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4 08:57:44

차이잉원/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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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초반2. 정부 관료 시기3. 정계 입문4. 민주진보당 주석 1기(2008년 ~ 2012년)와 2012년 총통 선거5. 민주진보당 주석 2기(2014년 ~ 2018년)

1. 생애 초반

1956년 (민국 45년) 8월 31일생. 대만섬 남부의 핑둥현은 그녀의 본적지이고, 그녀의 저서 "보통 사람의 특별한 인생"에 따르면, 타이베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본적지가 핑둥 현이라 사람들의 오해가 있다고[1].

의외로 순수 본성인이 아니라 반산(半山)[2]이다. 차이잉원의 저서 "보통 사람의 특별한 인생"에 따르면, 차이잉원의 증조부 때까지는 대만에 거주했으나 할아버지아버지대만일치시기만주국에서 활동[3]하다가 2차 대전 일본의 패망 이후 대만에 돌아와서 차이잉원을 낳았다고 한다. 부친이 객가인이며 할머니가 대만 원주민(파이완 족)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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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시절
차이잉원의 부친은 자동차 수리업을 기반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이후 부동산, 건설, 호텔업으로까지 사업 분야를 확장했다. 아니 도대체 수리점을 어떻게 운영했길래 하긴 한국에도 어느 불타서 망한 자동차 정비소 사장이 있긴 하다 이복 자매 형제 포함해서 11남매들(5남 6녀) 중 막내였는데, 부친이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자녀들 중 누군가 법학을 전공하길 기대했다. 이를 배경으로 차이잉원은 역시 훗날 대만 총통 선배들 이 되는 천수이볜마잉주도 거쳐간, 최고 명문 국립타이완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부친의 사업이 나름 성공한 편이어서 집안이 꽤 유복한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훗날 차이잉원이 교수가 된 후, 아버지가 못 보던 최고급 외제차를 끌고 오더니 "막내야, 이건 네 차다!"라며 선물했다고 하니 어지간히 잘살기는 했던 모양. 국민당 측에서는 이를 빌미로 차이잉원의 부친을 "일제 식민 통치 시절 특혜를 누린 친일파"로, 차이잉원은 "부모 잘 만나 세상 물정 모르는 인물"이란 식으로 비난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물론 차이잉원 측은 "근거 없는 흑색 선전"이라고 반박했다.

오빠와 언니들은 다 결혼해서 분가했는데 차이잉원 본인은 미혼으로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다. 아버지는 이미 차이잉원이 정치에 발을 들일 때 쯤(행정원 부원장 시절) 세상을 떴다.

학부 졸업 이후에는 미국 코넬 대학교 법학 석사, 영국 런던 정치경제대학교 법학 박사를 취득하였다.[4] 1984년 대만으로 돌아와 불과 27세 나이에(!!) 국립정치대학 법학과 부교수로 임용되어 1991년까지 후학을 양성하였으며, 1991년부터 1993년까지 둥우 대학 국제 무역학과 대학원과 법학과에서 교수를, 1993년부터 2000년까지 국립 정치 대학 국제 무역학과 교수를 지냈다.

2. 정부 관료 시기

차이잉원은 리덩후이 총통 시기(1988년 ~ 2000년)에 행정원 경제부의 국제 경제 조직 부서의 수석 법률 자문을 맡았다. 그녀가 국제 경제 조직 부서의 법률 자문을 맡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의 주 전공이 국제 무역과 통상법이었기 때문이다. 수석 법률 자문 역을 맡으면서 GATTWTO 대만측 수석 협상 대표를 맡았고 각종 경제 협상을 주도하게 된다. 또한 1998년부터 국가 안전 보장 회의 자문 위원과 국가 통일 위원회 연구 위원 직을 맡았는데, 리덩후이가 임기 만료를 앞둔 1999년 중국과 대만을 '특별한 국가 대 국가의 관계'라고 규정한 일명 '양국론'의 아이디어를 제공한 것은 차이잉원이었다.

