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8 13:38:41

태평양 전쟁/경과




1. 개요2. 1941년
2.1.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연합군의 선전포고2.2. 괌과 웨이크 섬을 점령하다2.3. 영국령 홍콩을 점령하다2.4. 인도차이나 반도를 향하여2.5. 남방작전을 개시(1941 ~ 1942)
2.5.1. 미국령 필리핀 점령2.5.2.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점령2.5.3. 인도네시아 점령2.5.4. 미안마 점령2.5.5. 자만한 일본
3. 1942년
3.1. MO 작전이 단행되다3.2. 미국, 만회할 방법을 찾다3.3. 미일역전의 순간, 미드웨이 해전3.4. 일본, 어떻게든 정신승리 해보려하다3.5. 과달카날에서 승부를 겨뤄보자
4. 1943 ~ 1944년
4.1. 계속되는 패전(연전연패)4.2. 필리핀 탈환과 레이테만 해전
5. 1945년
5.1. 이오지마에서의 일전5.2. 일본을 조기 항복시킬 방법이 없을까?5.3. 도쿄, 불바다가 되다5.4. 이오지마 전투의 후폭풍과 원자폭탄 투하, 그래도 항복하지 않는 일본5.5. 드디어 나서는 소련과 일본의 항복

1. 개요

태평양 전쟁 경과에 대해 다루는 문서

2. 1941년

2.1.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연합군의 선전포고

전쟁의 시작은 1941년 12월 7일,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면서 본격화되었다. 일본군은 진주만 해군 기지를 공습하여 미군의 전함과 항공기들에 큰 타격을 입혔고, 이 공격으로 미국은 2,400여 명의 사상자를 내며 엄청난 피해를 입게된다.

이에 1941년 12월 8일 ~ 9일 미국과 연합군 전영은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게 한다. 태평양 전쟁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2.2. 괌과 웨이크 섬을 점령하다

진주만 공습 이후, 일본군은 자국령이었던 북마리아나 제도팔라우, 일본명 남양 군도를 중심으로 주변의 미국령 도서들을 빠르게 제압하기 시작했다. 필리핀을 제외하면 최서단의 미국령이었던 섬에는 진주만 공습과 동시에 일본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당시 괌 섬에는 미 해병대 1개 중대와 아주 약간의 소형함정만이 있었기에 단숨에 수비군의 항복을 받아냈다.(제1차 괌 전투)

반면, 동시에 공격을 가한 웨이크섬에서는 미국 해병대의 거센 저항을 받아 1차 공격대는 몇 문 안되는 5인치 해안포구축함 2척이 격침당하고 3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는데도 미군 전사자가 0명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내며 말 그대로 탈탈탈 털렸고, 제6전대의 중순양함 4척과 진주만 공습에서 돌아오는 제국 연합함대의 지원까지 받아가며 12월 23일에야 간신히 점령했고 그 와중에도 큰 피해를 입어야 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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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영국령 홍콩을 점령하다

개전이 되기 전에 이미 영국령 홍콩일본군에 의해 겹겹이 포위된 상황이었다. 일본군중일전쟁의 와중에 이미 광둥성 해안지방을 점령했고, 1940년에 구룡 반도와 접한 중화민국 영토를 모조리 접수하여 영국군과 대치했다.

인도차이나 반도마저 일본군에 넘어가버리고, 홍콩의 군사적인 가치나 방어 가능성에 환상을 가지지 않았기에 동양함대도 개전 전에 이미 싱가포르로 기지를 옮긴 상태였다. 하지만 영국으로서는 전투도 치르지 않고 홍콩을 내주면 나중에 돌아오기 어렵기에 방어 준비에 나섰다. 영국군은 구룡반도 북단에 방어선을 구축하고, 13,000여 명의 홍콩 수비대를 편성하였다. 홍콩의 방어에는 또한 캐나다군의 왕립소총대대와 위니펙척탄병대대도 파견되었는데, 이는 전임 홍콩 방어 사령관이던 아서 에드워드 그라셋 소장이 캐나다 출신이라 귀국하면서 캐나다의 참모총장에게 홍콩 방어에 도움을 주었으면 한다는 제안을 캐나다군이 받아들이면서 이뤄진 일이였으며, 캐나다군이 태평양 전선에 참여한 몇 안 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일본군도 홍콩과 인접한 이후로 언제든지 홍콩을 공략할 수 있도록 23군을 편성하고,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한 공성부대로 제1포병사령부를 신설하여 언제든지 홍콩을 공격할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

12월 8일, 일본기에 의해 카이탁 비행장이 폭격받는 것을 신호로 본격적인 홍콩 공략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요새화된 구룡 반도 방어선 돌파는 시일을 들여 차근차근 하기로 했었는데, 하필 어느 똘기 충만한 연대에 의해 스케쥴이 크게 앞당겨져 버렸다. 공격을 맡은 38사단 중에서도 후미를 맡은 228연대가 전공에 눈이 멀어 공격을 감행, 원래 다른 연대가 맡기로 한 영국군 방어고지 하나를 와카바야시 도이치라는 장교가 이끄는 1개 중대의 돌격으로 공격 당일에 함락시켜 버렸다. 노발대발한 사단장이 당장 후퇴하라고 지시했으나, 연대장은 이를 무시하고 기어이 추가 공격을 가해 다른 고지까지 함락시켰다. 개전 초기 이런 돌격에 의한 방어선 돌파의 신화는 현지군 중심의 동남아 식민지군에게나 우연히 통했을 뿐이지만, 훗날 결과적으로는 일본군 육군에 근성론을 더욱더 불어넣게 되었다. 1942년 과달카날 전투부터 일본군 돌격 신화는 제대로 된 임자를 만나며 소멸하기 시작한다.[2]

이를 본 다른 연대들도 자극받아 계획보다 앞서 적극적으로 공세를 시작했고, 격노한 사단 사령부와는 별개로 23군 사령관 사카이 다카시 중장은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전면공세를 하자고 결론, 포병을 동반하여 방어선을 공략하여 개전 3일만인 11일에 방어선은 완전 붕괴되어 현지인 수비대와 영국 해군수병 몇 만명만이 있었던 영국군은 홍콩 섬으로 후퇴했고, 13일에는 구룡 반도가 완전히 일본군의 손에 떨어져버렸다.

