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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농구인 김동광의 지도자 경력을 정리한 문서.2. 코치 시절
은퇴 후 1983년 월급 200만원의 파격적인 조건으로[1] 2년 9개월 동안 바레인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 1985년 바레인에서 계약이 끝나자마자 친정인 기업은행의 코치로 복귀하였다. 1987년 강호석 감독의 뒤를 이어 감독으로 승격하였다. 대기업팀들과의 힘든 스카웃 경쟁에서 나름대로 알짜배기들을 챙기면서 1992년 실업연맹전 우승도 일궈내는 등 감독으로서의 역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그러나 1993년 SBS 농구단이 창단되고 선배인 신동파 당시 SBS 감독의 부름을 받게 되는데, 이때 기업은행에서 강력하게 이적을 만류했지만 결국 김동광의 SBS행을 막지 못했다.
3. 감독 시절
3.1. SBS 1기 시절
1년 뒤 신동파 감독이 물러나자 SBS 감독을 이어서 하게 되었다. KBL 프로농구 출범과 함께 SBS 스타즈 초대 감독이 되었다. 자신을 보좌할 코치로 강정수 코치가 직접 보좌를 했다.이 당시 단신 기술형 외국인이었던 제럴드 워커와 함께했다.1997 원년 시즌 정규리그 2위와 4강 플레이오프 직행으로 선전했다. 하지만, SBS 구단은 우승 실패를 이유로 경질을 선언했고 강정수 코치는 SBS 스타즈 2대 감독으로 승진했다. 이 과정에서 특유의 드센 품성 탓에 총감독으로 물러나는 부침을 겪기도 했다. SBS 감독 퇴임 이후 1997 국가대표팀 코치로 활약하게 된다. ABC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정광석 감독[2]을 보좌한 코치로 한국농구를 28년만에 아시아 정상에 올려놓게 된다.[3]
3.2. 삼성 1기 시절
프로농구 출범 이후 최경덕 초대 감독과 김현준 코치의 감독 대행 시절의 뒤를 이어서 SBS 프로 초대 감독에서 물러난지 1년만에 삼성 프로 2대 감독으로 부임했다.1998 ~ 2004년까지 6년간 수원-서울 삼성 썬더스의 감독으로 재직하면서 좋은 성적을 기록했다. 1998-1999 시즌 자신을 보좌할 코칭스테프는 김현준 코치와 전창진 코치였다. 선수도
1999-2000 시즌을 앞두고 코치들이 바뀌었다. 전창진은 1년만에 삼성 코치직에서 잘린 뒤 나래 코치로 이적했고 김현준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새롭게 자신의 뒤를 받칠 코칭스테프로 안준호 코치와 이민형 코치가 새로 선임되었다. 그 중 이민형 코치는 김동광의 측근이다. 문경은과 주희정을 중심으로 하늘로 떠난 영웅에게 최선을 다하면서 김동광 감독과 2년 연속 KBL 플레이오프 진출을 하게 된다.
2000-2001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 선발을 잘하면서 최강삼성의 시대를 열게 된다.아티머스 맥클래리라는 올어라운드 포워드 겸 언더 센터와 함께 디펜스가 뛰어났던 무스타파 호프를 영입에 성공하게 되며 차민석(2021 드래프트 1순위)선수 등장 이전 유일의 1순위인 이규섭의 입단과 함께 높이와 전력보강에 성공했다. 포인트 가드 주희정-슈팅 가드 강혁-스몰 포워드 문경은-파워 포워드 아티머스 맥클래리-센터 무스타파 호프라는 정통 베스트 5를 시작으로 식스맨에 가드 김희선과 포워드 강병수와 이규섭 그리고 센터 박상관과 이창수까지 선수층도 좋아졌다.이 기세를 바탕으로 2000-2001 시즌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이후 4강 플레이오프에서 SBS 스타즈를 3승 1패로 창단 첫 KBL 파이널에 진출했고 2000-2001 KBL 파이널은 전자라이벌인 LG 세이커스와 붙게 되는데 전력에서 우위라는 평을 들었다.
