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9:10:20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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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사람은 누구나 숨기고 싶은 어두운 사실, 잘못한 점이 있으며, 그걸 작정하고 털면 반드시 나오니 조심하자는 뜻.

영어로는 'Everyone has a skeleton in the closet.' 누구나 벽장속에 해골이 있다.

혹은 반대로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다와 비슷한 의미로 "사소한 잘못을 너무 깊숙이 파고드는 건 하지말자"고 할 때에도 쓰인다.

종교적 입장에서 보면 신 앞에서 깨끗한 사람은 드물거나 없기에 이 문장이 통용될 수 있다. 이집트 신화에서는 저승에서 죽은 자의 심장을 저울에 올려놓고 정의의 여신 마아트(Maat)의 깃털과 함께 비교해서 깃털보다 심장이 가벼워야 지옥으로 보내지 않았다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한술 더 떠서 원죄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없기에 털어서 죄 없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예수를 보내어 믿음으로 구원받게 한 것.
이럴 때의 의미는 주로 깨끗한 척 할 때 하는 말로 네가 아무리 깨끗한 척해도 뒷조사를 하면 반드시 나온다. 잘난척 하지마라는 의미이다.

이 말을 악용하면 먼지가 날 때까지 두들겨 패서 먼지가 나오던가, 아니면 없는 먼지도 만들어서 '거봐라 너도 그렇지 않냐' 라는 폭력고문의 정당화, 억지 흠잡기의 정당화 같은 무서운 권위주의식 인권 탄압의 논리로 발전할 수 있다. 애초에 사람을 턴다는 발상 자체가 권위주의의 발상이다보니. 따라서 저 사람에게 죄가 있다고 생각하는 권력자 앞에서 유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할 근거로 삼기 딱 좋은 발상이다. 덤으로 자신이 잘못했을 때 반성은 커녕 너는 잘못 안 하고 산 줄 아냐적반하장으로 악용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2. 지워도 추악한 사람도 있다

털어야 먼지라도 나오는 사람과 애초에 털고 말고 할 필요도 없이 딱 봐도 지저분한 사람은 전혀 다르다. 파블로 에스코바르 같은 경우, 아무리 기부를 하고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각종 복지시설을 세웠어도 결국은 수틀리면 사람을 몰살시키는 마약상에 불과했다. 김일성도 마찬가지로 크게 한 것도 없지만 제 아무리 독립운동가라는 것을 내세워도 나라 하나를 파탄의 경지까지 몰고 간 독재자에 불과했다.

범죄(폭행, 비리, 그외의 제반 경제사범)를 저지르고 이미지를 당장 바꾸기 위해 기부쇼를 펼치는 높으신 분들도 여기에 해당된다.

3. 하지만 진짜로 털어도 먼지 한 톨 안나온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먼지는 가벼운 실수나 거짓말 같은 사소한 게 아니라, 비리 같은 큰 잘못이나 성격의 결점을 뜻한다.
  • 역사에 기록된 청백리
    현대의 법치주의가 정립되기 전, 왕의 말 한마디면 없던 죄도 만들어서 목이 달아날수 있던 전근대에 관료로써 청렴결백하여 어떤 모함과 조사에도 결점이 발견되지 않아 청백리라는 인정을 받는 것은 충분히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1]
  • 이순신
    이순신의 경우 서익[2]과 같은 상관들이 비리를 강요해도 하급자로서 원리원칙을 고수했기에 이순신은 늘상 한직에서 지내곤 했다. 이순신이 상관들 비리를 철저하게 거부하자 이순신을 상관들이 꼬투리 잡을 일을 찾았지만 일절 없었을 정도이고 서익처럼 어거지로 무고하여 강등시킨게 고작이며 그 조차도 무고함이 드러나 복직되었다. 심지어 선조에게 파직당해 백의종군한 때에도 임금에 대한 충심을 잃지 않았으며, 이순신이 없던 때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한 뒤 선조가 돌아와 달라고 하자 복직해 명량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게다가 이순신은 두 번 백의종군 했는데 첫 백의종군은 어처구니 없게도 녹둔도에서 적과 싸워 이겨서[3]였으며 두 번째 백의종군은 암초가 가득한 칠천량으로 출병하지 않아서(무의미한 병력 손실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 외에도 학자들이 진짜로 이순신의 흑역사를 발굴해보려고 털어봐도 먼지는 커녕 미담만 줄줄줄 나오는 형편이다. 오히려 이순신 본인이 저술한 『난중일기』에서 자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판단한 서술들[4]이 나와 '이순신을 부족한 인재라고 비판한 사람은 이순신 본인이다.' 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
  •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과 그 막내 남동생인 유특한 유유제약 창업주
    형제가 나란히 털어도 먼지 하나 안 나온 사례. 유일한은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 정치자금을 내지 않아서 불시에 보복성 세무조사를 여러 차례 당했는데 먼지가 하나도 안 나왔다고 한다. 결국 이승만은 끝내 유일한 박사에게서 자금을 강제로 압수해서 뜯어냈지만 박정희는 완전히 깨끗하다는 보고를 받고 자신도 놀랐는지 정말로 그렇다면 오히려 상을 줘야 마땅하다며 1968년에 동탑산업훈장을 수여했다. 심지어 박정희 때는 세무조사를 했는데, 굳이 안 내도 될 것 같아 보이는 자잘한 세금까지 1원도 누락 없이 착실히 내서 세무조사를 한 사람이 "이런 사람도 있나?" 라고 반응했을 정도라고. 전두환에게서 여러 번 자금을 요구받았으나 동명그룹이나 국제그룹처럼 조금만 낸 것도 아니고, 아예 한 푼도 내지 않았던 터라 전두환도 포기했다고 한다. 심지어 유일한이 동생과 아들을 포함한 친인척들을 자신이 세운 유한양행에서 퇴직시킬 때 '퇴직금이 너무 많다고' 소송까지 걸어서 재판을 맡은 판사들까지 경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 앙드레 김: 1999년 5월 24일, 대한민국 정치권을 뒤흔들었던 권력형 비리 의혹 사건이자 역사상 최초로 특별검사(특검)제도 도입의 배경이 되었던 옷로비 사건에 연루되어[5] 피해자 신분으로 국세청에서 세무조사를 털었는데, 탈세 혐의가 단 하나도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오히려 국세청에서는 성실 납세자로 표창장까지 수여했다.# 게다가, 자선 복지단체에다 수 억 단위의 돈을 기부도 많이 했고, 고액 기부자 모임으로 유명한 아너 소사이어티 회원에 등록되기도 했다. 1990년대 당시에는, 사업 좀 크게 한다는 사람들은 대부분 탈세 정도는 기본으로 깔고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정말로 국세청에서 세무조사로 털었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온 사람이었으니 어떤 의미로는 정말 대단한 거물이었다. 게다가, 앙드레 김은 청문회가 끝난 후 자신을 비웃고 불쾌하게 대접한 정치권과 언론 인사들을 상대로 용서해주면서 "제 패션쇼에 한 번 구경오세요." 라고 초대하며 대인배같이 행동하는 멋진 모습도 보여줬다.
  • 프레드 로저스
    1966년에서 2001년까지 방영됐던[6] 미국산 교육용 프로그램 로저스 아저씨네 동네(Mr. Rogers' Neighborhood)의 진행자였던 프레드는 프로그램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을 일상 생활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선한 모습에 시청자들이 감동을 받아[7] 차 도둑도 그의 차를 죄송하다면서 제자리에 돌려주는 등 거의 성자 취급을 받았다. 얼마나 존경을 받았으면 그가 온몸에 문신을 새긴 전직 네이비 씰 저격수라는 등의 도시 전설이 돌아도 소개하는 사이트가 알아서 아니라고 해명해준다. 천하의 4chan도 막장인 우리를 이해해줄 수 있을 만한 유일한 인간이라면서 그리워하고 있다.