일본군은 구룡반도만 점령하면 홍콩 공략은 끝이라고 생각했으나, 홍콩 총독과 수비대 사령관은 홍콩 섬에서 끝까지 싸워보기로 결심한 상태였다. 일본군은 구룡반도에서 홍콩 섬으로 이어지는 급수를 끊고 항복할 것을 권유했으나 영국 총독은 항복을 거부했고, 그 때문에 일본군은 도해작전을 계획해야 했다. 홍콩에는 최소 반 년치의 식량과 탄약과 유류가 준비되어 있어서 상륙만 막아낸다면 어떻게든 방어가 가능하다고 수비대는 생각했다. 거기에 수비대 사령관은 광동성 전역에서 반격을 진행 중이며, 길어봐야 몇 달 이내로 홍콩 주변의 일본군을 뒤치기할 수 있다는 국민당군 사령관의 말을 믿고 있었다. 사실 실제로 국민혁명군은 홍콩의 구원을 위해 최정예 부대이던 9전구의 부대들을 남하시키긴 하였고, 홍콩에 파견되었던 중국군 소장이던 진책 소장의 경우 일본군과 내통하는 5열을 분쇄하여 영국군이 전투에 집중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렇지만 중국 전선에서 일본군은 위기에 몰리면 어김없이 화학전을 실행했기에 화학전에 대한 대비가 부족한 중국군의 구원 시도 자체는 실패로 끝났을 확률이 매우 높다.

결국 12월 18~19일 이틀에 걸쳐 일본군은 결사적으로 도해를 개시하여 상륙에 성공했다. 상륙 직후 일본군의 거센 공세에 동부여단이 스텐리 반도로 스스로 철수하면서 일본군은 병력을 자유롭게 운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해 일본군의 공세가 서부여단이 담당하던 황니천 계곡으로 집중되면서 19일엔 서부여단장이던 존 로슨 준장이 전사하고 황니천 계곡이 함락되었지만, 고속정의 지원을 받아가면서 일본군의 공세를 간신히 저지하는데는 성공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대담 저수지의 급수시설을 발견하고 급수를 끊어 홍콩은 바로 식수난에 빠졌다.

이 중 노스포인트 발전소를 지키던 퓨질리어 중대의 분투는 놀랍다 못해 눈물겹기까지 하다. 이들은 18~19일에 걸쳐 18시간 동안 발전소를 지키다가 결국 모든 대원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히며 전멸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대원들의 출신 성분. 중대원 중 노스포인트 발전소에서 일하던 홍콩전기회사 직원들을 제외한 대원들은 본래 지역 방위를 맡은 의용대인 홈가드의 노병들이었다. 이들은 나이가 너무 많아서[3] 실제 전쟁이 발발하기 전에는 홈가드 명단에만 이름이 올랐을 뿐 제대로 동원되지도 않았다. 게다가 이 노병 중에는 무역 회사의 사장, 고급 사교 클럽의 총무, 귀족 신분의 귀금속 상인 등 홍콩의 저명한 상류층 인사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이 발발하자 재산을 챙겨서 홍콩에서 탈출하기는커녕, 장교도 아니고 일개 병사 신분으로서 일본군과 끝까지 맞서 싸운 것이다.

잔존 수비대 및 영국 해군 수병들 등 영국군은 필사적으로 싸웠으나 일본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악착같이 공격해오며 거점 하나하나를 빼앗기는데다 파리시 산이 점령되면서 빅토리아 시티로 가는 길이 열렸고, 탄약과 식수마저 바닥나 더 이상의 저항이 어려워지자 결국 방어사령관이던 몰트비 소장은 25일 크리스마스날 페닌술라 호텔에서 일본군에 항복하고 말았다. 영국은 홍콩 함락을 막기 위해 장제스에게 중국군을 보내서 홍콩을 지원해달라고 부탁했고 장제스 역시 수락했으나 문제는 중국군 예비대가 홍콩에서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운남, 광서의 내륙지방에 있는 상황에서 기계화가 안되어있다 보니까 도보로 행군해야 했다는 것이고, 홍콩 근처에도 도달하기도 전에 홍콩은 함락되었다.

애초에 영국은 극동방어에서 싱가포르에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 홍콩은 비록 일본과 전쟁 시 사수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으나, 그렇다고 무혈로 홍콩을 내 주기에는 전쟁 이후의 재확보에 지장이 있을 것으로 예상하여 홍콩 방위를 포기한 것은 또 아니었다. 하지만 전투 개시 불과 18일만에 홍콩이 함락되는 충격적인 결과가 나왔다. 그래도 홍콩은 한줌밖에 되지 않는 영국군 노병들과 약간의 현지 홍콩인 부대들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싸워서 그래도 전체적으로 할수 있는만큼 했다고 평가받는다. 진짜 수치스럽게 함락된 건 말레이시아싱가포르.

이후 홍콩은 점령 일본군의 야만적인 통치로 말 그대로 조리돌림 당했다. 페닌술라 호텔은 토야 호텔로 이름이 바뀌었고, 영국 왕실을 상징하는 거리 이름이나 기타 영어 이름의 거리들은 몽땅 일본어로 개명되었으며, 학교 및 공공장소에서는 영어 사용이 금지[4]되고 일본어가 공용어로 지정됐다. 그리고 조선에서처럼 신사참배를 강요해 빅토리아 피크에 홍콩신사가 들어서기도 했다.[5] 홍콩에 거류하게 된 일본인은 과거 영국인의 자리를 빼앗아 1등 국민이 되고 영국인중국인 계통의 홍콩사람들은 졸지에 2류 아니면 3류로 굴러떨어졌다. 아무리 식민지 초기 영국인들이 중국인을 2등 국민 취급해서 "개와 중국인 출입금지" 등의 간판이 여러 곳에 있었다지만, 아예 이성을 잃은 일본인보다는 나았었다. 홍콩 경무처도 해체되어 일본 제국 육군 헌병이 그 자리를 대신했으며, 서슬 퍼런 공포 정치를 펼쳤다. 일본군은 홍콩 곳곳에서 민간인 학살을 벌이기도 했다.[6] 태평양 전쟁 기간 중 홍콩 총독을 역임한 일본군 장성 3명 모두가 전후에 전범으로 단죄받았다. 아무튼 이 때의 악연으로 인하여 홍콩은 지금도 반일 감정이 매우 강하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천하의 대영제국이 고작 아시아의 일본 따위에게 패하고 왕령 식민지를 내주었다는 소식은 아시아 전체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장제스는 외교부에 영국이 과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도 홍콩을 계속 사수할 의지나 능력이 있을지를 타진하면서 그 전까지 크게 건드리지 않았던 홍콩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나섰고, 동남아시아의 영국인 휘하의 아시아인 엘리트들도 영국인들도 이제 보니 신이 아니고 한낱 여느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반항적으로 변해갔다.

