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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nternational Development보통 개발(development)이라고 하면 여기서는 인류의 복지향상과 사회의 발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나타나는 변화들을 모두 포함하는 방식으로 정의된다.
당장 쉽게 말하자면 "왜 아직도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나 "아프리카는 어째서 아직도 못 살고 있는 것일까?", "선진국과 개도국 사이의 격차는 얼마나 좁혀지고 있을까?", "개도국을 도우려면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와 같은 의문들을 해소하기 위해 나타난 담론이다. 실제 일종의 학문분야처럼 존재하는 부분도 없진 않지만, 보통은 OECD나 세계은행 등이 발간하는 보고서, 여러 국제회의 등등을 통해서 논의가 비약적으로 진전되는 경향이 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못 사는 국가들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먹여주고, 경제적인 의미에서 보다 잘 살 수 있게 해 주겠다는 경향이 팽배했지만 점차 논의가 진전되면서 더욱 다차원적인 개념으로 확대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보통 개발이라고 하면 경제적 측면, 사회적 측면, 정치적 측면, 행정적 측면, 사회운동적 측면, 환경적 측면 등등을 모두 포괄한다.
그 때문에 이를 다루는 국제개발협력학은 사회과학의 일종으로 보이기는 하는데 도대체 어디에 속하는 것인지 쉽게 감이 잘 잡히지 않는 분야다. (…) 정치학에서도 취급할 수 있고[1] 행정학에서도 취급할 수 있으며[2] 사회학,[3] 경제학,[4] 환경, 의료보건 및 인권, NGO 관련 담론에서도 얼마든지 다룰 수 있는, 대표적인 다학제간 연구분야. 일단 많은 대학들의 경우 정치외교학/국제관계학 계통에서 주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애매한 정체성과는 달리, 국제개발의 주요 참여자들이나 주요 협약들은 심지어 중학교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한다.[5] 자세한 내용은 국제개발협력학에서 참고.
국내에서는 주로 무상원조기관 KOICA와 유상원조기관 한국수출입은행을 위시한 중앙/지방정부 차원의 지원, 월드비전을 포함한 종교 계통의 NGO,[6] 기타 민간사회 NGO들이 참여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UN이 일종의 총대장을 맡고 OECD 산하 개발원조위원회(DAC; Development Assistance Committee)가 행동대장을 맡고 있으며 국제연합 개발 프로그램(UNDP)이나 새천년개발목표(MDGs)와 같은 활동들이 이루어지고 있다.
2. 역사
과거에는 어떤 국가가 다른 국가를 순수히 선의만으로 도와주고 그 국가의 국민들을 위해 자국의 재화와 서비스를 쏟아붓는 현상이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이후 국제정세가 중요해지면서 정치적인 이유가 있다면 타국을 도와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나타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종식된 이후 전후복구를 하던 와중에 국제개발에 대한 아이디어가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교통과 정보통신의 발달로 대표되는 세계화는 국제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1940년대의 핵심 테마는 전후복구. 아마도 그 최초의 시도는 1943년 미국과 소련이 손을 잡고 만든 "연합국구제부흥사업국"(UNRRA; 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일 것이다. 전후 패전국인 일본과 독일, 이탈리아 등이 그 최우선 복구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1944년 브레튼우즈 체제가 자리잡으면서 IMF, GATT 등과 함께 국제부흥개발은행(IBRD)도 함께 나타났다. 유럽에서는 유럽국 간 경제협력이 박차를 가하면서 복구 및 재건비용의 국가별 할당 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1950년대의 핵심 테마는 냉전. 이때의 개발은 단순히 잘 사는 것 이상의 정치적 함의를 갖고 있어서, 자기네 편 국가가 잘 사는 것은 간접적으로 자기네 체제를 프로파간다하는 수단이 되었다. 즉 자기네 체제의 우위를 과시해 보이려는 의도에서 개발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대한민국이 6.25 전쟁의 아픔을 딛고 유엔에서 들어오는 구호물자들로 힘겹게 일어서던 것도 바로 이 때의 일. 국제적으로 식민지 국가들이 줄줄이 독립하면서 이들의 경제적 어려움이 이슈가 되기 시작하기도 했다. 경제체제는 애덤 스미스의 인간의 이기심이 경제성장을 유발한다는 주장에 따르는 근대화이론에 기초했다. 끊임 없이 발전하다 보면 좋은 것들이 순선환하게 될 거라며 경제적 성장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1960년대의 핵심 테마는 양적 경제개발.[7] 이때의 국제개발 담론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양적 발전, 수치상의 발전에만 머물러 있었다. UN은 1960년대를 제1차 10년 개발계획으로 잡아놓고 개도국들의 연간 경제성장률을 5%까지 향상시키자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으며 도리어 아르헨티나, 칠레, 가나는 경제위기가 닥쳤다.(…) 그래도 OECD-DAC가 설립되고 최초로 남북문제(North-South problem)[8]가 대두되었다는 중요한 의의도 있다. 아프리카에서 신생 독립국들이 줄줄이 나타나서 UN으로 우르르 달려가 가입하는 것을 계기로 남북문제가 제기되었다는 견해도 있다. 때문에 이 시기가 근대화이론에 맞서 카를 마르크스의 이념을 계승한 종속이론이나 세계체제론이 대두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즉 무작정 양적 개발에만 신경쓰다 보니 발전국가는 이를 통해 개발도상국을 착취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9]
