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17:54:07

낙랑클럽

1. 개요2. 이름의 유래3. 상세4. 성상납 여부 논쟁
4.1. 사실이다
4.1.1. 김기협 교수의 해석
4.2. 사실이 아니다
4.2.1. 반박
5. 관련 문서

1. 개요

외국인 대상으로 한국전쟁기 존재했던 고급 사교클럽이다. 모윤숙은 이승만의 지시로 김활란모윤숙6.25 전쟁이 지속 중이던 시기 1951년에 만들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미군정기에 설립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낙랑클럽에 소속된 인물 중 하나가 김수임인데 김수임은 6.25 전쟁 직전에 리강국 사건으로 총살되었기 때문이다. 미군 CIC 보고서에 의하면 낙랑클럽의 설립 시기는 1948년에서 1949년으로 추정된다.

2. 이름의 유래

모윤숙의 시 <논개>에서 논개는 최경회가 아닌 김시민을 사랑한 관기로 묘사되며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김시민이 전사하자 논개는 왜장을 끌어안고 나간다.[1] 모윤숙은 8.15 광복 전후에 스캔들에 연루된 바 있다.[2] UN군 고급 장교 접대용으로 낙랑클럽이라는 사교 단체를 조직한 후 자신을 논개에 비유한 것으로 짐작된다.

3. 상세

모집 조건은 영어 능통한 이화여자전문학교 출신자였고 총 100여 명 정도[3]가 소속되었으며 이들은 이화여자전문학교 혹은 숙명여자전문학교 출신[4]으로 영어 능통자라는 조건 때문에 당시 고관들의 부인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본문에서 언급되는 전숙희의 책에서도 이야기가 나오고 모윤숙 자체도 인정한 내용이다. 모윤숙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중심 인물이 손원일 제독의 부인 홍은혜,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 부인 허숙자 등으로 총재는 김활란, 회장은 모윤숙이었다. 이후 낙랑클럽에 대해서 '부인들의 민간 외교'라는 주장도 존재하지만 낙랑클럽에 소속되어 있었던 김수임을 변호하기 위해서 전숙희[5]가 쓴 책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에서도 낙랑클럽은 유사 매춘 단체에 가깝게 묘사되는데 <사랑이 그녀를 쏘았다>를 읽어보면 오히려 자선에도 참가한 우익 고위층의 사교클럽으로 묘사되어 있다. 단적으로 지나친 로비 문제와 김수임 사건 관련으로 낙랑클럽을 조사한 미군 CIC도 당시 조사 보고서에서 낙랑클럽을 '로비를 위한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규정해 버렸다. (金祥道, "6·25무렵 毛允淑의 美人計 조직 「낙랑클럽」에 대한 美軍 방첩대 수사 보고서") [6]