한편 홍콩 바로 옆에 있던 마카오는 일단 중립국인 포르투갈의 영토였으므로 일본군도 굳이 점령하지 않았다. 그 대신 마카오는 중립국 항구로서 기능을 계속했으며, 이 곳을 통해 포르투갈이 일본에게 석유 등의 물자를 판매하고, 일본이 중국을 감시하는 창구 중 하나로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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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인도차이나 반도를 향하여

뒤를 이어, 일본 제국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침공한다. 당시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게 항복한 상태라 일본이 동남아 식민지를 빼앗아가든말든 뭐라할 여유가 없었다.

일본은 중국을 압박한다는 핑계로 베트남을 무력점령하고 비시 프랑스를 협박해 베트남에 2만 5천명의 일본 주둔군을 두었다.

운좋게도 1941년에 나치 독일이 독소전쟁을 개전하면서 일본 제국의 도움이 더 절실해지자, 히틀러는 일본이 인도차이나를 사실상 제 안방처럼 휘젓고 다니도록 냅뒀다.

그렇게 일본은 손쉽게 인도차이나 반도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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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남방작전을 개시(1941 ~ 1942)

전반적 배경은 진주만 공습의 원인과 일맥상통한다. 중일전쟁이 길어지며 물자난은 가중되었는데, ABCD 포위망으로 전쟁에 필수적인 전략자원인 석유 수급이 어려워진 일본의 입장에서는 석유, 고무와 같은 핵심 전략자원 확보를 위해 서구열강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를 기필코 획득해야 했다.[7]

일본으로서는 어떻게든 동남아시아 전역을 확보해서 대동아 공영권을 완성시키는 것을 전략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일본은 유럽전선에 휩쓸린 서구열강들이 프랑스처럼 식민지를 포기할 것이라 기대했고 아울러 동남아시아만 모조리 장악하면 고립된 중국이 알아서 항복할 것이라 착각했다.

대본영은 진주만 공습이 성공한다는 전제하에 서태평양과 동남아시아를 모조리 석권하는 치밀한 전략 계획과 타임 테이블을 수립하여 남방작전을 개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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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 미국령 필리핀 점령

당신은 이제 운이 다했소... 당신의 보급도 이제 반으로 줄어들었소... 그러나 당신의 명예와 명망은 높이 사질 것이오.
혼마 중장, 필리핀 전투 당시 맥아더 장군에게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67px-Invasion_of_the_Philippines%2C_1941.jpg
나는 돌아올 것이다. (I shall return.)
더글라스 맥아더가 호주로 탈출하면서 남긴 말[8]
역시 개전과 동시에 필리핀도 공격을 받았다. 사실 필리핀의 미 극동군 항공세력은 개전이 되면 즉시 대만의 일본군 비행장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선제 공격 계획을 갖고 있었으나, 공격에 나서기도 전에 일본군의 맹공을 받고 핵심 항공전력 상당수를 상실해야 했다. 항공기 자체 숫자도 적었을 뿐더러 일본군의 제로센Ki-43 하야부사를 상대하기에는 P-40 워호크는 역부족이었고, 무엇보다 파일럿의 기량면에서도 미군은 일본군보다 많이 부족했다.

압도적인 항공전력으로 미군 항공세력을 궤멸시킨 일본군은 바로 필리핀의 핵심이라 할 만한 루손 섬 상륙을 개시했다. 대만에서 출병한 일본 제14군은 루손 섬 북부 아파리 등지로 상륙했고, 12일에는 팔라우에서 출발한 16사단이 방어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루손 섬 남부 레가스피에 상륙, 북상하기 시작했다. 상륙 단 5일만인 13일에 일본군은 이미 클라크필드까지 진격했고, 남북으로 협격당할 위기에 몰린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은 전쟁 전에 수립된 계획대로 방어 및 지연전으로 전환하여 본국으로부터의 증원을 기다리는 것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이에 미군은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를 오픈 시티, 즉 무저항도시로 선포한 뒤 포기하고 전 병력을 바탄 반도로 후퇴시켜 최후의 방어전을 개시했다.

1942년 1월 7일부터 시작된 바탄 전투에서 미군은 성공적으로 방어전을 수행하며 일본군의 마닐라 항 이용을 막아내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좁은 바탄 반도에는 10만에 달하는 미군과 필리핀군 병력이 몰려 있었다. 거기다 예상치 못하게도 연합군을 따라 들어온 피난민까지도 함께 있었기 때문에 미군은 보급 문제로 허덕여야 했고, 게다가 열대 질병까지 창궐하는 상당히 열악한 상황에 몰려 있었다.

바탄 반도 내부 상황 뿐 아니라 외부 상황도 절망적이기 짝이 없었다. 기본적으로 필리핀 방위계획의 기본 골자는 바탄 반도에서의 농성으로 적이 마닐라를 이용하지 못하게 강제하는 동안 막강한 미 태평양 함대가 증원 병력과 함께 필리핀에 도달하여 적을 박살내는 것이었다. 문제는 구원투수가 될 태평양 함대가 반신불수가 됐다는 점이었다. 사실 전략적인 면에서 보자면 진주만 공습이 성공한 시점부터 필리핀 전역의 승패는 이미 결정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가 문제였을 뿐. 여기에 바탄 반도 전투가 한창 진행 중인 와중에 말레이와 싱가폴이 함락되고 동인도 제도에서는 ABDA 함대가 자바해 해전에서 일본군에 완패함으로써 이제는 호주까지도 일본군의 위협에 노출되며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만 갔다.

결국 맥아더는 바탄 전투 와중인 3월 12일, 루스벨트의 철수 명령을 받고 호주로 탈출했다.[9] 맥아더가 탈출한 이후 휘하 군단장이었던 웨인라이트 소장이 중장으로 진급하고 루손군을 비롯한 필리핀 전체의 지휘권을 인계받았다.

한편 초기의 공세가 실패한 이후 일본군은 관동군으로부터 병력과 화기를 증원받은 뒤 대대적인 해상/항공지원까지 받아가며 4월 3일, 최후공세를 개시하여 미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화력과 병력의 열세 속에 루손군은 4월 9일 일본군에 항복했다. 루손군이 항복한 이후에도 웨인라이트 중장이 지휘하는 마지막 수비대는 마닐라 만을 감제하는 코레히도르 요새에 농성하며 저항을 이어나갔다. 일본군의 거센 공격 끝에 5월 7일 웨인라이트 중장이 항복했다. 자세한 것은 드럼 요새를 참고.

