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석조전 내부를 볼 수 있는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 석조전 상설 전시관〉 사이트.석조전 내부를 다룬 문서이다. 완공 당시 공간 활용은 층별로 달랐다. 지면에 위치한 지층은 궁인들이나 석조전 생활을 보조하기 위한 시설들이 있던 공간이었고, 1층은 방문자들을 위한 접대 공간이었으며, 2층은 황제, 황후 등 황실 가족 공간이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일제가 미술관으로 개조하면서 원래 모습을 바꾸었고, 이는 광복 후인 200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다가 2009년에 석조전 복원 사업으로 지층 전체와 1, 2층 일부 공간을 제외한 내부 복원을 2014년에 완료하였다.
모든 내부 공간이 대한제국 전시관으로서, 자유 입장이 가능한 지층의 대한제국 역사관 및 사전 예약로 입장하는 1·2층 관람 공간으로 전시실과 대한제국 당시 내부를 고증한 재현실이 있다. 전반적으로 영국식 신고전주의 양식 인테리어로 석조전 인테리어 시공을 맡았던 영국의 메이플 회사에 남아 있던 카탈로그에서 참고했다.
2. 지층
<colbgcolor=#e3ba62> 석조전 지층 배치도 |
2014년 복원 완료 이후, 대한제국 역사관이란 명칭으로 개방한 내부 공간 중 유일하게 자유롭게 입장이 가능한 곳이다. 전체 공간 중 서쪽에 위치한 1층으로 올라가는 서쪽 계단을 중심으로 네 방만 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1번 방은 덕수궁 주변 풍경, 2번 방은 고종의 근대적 개혁, 3번 방은 대한제국 신문물, 4번 방은 덕수궁 복원기에 대한 주제 등 주제별로 전시 공간을 구성하였다.
개방하지 않은 방들 중 중앙에 유일하게 큰 방이 있다. 복원 전에 수장고로 썼던 방이다. 내부적으로 어떠한 고증 자료가 전무한 곳인데다가 궁인들 및 석조전의 생활 등을 보조하는 공간이기에 인테리어를 하지 않았다.
3. 1층
<colbgcolor=#e3ba62> 석조전 1층 배치도 |
재현실 위주로 서술하였다.
3.1. 중앙홀
<colbgcolor=#e3ba62> 석조전 중앙홀 |
3.2. 귀빈 대기실
<colbgcolor=#e3ba62> 석조전 귀빈 대기실 |
주로 귀빈들은 황실에서 대접하는 비스킷, 과자, 샴페인 등을 먹으며 황제 폐현을 기다렸다고 한다.
대기실에는 협탁, 탁자, 원탁, 4개의 의자, 장의자, 장식장이 있다. 이 중 장의자와 장식장 또한 원래 있던 가구이다. 나머지는 전부 시공 당시 메이플사에 의뢰한 가구의 카탈로그를 참고해 재현한 복제품이다.
벽난로 위 거울은 사람 키에 맞지 않게 상당히 높이 있다. 이는 거울을 높은 곳에 둠으로써 빛을 반사시켜 건물을 환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대한제국 시기에 전등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현대보다 전등 빛이 환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시 거울은 사치품에 가까웠기 때문에 아무 데나 여러 개씩 깔아둘 수 없기도 했다.
3.3. 접견실
<colbgcolor=#e3ba62> 석조전 접견실 |
폐현은 황제께 나아가며 총 세 번 몸을 숙여 인사를 하며 나아가고, 뒷걸음으로 돌아오는 방식이었다. 외국 사신들에게는 상당히 곤혹스럽고 어려운 절차였다고 한다.
특별전이 있을 때에는 가구를 모두 치운 뒤 대형 전시 공간으로 활용한다.
접견실에서 가장 고가인 물건은 유럽에서 수입된 벽면 거울이었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는 중앙에 거울의 방이 있는데, 당대에 거울은 엄청나게 비싸고 화려한 사치품이었다. 이에 궁전 중심이자 프랑스 중심을 거울로 장식한 것이다. 이는 외국 사신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도배한 거대한 회랑인 거울의 방을 걷게 함으로써 사절단의 기를 죽여 프랑스의 외교적 우세를 확보하기 위한 고단수의 정치적인 장치였다. 거울이 비쌌던 이유는 베네치아의 일부 솜씨좋은 기술자들만 제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프랑스에서 이 기술을 빼내오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는 설이 있다. 석조전 접견실에 위치한 거울들은 유럽에서 장식한 형태로 잘라서 직수입하였고, 장기간에 걸쳐 매우 조심스럽게 운반하였다고 한다.
다른 공간에 비해 천장이 낮다. 한국 전쟁 당시에 내려 앉았기 때문이다.
3.4. 대식당
<colbgcolor=#e3ba62> 석조전 대식당 |
보통 마지막으로 거치는 곳이다. 대식당에서 마지막 해설을 하고 중앙홀로 이동하여 관람을 끝낸다.