2000-2001 KBL 파이널에서 4승 1패로 KBL 플레이오프 우승과 함께 삼성 유일의 KBL 통합우승을 이끌었다. 삼성은 KBL 출범 이후 첫 KBL 챔피언 트로피를 들어올렸고 마침내 농구명가의 천둥시대를 열였다.그리고, 당시 KBL의 서울 입성 규정 상 KBL 플레이오프 우승팀에 허락했는데 청주 연고의 SK 나이츠와 함께 서울 잠실의 한지붕 두가족 시대를 열게 된다. 하지만, 2001-2002 시즌 KBL 사상 첫 디펜딩 챔피언의 플레이오프 탈락의 시련을 당하게 된다. 이 몰락의 과정을 이렇게 나온다.
하지만 삼성시절에는 성과에 비해 저평가 받은 대표적인 감독인데, 프랜차이즈 스타와의 관계 조율에 실패하고 내친 일 때문에 김동광 감독의 인격을 비난하는 팬들도 많았다. 대표적인 예가 문경은을 팽하고 우지원을 데려왔던 일. 우지원이 먹튀 소리를 들을 정도로 못한 건 아니었지만 역시 문경은만한 활약은 하지 못해 득점력 저하를 불러왔고, 우지원을 데려온 이유를 수비강화라고 언플했지만 정작 우지원 역시 수비가 헬이라 별 차이는 없었다.
더군다나 수비를 중요시하고 기본을 강조하면서도 외국인 선수를 늘 단신조합으로 뽑아서 돌동광이라고 대차게 까이기도 했다. 항상 191cm-199cm 조합의 용병을 선호해서, 2m를 넘는 상대 장신 용병들에게 속절없이 털렸다. 이 때문에 외국인 선수 선발에 있어서 안목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평을 받았으며, 단신덕후라는 비아냥도 들었다. 성적 자체는 좋았지만 이런 점들이 늘 중요한 순간마다 발목을 잡았다.
하지만 훗날 문경은과의 일화에 대해 2022년 2월 1일 해명하기를 언론에 알려진것처럼 문경은의 수비가 떨어지고 자신이 싫어해서 우지원과 바꿨다는건 절대 사실이 아니며 우지원이 문경은 보다 수비가 약간 나았지만 얼마나 차이가 났겠냐면서 오히려 자신은 문경은의 트레이드를 강력히 반대했으며 문경은이 오히려 자신에게 트레이드를 강력히 요청했으며 심지어 구단 여행때도 계속 트레이드 시켜줄것을 간청했다고 한다. 자신이 봤을때는 다른팀 쪽에서 부추긴거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는데 진실은 감동광 & 문경은 둘만 알듯. 관련기사
2002-2003 시즌을 앞두고 서울 SK 나이츠에서 FA가 된 서장훈을 영입하면서 다시한번 정상도전을 했지만 실패를 하게 된다.주희정의 속도와 서장훈의 높이는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조직력에서 기복을 보였다. 결과는 2002-2003 시즌 6강 플레이오프에서 매각설에 시달렸던 4위팀 여수 코리아텐더 프루미에 2경기 모두 패하며 탈락했고 2003-2004 시즌에는 5위로 마감했다. 6강 플레이오프에서 4위팀 전자랜드 블랙슬래머에 1승 2패로 패하며 6년간 삼성 썬더스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 한은 결국 00-01 통합우승 시절 코치였던 삼성맨인 안준호가 후임 감독으로 부임해서 2005-2006 플레이오프 7전 전승 우승으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그것도 주희정을 포기하면서 얻은 성과. 자세한 건 SBS 2기-KT&G 시절로 대신.
3.3. SBS 2기-KT&G 시절
결국 삼성 감독에서 물러나게 되었지만, 곧바로 2004년 SBS 스타즈의 감독으로 복귀했다.자신을 도울 코치들은 SBS 프랜차이저이자 안양 성골인 이상범 코치를 유지하면서 SBS에서 연수를 보낸 김동광의 측근 중 하나인 김상식 코치를 수석코치로 두게 된다.
시즌 전 SBS는 전 두 시즌과 달리 상위권 후보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 토종 선수로 포인트 가드 이정석을 시작으로 슈터에 쌍포 양희승과 김성철이 있었으며, 외국인 조 번과 주니어 버로 조합이 좋았다.