남부 필리핀 지역은 일본군의 가용병력이 부족하여 꼭 필요한 지역만 장악하고 공격을 감행하지 않았으나 루손군의 항복 시점 즈음에 증원병력들이 도착하며 공격에 나서서 남부 필리핀도 전부 장악하였다. 일본군은 남부 필리핀 중에서도 주요 도서인 세부, 피나이, 민다나오에 상륙하여 미군을 격파했으나, 주력 섬멸에는 실패했다.

잔존 미-필리핀군은 주력을 보존한 채 안전한 내륙 산악지대로 철수하여 게릴라전을 준비중이었다. 몇몇 부대는 이미 부대를 해산시키고 나누어 게릴라전을 수행중인 상태였다. 따라서 필리핀 중-남부의 미군에게 항복을 받아내기가 복잡한 상황이었다. 결국 웨인라이트 사령관이 이미 항복한 포로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 있다고 일일이 지휘관들을 설득하여 항복이 진행됐다. 하지만 중부-남부의 연합군은 대부분 필리핀 현지인으로 구성됐기 때문에 굳이 미군 지휘관들을 따라 포로수용소를 들어갈 바에야 차라리 걍 탈영해서 각자 집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계속 내륙 산악지대에 남아 기회를 엿보며 맥아더가 진짜로 돌아올 때까지 게릴라전을 이어나가는 선택을 했다. 최종적으로 (부대를 아예 해체해버리거나 고립된 소규모 병력 정도를 제외한) 필리핀의 모든 제대의 항복이 완료된 것은 6월 9일의 일이었다. 일본은 이날 필리핀 점령을 선포했다.

필리핀 침공은 원래 1942년 2월 중순까지 50일 안에 마무리짓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하지만 예정일보다 4개월 가까이 초과되어 일본군은 상정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손실을 강요받았다. 그 결과 혼마 장군은 14군 사령관직에서 보직 해임되어 한직을 돌다가 이듬해 8월에 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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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2. 태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점령

마찬가지로 개전과 동시에 인도차이나 주둔 일본군이 국경을 넘어 태국으로 진군했다. 태국군과 일본군의 몇시간 동안의 산발적 교전 이후 양측간 교전행위는 종식되고, 일본군의 태국 영토 진주 및 통행권, 군사기지 이용의 권리가 주어졌다. 이와 동시에 태국도 추축국에 가담했다.

12월 10일, 영국 동양함대가 말레이 해전으로 전멸당하는 것으로 일본군의 제해권이 확립되었고, 일본군은 육군을 말레이 반도 동해안 곳곳으로 상륙시키며 영국군 방어선을 무력화시켰다.

한편, 주력부대는 태국 국경에서부터 남하하여 서해안 도로를 따라 남하, 12월 30일에 콸라룸푸르를 점령하고 1월 하순경에 싱가포르를 포위하는데 성공, 끝내 야마시타 토모유키가 영국군 사령관 퍼시벌로부터 항복을 받아낸다.[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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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 인도네시아 점령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779px-Pacific_War_-_Dutch_East_Indies_1941-42_-_Map.jpg
서쪽의 수마트라 섬에서 시작해 동쪽의 뉴기니 섬으로 끝나는 남방작전 최대의 하이라이트지만, 워낙 수비하는 네덜란드군의 병력이 적어 큰 전투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일본군에 의한 일방적인 공격과 점령의 연속이었다.

동인도제도 최초의 공격은 12월 15일, 브루나이 상륙으로 시작되었다. 영국령이었던 사라와크(북보르네오)에 가해진 일본군의 상륙은 당연히 유전지대의 확보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는데, 영국군의 방어가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중심으로 구축되어 있어 북보르네오의 일본군은 큰 저항을 받지 않고 목표를 점령했다. 24일에는 쿠칭이 함락되었고, 1월 11일에는 네덜란드령 남보르네오의 타라칸에도 일본군이 상륙했다. 이후 24일에 발릭파판이, 2월 10일에 반자르마신이 함락되면서 보르네오 섬은 일본군의 손에 떨어졌다. 이 와중에 발릭파판 앞에서 미군 구축함전대가 일본 수송함대를 기습하는데 성공, 수송함 3척을 격침시키는 데 성공하여 개전 후 첫 승전으로 미국 전역에 보도되었다.(미:마카사르 해협 해전/일:발릭파판 해전) 그런데 이때 격침된 수송선들은 빈 배였다.

보르네오 섬 동쪽의 셀레베스 섬에도 공격이 이루어졌는데, 섬 북단 메나도에 가해진 공격은 상륙전이 아닌 일본군 공수부대에 의한 공중강습으로 태평양 전역 최초의 공수작전이었다.## 1월 11일, 해군육전대 공수부대에 의해 메나도 비행장에 일본군 공수부대 1개 대대가 투입되었다. 네덜란드군 수비대는 거세게 저항했으나 공수부대에 의한 공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덕분에 일본군을 몰아내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다음날 2차 공수작전, 그리고 첫 공수작전과 동시에 개시된 상륙작전 등으로 일본군의 증원이 연거푸 오자 결국 패퇴, 항복하고 말았다.

어쨌든 메나도를 무사히 점령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발판으로 2월에 티모르 섬과 발리 섬을 공격했다. 티모르 섬에서는 다시 공수부대가 투입되었고, 이 와중에 일본은 중립국이었던 포르투갈령 티모르를 무단으로 침공, 영토사용권을 강제로 얻어냈다. 티모르 침공에 대한 연합국의 공격을 우려한 대본영은 2월 19일, 호주 북단의 포트 다윈을 연합함대를 동원해 폭격하여 남부의 위협을 제거했다.

한편, 말레이 해전 승리로 제해권을 쥔 일본군은 수마트라 섬 최대의 유전지대인 팔렘방을 공격했다. 2월 14일, 일본 육군 공수부대인 제1정진단이 우선 투입되어 비행장과 유전 지대를 공격했다. 이를 막는 방어군은 3,000여 명인데 그중 절반이 현지인 부대로 제대로 된 전력이라 하기에 어려웠고, 나머지 병력 중 1천여 명은 급파된 호주군 병력이라 현지 지리를 잘 몰랐다. 결국 일본군은 이틀에 걸친 공수작전으로 비행장을 뒤이은 육군 상륙부대의 지원으로 유전과 정유시설까지 확보, 동남아 최대의 유전 및 정유시설을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메나도 공수전에 투입된 병력은 해군육전대 요코스카지대, 팔렘방 공수전에 투입된 병력은 육군 제1정진단으로 각각 소속이 다른데 이는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에 기인한 결과로 서로 자존심싸움 때문에 각각의 공수부대를 운용한 것이다.

