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 이씨 양녕대군파의 역대 종주 | ||||||
1대 양녕대군 이제 | ← | 2대 함양군 이포 | → | 3대 부원군 이진 |
조선 태종의 손자 함양군 咸陽君 | ||
봉호 | 원윤(元尹) → 함양군(咸陽君)[1] | |
시호 | 이안(夷安) | |
본관 | 전주(全州) | |
이름 | 포(𧦞) | |
생부 | 양녕대군 | |
생모 | 수성부부인 김씨(隨城府夫人 安氏) | |
부인 | 군부인 고성 이씨(固城 李氏) | |
자녀 | 6남 | |
생몰 기간 | 음력 | 1417년 ~ 1474년 6월 21일[A] |
양력 | 1417년 ~ 1474년 7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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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전기의 왕족이다. 태종(조선)의 손자로, 양녕대군의 차남이다. 본명은 '포'이고, 시호는 '이안'이다.2. 생애
1417년(태종 17)에 왕세자 이제(후일 양녕대군)와 왕세자빈 김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431년(세종 13)에 원윤(품계: 통정 대부)을 거쳐, 이듬해에 함양군(품계: 가정 대부)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1438년(세종 20)에 모종의 이유로 윤으로 강등되었다가 1441년(세종 23)에 근신한다 하여 소릉[3] 수상관으로 임명받았다. 1454년(단종 2)에 다시 함양군에 제수되었으며, 이때 품계가 가덕 대부로 승격되었다. 이후 종친으로서 왕실에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하다가 1474년(성종 5) 7월 13일[4]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세.[5][A]3. 여담
- 양녕대군 생전에 그를 부양한 아들이었다고 한다. 장남 순성군이 있었지만, 지병이 있어 함양군이 대신 부양하였다고 한다. 함양군은 평소에도 양녕대군과 함께 온천에 가는 등 아버지를 잘 보필하여 양녕대군에게 ‘내가 과오가 적은 것은 함양의 덕이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 양녕대군의 종가는 차남 함양군 이포의 가계로 이어진다. 장남 순성군 이개가 양녕대군보다 먼저 사망하였기 때문이다. 예법대로라면, 순성군이 일찍 세상을 뜬 경우, 그의 장남(오천군)이 종가를 물려받는 것이 맞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던 사정들이 있었다. 양녕대군이 순성군보다 불과 5일 뒤에 세상을 떠나면서, 오천군의 입장에서는 조부-부친상을 한꺼번에 치러야 했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또한, 상술하였듯이 함양군이 순성군 대신 양녕대군을 모시고 살았는데, 부양한 아들이 상주가 되는 것이 당시에는 용인되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종가도 함양군의 후손들이 물려받았다.[B]
성종 대를 거치며 성리학적 예법이 완전히 자리잡자, 순성군의 후손들은 자신들이 장자 계통이니 종손 자격을 회복시켜줄 것을 연산군에게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후 9대손 이형까지 종가 직계가 내려오다가, 이형이 후사가 없어 양녕대군의 3남 서산군 이혜의 8대손인 이인망이 봉사손으로 입적되었다. 그런데 이형과 항렬이 같아 문제가 되었고, 이때 순성군의 후손으로 다시 종통을 세우자는 논의가 등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임금이었던 숙종은 이인망을 파양하되, 이인망의 아들 이한보를 이형의 양자로 입적하게 하여 항렬 문제를 정리하였고, 이후 이한보의 후손들로 지금까지 종가 직계가 이어진다.[B] 따라서 현재 양녕대군의 종가는 혈통상으로 서산군의 후손들이다.
[1] 군호는 경상남도 함양군에서 유래했다.[A] 출처: 《성종실록》 43권, 성종 5년 6월 21일 갑술 3번째기사.[3] 문종의 정비이자 단종의 생모 현덕왕후의 능.[4] 음력 6월 21일.[5] 당시 나이 셈법인 세는나이 기준. 만으로는 57세이다.[A] [B] 출처: 〈양녕대군가, 지덕사 600년 종통 잇는 봉사손의 50가지 인생 풀 스토리〉, 《세종대왕신문》 2023.02.13.[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