2000년 천수이볜이 총통으로 당선되면서 민주진보당으로 정권이 교체되자, 2000년 5월 행정원장으로 임명된 탕페이(唐飛)가 차이잉원을 행정원 대륙 위원회 주임 위원[5]으로 지명하면서 입각하였다.[6] 5개월만에 탕페이가 사직하여 장쥔슝(張俊雄) 1차 내각이 구성되었지만 유임되었고, 소삼통 구상을 현실로 실현시켰다.[7] 이러한 업적을 인정받아 2002년 여우시쿤(游錫堃) 내각에서도 대륙 위원회 주임 위원으로 유임되어 2004년 민주 진보당 입당 전까지 활동하게 된다. 소3통 성사 과정에서 중화민국군이랑 엄청 친하게 지내서[8] 입법 위원(국회의원) 선거 출마 전에는 중화민국군 측에서 직접 차이잉원에게 국방부장직을 제의한 적이 있다(역시 차이잉원의 자서전 "보통 사람의 특별한 인생") 동양 최초의 여성 국방장관이 될 수도 있었던 대목.

3. 정계 입문

2004년 9월 민주진보당에 입당하면서 정계로 진출했다. 원래는 리덩후이를 명예 주석으로 모시는 대만단결연맹에서 비례대표 후보 1번으로 영입하려 하였으나 천수이볜 전 총통의 직접 요청으로 민주진보당에 입당한 것. 그해 12월에 있었던 총선거에서 비례대표 후보 6번을 받아 당선되었다. 2005년 2월 임기 개시와 동시에 민주진보당 원내 부대표를 지냈다.

2006년 1월 23일에 새로 구성된 쑤전창(蘇貞昌) 행정원장 내각에 입각하면서 입법위원직을 사직하였고, 1월 25일에 행정원 부원장[9]에 지명되었다. 행정원 소비자 보호 위원회 주임 위원까지 겸직한 차이잉원은 쑤전창 내각 구성원 중에서 국민의 최고의 신뢰를 받게 된다.

하지만 행정원장 쑤전창이 2007년 민주진보당 총통 후보 경선에서 전 가오슝 시장이자 전 행정원장인 셰창팅(謝長廷)에게 패하면서 내각은 총사퇴하고, 차이잉원 역시 본적지인 핑둥 현으로 낙향한다. 낙향 이후 2008년에 잠시 제약 회사의 회장(무급이다.)을 맡기도 했다.

4. 민주진보당 주석 1기(2008년 ~ 2012년)와 2012년 총통 선거

화려한 학력 뿐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상당한 요직을 두루 거쳐온 엘리트 여성 정치인이다보니 야권의 총통선거 잠룡으로 거론되고 있었으며 민주 진보당 내부에서도 혁신의 요구가 나오고 있었기 때문에 차이잉원은 당 주석 선거에 출마하였고 쟁쟁한 당 원로들을 꺾고 주석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민진당은 2008년 1월의 입법 위원 선거와 3월의 총통 선거에서 연달아 참패하고 천수이볜 부패 파동까지 겹치면서 완전히 힘이 꺾여버려 존립이 위태로워진 상황. 심지어 빚이 많아서 일상적인 당무조차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는데, 차이잉원 주석은 시민들에게서 소액기부를 받는 운동으로 지지층을 재결집함으로서 위기를 벗어났다. 여기에 마잉주 정권의 지나친 친중 행보와 여러 국내 실정을 파고들어 선명 야당을 주창했고, 이후의 보궐 선거 및 지방 선거에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2010년 제13기 당주석 선거에서 90.29%라는 경이로운 지지율을 얻으며 민주진보당 주석에 연임되었다. 이러한 모습은 그녀를 야권의 대표적인 차기 대권 주자로 발돋움하게 된다.

당시 차이잉원의 활약은 2004년 한국 총선에서 박근혜가 천막 당사 등의 조치를 통해 차떼기, 노무현 대통령 탄핵 파동으로 존립 위기에까지 몰렸던 한나라당을 기사회생시킨 것을 연상시켰고, 덕분에 한동안 '대만의 박근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참고로 차이잉원은 대만에서 출간된 박근혜 자서전의 중국어판 서문을 써주기도 했다.

파일:EyxXKqG.jpg

2010년 ECFA 토론회 영상(1번). 마잉주 총통과 차이잉원 민진당 주석의 1:1 텔레비전 토론이다. 토론이 길어져서 14개로 나누어진 버전이 있다. 이 링크로 가면 1번 ~ 14번 전부 다 볼 수 있다.