낙랑 클럽의 자세한 실체는 90년대 중반 중앙일보가 미국 국립문서보관소가 비밀해제한 문서에서 발견하여 폭로하면서 널리 알려졌는데, 당시 국내 주둔하던 미군의 정보기관인 CIC가 작성한 비밀 문서에 기록된 이 단체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낙랑클럽은 서울에 거주하는 여성들에 의해 48년이나 49년께 사회단체로 조직됐다. 이 단체의 목적은 외국귀빈, 한국정부 고위관리 및 미군장성, 주한 외교사절 등을 접대하기 위한 것이다. 이 단체의 회원은 한국의 모 일류 여대를 졸업한 교육받은 여성들에 주로 국한됐다. 이들은 대개 영어를 할줄 아는 매력적인 여성들로 교양있는 호스티스였다. 특히 부산 피난 시절에는 송도(松島) 돌산 위에 세워진「시 사이드 맨션」등이 파티장으로 이용됐다. 이 클럽을 앞장서 조직하고 이끌고 있는 사람은 YWCA 총재이자 저명한 시인이다. 그녀는 51년12월 유엔총회 당시 소련 외무장관 비신스키를 열렬히 포옹한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낙랑클럽 회원들은 기혼, 미혼, 무직, 직업 여성등 다양한 인적구성을 보이고 있으며, 초기에는 회원수가 1백 50명에 달했다. 외국인 접대행위는 몇몇의 경우 외국인의 정부(情婦)가 되는 일로 발전되기도 했다. 실례로 낙랑클럽 조직 구성에 참여했던 한 여성은 부산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영관급 장교의 정부(情婦) 노릇을 했다.
(낙랑클럽은) 부산 피난시절에도 미군들을 상대로 접대행위를 계속했는데, 부산 주둔 미국의 한 관리는 이 클럽 회원들이 심지어 군 막사에까지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또한 해당 문서에는 당시 미국 현지에서 발행된 신문 기사를 인용하여 낙랑 클럽을 묘사한 대목도 있는데, 다음과 같다.
한국에서 가장 전설적인 여성은 한국 여성 2백명을 주한 외교관등을 접대하기 위해 자유당의 접대부로 조직한 시인이자 정치인 모윤숙 이다. 모윤숙 덕분에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사령부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사전에 알 수 있다. 부산에 있는 낙랑 클럽의 지도부는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을 갖춘 중년 여성들로 구성돼 있으며 이들은 군장성과 외교관들을 위해 항상 파티 계획을 세우고 있다. 어느날 밤 파티에서 한 젊은 참석자가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10년은 더 나이 먹은 여성이 접대하러 나오자 화를 내면서 항의했다. 그러자 15분 안에 한국정부 고위 관리가 젊은 낙랑 회원을 대동하고 나타났고 나이 먹은 낙랑 회원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낙랑 회원들은 두가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밤에는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고 불빛을 받으며 고위 관리들을 접대하고, 낮에는 한국군을 접대하기 위한 물품들을 구하기 위해 미군 막사의 문을 노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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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 2가지 사건은 스캔들 차원에서 다루어졌으며 쉬쉬되었으나 기파랑 출판사에서 출간된 <이승만과 메논 그리고 모윤숙>에서는 이를 민간외교로 평가했다. 물론 모윤숙 본인은 논개 드립을 치면서 미인계를 포함해서 모두 민간 외교로 싸잡아서 인정했다. 본 책에서는 미인계 운운은 안 나오고 순수한 문학적이고 문화적이며 로맨틱한 교류에 대해서만 주로 언급된다.#

4. 성상납 여부 논쟁

성상납을 정의할 때 성관계만 포함되는지, 성관계가 아니라 유사 행위까지 포함되는지에 따라 달라질수 있다.

나무위키에도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성(Sex)을 바치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성을 바친다는 기준이 개개인마다 다르기 때문. 영미권에서 쓰는 '캐스팅 카우치(casting couch)'나 2000년대 이후 대체 은어로 쓰기도 하는 스폰에 포함될 수도 있다.

4.1. 사실이다

미국의 공식 문서로 교차검증을 해보면 당시 여대생들이 미군을 접대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김활란의 낙랑클럽 부분에서 상술됐듯 김활란이 총재로 있던 낙랑클럽은 미군 산하 방첩기관 CIC가 작성한 문건에서 영어가 능통한 고학력자 여성을 모집해 국내외 유력자들을 상대로 로비활동부터 유력자들에게 접대를 통해 정보를 빼내오는 등 고급 호스티스 단체로 간주했던 부분이 존재하며, 이 문서가 해금 된 이후 중앙일보에서 1995년 당시 특종으로 보도한 부분이다("이승만 정부 외교 사절, 미군 등에 낙랑클럽 이용해 정보 빼냈다"). 그리고 이 낙랑클럽은 이화여대 등 당시 명문 여대생들을 중심으로 이뤄진 조직이었다.[7]

해당 보도에 따르면, 낙랑클럽은 48년께 시인이자 정치인이였던 모윤숙의 주도로 결성돼 국내 모 여대 출신의 용모단정한 영어가능자 150여 명을 회원으로 두고 주로 주한외교사절, 미국 고위관리, 미군 고위 장성 등을 위한 접대행위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얻은 정보들을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 측과의 협상에 이용되었다고 전해진다.