하지만 전자랜드와 삼성, 모비스에 연달아 지면서 개막 3연패를 한 데 이어 1라운드에서 3승 6패, 2라운드까지 7승 11패에 그치며 오히려 꼴찌로 추락했다. 지난 2년간 괴롭혔던 뒷심 부족 문제, 큰 기대를 모았던 이정석이 부상으로 1라운드를 나오지 못한 것이 치명타였다. 기대를 모았던 쌍포 마저 엇박자를 나타내며 시너지를 전혀 내지 못했다. 여기에 주니어 버로는 발목 기형으로 인해 제 모습을 보이지 못하며 퇴출 일보 직전까지 몰렸다. 하지만 시즌 중반 이후에는 양희승과 김성철의 쌍포, 조 번의 꾸준한 활약으로 중위권으로 올라서며 6강권 경기력을 이어갔다.
하지만, 1월 중순 조 번이 원주 TG 삼보와의 3차전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당하며 팀을 이탈했고, 무릎 내측 인대 파열로 6-8주 결장이 확정되며 시즌-아웃을 당했다. 그나마 당시 1월 이달의 선수에 선정된 양희승 포함 주니어 버로 등 토종 선수들의 분전으로 중위권은 유지했지만, 올스타 브레이크 직전 3연패를 당하며 18승 20패로 6위로 추락하며 위기를 맞이했다. 자칫 3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탈락할 위기였다.
그러나 번의 부상은 신의 한 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주인공은 바로 썰렁했던 안양체육관을 매진으로 만든 단테 존스였다.
2005년 3월 1일 SBS가 최다 연승 신기록 (12연승)을 세운 뒤의 단체 사진 |
6강 언저리에 있다가 교체한 외국인 선수 단테 존스의 신들린 활약을 앞세워 15연승을 달리면서 정규시즌 3위를 기록하는 기염을 토했다. 15연승 이후 마지막 홈경기에서 LG에게 패배하면서 성적은 33승 21패. 원년 시즌인 97년 이후 최고 성적에 해당된다. 15연승 당시 대구 오리온스에 크게 이기고 있던 도중 여유있게 벤치에 앉아 코치들과 웃으며 노가리를 까던 캡처 사진[4] 덕에 광간지라는 별명을 얻기도. 6깅 PO에서 오리온스를 가볍게 꺾었으나 4강 PO에서는 전주 KCC 이지스에게 1승 3패로 졌다. 그럼에도 김동광은 KBL 최다 연승 신기록을 세우면서 성공적인 복귀를 해냈다.
2년차를 맞이한 2005-06시즌. 이정석을 트레이드로 보내는 대신 삼성 시절부터 제자나 다름이 없는 주희정을 영입하며 런앤건을 꿈꾸기 시작했다. 구단도 SBS는 매각되었고 담배회사인 KT&G로 인수되었다. 팀 명칭은 안양 KT&G 카이츠였다. 외국인도 높이 보강을 위해 주니어 버로를 보내고[5] 전자랜드에서 활약한 정통 센터로 타워 빅맨인 가이 루커를 영입했다. 특히 단테 신드롬을 일으킨 단테 존스의 2년차도 기대되었으며, 쌍포 양희승-김성철도 건재했다. 창단 이래 첫 우승, 심지어 15연승 당시의 경기력만 재현된다면 사상 첫 9할 승률 1위까지 기대했을 정도로 기대감이 높았다.
하지만 2년차 시즌은 좋지 못했다. 양희승-김성철을 포함해 선수들의 잦은 부상이 이어졌으며, 단테 존스는 집중견제와 상대 외국인 선수들의 높아진 경쟁력 속에서 잦은 다혈질과 개인플레이로 고전했다. 여기에 주니어 버로가 나간 센터 자리의 부재도 컸다. 가이 루크-허브 래미쟈나-안토니오 키칭스 또한 버로보다 한참 아래의 기량으로 단테의 의존도를 가중시켰다. 이로인해 시즌 중반에는 9위까지 추락하면서 플레이오프에서 멀어지는 듯 했다. 다행히 후반기에는 전력을 추스르며 단테가 예전의 폭발적인 득점력을 다시 발휘했고, 국내 선수들도 점차 정상 컨디션을 찾아가며 5라운드 부터는 다시 무서운 상승세를 타며 플레이오프 경쟁에 다시 참여했다. 그러나 3월 22일 대구 오리온스와의 경기에서 83-98 완패를 당하며 사실상 플레이오프 탈락이 확정됐고, 결국 5할 승률을 기록하고도 당시에는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탈락하는 아픔을 겪었다. 전체적으로는 높아진 다른 팀들의 수준, 잦은 부상 악재 속에서도 선전했지만 초반 부진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 해 치열한 6강 PO 경쟁 때문에 7위로 밀리면서 PO 탈락했다. [6]
문제는 이 2차 SBS-KT&G 시절은 단테 존스의 의존도가 너무 컸다는 점이었다. 김성철 - 양희승이라는 쌍포와 주희정이라는 리딩 가드가 있었지만, 팀의 핵심은 단테 존스였고, 존스에 대한 파해법이 나오면서 성적이 하락한 격이다.
