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00 Greatest Greeks | ||||||||
※ 2009년 그리스 Skai TV 방송이 그리스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가장 위대한 그리스인 100명'을 선정 | |||||||||
TOP 10 | |||||||||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알렉산드로스 3세 | 게오르요스 파파니콜라우 | 테오도로스 콜로코트로니스 | 콘스탄티노스 카라만리스 | 소크라테스 | |||||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아리스토텔레스 |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 요안니스 카포디스트리아스 | 플라톤 | 페리클레스 | |||||
11위~100위 | |||||||||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미키스 테오도라키스 | 콘스탄티노스 카라테오도리 | 멜리나 메르쿠리 |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 니코스 카잔차키스 | |||||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오디세아스 엘리티스 | 호메로스 | 마노스 하지타키스 | 레오니다스 1세 | 히포크라테스 | |||||
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피타고라스 | 콘스탄티노스 카바피 | 마리아 칼라스 | 아르키메데스 | 아리스토틀 오나시스 | |||||
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하릴라오스 트리쿠피스 | 엘 그레코 | 콘스탄티노스 11세 | 요르기오스 세페리스 | 리가스 페레오스 | |||||
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아리스 벨루키티오스 | 요안니스 메탁사스 | 니코스 갈리스 | 게오르기오스 카라이코스 | 데모크리토스 | |||||
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게오르기오스 게미스토스 플레톤 | 디오니시오스 솔로모스 | 야니스 마크리야니스 | 아다만티오스 코라이스 | 야니스 리트오스 | |||||
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테미스토클레스 | 헤라클레이토스 | 투키디데스 | 유클리드(에우클레이데스) | 파블로스 멜라스 | |||||
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아테네의 크리스토둘로스 | 아타나시오스 디아코스 | 테오도로스 자고라키스 | 디미트리 나노풀로스 | 무명용사 | |||||
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페이디아스 | 아리스토파네스 | 코스티스 팔라마스 | 에톨리아의 코스마스 | 마놀리스 안드로니코스 | |||||
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소포클레스 | 니코스 벨로야니스 | 코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 |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 니콜라오스 마르지오리스 | |||||
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알렉산드로스 파나굴리스 |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 에피쿠로스 | 알렉산드로스 파파디아만티스 | 오톤 | |||||
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반젤리스 | 솔론 | 클레이스테네스 | 아이스퀼로스 | 바실리오스 2세 | |||||
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콘스탄티누스 1세 | 이온 드라구미스 | 코스타스 시미티스 |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 | 디미트리 미트로풀로스 | |||||
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테오 앙겔로풀로스 | 니코스 실루리스 | 스텔리오스 카잔티디스 | 차릴로스 플로라키스 | 에우리피데스 | |||||
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카롤로스 코운 | 유스티니아누스 1세 | 라키스 라조폴로스 | 헤로도토스 | 다나시스 벤고스 | |||||
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헬레네 글리카츠아흐와일러 | 카티나 팍시누 | 알리키 부지욱라키 | 마르코스 밤바카리스 | 그리고리스 람브라키스 | |||||
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바실리스 치차니스 | 피로스 디마스 | 마노스 로조스 | 마노리스 글레조스 | 엘레나 무잘라 | |||||
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필리포스 2세 | 디미트리스 혼 | 라스카리나 부불리나 | 탈레스 | 프락시텔레스 | |||||
※ 출처 | |||||||||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 |
빈의 오스트리아 의회 건물 앞 투키디데스 동상[1]
Θουκυδίδης / Thucydides (BCE 460?~BCE 400?)
1. 개요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다.2. 생애
정확한 출신은 알 수 없지만 그리스 아테네의 부유한 명문 귀족 가문 출신임은 확실하다. 자연 철학자 아낙사고라스의 제자였고 아티카(앗티케) 10대 웅변가 중 하나였던 안티폰에게 웅변술을 배웠는데 이때는 스승을 따르지 않았다. 안티폰은 귀족파였으나 투키디데스 본인은 민주파로 페리클레스를 지지했다.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한창이던 기원전 424년, 아테네의 장군으로 뽑혀 '트라케' 지역으로 파견된다. 임무는 이 지역 주요 도시인 '암피폴리스' 수비였는데 얼마 뒤 스파르타의 장군 '브라시다스'의 공격을 받아 도시를 빼앗긴다. 이 일로 아테네에서 반역죄를 선고받고 20년 동안 아테네 밖으로 추방당했으며 이 기간 동안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쓰게 된다.
저술은 종전이 6년 6개월이나 남은 411년에 멈춰 있는데 이유는 알려진 바가 없다. 죽음 역시 출생만큼이나 흐릿해 여러 설은 있으나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사망 연도조차 기원전 400년경으로 추정할 뿐이다.
