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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열(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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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감독
(1982 뉴델리 AG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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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농구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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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역대 이름 재임 기간
초대 이묘묵 1945년 12월 19일 ~ 1952년 2월 7일
2대
3대
4대 임봉순 1952년 7월 ~ 1956년 2월
5대
6대 갈홍기 1956년 2월 ~ 1957년 4월
7대 임봉순 1957년 4월 ~ 1961년 7월 14일
8대
9대
10대 박영준 1961년 7월 15일 ~ 1963년 1월
11대 박진석 1963년 1월 ~ 1964년 4월
12대 김창규 1964년 4월 ~ 1964년 11월
13대 이병희 1964년 11월 ~ 1980년 9월
14대
15대
16대
17대
18대
19대
20대 이동찬 1980년 9월 ~ 1983년 1월 24일
21대 서성환 1983년 1월 25일 ~ 1985년 9월
22대 김상하 1985년 9월 3일 ~ 1997년 2월
23대
24대
25대
26대 최헌열 1997년 2월 ~ 1999년 2월
27대 이종완 1999년 2월 ~ 2001년 7월
28대
29대 홍성범 2001년 11월 23일 ~ 2004년 3월 23일
30대 이종걸 2004년 5월 6일 ~ 2013년 2월
31대
32대 방열 2013년 2월 ~ 2021년 1월
33대
34대 권혁운 2021년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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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농구 감독
파일:방열 농구인 프로필.jpg
방열
方烈
<colbgcolor=#eeeeee> 출생 1941년 10월 10일 ([age(1941-10-10)]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학력 경복중학교 (졸업)
경복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 / 학사)
연세대학교 체육교육학
한국체육대학교 (체육학 / 박사)
지도자 조흥은행 여자 농구단 감독 (1968~1973)
쿠웨이트 국가대표팀 감독 (1974~1977)
현대 농구단 코치 및 감독 (1978~1986)
뉴델리 아시안 게임 농구 감독 (1982)
기아자동차 농구단 감독 (1986~1990)
1988 서울 올림픽 농구 감독 (1988)
기아자동차 농구단 총감독 (1990)
행정 한국실업농구연맹 부회장 (1985)
대한농구협회 부회장 (1993)
세계농구코치협회(WABC) 아시아 지역 회장 (1998)
경원대학교 사회체육대학원 원장 (2003)
대한체육회 이사 (2004)
경원대학교 생활과학대학 사회체육학과 교수 (1993~2007)
대한체육회 KOC위원 (2021)
건동대학교 총장 (2010~2013)
한국여자농구연맹 개혁위원회 위원장 (2012)
대한농구협회 회장 (2013~2021)

1. 개요2. 경력
2.1. 선수 경력2.2. 지도자 경력2.3. 교육자 및 해설자2.4. 행정가
3. 기타4. 저서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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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농구인. 고향은 서울 종로다.

대한민국농구협회의 회장을 역임했다.

농구대잔치 초창기 시절 현대전자를 강호로 이끌었고 기아자동차 초대 감독으로 이적한 후 기아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명감독이며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에서 남자 농구 대표팀 감독을 맡아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키는 182cm 내외로 강동희보다 약간 크고 허재의 눈썹 바로 위 높이까지 키가 온다.#

2. 경력

2.1. 선수 경력

경복중 1학년 때 야구부였지만, 농구코트 청소가 싫었던 농구부 선배가 학교 모자를 뺏어간 뒤 농구 코트로 데리고 갔고, 청소하면 돌려주겠다고 하면서 농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경복중과 경복고를 거치면서 농구를 계속했고, 연세대학교 입학 후에는 아예 국가대표가 되면서 완전한 농구인의 길로 들었다. 그러나 부상과 집안 형편으로 인해 선수 생활을 오래 하지는 못했다.

2.2. 지도자 경력

결국 27세의 나이로 조흥은행 여자 농구단 코치가 되면서 지도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여자 농구 무대에서 조흥은행을 잘 조련하면서 명성을 얻은 후, 쿠웨이트 농구대표팀 코치가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78년 현대전자가 농구단을 만들 때, 코치 자리를 맡으면서 남자 농구 지도자로 데뷔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의 감독 자리를 맡으면서 삼성과 라이벌을 형성하면서 지도자로서 본격적인 명성을 얻었다. 당시로서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지도 방법과 끊임없는 연구 때문에 따르는 후배가 많은 편이었고, 그 결실이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남자 농구 금메달이었다.

한창 현대의 감독으로 재직하다가 1986년 기아자동차 농구단의 창단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엄청난 금액을 받았다는 설도 있지만, 일단 본인은 신생팀이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명분에 끌렸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는 한다. 기아자동차를 조련하면서 농구대잔치 5연패를 이끌고, 1988 서울 올림픽 국가대표팀 감독도 맡는 등 지도자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올림픽 당시 개최국으로 예선 없이 본선에 자동 진출한 상황에서, 방열 감독은 토너먼트 8강 진출을 목표로 했으나 실패하였다. 순위결정전을 거친 최종성적은 9위.