전술된 CIC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어, 유흥업소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젊은 장교기자들을 위해 그녀는 젊고 아름다운 낙랑 걸들을 대거 불러오기도 한다. 어느 날 밤 파티에서 한 젊은 참석자가 자신이 기대했던 것보다 10년은 더 나이 먹은 여성이 접대하러 나오자 화를 내면서 항의했다. 그러자 15분 안에 한국정부 고위관리가 젊은 낙랑회원을 대동하고 나타났고 나이먹은 낙랑회원은 슬그머니 사라졌다. 낙랑회원들은 두 가지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데 밤에는 한복으로 곱게 차려입고 불빛을 받으며 고위관리들을 접대하고 낮에는 한국군을 접대하기 위한 물품들을 구하기 위해 미군막사의 문을 노크한다.
Possible Espionage Activity at Seenchon-Dong Hospotal.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미군 CIC 정보 보고서 1 - 인물조사보고서』. 1996. 667-668쪽.


더불어, 낙랑클럽 구성원들과 친분이 두터웠던 수필가 김숙희의 기록에 따르면
미군을 만난다지만 상대는 미 군정청의 실력자들인 장성급, 고급 장교에 한정되었고, 남한에 들어와 있던 각 나라 외교관과 유엔 산하 각종 단체장이었다. 사교적인 파티에 참석하여 그런 외국인들로 하여금 남한에 호의를 갖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 그러다 보니 이화 출신을 중심으로 한 달 만에 100여 명이 낙랑클럽 회원으로 지원했다. 그들 중에는 정부가 수립되고 장관급에 오른 주요 정치인의 부인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라는 구절이 있어 이화여대 구성원이 해당 클럽에 들어 있는 것 역시 부인할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4.1.1. 김기협 교수의 해석

또한, 계명대학교 역사학과 교수로 봉직한 김기협 교수는 고급 '사교' 조직 '낙랑클럽'을 아십니까?라는 제하의 글을 통해 당시 낙랑클럽에 실제 참여한 인물의 증언을 토대로 사실상 접대 조직이었음을 밝힌 바 있다. 김기협 교수는 최종고의 감각이 고상하기 때문에 남들에게 '매춘'으로 보일 만한 행위에서도 문학적-문화적 의미를 찾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전숙희는 여류 문인으로서 낙랑클럽 핵심 멤버들과 절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낙랑클럽의 활동에 정말 문학적-문화적 의미가 있었다면 포착하지 못했을 리가 없다고 논설한다.
낙랑클럽이 처음 발족했을 때는 회현동에 있던 모윤숙의 집에 회원들이 모였으나 미 군정청과 선을 대고 있던 우익 정치인이 주선하여 일본인 호화 저택을 적산가옥으로 불하받았다. 회원들이 그 저택의 넓은 다다미방에서 자주 모임을 가졌다. 클럽 운영의 리더였던 모윤숙은 사교적인 호탕한 기질을 십분 발휘하여 위트와 유머 섞인 이야기로 대부분 이화 후배인 회원들을 사로잡았고, 항상 옆에 있던 김수임은 명랑한 웃음으로 분위기를 즐겁게 했다.