2010년 양안FTAECFA의 조인 당시에 민진당 당론으로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고, 협상 타결을 앞둔 같은 해 4월 당 주석 자격으로 마잉주 총통과 TV 공개 토론을 갖기도 했다. 2011년 총통 선거 출마 때는 "당선되면 ECFA 지속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칠 것"이라고 공약했지만, 마잉주가 재선되면서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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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신베이 시장 선거에 직접 출마했다가 중국 국민당주리룬(朱立倫) 후보에 밀려 떨어지면서 기세가 꺾이는듯 했으나[10] 민진당의 총통 후보로 선출되어 마잉주 총통과 대결하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동성애자라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현재까지 미혼이다보니 저런 해프닝이 있었는데 차이잉원 본인은 과거 연애를 했었으나 사별한 뒤 정계 입문을 하면서 기회가 없었다고 담담하게 해명. # 사실 개혁 성향이 있기 때문에 동성애에 관대한 시각을 갖고 있을 수도 있긴 하다. 여담으로 이 의혹을 제기한건 대만 민주 세력의 대부이자 전 민진당 주석 스밍더(施明德)였는데,[11] 웬만해선 정치권으로부터 욕을 안 먹던 양반이 차이잉원을 향해 동성애 여부를 밝히라고 촉구하면서 여야를 막론하고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이 일을 계기로 동성애자들의 표심이 차이잉원에게 쏠렸다는 분석도 있는지라... 왠지 짜고 치는 고스톱 같다. [12]

2012년 1월 14일에 치러지는 총통 선거의 판세는 전반적으로 초박빙이었다. 4년 전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민진당의 위세가 강력했으며, 여론 조사 결과 5%P차로 마잉주 총통의 재선 가도에 바짝 따라붙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투표 전날에는 리덩후이 전 총통이 전격적으로 지원 유세를 해주면서[13] 결과가 뒤집힐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그러나 개표 결과는 80만표(6%P)차 패배.[14] 그나마 입법 위원(국회) 의석수는 지난 선거보다 늘어서 선전하긴 했지만 결국 총통 선거 패배 책임을 지고 민주진보당 주석(대표)직을 사퇴, 그렇게 정계에서 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5. 민주진보당 주석 2기(2014년 ~ 2018년)