이 시점에서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남은 것은 자바 섬뿐이었다. 자바 섬 상륙을 막기 위해 ABDA 연합함대가 출격, 2월 27일 일본군 수송선단을 포착하여 공격했으나 일본군 함대가 우루루 몰려오면서 오히려 역관광, 압도적인 전력차 속에서 분전했으나 네덜란드 경순양함 데 로이테르와 자바, 네덜란드 구축함 코르테놀, 영국 구축함 엘렉트라와 주피터가 격침당했고 데 로이테르에 승선하고 있던 연합함대 사령관 카렐 도르만이 전사했다.(제1차 자바 해전) 뒤이어 2월 28일에서 3월 1일에 걸쳐 후퇴하려던 연합군 함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미국 중순양함 휴스턴, 오스트레일리아 경순양함 퍼스, 네덜란드 구축함 에베르첸이 격침당했다.(순다 해협 해전) 3월 1일 오후, 살아남은 잔존함정에 대한 공격까지 이루어져 영국군 중순양함 엑스터와 구축함 엔카운터가 격침되었고 후퇴하던 미국 구축함 포프도 결국 격침당했다.(제2차 자바 해전) 이를 모두 합쳐서 자바 해전이라고 통칭한다.

이렇게 연합군 함대가 완전히 괴멸되는 틈을 타 일본군은 2월 27일과 28일에 걸쳐 자바 섬의 동서 양쪽에 상륙했다. 동쪽에 48사단, 서쪽에 2사단, 그리고 각 사단을 지원하는 지원부대까지 대대적으로 상륙시킨 일본군은 말레이에서 그랬던 것처럼 은륜 부대(자전거 부대)와 치하를 투입해 신속하게 진격했다. 물론 이 시점까지 자바 섬에는 연합군이 10만여명 정도 남은 상태였으나, 병력 중 절반이 네덜란드를 위해서는 별로 싸울 생각이 없는 인도네시아 현지주민 민병대였고, 사실상 저항능력과 의지를 상실한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지상에서의 저항조차 제대로 못했다. 결국 최후의 거점인 반둥에 집중포화를 얻어맞은 후인 3월 8일, 라디오 방송을 통해 네덜란드 식민지 정부는 항복을 선언했다. 이후 일본군의 공격은 뉴기니 접수로 이어졌고, 뉴기니 침공은 1942년 이후 남태평양 전역의 원인이 된다.

번외 이야기로 이 당시 기가 막힌 방법으로 탈출한 네덜란드 함선이 있다. 소해정인 아브라함 크리인센(HNLMS Abraham Crijnssen)은 자바 함락 직후 다른 연합군 함대와 함께 자바에서 탈출하려 했다. 탈출은 상당히 어려웠는데 이미 자매함인 HNLMS Pieter De Bitter는 3월 2일 수라바야에서 일본군에게 노획당했고, 역시 또다른 자매함인 HNLMS Eland Dubois과 Van Amstel 또한 3월 8일 격침당했다. 이 때문에 아브라함 크리인센 호는 특별한 방법을 써야 했는데, 바로 배를 섬처럼 위장하는 것이었다. 육지의 나무와 풀을 가져다가 배에 빽빽하게 심어서 가까이 접근해도 선박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결국 크리인센은 자바를 탈출하는데 성공한 마지막 함선이 될 수 있었고, 3월 20일 오스트레일리아의 프리맨틀(Fremantle)에 도착했다. 도착 후엔 오스트레일리아 해군 소속으로 활동하다가 태평양 전쟁 종전 후 네덜란드로 복귀, 1960년에 퇴역했다. 해당 함선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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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4. 미안마 점령

태국이 일본과의 군사동맹을 맺게 되면서 버마 식민지도 일본의 침공 위협에 노출되었다. 문제는 10만에 달하는 영국군 병력이 홍콩과 싱가포르에서 포로로 잡히고 해상세력도 괴멸되어 버마 식민지를 방위할 제대로 된 병력이 얼마 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원래 일본군은 전략적 가치가 별로 없던 버마를 공격할 계획은 없었지만 필리핀, 말레이, 네덜란드령 동인도, 뉴기니 등이 생각보다 너무도 쉽게 점령되자 크게 고무되어 1941년 12월 버마 공격을 결정하게 된다.

당시 버마에는 1만 4천명의 병력이 방위를 하고 있었는데 다른 식민지군들과 마찬가지로 제대로 된 전투태세를 갖추지 못한 부대들이었다. 영국은 버마보다는 인도를 사수하기로 방침을 결정하고 버마 방위를 돕겠다는 장제스의 제안도 거부했다.

그러나 막상 버마를 지킬 수 없다는 버마 총독 레지날드 스미드의 보고에 장제스의 제안을 수락했지만 버마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우려하여 어떠한 협조도 거부했다.[11]

1942년 1월 일본군의 버마 공세가 시작되자 영국에서 급파된 사령관 알렉산더 해럴드 장군은 버마 사수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모든 물자와 시설을 파괴하며 버마 북부와 인도로 후퇴했다. 3월에 버마의 수도 랑군이 함락되었고 주요 거점들이 모두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와중에 중국원정군을 지휘하고 있던 조지프 스틸웰 장군은 일본군의 전투력을 얕잡아보고 반격만이 효과적인 버마 방어라고 주장했다.

1942년 3월 일본군이 만달레이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스틸웰은 휘하 2개 사단에게 공격을 명령했다. 하지만 영국은 중국군을 전혀 돕지 않고 일방적으로 철수해버렸고 중국군은 일본군에게 포위되었다.

결국 스틸웰은 4일만에 패배를 인정했지만 모든 책임을 중국군의 기량에게 돌렸다. 하지만 이 상황을 타개한 것은 쑨리런이 지휘하는 중국군 38사단이었다. 중국군 38사단은 포위된 영국군과 민간인들을 구출했고 영국군과 중국군은 모두 피난길에 올랐다.

중국군 38사단을 제외한 모든 부대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200사단장 다이안란이 전사했으며 가뜩이나 부족한 장비들도 잃어버렸다.