이 책의 "책머리에"에서 전숙희는 "수임 언니"의 진심을 살려내기 위해 이 글을 쓴다고 했다. 이강국의 애인으로 미군정 간부와 동거하다가 간첩죄로 체포되어 처형된 김수임의 실존을 '비극적 사랑'의 관점에서 부각시키겠다는 뜻이다. 김수임의 활동 무대로서 낙랑클럽을 설명하는 전숙희의 입장에서는 낙랑클럽의 성격을 비하할 아무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전숙희는 낙랑클럽을 기지촌에 비교했다. "기지촌과는 비교할 수 없는 사교클럽"이라 한 것은 신분의 기준으로 비교할 수 없다는 말이며, 성격에서는 기지촌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책 속에서 모윤숙과 김수임의 모습은 고급 매춘부로 그려져 있다. 김수임이 베어드 헌병사령관과 가까워지는 과정의 한 장면을 옮겨놓는다. 베어드의 집에 두 사람이 저녁 초대를 받아 간 장면이다. (131~132쪽)
"'낙랑클럽'이란 이름부터 참 고약하다. 우리 역사 초창기 이민족의 침략과 지배를 상징하는 이름이 '낙랑'이다. 해방 조선에서 외국인 접대를 목적으로 모인 엘리트 여성 집단이 하필 '낙랑'이란 이름을 쓰다니. 2000년 전 토착 문화보다 우월한 중국 문명의 이민족 지배 아래 누리던 '식민지 낙랑'이 이 집단의 소망이었다면 더 할 말 없다. 더 고약한 것은 '낙랑'과 '여성'이 합쳐질 때 바로 떠오르는 '낙랑공주'의 이미지다. 이웃나라 왕자와 사랑에 빠져서 침략의 길을 열어주는 데 목숨 바친 '미친 년' 아닌가. 정말 '문학적-문화적 교류'가 이뤄져 낙랑공주 설화를 알게 된 외국인이라면 낙랑클럽 멤버의 환대를 받으면서 상대를 어떤 눈으로 보았겠는가.
낙랑클럽과 모윤숙의 이름이 유엔 조선 위원회에 대한 로비 활동으로 회자되는 것은 '매춘'의 선정성 때문이다. 나는 모윤숙의 성적 매력이 한국 현대사의 전개 방향에 결정적 작용을 했다고 믿을 수 없다.(중략)낙랑클럽의 활동은 당시 조선의 유산 계층을 배경으로 하는 한민당-이승만 세력이 펼친 로비 활동의 일환이었다. 반공-반탁을 간판 삼아 분단 건국을 추진한 그 세력은 풍부한 재력을 비롯해서 자기네 목적을 추구하는 데 동원할 자원을 많이 갖고 있었고, 낙랑클럽은 그중 일부였다. "이성이 심정에 의해 흔들렸다"는 메논의 회고는 사랑 때문에 저지른 잘못을 그리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통념 때문에 나올 수 있는 것이었다. "양심이 뇌물에 의해 마비되었다"는 고백이 나오지 않았다 해서 뇌물의 작용이 없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몸까지 바치는 판에 재물이라고 아낄 리는 없었으리라고 짐작해 둔다.

고 말하고 있다. #

4.2. 사실이 아니다

유흥 목적으로 접대를 했다고 해서 반드시 성관계를 제공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김준혁이 ‘이화여대생 미군장교 성상납’ 발언의 근거라면서 자신의 블로그에 공개한 논문[8]에도 ‘성상납’이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김활란이나 모윤숙에 의해 동원된 젊은 여성들이 파티에서 "직접적인 성적 유흥을 제공하지는 않았을지라도"[9]라고 표현, 당시 활동이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성상납은 아니었음을 시사하는 문구가 있었다. 서울신문 여성신문

실제로 낙랑클럽의 활동 양상에 대한 회장 모윤숙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낙랑구락부는 어찌 알고 물어. 그런 6·25 피란 시절(1951년) 부산에서 생겨 약 2년간 지속되었지. 이승만 대통령이 불러 ‘외국 손님 접대할 때 기생파티 열지 말고 레이디들이 모여 격조 높게 대화하고 한국을 잘 소개하라’고 분부하지 않겠나. 우리는 부랴부랴 낙랑구락부를 조직, 김활란 박사를 고문으로 하고 내가 회장을 맡았지. 금방 50명 가량의 회원이 모였는데 그 때 예쁘고 인기 있던 여성으로 손원일 제독 부인인 홍은혜, 화신백화점 박흥식 사장부인 허숙자씨 등이 생각나는군. 말하자면 낙랑은 정부의 부탁으로 이른바 파티대행업을 한 셈인데……. 부산 송도 바닷가 돌멩이 위에 지은 집(귀속 재산)을 우양(허정) 장관한테서 빌려 씨 싸인드 맨션이라고 부르고 파티비용은 청구서에 따라 장면 총리실에서 지불해 주셨죠. 한 번에 5만 내지 10만 원 정도였든가 몰라. 국무위원들이 귀빈들을 초대하는데 빈객으로 오는 덜레스 미국 국무장관, 리지웨이 장군, 워커 장군, 밴 플리트 장군에 무초 미국 대사 등이 온 곳 같고, 그때 장면 총리와 무초 대사가 뜰 모퉁이 버드나무 밑에서 수군수군하는 모습을 보고 우린 전쟁이 멎고 통일이 되는 줄로만 알았지. 헬렌 김(김활란)이 외국인 대하는 매너 에티켓 등의 회원교양을 지도했고 나는 모닝캄(Morning Calm), 나라에 와 주셔서 반갑다는 두 마디 환영사만 했었지. 그리고 서툴러서 손님 구두를 밟는 가운데 사교댄스도 췄고 미인계도 썼지 뭐, 이 말은 쓰지 말아요. 그러나 낙랑을 통해 우린 값진 민간외교를 했다고 자부하고 있어요.
장영은, 『근대 여성 지식인의 자기서사 연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7, 94-95쪽.