차기 시즌에도 전력보강 대신 전력유지를 했지만 그건 독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전과 달리 명백히 약체로 평가받았기 때문. 설상가상, 쌍포였던 김성철이 인천 전자랜드로 이적하며 전력이 더욱 약해졌다. 결국 양희승마저 부진에 빠지며 극단적인 단테 존스의 의존도가 더욱 심해졌고, 결국 2006-07 시즌 초반 6승 10패에 그치자 전격적으로 해임되었다.
후임으로는 김상식 대행을 거쳐 유도훈 감독을 선임하면서 돌풍을 일으키면서 6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차기 시즌이었던 2007-2008 시즌에도 정규리그 4위와 플레이오프 4강까지 돌풍이 이어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유도훈 감독마저 구단과의 불화 끝에 2008-2009 시즌 개막이 코앞에 다가왔는데 자진사퇴를 하게 된다. 결국 SBS 시절부터 성골이었던 이상범 코치가 09-10 시즌 감독대행을 거쳐 오늘의 KGC인삼공사로 바뀐 10-11 시즌부터 정식 감독이 되었다. 그는 11-12 시즌 SBS 시절부터 없었던 KBL 챔피언의 한을 푼 스페셜 원이 되었다.
물론 백수로 논 것은 아니다. KBL에서 행정 일을 보면서 귀화혼혈선수의 영입과 함께 리그 수준을 높이면서 SBS SPORTS와 방송해설로서도 코트가 아닌 야인으로 지내게 된다. 그리고 2011년 MBC SPORTS+ 해설위원과 2012년 서울 삼성 썬더스 감독으로 복귀할 때까지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특히 삼성과 KT&G-KGC에 대한 해설은 애정을 넘어 열정이었다.[7]
3.4. 삼성 2기 시절
3.4.1. 2012 ~ 2013 시즌
2012년을 앞두고 2006년 안양 KT&G 카이츠 감독 경질된 이후 6년만에 KBL 감독으로 돌아왔다. 60세가 넘은 나이었다. 김상준 감독의 성적부진으로 인한 전격 경질 이후 8년만의 컴백이었다. 서울 삼성 썬더스의 제5대 감독으로 복귀했다.
당시 김동광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젊은 사람들은 되고, 저는 안 됩니까? 나이가 많다고 생각해 마음을 비웠던 상태였다. 농구 감독은 나이를 떠나 열정을 갖고 선수들과 어울리며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갖고 있는 지식은 현직 감독들에 비해 절대 뒤쳐지지 않는다. 내가 젊은 감독들에게 배울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실제로 11-12 시즌 모교 후배인 김진 감독이 창원 LG 세이커스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최고참이 되었는데 그만큼 KBL 프런트 농구의 문제점도 드러낸 상태였다. 13-14 시즌을 앞두고
창단 최저 성적을 냈던 김상준 감독을 구단에 이어 삼성스포츠단 차원에서 전격 경질한 이후 서울 삼성 썬더스의 감독으로 전격 부임하면서 다시 현장으로 돌아왔다. 김동광의 측근 중 하나인 김상식 전 대구 오리온스 감독을 수석코치로 같이 부임했다.[8]
하지만, 의문이 나왔는데 삼성에서 은퇴했던 이상민이 코치로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민이 경험을 쌓아서 감독으로 갈때까지 시간을 벌기위한 몸빵용 감독이라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딱히 인연이 없는 이상민을[9] 김동광 감독 본인이 선임했을 리는 없고, 프런트가 꼽아놓은거 같은 구도라서 결과가 어떻게 될지 기대 반 우려 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논란에 관계없이 전력보강 구상을 확실히 밝히는 등 의욕적으로 임하던 모습은 팬들에게 잘 어필이 되었다.