3. 역사학자로서의 업적
널리 알려진 업적은 신화(+설화)와 역사의 분리이다. 투키디데스 이전까지 역사는 신화와 딱딱 분리되지 않았다.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나 일리아스에서 인간들은 신의 의지나 신탁에 따라 움직인다. 따라서 전쟁은 모두 신들의 게임이었고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토스조차 <역사>에서 페르시아 전쟁에서 그리스 세계가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신의 섭리라고 서술했다.[2] 실제로 당시 그리스인들은 트로이 전쟁이 신의 전쟁이라고 믿었다.하지만 투키디데스는 소피스트의 회의주의와 히포크라테스의 정신의 영향을 받은 세대였고 이를 역사 서술에 적용했다. 전설이나 신화처럼 확신할 수 없는 요소는 걷어내고,[3]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을 적으려고 애쓴 것이다. 이를테면 이전의 그리스인들은 트로이 전쟁에서 트로이가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를 트로이인의 용맹에서 찾았다. 반면 투키디데스는 이를 당시 헬라스의 경제 발전 상황과 연관 지었다. 당시 헬라스는 경제적인 수준이 낮아 가난했고 자연히 트로이 원정군의 장비나 보급 수준도 엉망이었다. 그렇기에 트로이는 손쉽게 공격을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사회에 대한 분석과 함께 '개인'을 강조하였다. 역사는 개인, 특히 정치 지도자들의 판단에 따라 방향이 바뀐다. 지도자의 한 수(一手)는 폴리스의 시민에게 평화를 줄 수도, 타국의 노예로 만들 수도 있다. 역사 속에서 현명한 지도자는 여럿이었지만 투키디데스의 기준에서 가장 현명했던 지도자는 페리클레스였다. 그에 따르면 페리클레스는 정치적인 재능이 뛰어나고 전쟁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인물이었으며, 아테네의 몰락은 페리클레스만큼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역사는 신에 대한 찬양이나 강연이 아닌 현재와 미래 세대를 위한 도움이라고 생각하였다. 역사에는 일정한 패턴이 있고 그 패턴은 비슷한 상황이 되면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4] 이는 최초로 역사학자의 사명과 역사학의 목적을 제시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저술이 후대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 썼던 것이다.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신화가 아닌 사회, 정치, 경제에 중점을 두어 세상을 분석했고 이를 토대로 전쟁사를 적었다. 이는 훗날 '실증주의 역사관'에 큰 영향을 주었다.
국제 정치학 이론 중 '현실주의'의 시초로 불리기도 한다. 그는 폴리스들이 서로 전쟁을 벌였던 원인을 공포와 명예(위신), 이익에서 찾았고(아테네와 멜로스의 대화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이 설명은 현대의 국제 사회에도 유효한 이론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부터『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국제 분쟁을 이해하기 위한 고전으로 보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 책이 가장 빛을 발한 시기는 역시 냉전 시대일 것이다. 헬라스 세계를 양분했던 기존 강대국 스파르타와 떠오르는 별인 아테네의 관계는 20세기 세계를 양분해 충돌 직전까지 갔던 미국과 소련을 떠오르게 한다. 다른 국가들은 미국과 소련을 골라 동맹에 들어갔고, 중립국을 외치던 약소국은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이는 놀라우리만큼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와 비슷하다. 아시아를 양분하려는 신흥 강국 중국과 기존 패권을 지키려는 미국을 보고 있자면 두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경합하는 한반도에게도 결코 남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역사의 패턴은 반복되고, 따라서 역사를 통해 현재의 문제 해결을 위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투키디데스의 혜안이 맞았던 것이다.
역사에 대한 사실적인 판단과는 별개로 인용된 연설들의 수사학적 퀄리티가 유명한 책이다. 다만 원문 그대로 인용된 것은 아니며 대부분 투키디데스의 재구성이 들어갔다. 어찌 보면 민주정에 대한 로망으로 가득한 페리클레스의 연설마저도 페리클레스의 색채보다는 투키디데스의 색채가 강할지 모른다는 말(...).