진보언론인 미디어오늘에서도 김준혁이 제기한 논문에서 김활란의 인솔, 유흥이라는 단어는 언급되어 있지만 이것이 '성상납'이라는 명확하고, 명백한 기록이 없으므로 김준혁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봤다. #

다만 논문은 "그들[10]을 분류해 보면 첫째 고급장교를 상대로 파티장소에서 사교적인 교제 를 하여가며 실질적인 매음을 하는 고급 인텔리충과, 둘째로는 버젓하게 살림을 차리고 있는 층과, 그 다음이 소위 "홀 하우스"라고 하는 포주 밑에서 돈만 주면 아 무나 상대하는 중과, 끝으로 최전신지구에 방황하면서 닿는대로 기회있는대로 매음을 하는 유랑층 등 네 계급이다."라고도 서술하고 있으므로 '성을 포함한'의 내용의 해석은 다른 자료와 교차검증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최종고 교수는 모윤숙과 낙랑클럽의 활동을 "문학적 문화적 교류를 통해 외교를 펼쳤던 것"으로 파악한다고 했다. 개항 초기의 일본에서 여성을 동원해 서양인과 춤도 추고 접대도 하게 했던 것과는 달랐다는 것이다.

4.2.1. 반박

그러나 모윤숙이 낙랑클럽 회장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위 발언이 객관적인 사실을 밝혀 준다고 단정하기 어렵다. 모윤숙의 회고들은 자신에게 불리한 낙랑클럽 관련 사실들을 축소 및 은폐했다고 평가되며,[11] 위에서 주장한 낙랑클럽의 조직 시점도 사실과 다르다. 반면 1952년 외국인 종군기자가 취재한 기사[12]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우리들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지만 낙랑걸들은 그렇지 않다”고 위안부들은 비감한 표정으로 말한다.
이임하,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 『역사연구』 14, 2004, 113쪽.
여기서 말하는 위안부들은 물론 전쟁 당시 동원된 한국군 위안부이다. 당시 위안부들의 관점에서는 낙랑클럽의 활동에 본인들과 유사한 부분이 있었던 것이다.
부산 피난 시절에도 미군들을 상대로 접대행위를 계속했는데, 부산 주둔 미국의 한 관리는 이 클럽 회원들이 심지어 軍막사에까지 들어오고 있다고 전했다.
#
이러한 기록을 보았을 때, 낙랑클럽이 유흥업소와 유사한 집단으로서 기능했을 가능성은 배제하기 어렵다. 정확히는 모윤숙이 언급한 제독 부인, 사장 부인, 김활란 등은 정말 사교댄스와 파티 활동만 했을 개연성이 있지만, 젊은 장교와 기자들을 접대했다는 '젊고 아름다운 낙랑 걸들'의 활동은 이와는 뉘앙스가 다르다. 실제로 위의 회고에서 모윤숙 자신도 “미인계도 썼지 뭐”라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이처럼 당시 낙랑클럽에서 성(性)을 이용하여 접대활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이를 '위안', '성욕 위무', '성적 위계관계 수용', '성적 위안' 등으로 인식 및 평가한 연구들이 발표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위문은 금전이나 물품(편지 포함), 노력봉사 등을 통한 지원을 의미했고, 위안은 성(性)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를 가진 오락, 유흥의 제공을 의미했다. (…중략…) 그러나 일부의 여성지도자들은 이와 다른 형태의 활동인 외교미군(UN군) 장교들을 위안한다는 명목의 '파티 대행업'에 나섰다. 대통령을 비롯한 행정부 각료와 유력인사들의 절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파티대행업에 나선 여성지도자는 김활란모윤숙이었다. 이들은 각각 전시국민홍보외교동맹(이하 홍보외교동맹이라 약함)과 낙랑클럽을 조직하고 여학생 등을 동원하여 파티대행업에 나섰다.
이임하,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 『역사연구』 14, 2004, 109-110쪽.[13]