1970년대의 핵심 테마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BHN; Basic Human Needs). 가뜩이나 오일쇼크로 인해 선진 공여국들의 주머니 사정이 나빠지자 개발분야는 크게 사기가 꺾였는데, 정작 자기네 피 같은 돈을 받은 후발 수원국들은 그걸 부패니 뭐니 하며 쓱싹하고(…)[10] 누적채무 문제가 갈수록 심각해지자 공여국들은 뒷목을 잡을 지경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진정 각 사람 개개인들에게 필요한 지원을 해야겠다는 인식이 나타났고, 거시경제 데이터에 의존하기보다는 실생활에 정말로 도움이 되는 방향의 지원 트렌드가 나타났다. 그리하여 지역주도개발이니 참여적 농촌개발이니 하는 개념들이 나타났다. 종합적으로 1970년대는 "사회구조상의 문제를 개혁하는 것이 개발담론에서 반드시 필요하다" 고 역설한 틴버겐 보고서에서 보듯 개발담론이 사회적 측면으로까지 확장된 시기가 되었다.[11]
1980년대의 핵심 테마는 신자유주의. 수원국들의 누적채무 문제는 이자율이 급속히 올라가면서 답도 없는 수준까지 악화되었고 공여국들 역시 두 차례의 오일쇼크로 인해 허리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멕시코와 브라질은 기어이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버렸고[12]다급해진 공여국들은 리오 클럽, 파리클럽 등을 통해 채무경감, 부채탕감 등의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한편 워싱턴 컨센서스를 통해 "수원국들이 개도국들에게 무한정 의존하는 의지박약을 보이고 있다"(…)는 합의가 도출되었고, 세계은행과 IMF는 개발과정에 시장기구와 민간부문 활력을 강조하면서 구조조정 차관(Structural adjustment loan)을 제안하였다. 이 무렵 개발의 의존성 문제와 관련하여 떠오른 또 다른 개념이 바로 남남협력 및 주인의식(ownership)으로, 개도국 간 기술협력 및 상호교류, 개도국의 주체성을 도모해야 한다는 관점이 그것이다.
1990년대의 핵심 테마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 개발담론에 있어서 최대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시기이다. 미국 경제는 클린턴 시기 들어 장기간의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냉전은 종식되었으며 평화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급진적 의견들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해지자 공적개발원조(ODA;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 금액도 점점 두둑해져 갔다. 세계화(globalization)라는 용어가 언제부터인가 사방에서 쓰이기 시작했으며 한편에서는 기후변화와 같은 새로운 이슈들이 떠올랐다. 파괴되는 오존층, 무너지는 빙산, 오도가도 못하는 북극곰 등이 연일 매스컴을 장식했고 개발담론에도 환경적 측면이 본격적으로 포함되기 시작했다.[13] 미래 세대의 필요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우리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킬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토의정서 및 3대 환경협약,[14] 몬트리올 의정서 등이 이 시기의 중요한 성과. 앞서 진행되던 사회적 논의 역시 이 무렵에 꽃을 피워서, 1994년에는 최초로 인구문제가 제기되었고 1995년 베이징 회의에서는 젠더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냉전이 종식되면서 기존의 같은 진영에 있던 국가들을 공여국이 무차별적으로 지원해주던 양상이 누그러들고, 앞서 언급한 논의들을 제대로 고민하고 문제해결에 노력하는 국가만을 지원하겠다는, 이른바 선한 거버넌스(Good governance)[15]와 같은 개념들도 개발담론에 도입되었다.
2000년대의 핵심 테마는 새천년개발목표. 이미 1990년대에 OECD는 《21세기를 구상하며》(Shaping the 21th Century)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21세기 인류가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 바 있었다. 그리고 2000년 9월, 뉴욕 소재 유엔본부에 전세계 189개국의 정상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만장일치로 새천년선언(Millennium Declaration)을 발표하였다. 선진국과 개도국, 공여국과 수원국, 서구 문화와 동양 문화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서 인류의 밝은 미래를 위해 하나되어 노력하자고 선언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비록 9.11 테러 이후 미국발 경제침체가 나타나기는 했지만 대한민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들이 외환위기를 잘 극복해 냈으며, 브라질과 인도 등 새롭게 떠오르는 다크호스들의 존재는 미래 국제정세를 낙관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천의 자리 숫자가 바뀌는 역사의 결정적 시점에 있었다는 점도 다소간 이상적 논의가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이 시기 개발담론에는 파리선언 이후 원조효과성(aid effectiveness)과 같은 개념들이 나타났다. 원조를 했으면 그것이 과연 얼마나 당초 목표를 달성하였는지 철저히 점검하자는 것. 결과적으로 원조 프로그램에 대한 성과평가가 요청되었고 이것은 행정적 측면이 개발담론에 포함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OECD-DAC는 2000년대 이후 모든 ODA에 대해서 비구속성[16]으로 전환할 것을 결정하였다.
