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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재단법인 관서기원 一般社団法人 関西棋院 / Kansai Kiin
관서기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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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바둑 단체. 도쿄의 일본기원과는 별개의 프로 조직이다. 이름 그대로 간사이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본부은 오사카부 오사카시 주오구 기타하마에 있다. 창립자는 하시모토 우타로 九단.[1] 기사 수는 일본기원의 3분의 1 정도다.2. 역사
일본은 전국이 일일생활권인 한국과는 다르게 땅이 길고 넓어서 도쿄에서 지방으로 대국을 가려면 왕복에 이틀, 혹은 그 이상이 걸린다. 지금처럼 신칸센이 있지도 않았던 1940~50년대는 더더욱 그랬고 그런 상황에서 일일이 기사들을 이동시켜서 대국시키려면 교통비도 어마무시할 뿐더러 기사들 컨디션도 불편하기 때문에, 일본기원은 일본 제2의 도시권인 간사이에 관서별관을 개설해, 저단자들이나 낮은 레벨 예선은 그 지역 내에서 치르도록 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MLB나 NBA가 그리하듯 일종의 지역별 디비전 시스템을 만들어놓은 것. 문제는 여전히 五단 이상으로 승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쿄의 일본기원으로 상경해서 승단전을 치러야 했고, 八단 이상으로 승단해야 일본기원에서 열리는 타이틀전에 참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 九단은 1949년에 九단으로 승단한 후지사와 호사이 단 한 명뿐이었고, 八단도 극소수 정상급 기사들뿐이었다.지방 기사들 입장에서 보면 이는 지나치게 불공평한 처사였다. 당시는 신칸센도 없던 시절이라 한번 상경하려면 6~7시간씩, 길게는 하루 종일 기차나 버스로 이동을 해야 하고 와서도 익숙지 못한 환경에서 잠을 자야 하는 등 굉장히 체력적으로나 뭐로나 부담이 컸기에, 일방적으로 어웨이 경기를 치러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불리했던 것. 그럼에도 한국도 그렇듯 수도에만 인프라가 집중되어 있었다 보니 딱히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프로기사를 목표로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관서별관의 에이스 하시모토 우타로 八단마저도 도쿄로 거처를 옮기는 것을 고려했을 정도였다. 이때 간사이 지방의 성공한 실업가이자, 바둑 애호가인 기무라 히데요시(木村秀吉)[2]가 "최고의 기사가 생활을 이유로 도쿄로 가는 것은 간사이의 수치"라며 하시모토를 후원해줬고, 기무라의 후원에 힘입은 간사이의 기사들은 관서별관의 이름을 관서기원으로 고치고 일본기원으로부터 독립했다. 이것이 관서기원의 첫걸음.[3]
아무튼 이렇게 첫걸음은 떼었지만, 사실상 도쿄에 있는 일본기원 소속이던 관서별관을 관서기원으로 이름만 바꾼 수준이었고 일본기원의 하부조직처럼 굴러가는 점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다 1950년 혼인보전 이후 사건이 터지게 된다. 당시 혼인보전은 격년제로 열리는 기전이었는데, 관서기원의 창립자 하시모토 우타로 八단(당시)이 혼인보 타이틀을 획득하자, 관서기원의 기사에게 타이틀을 뺏겨 자존심이 상한 일본기원이 빨리 타이틀을 다시 가져오기 위해 현역 혼인보인 하시모토 八단의 동의도 없이 스폰서를 움직여 멋대로 매년 열리는 기전으로 바꿔버린 것. 이 때문에 관서지방 바둑인들과 하시모토 우타로 八단도 분노, 관서기원 독립을 추진해 아예 일본기원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독자적인 단체로서 행보를 시작했다.[4] 이전까지는 같은 일본기원 하의 동부-서부 컨퍼런스 관계였다면 아예 내셔널 리그-아메리칸 리그처럼 독자적인 리그를 구축하겠다고 선언한 것.