그러나 연세대 출신인 방열이 연세대 출신의 유재학, 정덕화를 끼고 돈다는 오해를 사면서 기아자동차 내부의 연세대 출신 vs 중앙대 출신의 갈등이 터지고 말았고, 결국 방열은 이 사태로 환멸을 느끼고 1992년을 끝으로 지도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말았다.[1] 후임 감독에는 최인선이 임명되었다. 이 탓에 시간이 흐른 뒤 다른 중앙대 출신 기아 선수들과의 관계는 그럭저럭 양호해진 편이지만, 항명의 주동자로 지목되던 허재와는 여전히 껄끄러운 편이라고 한다.[2]

2.3. 교육자 및 해설자

1993년부터 경원대학교 교수 자리를 맡은 이후, 2007년 정년을 맞이할 때까지 경원대에서 교수 자리를 맡으면서 농구인에서 학자로 변신했다.

코치협회를 설립해서 활동했지만 여러 분란에 휘말리면서 사라졌고, 농구대잔치의 기획이나 프로 출범에 대해서 지지하는 등 행정 쪽에서도 비교적 두각을 나타낸 편이었다. 특히 농구에 관해서는 여러 외국 서적을 번역하거나 훈련 방법의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그 결과로 농구에 대한 많은 학술서를 쓰면서 농구 계의 학술적인 업적에 큰 기여를 했다. 여러 공헌 때문에 농구계에서의 신망도 두텁고, 교육자로서도 비교적 신망이 두텁다고 한다.

여러 농구계 및 체육학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서인지 2010년 건동대학교의 총장 자리를 맡아 체육계 출신으로는 유일무이한 대학 총장에 올랐다만, 해당 대학이 부실대학으로 선정되고 스스로 폐교하는 바람에 흑역사가 되었다.

교수직 활동 와중인 1990년대에 MBC에서 농구 해설위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2.4. 행정가

20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농구 인기 하락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던 방열은 2013년 대한농구협회 회장 선거에 출마해서 현직 회장이자 국회의원인 이종걸, 한국농구연맹 총재이자 역시 국회의원인 한선교를 모두 제치고 회장에 당선되었다. 체육인이 정치인을 경선에서 누르고 경기단체 회장에 오른 것은 대단히 이례적인 사례이다. 그만큼 방열 회장의 인망이 두텁다는 이야기. 그런데... 당장 2014 농구월드컵 조추첨에 아무도 보내지 않았다. 이로써 한국은 농구월드컵 조 추첨식에 참석하지 않은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게다가 2014년 농구월드컵과 아시안게임 준비에 한창이던 국가 대표팀 로스터를 자신이 기획한 대학생 대회의 흥행을 위해 차출 불가 원칙을 깨고 차출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준비했으나 대실패. 2015년 FIBA 아시아챔피언십의 행보는 그야말로 가관, 앞당겨진 시즌을 치러야 하는 KBL의 감독인 유재학과 유도훈을 감독 후보로 선발하고, (당연히)이 두 사람이 거부의사를 보내자 공개모집을 하고도 지원자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서 겨우겨우 김동광 감독을 선임했다. 대표팀 지원은 눈물나는 수준, 예산 부족으로 매니저와 통역 담당을 뽑지 못해서 매니저와 통역 업무 모두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채웠으며, 대표팀의 훈련 상대는 대학교팀에 대표팀 인력 몇을 참가시키는 주먹구구로 치러졌다.

유니폼조차 제대로 지원이 되지않아 작년에 썼던 유니폼을 입어야 했다. 그리고 2m이상 선수는 비즈니스석에 태워보내는 것이 규정인데, 2m가 넘는 최준용의 키를 199로 처리해 이코노미석에 태워 보내는가 하면, 대표팀 선수들의 경기수당을 12만원에서 6만원으로 깎았고, 호텔의 세탁 서비스 비용을 주지못해 막내급 선수들이 욕조에 세제를 풀어서 빨래를 해야했다. 중국 음식이 입맛에 맞지않아 대표팀은 부랴부랴 인근 한식당을 찾아 도시락을 시켰는데 돈이 없어서(!) 인원에 맞게 주문도 못하는 것을 식당 주인이 딱하게 여겨서 18,000원짜리 도시락을 10,000원으로 할인해서 제공했다. 그런데 방열과 농구협회 관계자들은 비즈니스석을 타고 선수단 숙소를 방문했다. 그러면서 유명무실해질 2017 아시아챔피언십 대회를 개최하겠다고 하는걸 보면, 국제 농구계의 흐름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2017년 9월 30일 2017 남녀 대학농구리그 시상식장에서 여러분이 잘하지 못해서 대학농구의 입지가 줄어들었고, 해체설이 돌고 있다". 또한, "도박과 약물을 해서는 안 된다. 또 공부와 농구를 열심히 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해서 농구가 위기를 맞았다.라는 발언으로 일선의 농구지도자들과 농구팬들에게 "지원도 변변히 해 준 것이 없으면서, 대학농구의 위기가 학생들의 행실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로 들렸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결국 농구팬들에게 공공의 적 취급을 받게 된다.