각각의 인물이 전쟁 직전이나 전쟁 중에 발언한 연설에 관해 말하자면, 직접 들었든 간접적으로 전해 들었든 나로서는 정확히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실제 발언의 전체적인 의미를 되도록 훼손하지 않으면서 연설자로 하여금 그때그때 상황이 요구했음직한 발언을 하게 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권 22장 1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1권 22장 1
4. 비판점
아무리 객관성을 추구했다고는 하지만, 그의 저술에서도 특정 사상이나 인물 쪽으로 기울어진 평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페리클레스를 높이 평가하며 시칠리아 원정이라는 재앙을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을 제공한 니키아스를 동정한다. 이에 반해 아테네를 궁지에서 구한 승리를 거둔 클레온 등은 거세게 비판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연구를 선도해 온 역사학자 도널드 케이건에 의하면, 투키디데스는 독자들을 자신의 의견에 공감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료를 선택했으며 여러 가지 기법을 동원해 독자의 생각을 은연중에 한 방향으로 이끌어냈다고 한다.다만 투키디데스는 감정과 경험을 지닌 인간이며 저술의 대상이었던 시대를 직접 살다 간 사람이다. 헬라스 내에선 조국 아테네를 위한 전쟁에 참여했고 헬라스 전체가 아닌 아테네로 범위를 좁히더라도 중립적인 제3자와는 거리가 먼 페리클레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자연스럽게 페리클레스의 반대파(이를테면 클레온)를 싫어하고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를테면 니키아스)들을 좋아한 것이다. 끊임없는 객관성 추구로 역사 저술에 있어선 신화와 역사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으나, 그 역시 인간이었기에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걷어내지 못한 것은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투키디데스의 저작은 비판적인 관점으로 읽어야 한다. 다른 모든 글들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지만.
5. 투키디데스의 함정
기존의 국제 질서를 주도하던 강대국이 약화되고 신흥 강대국이 등장할 때, 두 세력 사이의 패권 교체는 전쟁을 포함한 직접적인 충돌을 수반한다는 주장이다. 국제 정치학에서는 1950년대 후반 이래 오랜 기간 세력 전이 이론(power transition theory)이나 패권 안정론(hegemonic stability theory)이라는 이름으로 체계화돼 온 이론이지만, 여기에 투키디데스가 겪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따온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란 그럴싸한 타이틀을 붙인 것은 그레이엄 앨리슨의 2012년 파이낸셜 타임즈 기고가 처음이다.현대에서는 '제1차 세계 대전과 같은 세계 패권의 전환 시기에, 대규모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비관적인 정치관으로도 인식된다. 21세기 버전 예시는 역시 미중관계.
6. 명언
(천병희 번역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발췌)당시에는 전쟁이 뭔지 몰라 전쟁이 싫지 않은 젊은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2권 8).
소수자가 아니라 다수자의 이익을 위해 통치되기에 우리 정체를 민주 정치라 부릅니다. 시민들 사이의 사적인 분쟁을 해결할 때는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합니다. 그러나 주요 공직 취임에는 개인의 탁월성이 우선시되며, 추첨이 아니라 개인적인 능력이 중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누가 가난이라는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도시를 위해 좋은 일을 할 능력이 있다면 가난 때문에 공직에서 배제되는 일도 없습니다.(2권 37, 페리클레스의 추도사 中)
번영을 누리는 평화 시에는 도시든 개인이든 원치 않는 어려움을 당하도록 강요받는 일이 없으므로 더욱 높은 도덕적 수준을 유지한다. 그러나 일상이 충족될 수 없는 전쟁은 난폭한 교사이며, 사람의 마음을 그들이 처한 환경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뜨린다.(3권 82)
인간관계에서 정의란 힘이 대등할 때나 통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관철하고 약자는 순응해야 한다는 것쯤은 여러분도 우리 못지않게 아실 텐데요.(5권 89) [영문][6]
7. 기타
자신의 저작 서문에서 밝혔듯이, 신의 개입을 인정하지 않고 인과 관계에 따라 분석하고 엄격한 기준으로 사료를 수집하여 과학적 역사관의 창시자로 인정받는다.범유행전염병의 역사에 기록된 아테네 역병이 창궐하던 시기에[7] 전염병에 걸렸다가 생존하는데 성공해서 기록을 남긴 전적을 보유하고 있다.[8] 당대에서 병에 걸려봤다가 살아남았던 사람이어서 그런지 전염병에 대해 매우 생생한 기록을 남겼고[9] 학자들은 그의 기록을 토대로 전염병의 정체를 추측하고 있다.[10] 투키디테스는 이 전염병이 아테네 외부에서 왔다고 보고 있다.[11]