2010년대 전반기의 핵심 테마는 개발 파트너십. 2011년 부산에서 열렸던 국제원조총회에서는 국제개발을 위한 포괄적인 국가 간 연대와 네트워크가 강조되었다. 원조효과성 개념은 더욱 심화되고 확장되어 이행 모니터링 체제 등으로 구체화되었으며, 지속가능성 개념 역시 2012년 리우+20 회의[17]에서 다시 구체화되었다. 여기서는 기존의 MDGs의 대항마로써 새롭게 지속가능한 개발목표(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라는 패러다임이 제시된 바 있다.
2010년대 중반기에는 소위 "Post-2015"라 하여, 그 데드라인이 2015년으로 정해진 MDGs가 종료되면 그 이후에는 도대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가 진행중에 있다. 문제는 과거 MDGs를 설정하던 무렵과는 국제정세가 너무나도 바뀌어서 이번 논의는 정말 쉽지 않다는 것.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그리스 경제위기, 유럽의 경제침체 등이 3콤보로 터지면서 다시 개발담론은 힘을 잃어가고 있다.(…) 게다가 엄청나게 강력해진 중국이 개도국의 이해를 대변하며 선진 공여국들의 입장에 사사건건 태클을 걸고 있어서 어떤 합의가 쉽지 않다는 점도 시대적 한계가 되고 있다.
3. 대한민국과 국제개발
대한민국은 세계 국제개발 역사로 보자면 과거 원조 수원국에서 현재 원조 공여국이라는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개도국 개발 시 대한민국 모델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하기도 하며, 실제로 한국도 새마을운동이나 기타 여러 경제 개발 비법(?)을 해외에 전수하려는 중이다.4. 관련 문서
[1] 국제외교 및 거버넌스, 정치 분야.[2] NGO 관리론 및 조직이론, 효과성 이론 등 분야.[3] 젠더문제, 부패문제, 교육문제, 불평등 분야.[4] 빈곤문제, 공적개발원조, 자유무역 등 분야.[5] 일례로 중학생들도 기후변화협약이나 교토의정서, 세계인권선언 등에 대한 조사를 하는 모습을 네이버 지식인 등에서 종종 볼 수 있다.[6] 현장에서는 이런 종교 NGO들이 국제개발에 참여할 때 굉장히 초보적인 관점, 즉 "시혜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불만의 목소리도 있다. 물론 이들의 규모와 행동력 자체는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7] 1960년대는 세계 지성의 역사에서 양적 접근법이 사회과학 전 분야를 맹렬하게 휩쓸던 시기라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사회과학에서의 엄밀한 과학적 방법이 강조되었고, 주관적 주제는 그다지 논의할 가치가 없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8] 흔히 국제정치학에서 동서문제라 함은 이념대립, 남북문제라 함은 빈부격차를 의미한다.[9] 현재는 자유주의 진영의 이념적인 승리로 이 이론은 많은 힘을 잃었지만, 당시에는 국제정치학에서 자유주의이론과 양대이론이라고 불리는 현실주의와 맥을 같이 했기 때문에 파급력이 강했다. 실제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선진국이 무역을 통해 오히려 개발도상국의 자본을 흡수한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다.[10] 물론 당시에 자원값이 엄청나게 오른건 사실이었기에 자원이 많은 국가들은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의 경제발전을 보이던 시기이기는 한다. 물론 자원이 없는 국가들은 그런거 없었지만.[11] 그래서인지 부패문제와 젠더문제 또한 이 시기에 처음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12] 사실 멕시코와 브라질은 1970년대까지는 개발 모범국가에 속했고, 정치는 부패되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수준의 경제발전수준을 보이기는 했다. 하지만 문제는 개발과정에서 외채를 많이 끌여올린게 문제로 오일쇼크와 이자율 상승 2콤보를 맞게되면서...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13] 최초로 환경문제가 논의된 것은 1972년 스톡홀름 회의에서의 일이다.[14] 기후변화협약, 생물다양성협약, 사막화방지협약[15] Governance는 Government와 다르게 정부의 하향식 정책결정이 아닌 정부와 민간/시민단체(사회영역)과 기업(시장영역)이 함께 협력하는 것을 의미한다.[16] 비구속성 원조(untied aid)란 수원국이 공여국의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할 의무가 없는 원조이다.[17] 리우회의 이후 20년만에 동일 장소에서 개최된 환경회의라는 점을 기념하여 이름이 이렇게 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