[1] 다만 시대의 기준에 따라 현대의 법리로는 불법인 것이 그 시대에는 불법이 아닐 수는 있기 때문에 이 기준을 시대를 막론하고 적용하기는 어렵다.[2] 徐益, 1542년(중종 37) ~ 1587년(선조 20). 효종, 현종 때의 명신인 서필원의 증조부로 부여 서씨. 이순신을 억울하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파직한 인물이다보니 위인전이나 드라마나 소설같은 매체에선 이순신을 무고하는 썩은 쓰레기로 나오는게 일쑤이다. 실제론 서익은 당대 병조·이조좌랑, 안동부사, 의주목사 등을 지냈으며,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이이(李珥)·정철(鄭澈)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은 사람이다. 죽은 뒤에도 서원에 배향되었을 정도로 존경을 받았던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던 흔적이 많다. 하지만, 다시 상관(정확히는 감찰관)으로 와서 억지 트집을 잡아, 억울하게 강등당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이순신과의 악연을 지닌 자이다. 그 이유는 이순신에게 자신의 친구를 추천하라는 요구를 하다가 거절당한 것에 대한 개인적 보복이었다. 아무튼, 억울하게 무고하여 하급자를 처벌했음에도 당대에는 처벌을 받지 않아 높으신 분들 눈치를 보며 굽신거리던 인물이 아닌가하는 의심도 있는데 위에 쓴 대로 상부에선 높이 평가되었던 점도 있고 기록을 보면 탐관오리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고한 이순신을 개인적으로 보복하려고 한 점으로 인하여 서익 본인은 현대에 와서 이순신을 무고한 탐관오리같이 막되먹은 자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니 자업자득으로 남긴 이미지가 된 셈이다. 참고로 우암 송시열도 서익을 존경했을 정도였지만 이젠 매체나 위인전을 통하여 간신배같은 이미지만 남아있다. 오죽하면, 서익의 후손들도 살아 생전에 존경받던 서익이 이순신 무고로 인하여 간신배로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이순신 무고는 분명한 사실이라 뭐라고 하소연도 못할 정도이다.[3] 이순신의 지휘관이 도주했는데 그 지휘관이 도주한 죄로 처벌 당하지 않으려고 이순신을 무고했기 때문이었다.[4] 사직의 위엄과 영험에 힘입어 겨우 조그마한 공로를 세웠는데, 임금의 총애와 영광이 너무 커서 분에 넘쳤다. 장수의 자리에 있으면서 티끌만한 공로도 바치지 못했으니, 입으로는 교서를 외고 있으나, 얼굴에는 군사들에 대한 부끄러움만이 있을 뿐이다.
난중일기》, 을미년(1595년) 5월 29일 이순신 본인이 스스로 내린 평가.
[5] 국민의 정부 시절, 최순영 신동아그룹 회장의 부인 이형자가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 부인의 옷값을 대신 내 주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 때문에 '옷값대납사건'이라고 불리기도 한다.[6] 1966 ~ 1968년까진 NET, 이후 PBS에서 각각 방영됨.[7] 호구라고 비웃던 방송국 직원들이 가정사나 인생사가 생기면 그를 찾아와서 펑펑 울면서 상담을 받고, 팬들이 질문을 하거나 조언을 구하면 그 팬은 물론이고 가족에게까지(!) 친필 편지를 보내는 등, 다 적으면 이 문서보다 길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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