일본군은 버마를 장악하고 중국-버마 국경을 차단하여 윈난 성을 위협하면서 버마 루트를 차단했다. 장제스는 급히 버마 국경에 3개 사단을 파견하였으나 일본군은 더 이상 공세를 취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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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5. 자만한 일본

"승리의 과실이 우리의 입 안으로 너무나 빨리 들어오고 있소."
쇼와 덴노, 1942년 그의 생일(4월 29일)에
1942년 5월, 일본은 작전대로 동남아시아 전역을 완전히 지배하는 데 성공한다.[12] 태국은 일본의 군사동맹에 가담했고, 나머지 유럽 열강의 식민지들은 일본의 손에 떨어졌으며, 호주와 인도양에서의 해상 위협도 연합함대의 공격으로 제거되었다. 불과 반 년 만에, 그 넓디 넓은 동남아시아 전역을 큰 피해 없이 완전히 제패한 것이다. 아무리 연합군의 사정이 열악하다 하더라도 남방 작전 기간 내내 일본군이 보여준 모습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거기다 열악하다고만 할 수도 없는 것이 오히려 수적으로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연합군이 일본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필리핀 같은 경우 숫적 우위는 물론 B-17, 스튜어트 전차 등 장비까지 충실하게 갖추고 있었다. 일본 또한 전쟁 기간 내내 중국에 상당한 전력을 투입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태평양 전역에 투입할 수 있는 육상전력은 제한적이었다. 더군다나 남방작전은 단기간에 동시에 복수의 거점을 공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지라 그 부족한 전력도 상당 부분 분산이 불가피했다. 특히 은륜부대와 말레이, 싱가포르 전역에서 이루어진 기만작전[13]을 보면 그 이전 중국에서 삽질하던 경우나 몇 년 뒤 섬을 방어하면서 반자이 돌격, 집단자살, 가미카제나 하던 모습과는 180도 달랐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급하게 먹은 음식은 체하는 법이라고, 일본은 넓디 넓은 점령지를 억지로 유지하기 위해 상당한 병력을 할애해야 했으며 열악한 보급역량 상당수도 동남아시아로 돌려야 했다. 그리고 인도군 등과 같은 식민지군과 연합하여 공동 작전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학살 등 일본군의 비상식적인 행동 + 자원수탈로 인해 유럽 식민지배로부터 해방시켜 준 현지인들이 일본을 적대시하고 과거의 지배자들과 협력하여 반일투쟁을 벌이게 되어 투입병력은 더 늘어만 갔다. 결국 이는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확대되어 장기전으로 이어졌다.

그래도 일본은 고대하던 석유, 고무 등의 전략자원 수급이 가능해졌고, 일시적으로나마 대동아 공영권을 완성시키는데 성공했다. 1942년 5월은 일본 제국의 최전성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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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42년

3.1. MO 작전이 단행되다

남방작전의 성공 이후 태평양 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승승장구하던 일본 해군은 새로운 작전 계획을 수립한다. 솔로몬 제도의 툴라기 섬을 점령하고 그곳을 발판으로 파푸아뉴기니의 수도인 포트모르즈비(Port Moresby)를 점령하여 남방 한계선을 더욱 확장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한편 이미 일본군의 암호를 가로채고 있던 미 해군도 이런 움직임을 알아챘고, 진주만 공습의 책임을 지고 옷을 벗게 된 허스번드 킴멜의 후임으로 태평양 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한 해군대장 체스터 니미츠는 해군소장 프랭크 '블랙 잭' 플래처의 지휘 하에 정규 항공모함 USS 렉싱턴과 USS 요크타운을 중심으로 구성된 함대를 파견하여 이노우에의 함대를 막도록 한다.

치열하게 진행된 전투끝에 이노우에는 승산이 없다고 핀단하고 포트모르즈비 침공을 포기 및.상륙부대를 철수시킨다. 미국은 전략적 목표인 포트모르즈비를 지켜낸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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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미국, 만회할 방법을 찾다

미국이 패전하는 상황이 지속되자,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 군부와 국민들의 사기를 끌어올리려면 뭔가 일본군한테 한 방을 먹여줄 필요가 있었다. 

이에 지미 둘리틀 중령의 이름을 딴 둘리틀 공습이 진행되어지고, 16대의 쌍발 폭격기를 투입, 실행에 옮긴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적진 한가운데에 달랑 쌍발 폭격기 16대에 탑재된 500파운드 폭탄 64발로, 간이조준기만을 이용한 고공수평폭격으로 이룬 전과임을 생각하면 매우 준수한 결과이며, 류호의 취역 지연은 미드웨이 해전 이후 일본 해군이 항모와 항공대 전력을 제때 보충하지 못하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 폭탄을 떨궈서 한 방 먹여준다'는 본래 목적은 달성된 상태였으며, 그 결과 일본군 수뇌부는 크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한창 승승장구하면서 태평양 반쪽을 집어삼키고 인도양, 호주까지 넘보는 상황에서 백주대낮에 본토의 수도 한복판에 폭탄이 떨어지고 그게 황궁 근처라 천황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든 것은 일본군 장성들 입장에서는 대단히 수치스러운 일이었다.

그것 때문에 자신있게 남방작전을 밀어붙이려 했던 일본 육군이나, 진주만 공습이 성공했으니 미군은 앞으로 2년 동안 못 나올 거라고 천황에게 호언장담했다가 4개월 만에 본토 폭격을 맞은 일본 해군의 체면이 모두 크게 손상되었고, 일본 열도 공습은 심리적으로 일본에게 타격을 주기 충분했고, 미국 국민들의 사기를 높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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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미일역전의 순간, 미드웨이 해전

둘리틀 공습을 받은 일본 입장에서는 '천황이 거주하는 황궁이 있는 수도 도쿄가 대놓고 폭격당했다'는 점이 컸는데, 본토에 폭격이 일어났다는 건 '인계의 신'인 천황의 옥체가 폭탄에 상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육해군 대립이 심화된 일본 군부에서 이는 육군이 해군을 물어뜯을 최상의 건수였다. 즉, 해군은 이 사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시 한순간에 천황도 제대로 지키지 못한 멍충이들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다.

만약 미국이 똑같은 방법으로 일본 본토를 다시 공격한다면 해군은 육군을 주축으로 한 반대파에게 엄청난 비난을 받을 판국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해군 수뇌부는 태평양 함대를 공략해야 한다는 야마모토 제독의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하기 시작했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야마모토 제독은 '미 항공모함은 큰 골칫거리다'는 판단하에 미드웨이 공격을 제안한 것이었으나, 이전까지는 아무도 항공모함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무시되었던 것이다.

허나 '항공모함'에 '육상 폭격기'를 싣자 일본 본토까지 폭격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항공모함에 대한 평가는 180도 달라져 버렸다. 이렇게 되자 야마모토 제독은 혜안을 가지고 미드웨이 공격 안건을 제시한 셈이 되었고 수뇌부는 그 선견지명을 무시한 까닭에 이 험한 꼴을 당했다는 여론이 세워졌다.

이미 이전에도 일본 해군에서는 거의 선지자급으로 존경받던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말이 사실이 된 이상 체면 문제가 걸려 있던 해군에서는 야마모토 제독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대본영에서도 군말 없이 이 작전을 승인해 주었다.

