점왕에 오른 선수다.[11] 이는 사르데냐 섬이 연고지인 칼리아리 칼초의 우승을 제외하면 남부 이탈리아를 연고로 한 팀이 스쿠데토를 차지한 전무후무한 사례다.[12] 물론 개인 플레이의 수준 또한 절대 떨어지지 않았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8강 잉글랜드 전에서 나온 단독 드리블골과 4강 벨기에전에서 터트린 골을 보면 알 수 있다.[13] 당시 나폴리는 마라도나를 제외하고 전부 이탈리아 선수들이였고 살바토레 바그니, 페르난도 데 나폴리, 브루노 지오르다노 단지 3명만이 성인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출전 기록이 있었다. 그중 지오르다노는 대표팀에 뽑힌 8년 동안 13경기만 출전한 로테이션급 멤버였으며 85년 이후로 A 매치에 소집되지 못했고 데 나폴리는 막 대표팀에 자리잡던 신성, 바그니는 87년 이후로 국가대표팀에 뽑히지 못했다. 당시 유망한 수비수였던 치로 페라라는 나폴리의 우승에 기여 후 1987년 6월 10일에 첫 성인 대표팀에 데뷔했다.[14] 성 제나로는 나폴리에서 순교한 베네벤토의 주교로 나폴리의 신자들을 방문 도중 체포되어 교수형에 처해졌는데, 목을 베일때 흘린 피가 두개의 호리병에 담겨진채 응고되지 않고 보존되고 있다.[15] 브라질 리그 최우수 선수에게 수여하는 상이다.[16] 마라도나, 지오르다노, 카레카로 이루어진 라인으로 이탈리아어로 마법사라는 뜻이다.[17] 밀란 선수들이 크리파에게 우르르 뛰어서 라인을 올리는 것을 볼 수 있다.[18] 당시 6라운드 유벤투스전부터 계속 2위를 유지했으나 결국 인테르를 넘지 못했다. 마테우스가 마라도나의 라이벌로 등극하는 것도 이때쯤이다.[19] 현재까지 나폴리의 유일한 유럽 대항전 트로피다.[20] 이탈리아의 대표적인 명문 클럽 유베, 인테르, 밀란에서 모두 뛴 선수이며 1988/89 시즌에 22골을 넣으며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한 선수다.[21] 일설에 의하면 당시 FIFA 사무총장이던 제프 블라터가 협상을 도왔다는 말이 있다. 당시 FIFA는 최고의 마케팅 수단인 마라도나의 부활을 원하는 기관이었다.[22] 세비야 시절은 성공적이지 못했지만 당시 함께 경기를 뛴 몬치는 훗날 "1시즌 뿐이지만 마라도나가 세비야에 있었다는 것만으로 큰 자부심"이라고 말했다.[23] 마라도나가 뉴웰스에 몸담을 당시 유소년 팀에 훗날 자신의 뒤를 이어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되는 리오넬 메시가 있었다. 메시는 마라도나의 사망 후 경기에서 골을 넣은 후 10번이 새겨진 뉴웰스 셔츠를 입고 양손을 들며 마라도나를 추모하는 감동적인 장면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24] 마지막 24개국 본선 진출 대회[25]브라이튼, 2023년 이후 리버풀에서 뛰는 알렉시스 맥 앨리스터의 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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