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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선수 경력 | ||||
SV 다름슈타트 98 | →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 → | 바이어 04 레버쿠젠 |
차범근 1979-1983 | |
▲ 79/80 시즌 차범근 | |
소속팀 | <colbgcolor=#ffffff,#191919>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분데스리가) |
등번호 | 11 |
기록 | |
122경기 46득점 35도움 | |
16경기 5득점 3도움 | |
6경기 1득점 1도움 | |
12경기 6득점 7도움 | |
합산 성적 | |
156경기 58득점 46도움 | |
우승 기록 | UEFA 유로파 리그: 1979-80 DFB-포칼: 1980-81 |
개인 수상 |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MVP: 6회[1]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18회[2] Kicker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1회[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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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차범근의 선수 경력 중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활약상을 서술한 문서이다.2. 하이라이트
79/80 시즌 UEFA컵 우승 트로피를 드는 차범근 |
80/81 시즌 DFB-포칼 우승 트로피를 드는 차범근 |
81/82 시즌 분데스리가 14R SV 베르더 브레멘전 골[4] |
82/83 시즌 분데스리가 11R 1. FC 쾰른전 골[5] |
아인트라흐트가 춤춘다, 차-차 차!
차범근 활약 당시 독일 빌트 차이퉁(Bild Zeitung) 기사 제목
차범근 활약 당시 독일 빌트 차이퉁(Bild Zeitung) 기사 제목
79/80 시즌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시절 차범근 |
3. 상세
3.1. 입단
1979년 6월 22일 독일로 떠난 차범근은 7월 15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팀 관계자들 앞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당시 A 팀과 B 팀으로 나누어 진행한 연습 경기에서 A 팀에 속한 차범근은 두 골을 어시스트하며 A 팀의 2:1 승리를 이끌고 이에 만족한 프랑크푸르트 관계자들은 바로 다음 날인 7월 16일 정식 계약을 맺는다.[6][7] 이는 구단 역사상 역대 열 번째 외국인 선수이자, 최초의 비유럽 및 동양인 선수 영입에 해당한다.[8]3.2. 활동
1979년 6월 22일 독일로 떠난 차범근은 7월 15일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팀 관계자들 앞에서 테스트를 받았다. 당시 A 팀과 B 팀으로 나누어 진행한 연습 경기에서 A 팀에 속한 차범근은 두 골을 어시스트하며 A 팀의 2:1 승리를 이끌고 이에 만족한 프랑크푸르트 관계자들은 바로 다음 날인 7월 16일 정식 계약을 맺는다.[9][10] 이는 구단 역사상 역대 열 번째 외국인 선수이자, 최초의 비유럽 및 동양인 선수 영입에 해당한다.[11]프랑크푸르트에 합류 후 아홉 차례의 친선 경기에서 다섯 골을 넣으며 팀 적응을 마친 차범근은 1979년 8월 11일 15:30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분데스리가 1라운드 홈경기에 선발 출전하며 구단 데뷔 전을 치렀다. 풀타임을 소화한 차범근은 경기 자체는 아쉽게 0:1로 패배했지만 무득점임에도 경기를 뛴 선수 중 최고 평점인 2점을 받을 정도로 맹활약하였고, 분데스리가 1라운드 베스트 11에 선정된다.
차범근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데뷔 시즌은 놀라운 수준인데, 병역 문제로 공군에 돌아간 뒤 만기 제대까지 5개월간 경기 자체를 뛰지 못한 상태로 만 26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분데스리가에 진출했음에도 데뷔 시즌에 랑리스테 월드클래스 등급[12]과 시즌 평점 공격수 부문 3위를 기록하고[13] 구단 최초의 UEFA컵 우승[14][15] 까지 이뤄냈을 뿐 아니라, 라운드 베스트 11(Elf des Tages)[16]에 8회 선정되며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Elf der Saison)에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분데스리가 12골을 기록하며[17] 팀 내 득점 1위를 기록한 차범근은 구단 역사상 데뷔 시즌 팀 내 득점 1위를 기록한 역대 세 번째 선수이자, 데뷔 시즌에 10골 이상을 넣은 아홉 번째 선수가 되었다.