하지만, 극비라고 숨기면서 진주만 공습을 준비해왔던 이전에 비해 이번에는 대놓고 공개하다시피 할 정도로 보안이 엉망이었다.

한편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군의 공격 위치를 정확히 알고 미리 함정을 파 준비할 수 있었다. 일본군의 정확한 공세 위치와 시간을 읽어낼 수 있었기에 매우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당연히, 미드웨이 섬을 놓고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은 궤멸적인 피해를 입게된다. 주요 항공모함 4척, 폭격기 300여대를 잃은 것도 모자라 태평양 제해권을 상실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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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일본, 어떻게든 정신승리 해보려하다

일본 수뇌부들은 미드웨이에서의 패전을 숨기기 위해 미국 알레스카 북부의 얄루산 열도 2개(애투 섬, 키스키 섬)를 점령하면서 승리했음을 선전한다.

3.5. 과달카날에서 승부를 겨뤄보자

비록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제국 해군이 자랑하던 정예 항공모함 기동부대가 박살나는 참극이 일어났지만, 이것은 엄밀히 따지면 일본군이 압도적 우위라는 위치 때문에 방심하다가 참극 이후 비교적 우위라는 상황을 허용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비록 연합군에게 칼자루를 하나 넘기긴 했어도 서태평양의 도서를 요새화한 일본이 태평양 전역에서 우세한 상황이였기에 한판 겨뤄보고자 한다.

그래서 일본은 1942년 5월 과달카날 인근 툴라기 섬과 플로리다 섬, 그리고 과달카날 섬에 상륙했다. 툴라기에 수상 정찰기 기지를 설치한 뒤 7월에는 두 개의 설영대 2,800명과 해군 900명을 파견하여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비행장은 차후 연합군의 반격을 견제하고 해군의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항공기지로 활용할 목적이 있었다.

당연히 이 소식에 미국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룽가 곶에 비행장이 건설된다면 필시 제로센과 일식육공 등의 긴 항속거리를 지닌 기종들이 배치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미국과 ANZAC 사이에 형성된 연결 라인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만약 이 연결 라인이 끊어진다면 ANZAC 지역은 고립되고 최악의 경우 일본군의 손에 떨어져 서태평양 전체가 일본 제국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 때문에 미군은 서부 해안의 위협이 현실이 될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942년 6월, 연합군 수뇌부는 일본군이 비행장을 완성할 것으로 추정되는 8월 초순 이전에 미 해병대를 주축으로 한 육상전력을 투입, 과달카날을 탈취하여 훗날 벌어질 반격작전의 초석으로 삼는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에 따라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 전역이 시작되었다.

1942년 8월, 미국 군대는 과달카날 섬에 상륙하여 일본군 기지를 점령하여 건설 중이던 헨더슨 비행장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일본군은 헨더슨 비행장을 탈환하려고 여러 차례 반격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그 뒤에도 엎취락 뒤치락하는 전투가 계속 진행되었다.(사보섬 해전, 가달카날 해전 등)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은 보급 부족과 병력 손실로 섬에서 철수하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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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943 ~ 1944년

4.1. 계속되는 패전(연전연패)

과달카날 전역에서 일본군은 참패를 맛봤고, 1943년 1월 말, 동부 뉴기니의 동남부 지역인 파푸아 반도 일대에서도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에 의해 축출되고 있었다.(코코다 트랙 전투, 밀른만 전투, 부나-고나 전투)

이런 상황에서 과달카날과 동부 뉴기니 동남부를 잃은 일본군은 솔로몬 제도 일대와 뉴기니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미군의 공세에 대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사이판 섬, 괌 섬, 펠레리우 섬 마저 빼앗기게 되며, 1944년 6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틀 동안 진행되어진 필리핀 해 해전에서 일본군은 약 400기의 항공기를 잃고, 항공 모함 3척(신호, 타카오, 쿄카이)을 침몰되는 궤멸적 피해를 입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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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필리핀 탈환과 레이테만 해전

뒤이어 필리핀 탈환 작전이 시작되었고, 이 과정에서 레이테만 전투가 일어나게 된다. 레이테 만 해전은 군함만 600척이 넘게 동원되었으며, 항공모함만 28척, 야마토급 전함, 나가토급 전함, 아이오와급 전함 등 당시 최신예, 최고성능의 전함들이 한데 참전한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해전이다.

이 전투로 인해서 일본군은 해상전력이 사실상 와해될 정도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전쟁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레이테만 전투에서의 승리로 연합군은 필리핀을 탈환하게 되고, 일본군을 압박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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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945년

5.1. 이오지마에서의 일전

이오지마는 원래 별 볼일 없는 아주 작은 화산섬이지만, 사이판을 미국한테 빼앗긴 이후로는 중요한 요충지가 된다.

중부 태평양에서 미 해군이 진격하자 이에 일본 해군이 이곳에 비행장과 레이더 기지를 건설한다. 이 기지는 지리적으로 일본 본토 바로 앞의 전진 기지인데다, 본토 폭격을 목적으로 인근을 지나가는 미 육군항공대의 B-29 폭격기를 요격하거나 본토에 경보를 해 줄 수도 있었다.

반대로 미 육군 항공대는 일본 본토 폭격 때 일본의 요격기를 무력화할 B-29의 호위기인 P-51 머스탱을 띄울 비행장으로 이오지마를 생각했고, 그와 함께 일본 본토 폭격을 마치고 귀환하는 B-29 폭격기들 중 문제가 생긴 기체가 착륙할 비상 활주로를 만들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 섬이 필요해진 상황이었다.

또한 전략적으로 보아도 이오지마를 점령하면, 이오지마와 인접한 일본의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방어진지인 오키나와를 점령하는데 중요한 기착지로 활용할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전략적인 위치 때문에 미군은 이오지마의 공략을 결정했는데, 이전까지의 무능하고 무책임한 일본군 지휘관과 달리 미국을 잘 알고, 자신의 전략적 목표를 잘 알고 있던 책임감 있는 용맹한 지휘관이 하필 이오지마에 있었던 탓에, 이오지마에서 피 비린내 나는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1945년 2월 19일, 미국 군대는 대규모 공습과 해상 포격 후 이오지마에 상륙했고, 일본군은 섬 안에 구축된 지하 요새와 동굴에서 매복 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미해병대는 일본의 땅굴과 벙커에 대한 특효약이었던 화염 방사기를 동원해 벙커와 동굴을 통째로 태워 버리는 식으로 공격을 단행한다.[14]

1주일 만에 전쟁이 끝날 것을 생각했지만, 일본군은 지연전을 목표로 섬 전체를 요새화시켜둔 상황이었다. 상륙 직후의 막대한 희생과 스리바치산 함락 이후로도, 미군은 구리바야시가 구축해둔 방어선으로 인해 섬 내륙 지역으로 더디게 전진하며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였다.