철학자 플라톤의 대화편 『메넥세노스』는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려 페리클레스의 전몰자 추도 연설(혹은 이를 윤색한 것으로 강하게 추정되는 투퀴디데스)을 비판하고 이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해석이 우세하다. 페리클레스의 연설은 오늘날 황금기 아테네 민주정을 찬미하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본문 그 자체에서 보자면 (즉 21세기 사람에게 가지는 의의가 아니라 연설문이 동시대 아테네 사람들에게 의도한 의미에서 보자면) 아테네 민주정 찬미보다는 아테네의 패권을 위해 헌신할 것을 주문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연설문은 36-41에서 조국 아테네에 대한 찬사를 이어가다가, 42에서 전몰자들의 용기를 칭찬하고, 43부터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전몰자 못지않은 헌신'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서 연설은 은근슬쩍 폴리스 간의 국제 외교 질서에 침묵하고, 오직 조국 아테네만을 시민 윤리의 최고 척도로 밀어붙이고 있다. 물론 정치인 페리클레스 입장에선 윤리 연설보다는 아테네 패권을 위한 현실 정치 연설을 하는 게 인간적으로는 자연스럽지만, 철학자 플라톤 입장에서는 현실 정치 연설에 대해 당연히 훈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소크라테스적 입장과 투퀴디데스 내지 페리클레스적인 입장의 방식 사이에는 철학과 정치, 이성과 현실, 보수와 진보, 평화 공존과 제국주의 등 서로 다른 목적들과 해결해야 할 서로 다른 문제들이 내재되어 있다. 『메넥세노스』에서의 소크라테스는 분명 페리클레스적 삶의 방식에 맞서 당시의 아테네인들은 물론 『메넥세노스』를 읽는 오늘날의 우리들로 하여금 지상에서의 불멸성과 정치적 위대성에 대한 지향을 버리고 자연적 본성에 입각한 정치학에 충실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요컨대 소크라테스의 연설은 역사에 대한 패러디 또는 조롱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의 개진 내지 훈계에 가까운 것이다.
플라톤, 『메넥세노스』, 이정호 옮김, 아카넷, 2021, p.132
요컨대 소크라테스의 연설은 역사에 대한 패러디 또는 조롱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의견의 개진 내지 훈계에 가까운 것이다.
플라톤, 『메넥세노스』, 이정호 옮김, 아카넷, 2021, p.132
[1] 사진 출처 : en.wikipedia.org[2] 당시 페르시아는 그리스보다 발전해 있었고 당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인이 자기들보다 우월하다고 믿었다. 다윗에 해당하는 그리스가 골리앗 격인 페르시아를 이긴 까닭을 설명하지 못해 신의 섭리로 풀이한 것이다.[3] 이 때문에 투키디데스를 무신론자로 보는 시선도 있지만, 역사와 신화를 분리하여 설화나 기적의 요소를 배제하고 역사를 서술함은 후대 그리스도교 역사가들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다. 신실한 유신론자들 역시 기적 등에 관한 진술은 쉽게 왜곡되고 날조될 수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투키디데스를 현대적인 무신론자로 보기엔 시대적으로 무리가 많거니와, 본인부터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때문에 무신론자란 평을 듣기를 기피했을 공산이 크다. 동시대 사람인 소크라테스가 신을 우습게 보고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누명으로 처형되었음을 감안하면 특히 더 그렇다. 독자들에게 제발 자기를 법정에 고발해 달라고 광고하려던 게 아닌 이상, 황금기 아테네의 저술을 읽고 저자를 무신론자로 단정하기는 어려운 일이다.[4] 사실 그리스도교가 전래되기 이전 그리스인들이 가졌던 시간 관념은 기본적으로 있었던 일이 반복된다는 순환론적 시간관이었다. 세상이 영원불멸하다는 그리스적인 관념과도 연관이 깊다.[영문] Right, as the world goes, is only in question between equals in power, while the strong do what they can and the weak suffer what they must.[6] 그 유명한 멜로스의 대화이다.[7] 참고로 이 시기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시기에 포함된다. 정확히는 BCE 432~BCE 427 정도로 전쟁 초기.[8] 이 시기에 아테네 인구가 전염병 때문에 1/3 정도 죽어나갔다.[9] 전염병에 대한 기록과 함께 전염병이 창궐하면서 아테네 사회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도 상세하게 기술하였다. #[10] 다만 아직도 병의 정체는 불분명하다. 당 시대의 환자들의 집단 무덤을 조사한 학자들은 유전자 조사와 그의 기록에서 나온 전염병의 증상 관련 서술들을 토대로 티푸스라고 추측하고 있지만 이외에도 증상이 겹치는 다른 전염병들일 가능성이나, 혹은 여러 가지 전염병이 함께 아테네를 강타해서 수차례의 역병을 일으켰을 거라는 다른 추측들도 학계 내에서 존재한다.[11] 그는 전염병이 그 당시 에티오피아에서 시작했고, 이집트와 리디아를 거쳐 그리스 세계로 전염되어 더 넓은 지중해 전역에 퍼졌다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