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順丈─, 順將─한반도 지역에서 20세기 초반까지 유행한 바둑 규칙. 티베트나 시킴 전통 바둑도 이와 비슷하게 둔다고 한다#[1]. 광복 후 1945년 11월 한성기원(오늘날 한국기원) 설립을 주도한 조남철 기사가 세계 바둑 흐름에 맞춰가자는 이유로 한국에서 유행하던 바둑 규칙을 일본식으로 맞추면서, 사실상 사장되었다.[2] 물론 조남철 혼자 주장한다고 되는 건 아니지만[3], 후술되어 있듯 현대 바둑에 비해 포석의 묘미가 적다는 단점도 있었기에 대중들도 점점 이를 수용한 것으로 보인다.[4]
하지만 이후 한국에서의 바둑 인기가 서서히 떨어지면서 순장바둑에 다시금 주목하는 사람들도 생기고 있다. 신세대에게 바둑이 외면받는 이유가 초반의 수싸움이 너무 난해해서 입문장벽이 너무 높고 작정하며 게임을 늘어지게 하려면 밑도 끝도 없이 질질 끌 수 있는 데다가 기본적으로 대국 시간이 너무 길어서 현대의 여가 트렌드에 안 맞는 감이 있어서인데, 순장바둑이 앞서 말한 바둑의 여러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 기본적으로 빠르고 공격적인 전투바둑을 강제하기 때문에 대국 시간도 비교적 짧고 보는 맛이 있으며 입문장벽이 낮아서 바둑 유입인구를 늘릴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5] 그뿐만 아니라 순장바둑의 최대 단점이 초반 포석의 다양성이 적다는 점인데, 어차피 알파고의 등장 이후 모든 바둑 기사들의 초반 포석이 똑같이 일원화돼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순장바둑만의 단점이라 보기도 어려우며 저럴 바엔 순장바둑을 두는 게 나을 수도 있단 얘기.
2. 유래
백제시대부터 전해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긴 하나,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 혹은 유행했는지는 조선시대 등 학자간에도 이견이 많다.그래도 관련 백제 유물은 존재하는데, 일본 나라시의 정창원에 소장중인 목화자단기국이 그것으로 순장바둑판의 특징인 화점 17개가 명확하게 찍혀 있다.
하지만 평양시 임흥동 고구려 유물 1호에서 출토된 1~5세기경 고구려 바둑판 역시 화점이 찍혀 있으며 상술한 백제 바둑판[6]보다 앞선 시기의 유물인 걸 감안하면 순장바둑 역시 고구려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크다.
3. 규칙
화점마다 미리 돌을 착수해서 포석을 미리 하고 선을 정해 두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가를 할 때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돌만 남기고 상대방 돌은 물론 자신의 집 안에 있는 돌까지 전부 다 들어내서 없는 돌로 취급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공배를 메우면 그만큼 집이 더 늘어날 수 있기 때문에 공배를 다 메우고 끝낸다.자기 집을 아무리 메우거나 남의 집에 들어가도 손해가 아니기 때문에, 되는 수 안 되는 수 다 동원해 볼 수 있다.
4. 첫 배치
그림과 같이 흑돌 9점[7]과 백돌 8점을 배치[8]한 뒤 백이 두는 것으로 시작한다[9]. 덤 제도는 없다.
포석이 균형있게 미리 되어 있기 때문에 집 짓기 좋다는 장점이 있으나[10], 이로 인해 초반 변수가 현대의 바둑에 비해 적어서 포석의 묘미가 없고 다양성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지금은 바둑 인공지능이 있어서 순장바둑이 흑백 중 누구에게 더 유리한 바둑인지를 물어볼 수 있는데, 흑에게 4~5집 유리한 것으로 나온다. 순장바둑이 흑에게 유리하기는 하되, 유리한 정도가 7집 내외인 정선바둑만큼에는 약간 못 미친다는 것. 중앙의 흑돌 한 점을 제외한 흑 8점과 백 8점의 배치는 서로 90도 회전에 대해 대칭적이므로 이 16점이 놓인 장면의 형세는 정선바둑과 크게 다를 이유가 없지만, 추가로 흑 한 점이 강제로 천원에 두어지면서 약간의 손해가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위 그림의 장면을 인공지능에게 분석시킨 결과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 젠7에게 덤을 0집으로 설정하고 첫 장면을 분석시키면 흑의 승률이 54%로 역시 흑에게 더 유리한 상황인 것으로 나온다. 순장바둑의 첫 장면에서 백의 덤을 4.5집으로 설정할 때가 흑백의 승률이 반반에 가장 가깝게 나온다.