당연히 일본기원에서는 분노했고 하시모토 우타로 八단에게서 혼인보 타이틀을 박탈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으나,[5] 실력으로 타이틀을 되찾자는 의견이 주류를 차지했기 때문에, 하시모토 우타로 혼인보에게 도전할 도전자를 뽑는 도전자 결정 리그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51년 제6기 혼인보전에서 하시모토 우타로 八단은 도전권을 획득한 일본기원의 사카타 에이오 七단(당시)을 4-3으로 꺾고 방어에 성공, 혼인보전 2연패를 달성했다. 그 후 각종 기전에 현역 혼인보 불참 카드[6]를 앞세워서 관서기원 기사들의 기전 참가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후 관서기원은 소속 기사들의 활약으로 전성기 1950~1960년대에는 일본기원을 나름 위협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활약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1980~2000년대에 7대 기전 타이틀을 획득한 관서기원 소속 기사가 1981년에 왕좌 타이틀을 획득한 하시모토 쇼지 九단 단 1명 밖에 없었을 정도. 그래도 2010년대 들어서부터는 사카이 히데유키 八단, 유키 사토시 九단, 무라카와 다이스케 九단 등의 활약으로 예전의 기세를 어느 정도 되찾아가고 있다.
분리된 지도 7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 창립자인 하시모토 우타로 九단을 비롯, 당시 동서 갈등의 주역들은 거의 다 사망해서 흘러간 일이 되어버린 현재는 일본기원과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주요 기전 3차 예선 이후부터는 관서기원과 일본기원의 기사들이 섞여서 대국한다. 만약 일본기원 출신 기사라 할지라도 관서기원 출신 기사가 단위가 더 높을 경우에는 관서기원에 와서 대국한다. 국제대회 예선전도 같이 치른다. 농심신라면배같은 국제대회 단체전에도 관서기원의 정상급 기사들이 일본기원의 기사들과 함께 일본 대표로 출전하고 있다.
최근에는 일본기원과의 재통합 논의도 종종 나오고 있지만, 단수 조정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실현되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아시안 게임과 같은 국가대표 출전 국제대회에는 2010년부터 일본기원, 일본페어바둑협회와 함께 전일본바둑연합을 구성하여 통합 명의로 출전하고 있다.
3. 기타
- 자체적으로 바둑 잡지도 출판하고 있다. 제목은 월간바둑관서.
[1] 1907~1994, 세고에 겐사쿠 명예 九단 문하 출신. 참고로 세고에 九단은 일본기원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사람 중 한 명이며, 우칭위안, 조훈현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기사이다. 참고로 한국에서는 세고에 겐사쿠가 평생 제자를 3명(하시모토 우타로, 우칭위안, 조훈현)만 뒀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 세고에 겐사쿠에게는 저 3명 외에도 스기우치 마사오, 히사이 케이시, 이요모토 모모이치라는 제자가 있었다.[2] 훗날, 관서기원 2대 이사장이 되는 인물이다.[3] 실제로는 이때 단순히 이름만 고친 게 아니라 관서별관 건물을 매입해서 재무상으로 완전히 독립을 했다고 한다. 건물 매입비용은 모금으로 모았다고. 당시 전쟁 중에 공습으로 불탄 도쿄 일본 기원 회관의 재건을 위해 전체 기사에 의한 모금 활동이 이뤄졌는데, 간사이 지부에는 총 50만 엔 목표액이 부과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간사이에서도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모금액의 절반을 도쿄에 보내기로 하고 모금활동을 실시해서 100만 엔을 모았는데, 막상 이렇게 되자 이 금액을 간사이를 위해서 전부 쓰자는 의견이 기사와 후원자들 사이에서 강해졌고, 결국 모금액으로 관서별관 건물을 매입해서 재무상으로 일본기원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데 성공한 것이라고 한다.[4] 사실 혼인보전을 격년제에서 매년 개최해야 한다는 의견은 하시모토 우타로 八단도 동감하고 있었다. 다만 그것을 현역 혼인보인 자신에게 알리지도 않고 일본기원이 멋대로 바꿔버린 행위에 분노한 것. 과정에 화가 난 것이지 혼인보전의 매년 개최 자체에는 불만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혼인보전은 이 이후 매년 개최되게 된다.[5] 혼인보전은 마이니치 신문과 일본기원의 계약에 의해 출범한 타이틀전이었기 때문에 일본기원에서 이탈한 관서기원 기사는 혼인보전 참가 자격이 없다는게 그 이유였다.[6] 간단히 말해 관서기원 소속 기사들의 참가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혼인보 타이틀 홀더인 나도 불참하겠다는 것. 이 당시에는 타이틀전이 아직 혼인보전 하나였기 때문에 혼인보의 불참은 세계챔프 불참이란 뜻이고, 이렇게 되면 당연히 흥행에 막대한 차질이 생기게 된다.[7] 사실 제도화하기 전부터 아마추어 강자들을 종종 관서기원 소속 프로기사로 편입시켜줬다.[8] 홍맑은샘 四단이 바로 이 제도를 통해 관서기원에서 프로기사가 되는 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