2012-2013 시즌 홈 개막전에서 승리하면서 전설의 명장이 살아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원주 동부 프로미와 부산 kt 소닉붐에서 팀과 잘 섞이지 못해서 계륵 취급을 받던 브랜든 보우먼과 대리언 타운스를 각각 트레이드로 데려와서 팀에 완벽히 적응시키면서 재평가를 받았다. 2000년대 초에 용병을 갈구던 모습과는 달리 그 둘의 기를 잘 살려주는점이 높게 평가받았다. 높이가 필요할 땐 205cm, 125kg의 거구 타운스로 대처하고 속도와 득점이 필요할 땐 빠른 보우먼을 기용해서 재미를 봤다. 더군다나 보우먼의 경우 원주 동부에서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하고 강동희 감독에게 이리저리 까이는 등 고생하다가 삼성 이적후 활기있는 모습을 보여서 죽은 용병도 살린다는 드립이 나왔다.
또한 브랜든 보우먼이 이적 후 원 소속팀 동부와의 경기에서 복수심에 불타올라 노마크 상태에서 필살 5점짜리 360도 계란후라이 덩크!를 구사하다 실패한 뒤 이승준에게 인유어페이스 덩크로 역관광당했음에도 오히려 보우먼을 격려해주는 모습에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보우먼을 자주 갈비집에 데려갔었다는...
중간에 8연패를 포함하여 4라운드 1승 8패 9위까지 내려갔지만, 다른 팀들 역시 안 좋은 경기력을 보여줘서 완전히 경쟁에 밀리지는 않았다.
이 시절 경희대학교 10학번 트리오[10]인 김종규, 김민구, 두경민을 노리기 위해 쉬어가는 모습을 보였던 허재의 KCC와 전창진의 KT 그리고 강동희의 동부가 탱킹전에 참여했고 여기에 자신의 대학 후배인 김진의 LG도 가세하는 모습에 최고참 감독으로서 쓴소리를 했고 인터뷰에서 "질 거면 우리한테 승수를 내줘라. 우린 플레이오프에 가겠다"며 차라리 자신이 봄농구를 올라가기 위해 배수의 진을 쳤는데 성공하게 된다.
3월 15일에 KCC를 꺾고 2년만에 6강 플레이오프에 팀을 진출시키자 농구팬들은 김상준 전 감독이 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추락시켜 놓은 97 시즌 원년 이후 15년뒤인 지난 11-12 시즌 꼴찌팀을 6강으로 이끈 김동광 감독님에게 찬사를 보냈다.
3.4.2. 2013 ~ 2014 시즌
2013년 9월 30일, 신인 드래프트에서 1.5%의 확률을 뚫고 4순위 지명권을 따내 고려대 가드 박재현을 지명했다.#1 이후 원주 동부 프로미와 박병우 - 김명훈 트레이드를 성사시키면서 빅맨 보강을 하였다. 사실은 2년간 임대형식으로 트레이드로, 2년이 지나면 소속팀으로 복귀할 수도 아니면 완전히 바꿀 수도 있다. #2
시즌 초반에는 마이클 더니건이 2경기만에 부상으로 빠지며 8연패를 당하는 등 위기를 맞았지만, 더니건이 돌아오면서 골밑과 수비가 보강되면서 중위권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이후 팀이 다시 연패에 빠지면서 슬슬 비판이 나오고 있다. 특히 트레이드 부분에서 굳이 마이클 더니건을 내주고 허버트 힐을 데려온 것이나, 박재현을 지명으로 인해 빅맨 보강을 위해 박병우를 내주고 김명훈을 영입한 부분, 김동우 영입등으로 선수 보강을 했지만, 뚜렷한 효과를 내지 못한 부분을 비판받았다.
그런데 시즌 중이던 2014년 1월 27일, 팀의 성적 부진에 대해 책임을 지고 감독직 자진 사퇴를 선언했고, 삼성 구단은 00-01 통합우승 시절의 감독이라는 공을 고려했는지 총감독 직함을 주며 계약기간을 채웠다. #3 잔여 시즌은 김상식 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이상민 코치와 함께 치른다고 한다. 팬들은 마저 시즌 치르고 떠나라며 아쉬워하고 있다. 결정적으로 드래프트 때 좋은 선수 잡겠답시고 경기를 개판으로 치른 몇몇 팀들과 달리 끝까지 열심히 했던지라 더 아쉬움이 남는다는 평가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위에 나온 트레이드 포함 신인 육성 능력에서는 비판이 뜨고 있다.