- 카타고 60블럭에게 덤을 0집으로 설정한 뒤 첫 장면을 분석시키면 흑의 승률이 87%, 집으로는 5.7~8집 가량 앞서는 걸로 나온다.
- 릴라 제로(258)는 흑의 승률이 39.x%인 것으로 본다. 릴라 제로는 백에게 덤 7.5집이 주어진다는 전제 하에 승률을 계산하는 것인데도 4대 6 정도의 팽팽한 승부로 본다는 것은, 실제로는 덤이 없는 순장바둑이 흑에게 유리한 규칙이라는 뜻이다.
5. 계가
바둑이 끝나기 전 공배를 전부 메워 나간다.공배를 메운 후 계가를 청하면 흑백 양쪽은 집의 경계만 남기고 모든 돌을 다 걷어낸다.[11] 그리고 그 상태에서 센 집 안의 빈 점 숫자가 바로 집 숫자가 된다.
6. 여담
조남철 기사가 1954년 대만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를 했는데, 당시 달러 환전을 위해선 정부의 허가가 필요했다. 이에 당시 자유당 서열 3위였던 장경근의 백으로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조남철과 김봉선이 경무대 시범 대국을 했는데, 첫판을 현대 바둑으로 두자 이승만이 "자네들은 왜 왜놈 바둑을 두나"하고 질책을 했다고 한다. 이에 조남철이 해명을 한 뒤 2국부터는 순장 바둑을 뒀다는 일화가 있다.# 이후 대국을 보고 만족한 이 대통령은 이왕 가는 것이니 꼭 이기고 오라며, 가만(可晩)이라는 허가서를 내줬다.#[1] 첫 배치 이야기다. 집은 중국식으로 센다.[2] 그보다 먼저 일제강점기인 1937년 1월 1일에 폐지 결의를 했다고 하지만, 그 뒤로도 특별행사로 아주 가끔 선보이곤 한다(아마추어 행사는 외국에서도 했다).[3] 순장바둑 없앤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던 조남철도 순장바둑 고수를 만나 바둑을 두고 기보를 적은 적이 있다(6.25 전쟁 때 잃어버렸다고 한다). 1995년 10월 6일에는 이창호 당시七단과 순장바둑을 두기도 했다.[4] 다만 계가법마저 버린 것은 아쉬워하는 의견도 있다. 일본식과 달리 귀곡사도 실전에서 해결할 수 있고, 중국식과 달리 덤을 한 집씩 바꿀 수 있고, 전만법이나 서양식과 달리 검은돌과 흰돌 갯수를 같게 하지 않아도 되는 계가법이다.[5] 입문만 순장바둑으로 하고 어느 정도 이상 실력이 되면 그때 돼서 포석을 배우며 일본식 바둑으로 전환하는 방법이 있다.[6] 의자왕은 6세기경 인물이다.[7] 천원 검은돌을 맨 마지막에 놓는다. 이 천원 검은돌을 흑1이라고 적은 기보도 있다.[8] 순장바둑판은 돌 놓는 자리에 모두 화점을 찍었다. 그래서 화점이 천원까지 17개. 이 첫 배치 때문에 순장바둑을 화점바둑이라고도 했다. 티베트나 시킴에서는 가로세로 17줄 바둑판 3선에 미리 검은돌 여섯, 흰돌 여섯을 같은 간격(위 그림 배치보다 한 칸 더 벌려서)으로 번갈아 놓는다.[9] 상수가 백을 잡는다(천원에 돌을 놓지 않고 시작하는 티베트·시킴식은 상수가 백을 잡고 먼저 둔다).[10] 그보다는 저절로 싸움이 일어나는 배치라고 볼 수 있다.[11] 걷어내고 남은 돌(집의 경계)이 단수에 몰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패를 이은 곳은 집이 아니다. 거봉에서도 남은 돌이 단수에 몰리지 않는 데까지 안쪽 돌을 들어내 집으로 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