하지만 차이잉원은 당 주석과 총통 후보까지 지낸 거물급 정치인이 되어 있었다. 마잉주 총통 집권 2기 초반부터 불어닥친 소고기 파동과 마잉주의 입법 원장(국회 의장) 도청 의혹 등이 터지면서 마잉주는 국민들의 신임을 잃어버렸고 양안 서비스 협정을 급속하게 추진함으로써 국민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이로써 차이잉원은 국민들에게 많은 지지를 얻게 되었으며 2014년 3월에 민주 진보당 당 주석 선거 출마 선언을 하게 된다. 2014년 5월 당 주석 선거에서 무려 93.71%라는 압도적인 표를 얻으며 제15대 민주 진보당 주석으로 당선되었다. 차이잉원은 주석직에 취임한 이후부터 그해 11월에 있을 지방 선거에 총력을 쏟기 시작했으며, 홍콩우산혁명이 고조되자 홍콩을 지지하는 대만 내 집회 현장에 직접 방문하는 등의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보여주었다. 11월 29일에 있었던 지방 선거에서 사상 최대의 대승을 거두면서 선거의 여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었고 차기 총통 후보로써 압도적인 입지를 가지게 되었다.
[1] 대선 공고에도 출생지가 타이베이라고 되어 있다. 대선 공고에는 후보자의 출생지가 성급, 현급 행정구역까지 나온다. 본적지는 안 나온다. 대륙 출생자의 경우 현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구역이 아닌 중화민국의 명목상 행정구역으로 나온다. 그래서 과거 롄잔은 '산시 성 시안 시'가 아니라 그냥 '시안 시'로 나왔고, 쑹추위도 '후난 성 샹탄 시'가 아닌 '후난 성 샹탄 현'으로 나왔으며, 쉬신잉은 '타이완 성 신주 시'로 나와 있다. 차이잉원은 그냥 '타이베이 시', 마잉주는 '홍콩'으로 나와 있다. 타이완 성 타이베이 시가 아닌 그냥 타이베이 시로 나온 것으로 보아 출생 당시의 행정구역이 아닌 현재의 행정구역을 기준으로 한다고 볼 수 있다.[2] 대만 출신이지만 중국 본토로 넘어가 활동하다 국민당이 본토로 피난올때 같이 대만으로 돌아온 사람들을 의미한다. 대만 출신이었기에 대륙에서 넘어온 외성인들이 대만 섬의 실정을 아는데 도움을 줬으며, 그 덕분에 외성인들이 중심이 된 국민당 독재정권에서도 어느정도 입지를 확보할수 있었다.[3] 이 때문에 순수한 의미에서의 반산으로 여기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 반산을 따로 구분하는 이유가 대만 출신이면서도 대만일치시기 시절 일본의 영향보다는 국민당 치하 중국 대륙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면서 살아온 인사들이었다는 점이기 때문이다.[4] 이 시절 중국어를 거의 사용을 하지 않아서 귀국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중국어를 어색해했다. 2016년 현재도 마찬가지로 차이잉원의 표준중국어는 발음과 어순 모두 어색하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한때 총통 선거에서 대결했던 마잉주 전 총통에 비하면 유창함에서 꽤 차이가 난다.(이건 마잉주가 비관화권 출신임에도 표준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탓이기도 하다. 중화민국 역대 총통 중 관화권 출신이 하나도 없다.) 마잉주 - 차이잉원 ECFA 토론을 봐도 차이가 좀 심한 편이다. 확실히 영국 - 미국 유학 생활을 하면서 중국어를 안 쓴게 잔재로 남은듯. 유학은 마잉주도 했는데[5] 중국과의 양안 관계를 담당하는 기관으로 한국의 통일부 장관격[6] 대만의 정부 구조는 다소 복잡한데, 쑨원이 제기한 오권분립 원칙 때문이다.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대통령이 행정부의 수반이 되지만 대만에서는 행정부 수장은 행정원장이다. 행정원장은 총통이 임명하며 행정원장은 내각을 구성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내각제 국가와 비슷하게 행정원장 이름을 딴 내각으로 시기를 구분한다. 하지만 총통의 권한과 행정원장의 권한이 내각제 국가처럼 명확하게 나뉘는게 아니라서 행정원장은 내각제 국가의 수상과 같은 위치가 아니며 한국의 국무총리와 비슷한 위치라고 보면 된다.[7] 삼통이란 양안간의 직접적인 통상, 통항, 통신을 일컬으며 규모에 따라서 소삼통, 중삼통, 대삼통으로 나뉜다. 소삼통이란 중삼통을 하기 전에 이루어지는 단계이며 양쪽의 푸젠 성끼리의 교류가 중심이다(중화 인민 공화국 샤먼과 중화민국 진먼을, 중화 인민 공화국 푸저우와 중화민국 마쭈를 통해서 직접적인 통상과 바다를 통한 통항을 실현하고, 전세기 형태로 대만과 대륙간의 직접적인 비행 항로 설정이 포함된다. 중삼통은 대륙 푸젠 성과 대만, 대삼통은 양안 전체의 교류가 된다.[8] 거짓말이 아니라, 차이잉원 특유의 직설적이고 똑 부러지게 시원시원하며 영국미국에서 유학하면서 깨우친 합리적인 언변이 중화민국군 측에 어필했다고 한다. 다른 정치인들과 달리 차이잉원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 군대식 언어를 썼던 셈이라 중화민국군 측에서도 차이잉원의 말은 잘 들었다고.[9] 한국으로 따지면 부총리이다.[10] 참고로 중국 국민당 문서 말미에 가면 국민당 중앙 위원이 총에 맞았다는 글이 있는데, 바로 이 선거에서 벌어진 일.[11] 스밍더는 계엄령 해제 이전 대만의 최대 민주 투쟁 사건인 1979년 가오슝의 '메이리다오 사건'으로 투옥된 주동 인물 중 한명이었고, 1986년 민진당 창당 멤버에 이후 당 주석을 역임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된 이후부턴 2차례의 입법원 위원(한국의 국회 의원에 해당) 당선을 제외하면 제도권 정치인으로는 의미있는 역할은 하지 못했다.[12] 대만 LGBT 계열에선 차이잉원의 인기가 좋은 편으로 일부에선 2016년 총통 당선이 미국 동성 결혼 법안 통과에 맞먹는 급의 사건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물론 본인도 동성결혼에 관련하여 찬성하고 있다. #[13] 리덩후이중국 국민당 소속으로 총통을 지냈지만, 실제로는 친일 대만 독립 성향을 가지고 있는 인물이다.[14] 정확히는 마잉주 51.6%, 차이잉원 4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