믿거고의 모교 제자인 박재현을 2013 KBL 드래프트에서 지명하면서 박병우를 보낸 부분이 포함된 트레이드들의 실패, 김상준 전 감독의 제자인 포워드 임동섭을 잘 뽑았지만 원래 포지션인 포워드가 아닌 억지로 빅맨으로 전향시켜 발목 부상을 입게 하는 바람에 거진 2시즌을 날려먹은 일, 하위 픽임에도 포텐이 있던 이관희를 올드 스쿨 타입이었는지 자기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고 벤치에 짱박고 그 자리를 황진원과 김승현 같은 노장들에게 준 것 때문에 안 좋은 쪽으로 재평가도 이루어지면서 삼성 암흑기의 또 다른 주역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사실 김동광 감독 입장에서도 세대차이기는 하지만, 결국 믿거고의 저주를 끊지는 못했다. 추가로 삼성은 전자 라이벌인 LG와 함께 신인 육성을 그렇게 잘 하는 팀이 아니다.
현재까지 흑역사 기간이 이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6강 플레이오프 진출은 해 놔서 비밀번호가 될 뻔할 걸 도중에 끊어놓은 덕에 삼성 팬들의 평가는 좋은 편이고, 또한 KBL 원년 시절부터 본 농빠들만 아니라 농구인들 사이에서도 평판은 매우 좋다.
결과론으로 김동광 감독이 보여준 수비와 열정은 대다수 농구 팬들에게 최고로 기억되고 있으니, 이 점은 충분히 박수를 받을 만한 일이다.
3.5. 대한민국 농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5 ~ 2016)
삼성 감독 재복귀 이전 방송해설을 했던 MBC SPORTS + 방송해설위원을 재개하는 도중 2015년 6월 29일, 남자 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되었다.그런데 막장 농구협회가 명색이 국가대표팀인데 통역도 매니저도 전력분석관도 없이 감독 한명만 덜렁 선임해놓고, 지원은 나몰라라 하고 있어서 농구팬들의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매니저도 전력분석관도 없는 김동광호, 불안하다 관련 썰
이렇듯 제대로 된 지원도 없이 선수들이 유니폼을 빨고 제대로 식사도 지원 못해주는 상황에서도 괜찮은 경기력을 보이며 고군분투 했으나, 중국에게 역전패 당하고 8강에서 이란을 만나 패하며 목표를 이루진 못했다. 국가대표의 중심으로 떠오른 이승현과 가드로의 가능성을 보여준 최준용이 그나마 수확.[11]
삼성 썬더스 감독 말년처럼 비극의 성적이었지만 최선을 다하면서 농구인들과 농구팬들은 그나마 위로의 박수를 보냈다. 후임이 부친대표팀을 구성했던 걸 보면...
그 시절 고려대 농구부 출신은 이승현과 강상재 그리고 문성곤을 지도했다. 3 선수 모두 이민형 감독의 제자들로 KBL에서 선전 또는 성과를 내고 있다. 결국 모교의 눈과 KBL의 눈은 같았다. 이들을 선발하면서 향후 김상식 코치가 허재를 거쳐 대표팀 감독으로 승진할 때 세대교체의 유산을 남겼다.