3.5. 소식당
<colbgcolor=#e3ba62> 석조전 소식당 |
방들 중 유일하게 인테리어 마감이, 락커칠을 한 듯한 영국산 오크나무로 만든 판넬링이다. 그래서 미술관으로 바뀐 후에도 귀빈실로 사용하였다. 1시간 이상 되는 심화 해설과 석조전에서 분기별로 진행하는 특별전 때에만 관람이 가능하다.
4. 2층
<colbgcolor=#e3ba62> 석조전 2층 배치도 |
재현실인 침실과 황제의 서재, 황후의 거실 및 화장실과 욕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불침번을 서던 궁녀들이 사용한 방으로 추측할 뿐, 제대로 된 고증 자료가 없어 전시실로 활용한다.
1층과 마찬가지로 재현실 위주로 서술하였다.
4.1. 황제의 침실
<colbgcolor=#e3ba62> 석조전 황제침실 |
벽면의 인테리어는 소식당을 제외하면 같으며 카펫 위로는 침대를 포함해 옷장, 세면대, 의자, 안락의자, 협탁 등이 있다. 이 중 옷장과 세면대는 원래 침실에 있던 것을 다시 배치한 것이다. 또한 황제의 침실이기 때문에 커튼과 소파의 덮개, 침대의 이부자리 등의 색상이 황색이다.
세면대는 큰 대야에 대형 저그가 겹쳐져 있는 형식으로 요즘의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는 세면대와 다르다. 이는 수도관이 들어오기 전에 유럽 왕실에서 사용하던 방식이다. 황족이 대야에 손을 대면, 위에서 시종들이 물을 부어주는 식이었다. 이를 감안해서 세면대 탁자 상판 부분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나무일 경우 물이 튀어 썩기 쉽기 때문이다. 경복궁에 위치한 국립고궁박물관 전시에도 이와 같은 세면대가 있는데, 빌레로이앤보흐 사 제품이다.
침대는 요즘 침대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데, 유럽에서도 동시대의 침대는 주문제작으로 사용하는 사람의 키보다 살짝 크게 제작했기 때문에 작았고, 그 유럽의 제품을 수입한 것이다 보니 작아 보이는 것이다.
추가적으로 당시 유럽의 귀족들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베개에 상체를 올리고 거의 앉은 자세로 수면을 했고 이 침대 또한 같은 구조로 상체를 뉘울 수 있는 베개가 있기 때문에 더더욱 작아보인다.
황제의 침실을 황제의 서재, 황후의 부드와흐(규방), 황후의 침실, 2층 중앙홀과 차례로 연결하였다. 유럽의 궁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파트형 구조이다. 이런 왕족의 주거 구조를 현대에 아파트를 만들 때 접목시켰다.
4.2. 황제의 서재
<colbgcolor=#e3ba62> 석조전 황제서재 |
중앙 원탁 위에 있는 책은 당대 국제법 기초 서적이었던 만국공법이다. 고종황제는 외국 사신들에게 이와 같은 외국 서적들을 부탁하여 입국시 3 ~ 4권 정도씩 가져오게 시켰다고 한다. 이와 같은 고종황제의 행보를 보면, 중국과 러시아에게 승리한 일제가 세계에서 손꼽히는 무력으로 침략하는 것을 정면에서 막지는 못했지만 조선과 대한제국을 위해 자주적인 노력을 기울였던 군주였음을 알 수 있다.
4.3. 황후의 침실
<colbgcolor=#e3ba62> 석조전 황후침실 |
가구 구성은 황제의 침실과 거의 같다. 단, 황후의 침실이라 그런지 카페트 위로 화장대가 있는 것과 커튼이나 방석이 자주색인 것이 다르다. 준공 이후 배치했던 옷장, 세면대, 화장대, 책상을 복원하면서 다시 놓았다.
4.4. 황후의 거실
<colbgcolor=#e3ba62> 석조전 황후거실 |
중앙에 위치한 원탁 위에는 영국의 웨지우드 사에서 제작한 티팟 세트가 있다.
4.5. 화장실&욕실
<colbgcolor=#e3ba62> 석조전 화장실 |
<colbgcolor=#e3ba62> 석조전 욕실 |
대한제국에서 수세식 좌변기가 최초로 설치되었다. 그 당시 고종 황제의 황실로 사용되는 건물에 영국식 수세식 변기[3]가 설치되었다.
황제와 황후의 화장실/욕실 디자인은 대체적으로 같다. 변기나 욕조, 세면대 등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쓰던 것들을 그대로 들였다.
[1]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 부속 건물인 쁘띠 트리아농에 놓여져 있던 로코코풍 대리석 탁자를 본떠 만든 것으로, 원본은 프랑스 혁명 이후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져 쉴리관의 왕실 아파트에서 전시한다. 루이 16세의 왕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용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화려한 금장 인어장식 등을 통해 로코코 시대 우아함을 그대로 보여준다.[2]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고려시대 이전부터 1930년대까지 상류층 이상은 독상을 받는 게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식사 문화였다.[3] 물탱크가 상부에 달려 있으며, 줄을 당겨 물을 내리는 방식. 석조전은 영국인이 설계한 영국식 건물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방식이 채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