특히, 센다 사다스에 소장이 지휘하는 혼성 제2 여단의 강력한 저항에 미군은 3월 22일부터 여드레 동안 사상자 약 3,000여 명이 발생해 센다가 지키는 타마나 산을 우회해야 했다.

하지만 타마나 산의 일본군은 개전 17일후 폐쇄된 참호안에서 화염방사기에 타죽을 운명에 놓이게 된다.

센다는 쿠리바야시에게 옥쇄하겠다고 요청하나 쿠리바야시는 이를 거부하고 대신 본대에 합류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결국 미군의 공격에 본대에 합류 직전 센다 군은 전멸하고 센다와 참모진들은 자결했다.

이후 쿠리바야시는 센다의 최후를 보고 받고 최후의 전투를 준비했다.

3월 26일, 쿠리바야시는 남은 병력 300여 명을 이끌고 마지막 돌격을 감행했으나 실패하였고 대부분 병력이 전사했다.

이때 함께 돌격한 쿠리바야시도 전사한 듯하다. 이것이 일본군의 마지막 조직적 공격이었다.

이 후 일본군은 이오지마 곳곳에서 일본군의 유격전이 있었지만 큰 피해는 주지 못했고, 일본군은 이 소규모 유격전 때문에 1,200여 명이나 전사했다.

결국 1주일 만에 끝내겠다던 전투는 정작 끔찍한 희생자를 많이 만들면서 1개월 이상이나 계속된 끝에 예상대로 미군의 상처가 가득한 승리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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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일본을 조기 항복시킬 방법이 없을까?

전투에 지친 미국은 일본을 조기 항복시킬 방법을 구상하게 된다. 이에 일본의 전쟁수행 의지를 꺾어놓기 위해 도쿄대공습과 원자폭탄 투하 카드를 꺼내들었다.

5.3. 도쿄, 불바다가 되다

일본의 산업 역량을 완전히 무력화하고, 전쟁물자를 만드는데 협조하는 일본 민간인들을 처단하기 위해 커티스 르메이는 도쿄를 공습한다. 폭격은 1945년 2월부터 3월까지 진행되어졌으며, 20만 이상의 사망자가 속출 및 도쿄는 잿더미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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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이오지마 전투의 후폭풍과 원자폭탄 투하, 그래도 항복하지 않는 일본

이오지마 전투에서처럼 일본군의 처절한 항전으로 미군의 인명피해가 막대할 것을 염려한 미군 상층부와 당시 미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맨하탄 프로젝트를 통해 완성된 리틀보이, 팻 맨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할 계획을 세운다

그렇게, 미국은 이를 실행에 옮겨 1945년 8월, 히로시마•나카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였다. 하지만, 일본의 항전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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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드디어 나서는 소련과 일본의 항복

소련의 만주 전략공세가 시작되고 나서야 일본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항복한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고,  9월 2일 항복 문서에 공식 서명하면서 태평양 전쟁은 종결된다.
[1] 자세한 것은 웨이크섬 전투 참조. 사실 이 전투는 일본군이 남방작전 과정에서 치른 가장 격렬한 전투였다.[2] 과거 문서에선 와카바야시 도이치 중위가 과달카날 전투에서 똑같이 돌격 중 전사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와카바야시 도이치가 사망한 1943년 1월 14일 그의 중대가 소속된 228연대는 오스틴 산에서 미군 27연대의 공세를 방어중이었다. 출처: Forgotten Fights: The Battle for Guadalcanal's Mount Austen, 1942[3] 최연소 대원이 55세였다고 하니 말 다했다.[4] 의외로 현지에서 널리 쓰이던 광둥어의 사용은 금지하지 않았다.[5] 이것은 나중에 홍콩이 해방된 후 성난 군중에 의해 박살난다.[6] 이 같은 만행은 이후 일본령 싱가포르에서도 똑같이 반복되었다.[7] 사실 진주만 공습은 남방작전을 위한 과정에 불과했지 목적이 아니었다.[8] 그리고 3년 후 벌어진 필리핀 탈환전에서 승리하면서 이 말을 실천했다.[9] 맥아더는 가족과 함께 미-필리핀군 수비대와 최후까지 운명을 같이 하겠다고 마셜에게 밝혀 미국 지도부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맥아더 같은 고급장교가 적의 포로가 되거나 전사하는 위험을 감수할 의사가 전혀 없던 루스벨트는 맥아더에게 탈출할 것을 강경하게 관철시켰다.[10] 더 자세한 것은 싱가포르 전투를 참고.[11] 심지어 버마의 군사지도를 주는 것도 거부하다가 막판에야 번역도 안된 한장을 대사관 편으로 보내서 중국군은 지도도 없이 작전해야 했다.[12] 이는 최종적으로 모스크바의 점령에 실패하여 부인할 수 없는 실패로 막을 내린 바르바로사 작전과는 대비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인도양-중국-태평양으로 이어져야 했던 일본 제국의 삼면전선에서 대영제국과 네덜란드 식민제국을 사실상 이탈시켜 전선을 둘로 줄여버린 거대한 전략적 성취였고, 1944년 중반으로 접어들어 인도 방면의 군대가 증강되고 무타구치 렌야의 삽질로 동남아시아의 일본군이 자멸하기 전까지 영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다만, 하도 남방 작전의 범위가 넓다 보니 100% 성공이라고 할 수는 없는게, 코코다 트랙 전투가 실패하며 포트모르즈비를 비롯한 뉴기니 섬 남부 점령은 실패했다. 파푸아뉴기니는 동남아시아가 아닌 오세아니아에 해당하긴 한다만 남방작전의 점령 목표 중 하나였고 호주를 견제하고 연합군의 교두보 마련을 막으려면 필수적으로 점령해야 하는 상당히 중요한 섬이기도 했다.[13] 사실 영국군이 싱가포르 요새를 중심으로 간신히 버텼다지만 일본군 역시 탄약이나 화력이 상당히 부족했다. 이 점이 노출되지 않도록 포격 후 잽싸게 포병을 멀리 재배치시켜 다시 포격을 함으로써 영국군이 일본군의 화력을 과대평가하게끔 기만했다.[14] 심지어는 공병대가 TNT를 던진 뒤 화염방사로 지져서 엄청난 폭발을 일으켜 동굴 내부를 싹 쓸어 버리거나 불도저로 동굴을 메워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