방송해설에서 보았던 농구지식과 농구열정은 현재 KBL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3.6. 코칭 스타일
전형적인 올드 스쿨 타입이다. NBA로 보면 LA 레이커스와 마이애미 히트의 전설적인 명장인 팻 라일리를 보면 연상하기 쉽다. 같은 가드 출신의 최인선 감독은 전술과 전략이 해박하면서 미국농구와 한국농구 사이의 해법을 잘 제시했으며 선수를 살린 경우라면, 김동광 감독의 경우 공격 전술과 전략보다 수비 전술과 전략에서는 역대급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SBS 시절 이상범과 양희승 그리고 삼성 시절 강혁과 이규섭을 혹독하게 지도했다.3.6.1. 장점
김동광 감독의 최고의 장점은 수비전술이다. 모교 제자이자 전자라이벌인 창원 LG 세이커스의 이충희 초대 감독처럼 맨투맨 디펜스와 더블팀 디펜스를 교란하게 활용했다. 높이와 힘이 있는 빅맨들을 중심으로 한 디펜스는 역대급 평가를 받고 있다..[12]특히 속도가 빠른 편이었던 주희정의 압박수비를 잘 활용했다. 또한 삼성의 성골인 강혁은 투맨 게임 마스터지만 맨투맨 디펜스는 물론이고 존 디펜스도 최고의 수준이었다. 투 가드 라인의 디펜스가 최고면 그야말로 상대팀은
공격전술의 경우, 주로 투맨 게임에서 리딩 가드 또는 세컨 가드를 항상 강조하면서 픽앤롤과 픽앤팝이라는 전술 또한 간단명료한 것을 선호했고, 외국인 선수에게는 오펜스 때 아웃사이드보다 포스트(즉 인사이드)를 더 강조했다. 특히 아티머스 맥클래리와 무스타파 호프로 00-01 시즌 삼성 역사상 유일의 KBL 통합우승을 달성했고 주니어 버로를 통해 04-05 SBS 12연승 돌풍을 일으켜 파워를 바탕으로 한 포스트 플레이를 강하게 하면서 색깔이 있는 성적을 냈다.
삼성 감독 1기 시절에는 팀에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문경은과 김승기를 트레이드로 보낸 이후 김희선과 그리고 트레이드로 데리고 온 주희정과 드래프트로 뽑은 강혁으로 이어지는 가드 라인 재편에 성공함을 넘어 드래프트로 뽑은 이규섭의 멘토로 강병수를 데리고 오면서 로스터 밸런스를 잡은 점이다.
SBS 감독 2기 및 KT&G 감독 시절에는 이미 LG 창단멤버였으나 자리를 잡지 못했던 양희승을 김성철과 쌍포로 구축한 점을 넘어 삼성에서 키웠던 주희정을 데리고 오면서 안양발 런앤건을 만들어냈다.
3.6.2. 단점
강성인 성격으로 인해 선수들과 불필요한 기싸움과 오해가 많았다. 삼성의 스타로 남지 못한 문경은과 구단이 또 하나의 우승을 위해 데리고 온 서장훈과의 관계는 썩 좋지 못했으며 SBS 감독 시절에는 당시 신인이자 막내였던 이정석 또한 김동광의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해 떠나야 했다. 공교롭게도 이정석은 삼성에서 이적한 후 05-06 플레이오프 7전 전승 우승 멤버가 되었다. 당시 감독도 자기 라인이 아닌 삼성 성골이었던 코치 출신의 안준호였다.또한 김동광 감독은 3점슛에 의존하는 농구를 싫어했는데, SBS 2기 시절 단테 존스의 화려한 3점과 덩크에 열광했던 팬들이 많았지만 정작 본인이 그로 인해 비극이 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13] 그 시절 김동광 감독은 같은 슈터인 양희승과 김성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코비 브라이언트 모드로 혼자 북치고 장구를 쳤던 단테 존스를 극도로 싫어했다. 05-06 시즌 이후 FA로 풀린 김성철을 잃은 이후 이 현상이 극심했는데 결국 이로 인해 프런트와의 갈등으로 06-07 시즌 6승 10패로 16경기만에 경질되었다.
