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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민(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홍종민
洪鍾民[1]으로 등재되어 있다.]
파일:홍종민(독립운동가).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이명 진영수(陳永洙)·진영주(陳永周)
홍윤(洪潤)·이무(李武)·이유(李有)
황종민(黃鍾民)·황윤(黃潤)[2]
문원(文遠)
본관 남양 홍씨[3]
출생 1913년[4] 3월 3일
경상북도 안동군 동선면 모산동
(현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 모산골 133번지)[5]
사망 1969년 11월 24일[6] (향년 56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동2가 8번지 자택
가족 배우자 신금순[7], 외아들 홍준성[8]
임관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반)
최종
계급
중령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3묘역-5판-2091호 (4행 11열)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독립운동 및 국군 복무2.3. 예편 이후 생활고2.4. 쓸쓸한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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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군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홍종민은 1913년 3월 3일 경상북도 안동군 동선면 모산동(현 안동시 와룡면 지내리 모산골마을) 333번지에서 아버지 홍재무(洪在武, 1882 ~ 1923. 5. 16)와 어머니 전주 이씨(1892 ~ 1930)[9] 사이의 두 아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래로 남동생 홍종근(洪鍾根, 1919. 2. 7 ~ 1990. 9. 4)이 있었다. 이후 와룡면 지내리 622번지 먹골마을로 이주했고, 상경한 뒤에는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192번지에 거주했다.

2.2. 독립운동 및 국군 복무

그는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길림성 길장도(吉長道) 반석현(磐石縣) 마하(螞河)[10], 흑룡강성[11] 등지에 거주했다.

그 뒤 부모님을 모두 여의고 1932년 8월 동북 한·중연합 항일군사령부 독립대대(東北韓中聯合軍司令部獨立大隊)에 입대하여 그해 9월 길림성 쌍성시(雙城市)[12]에서 벌어진 쌍성보 전투, 이어 벌어진 길림성 전투에 각각 참전하였다. 1933년 5월부터 6월 사이에는 길림성 영안현(寧安縣) 발해보(渤海保) 동경성(東京城)[13]에서 벌어진 동경성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그해 6월 말부터 7월 사이에는 길림성 왕청현(汪淸縣) 대전자령(大甸子嶺)[14]에서 벌어진 대전자령 전투, 9월에는 길림성 동녕현(東寧縣)[15]에서 벌어진 동녕현 전투에 각각 참전하였다.

그 뒤 이듬해인 1934년 지청천을 따라 중국 본토로 건너갔고, 그해 11월 하남성 낙양현(洛陽縣) 서공지(西工地)[16]에 있던 중국 국민당 계열의 낙양군관학교[17]에 입교하여 군사교육훈련을 받은 뒤 1935년 졸업하였다. 1936년 남경특별시에서 민족혁명당에 입당하고, 다시 정치훈련반에서 사상교육을 받은 뒤 정치훈련반을 수료했다. 그해 3월 김구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의 특명으로 지하공작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북평시(北平市)를 거쳐 만주로 이동했고, 이어 국내의 평안북도로 파견되어 학생모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뒤 신의주형무소로 이송되어 옥고를 치르다가, 1936년 12월 14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에 대해 징역 2년형,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고 곧 출옥했다.

출옥 후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망명해 있던 호남성 장사시(長沙市)로 건너갔고, 1937년 김구의 특명으로 지청천·이범석과 함께 하북성 북평시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 경찰에 재차 체포되어 의주형무소에 구금되기도 했다.

출옥한 뒤에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했으며, 그곳에서 8.15 광복을 맞았다. 광복 직후 재만동지회 주도로 한인교포들의 피해 방지를 위해 한·중 친선 선무공작대(宣撫工作隊)를 조직하고 부책임자로 활동하였으며, 그해 10월에는 자위대를 편성하여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교포들을 보호하는 등 활동을 하다가 귀국하였다.

귀국 후 1948년 12월[18] 육군사관학교 특별 8기에 입교해 1949년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임관해 복무하던 중 6.25 전쟁에 참전했다. 6.25 전쟁 중에는 제9보병사단 38연대 근무중대장 등으로 복무하며 '철의 삼각지대'에 속하던 강원도 김화군 603고지, 화천군 적근산 604고지 등지에서 활약해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2.3. 예편 이후 생활고