하지만 여성들의 '사교'는 여성들의 성을 대가로 한 이른바 성적 경제의 값비싼 대가에 다름 아니었다. 모윤숙이승만의 지시로 '낙랑클럽'이라는 여성 '사교' 모임을 결성하여, 미군정 고위관료들의 노고에 보답하는 시혜와 보은의 불평등하고 비대칭적인 국제정치질서의 섹슈얼한 양상에 복무했다. 외국 유학을 다녀온 아름다운 여성들로 영어를 구사할 줄 아는 '낙랑클럽'의 엘리트 여성들은 여성들 내부의 계급적 차이를 첨예화함은 물론 미군정 고위관료들의 고독과 성욕을 위무하는 '위안형' 주체로서 여성들 간의 내적 차이를 무화하는 이율배반적 측면 또한 갖고 있었다.
공임순, 「스캔들과 반공 : '여류' 명사 모윤숙의 친일과 반공의 이중주」, 『한국근대문학연구』 9(1), 2008, 190쪽.
이와 같은 대한여자청년단 활동과 낙랑클럽 활동은 모두 여성의 성(性)을 내세운 활동이었다. 이는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전쟁기 여성을 동원하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주로 구원의 손길을 제시하거나 위안을 담당하는 전통적 여성의 역할이 강화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즉 한국전쟁기 여성들은 병사들을 간호하고, 피 묻은 군복을 빨며, 주먹밥을 해 나르는가 하면, 병사들의 무훈과 승리를 염원하는 위문대를 만들고, 일선 병사의 노고를 위로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병사들을 성적으로 ‘위안’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배안숙, 『모윤숙(毛允淑)의 인식과 활동(1945-1953)』,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2, 39쪽.
또한 교양어학뿐만 아니라 몸매에 있어 매력이 있는 인물이 주빈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외교라는 것이 성적인 위계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민영, 「반공 국민의 회고담과 민족주의적 주체 구성의 자기 서사 - 모윤숙의 『회상의 창가에서』를 중심으로」, 『한국근대문학연구』 22(2), 2021, 262쪽.

5. 관련 문서




[1] 김시민은 1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2] 인도 대표 제논과의 관계가 대표적. 모윤숙도 인정했고 제논도 인정했다. 이걸 뉴라이트 계열 출판사인 기파랑 출판사에서는 우정을 통한 민간 외교로 묘사하기도 했지만 당사자인 모윤숙과 제논도 인정한 미인계다.[3] 적게 잡은 경우가 50명, 많이 잡은 경우는 최대 300명 이상. 당장 모윤숙의 말부터 논란이 있고 관련 글들마다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다.[4] 많은 경우는 이화여자대학교만 언급되는데 머릿수를 많이 잡는 경우에는 숙명여자대학교도 포함된다.[5] 당시 유명한 여류 문인으로, 낙랑클럽의 인사들과는 상당한 친분 관계가 있었다.[6] '월간중앙' 229호. 심각한 자료는 조중동 계열에서 많이 나왔다. 월간중앙도 그렇고 신동아 자료도 그렇다.[7] 낙랑 클럽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연구한 것은 다름아닌 뉴라이트다.[8] 이임하,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 『역사연구』 14, 2004, 107-148.[9] 이임하, 「한국전쟁과 여성성의 동원」, 『역사연구』 14, 2004, 116~117쪽[10] 양공주[11] 이민영, 「반공 국민의 회고담과 민족주의적 주체 구성의 자기 서사 - 모윤숙의 『회상의 창가에서』를 중심으로」, 『한국근대문학연구』 22(2), 2021, 275쪽.[12] 1952년 12월 24일에 발행된 미국 샌프란시스코 인근 데일리 팔로 알토 타임스의 기사. CIC 보고서에 인용된 자료이다.[13] 위에 서울신문과 여성신문에서 김준혁을 비판하며 인용한 그 논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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