3.7. 통산 감독 성적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정규시즌 | 플레이오프 | |
1997 | 안양 SBS 스타즈 | 21 | 14 | 7 | 2위 | 4강 PO | |
<rowcolor=#2a52be> 통산 | 21 | 14 | 7 | 0.667 | -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정규시즌 | 플레이오프 | |
1998-99 | 수원/서울 삼성 썬더스 | 45 | 25 | 20 | 6위 | 4강 PO | |
1999-00 | 45 | 23 | 22 | 3위 | 4강 PO | ||
2000-01 | 45 | 34 | 11 | 1위 | 우승 | ||
2001-02 | 54 | 24 | 30 | 8위 | - | ||
2002-03 | 54 | 28 | 26 | 5위 | 6강 PO | ||
2003-04 | 54 | 28 | 26 | 5위 | 6강 PO | ||
<rowcolor=#074ca1> 통산 | 297 | 162 | 134 | 0.545 | V1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정규시즌 | 플레이오프 | |
2004-05 | 안양 SBS 스타즈-KT&G 카이츠 | 54 | 33 | 21 | 3위 | 4강 PO | |
2005-06 | 54 | 27 | 27 | 7위 | - | ||
2006-07 | 16[14] | 6 | 10 | - | - | ||
<rowcolor=#062a78> 통산 | 124 | 66 | 58 | 0.532 | -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승 | 패 | 정규시즌 | 플레이오프 | |
2012-13 | 서울 삼성 썬더스 | 54 | 22 | 32 | 6위 | 6강 PO | |
2013-14 | 39 | 14 | 25 | 8위[15] | - | ||
<rowcolor=#074ca1> 통산 | 93 | 36 | 57 | 0.387 | - | ||
<rowcolor=#373a3c> 총계 | 535 | 278 | 257 | 0.520 | V1 |
3.8. 100승 단위 달성 경기
소속팀 | 시즌 | 승리 | 상대팀 | 일자 | 경기장 |
수원 삼성 썬더스 | 2000-01 | 100승 | 부산 기아 엔터프라이즈 | 2001년 2월 22일 | 수원실내체육관 |
안양 SBS 스타즈 | 2004-05 | 200승 | 울산 모비스 피버스 | 2005년 2월 16일 | 안양실내체육관 |
[1] 1983년 당시 월급 200만원(연봉 환산시 2400만원)은 상당히 파격적인 조건이었는데 이 돈이면 서울 강남에 35평짜리 아파트 한 채를 너끈히 살 수 있던 금액이었다. 더구나 이 당시 직장인들의 평균 월급이 30~40만원 수준인 점을 고려하면 한국 직장인 평균보다 최소 6배 이상 많은 금액의 파격 대우를 받았다.[2] 고려대 대선배로 슈터였으며 라이벌 현대에서 선수와 감독을 했다. 2012년에 별세했다.[3] 이 당시 중국 선수들이 외국에서 단체로 병에 걸려와 컨디션이 극악이었다.[4] 완전히 굳은 표정으로 코트를 바라보던 김진 감독과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5] 당시 기사에 의하면, 단테와 함께 재계약을 하려던 버로가 재계약에 미동적인 태도를 보이며 재계약에 실패했다는 후문이 있다.[6] 당시 허재의 KCC와 김진의 오리온스 그리고 신선우가 부임한 LG와 정규리그 54게임 기준 52게임까지 순위를 알 수 없었다. 결과는 KCC 5위, 오리온스 6위, KT&G 7위, LG 8위 그리고 SK는 9위였다. 그 중 LG와 SK는 우승후보로 평가받았는데 충격과도 같았다.[7] 그도 그럴것이 삼성과 KGC에서 가장 오랜 감독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팀의 특성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셈이다.[8] 김동광의 측근은 김상식 이외에 1기 시절 임정명과 이민형이 있었다. 그 중 이민형은 코치로서 한 때 삼성에서 00-01 통합우승을 함께 했다. 하지만 모교인 고려대학교 농구부의 감독직 재임으로 인해 이번에는 함께하지는 못했다. 한 때, 모교 후배인 강을준의 수석코치직이 나왔지만 SBS 스타즈 출신의 김상식으로 회선했다.[9] 김동광과 이상민은 초중고대, 그리고 프로팀까지 전혀 접점이 없다. 학연도 아니고 지도자와 선수로 같은 팀에서 활약한 적도 없다. 반대로 김상식의 경우 기업은행, SBS에서 감독과 선수로 함께 했고, 김상식이 은퇴하자 김동광이 직접 팀에 건의해서 해외 연수까지 보내준 사이다.[10] 쉽게 말하면 경희대 3인방[11] 방열 회장이 유재학을 이뻐했던 댓가라는 비판이 있기도 했다.[12] 심지어 외국인 선수들에게 직접 영어로 토킹하면서도 디펜스는 항상 빠지지 않는다.[13] 사실 김동광 감독은 속공과 3점은 살리지만 자신은 확률높은 셋 오펜스(지공)과 얼리 오펜스(지공 속 속공)를 강조한다.[14] 시즌 도중 경질[15] 중도사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