이후 38연대 부연대장에까지 오른 뒤 1960년 12월 고령을 이유로 중령으로 예편했다. 당시에는 20년 이상을 복무하면 군인연금을 수령할 수 있었지만, 전투연한을 더해도 1년이 모자라는 19년을 근속한 탓에 10여 만원을 퇴직연금으로 받을 수 있었다. 퇴직한 뒤에는 서울특별시 성북구 송천동[19] 493번지에 셋방을 얻어 세탁소를 경영하며 아내 평산 신씨 신금순(申今順, ? ~ 1970)[20], 외아들 홍준성(洪駿成)과 그런대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한편 그의 외아들은 9살 때부터 결핵성 척추염을 앓아 두 다리를 쓰지 못하다가, 그가 장교로 복무하던 때에 육군병원에서 치료를 잘 받아 한때 걸을 수 있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61년 병이 재발해 그의 퇴직연금과 세탁소로 벌어 들이던 수입은 모두 아들의 치료비에 들어갔고 그마저도 허사였다. 결국 1966년을 전후해서는 빚까지 떠안게 되면서 세탁소 또한 폐업했고, 송천동에 있던 셋방에서도 쫓겨나고 말았다. 이후 생계를 위해 아내는 이웃집에 식모처럼 더부살이를 하고, 그는 반신불수의 아들을 업고 다니며 노숙을 했다. 며칠을 굶다가 서대문구 중림동 149번지[21] 성신대학 의학부 제2부속 자선병원[22]에 찾아가 딱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아들의 다리를 고쳐달라고 요청하자, 수술비 2만원만 내면 고칠 수 있는 병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얻었다.#

그 길로 그는 영등포구 동작동[23] 국군묘지[24] 서쪽 산기슭에 땅굴을 파고 살며 한강변에서 모래 장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2.4. 쓸쓸한 말년

파일:홍종민(독립운동가)-2.png
1966년 10월 18일 10여년만에 만난 박응규 예비역 준장(左), 홍종민 예비역 중령(右)과 그 아들(中).

그러던 1966년 9월 아침 여느 때처럼 국립묘지 서쪽 산기슭에서 땅굴을 파며 모래를 운반하다가 군 복무 시절 직속상관이었던 박응규(朴應奎) 예비역 준장(당시 국립묘지관리소장)과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용산구 용산동2가 8번지에 단칸방 판잣집에 살 수 있게 되었다. 그 뒤 196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행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여받았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날품팔이를 하며 생계를 이어나가다가 1969년 11월 24일 영양실조지병간암으로 별세했다.
파일:홍종민(독립운동가)-1.png
1969년 11월 24일 판잣집 단칸방에 마련되었던 초라한 홍종민 지사의 빈소.

사후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이후 국립서울현충원 3묘역에 이장되었다.

[1] 남양홍씨남양군파세보 4권 781쪽에는 洪[2] 낙양군관학교 동기생 명부에는 황종민·황윤으로 오기되어 있다.[3] 당홍계 남양군파-교수공파 32세 종(鍾) 항렬.[4] 남양홍씨남양군파세보 4권 781쪽에는 1912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5] 남양 홍씨 당홍계 집성촌이다.[6] #[7] 申今順. ? ~ 1970. 평산 신씨이다. 신석순(申錫順) 또는 심금순이라고도 한다.[8] 洪駿成.[9] 이춘하(李春夏)의 딸이다.[10]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판스시(礬石市) 하마허촌(蛤螞河村). 이곳에 아버지 홍재무의 묘소가 있었다.[11] 어머니 전주 이씨의 묘소가 흑룡강성에 있었다.[12]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솽청구(雙城區).[13]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닝안시(寧安市) 둥징청진(東京城鎭).[14] 현 중화인민공화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 왕청현 왕뤄선(汪羅線) 타이핑링(太平嶺).#[15]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둥닝시(東寧市).[16] 현 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뤄양시 시공구(西工區) 카이쉬안시로(凱旋西路)18호.#[17] 정식명칭은 중화민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이다.[18] 또는 1949년 2, 3월[19] 1973년 도봉구가 신설되자 도봉구 관할이 되었다가, 1995년 강북구 관할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20] 신석순(申錫順), 심금순이라고도 한다.[21] 현재 이 지번에는 1971년 6월 준공된 성요셉아파트가 들어서 있다.[22] 원래 이름은 성요셉자선병원이었는데, 1955년 10월 21일 옛 성신대학 의학부(현 가톨릭대학교 성의교정)로 이관되어 성신대학 의학부 제2부속 자선병원이 되었다. 이후 1974년 8월 폐쇄되었다.[23] 1973년 관악구 관할이 되었다가 1980년 동작구에 이관되어 현재에 이른다.[24] 1965년 국립시설로 승격돼 '국립묘지'로 개칭되었다가 2006년 국립서울현충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