2020년 들어 방열회장을 위시한 농구협회가 대표팀선수들의 지원에 너무나도 소홀하다는 비판이 다시 나왔다. 도쿄 올림픽 출전권을 딴 여자농구팀의 경우 팀의 에이스인 박지수 선수가 총대를 매고 국제대회를 준비하며 협회가 제대로 된 연습경기를 주선해주지 않아 경기감각을 끌어올리기 어려웠다고 비판했다. 남자 농구팀의 경우 허훈 선수가 국가대표 선수들의 이동 버스 사진을 찍어 이를 조소하는 듯한[3] 게시물을 자신의 SNS에 올렸다. 협회는 이런 비판에 대해 올림픽 베이스캠프를 한국에 차리는 팀을 대상으로 연습경기를 추진할 예정이며, [4] 버스의 문제는 진천선수촌이 있는 진천에 자차로 오겠다는 선수가 3명뿐이어서 나머지 9명의 편의를 봐주기 위해 한 조치였다고 해명했다.

2021년 임기만료와 함께 대한민국농구협회장 자리에서 퇴임했다. 후임으로 권혁운 아이에스동서 회장이 단독후보로 선출됐다. 기업인 출신으로는 17년 만의 농구협회장이다. 이후 2021년 6월에 승부조작으로 KBL에서 제명당했던 강동희를 복권 해달라는 내용의 탄원서를 농구인들한테 앞장서서 받았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 인해 수많은 농구팬들에게 비판을 받았다.

퇴임 이후인 2022년에 '인생이라는 코트 위에서'라는 60년이 넘는 농구 인생을 정리한 자서전을 출간했다고 한다. 한국 농구 역사와 본인의 인생사를 파악할 수 있다는 정보서로서 쓸 만하지만, 농구 팬들은 농구협회장 시절 한국 농구를 발전시키기는커녕 도리어 퇴보 시킨 장본인 주제에 자화자찬, 자기 자랑, 자뻑만 늘어놓는 자서전을 출간했다며 평가 절하 혹은 비판하는 반응들이 다수다.

3. 기타

  • 박한 전 고려대 감독과 함께 한국 농구 역사상 최초로 경기 중에 정장을 차려 입은 감독이기도 하다. 1980년대까지 한국의 감독이 스포츠맨십을 이유로 정장이 아닌 평상복+점퍼 차림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는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일이다.

4. 저서

  • 실전 현대농구(전 2권, 번역) - 존 우든 저. 창공사. 1994.
  • 명승부사 방열의 농구 만들기, 인생 만들기 - 김영사. 1995.
  • Basketball: 농구를 잘 아는 길, 농구를 잘 하는 길 - 하나로. 1997.
  • 사회체육 프로그램론 - 대경북스. 2000.
  • 스포츠 보도론 - 대경북스. 2001.
  • 농구 기초편 - 대경북스. 2001.
  • 농구 전술편: 지역수비의 모든 것 - 대경북스. 2004.
  • 농구 공격편 - 대경북스. 2006.
  • 농구바이블(전 2권) - 대경북스. 2006.
  • 전략농구(이문규, 유재학과 공저) - 대경북스. 2010.
  • 페어플레이를 위하여 - 대경북스. 2018.
  • 인생이라는 코트 위에서: 어느 원로 체육인의 인생 이야기 - 대경북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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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담으로 이때 방열 감독이 중대 출신에게 밀려난 것으로 판단한 연세대 농구팀 측에서는 이후 기아로 선수들을 보내는 것을 극히 꺼리게 됐다는 루머가 있었고, 실제로 정덕화 이후로는 오랜 동안 연세대 출신 선수가 없었다.[2] 허재가 이 항명사건의 주동자인지는 의견이 엇갈린다. 하지만 이 사건 이후로 두 사람의 관계가 껄끄러운 것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으며, 허재가 주동자는 아니더라도 돌격대장 역할은 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허재도 과거 인터뷰에서 "농구 하나는 기가 막히게 가르치시는 분"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방열 감독의 지도력은 인정하고 있다. 현재 허재쪽 위키에는 관련 내용은 삭제된 상태.[3] 일반 관광버스보다 못한 마을버스 크기의 버스에다가 2m 장신의 선수들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타야 했다.[4] 그러나 이게 얼마나 졸속적인 행정인지 알 만한 것이, 보통 올림픽 본선 조편성이 나온 후, 1승 대상으로 삼을 팀을 정하고, 그 팀과의 모의 시뮬레이션이 될 수 있는 나라나 팀을 섭외하여 연습경기를 치러야 하는데 그런 것을 감안하지 않고 그저 무작정 베이스캠프를 차리는 국가하고만 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될지 의심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