1980년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득표수 | 1980년 1월 7일 Kicker 메인 표지[18] |
79/80 시즌 슈포르트 빌트 분데스리가 올해의 베스트 11 | 1980년 푸스발 보헤(fußball-woche) 관련 기사 |
여기에 유력 일간지였던 빌트가 선정하는 79/80 시즌 분데스리가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빌트의 경우 본지인 빌트 자이퉁(Bild Zeitung)과 자매지인 슈포르트 빌트(Sport Bild) 모두 차범근에 대한 초반 평가가 유일하게 안 좋았던 스포츠 매체였는데 점차 평가가 좋아지더니 최종적으로 빌트 자이퉁에서는 79/80 시즌 선수 랭킹 3위, 슈포르트 빌트에서는 분데스리가 베스트 11에 선정하였다.[21] 여담이지만 1979년 발행부수 500만 돌파를 기념하는 행사에 프랑크푸르트시의 스포츠 선수로는 유일하게 차범근을 초대하기도 했다. 당시 함부르크에 본사를 두고 있던 빌트가 굳이[22]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선수를 초청했다는 점은 당시 차범근의 인기를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80/81 시즌의 경우 첫 경기에서 무득점임에도 평점 2점을 받았고, 두 번째 경기에 멀티골을 넣으며 평점 1점을 기록하는 등 데뷔 시즌의 활약을 이어가는 듯 보였지만 선수 생명에 위협이 될 정도의 큰 부상을 연이어 당해 그 여파가 꽤 큰 시즌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DFB-포칼 우승을 이끌었는데, 당시 두 차례의 멀티골을 포함해 6경기 6골을 기록하며[23][24] 포칼 득점 순위 상위에 랭크되는 등 맹활약했고 리그와 UEFA컵을 포함해 시즌 16골로 오히려 데뷔 시즌보다 더 많은 골을 넣으며 차붐의 건재함을 알렸다.
81/82 시즌 역시 분데스리가 11골을 넣어[25] 팀 내 득점 1위를 기록한 차범근은 82/83 시즌 자신의 프랑크푸르트 시절 리그 최다 득점인 15골을 기록하는데 이는 팀의 리그 득점 31.25%에 해당했으며[26][27] 팀 내 최다 득점은 물론 구단 역사상 한 시즌 분데스리가 역대 득점 7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이에 힘입어 82/83 시즌 라운드 베스트 11(Elf des Tages) 6회에 선정되어 전체 선수 순위 상위에 랭크되었을 뿐 아니라 라운드 최우수선수[28](Spieler des Tages)에도 전체 선수 1위에 해당하는 3회 선정되었다. 랑리스테 역시 전반기 랑리스테 IK(인터내셔널 클래스)를 시작으로 전후반기 통틀어 전체 외국인 순위 2위, 분데스리가 시즌 평점 공격수 부문 3위를 기록하는 등 데뷔 시즌 못지않은 평가를 받았다. 이렇듯 차범근은 매 시즌 10골 이상을 넣었으며 멀티골만 12차례[29] 기록하는 등 팀 내 득점 순위 1위에 해당하는 득점력을 과시하며 팀의 주축 공격수로서 활약했다. 또한 단순 득점뿐만 아니라 경기 장악력과 기회 창출도 뛰어났기 때문에 시즌별 경기 평점도 상당히 높았다.
차범근의 영입을 로또 당첨에 비유한 당시 서독 신문 기사 | 79/80 시즌 전반기 차범근의 Kicker 랑리스테 평가 기사 |
잠깐 랑리스테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자면 차범근의 WK(월드 클래스) 등급은 랑리스테의 평가 기준을 까다롭게 책정 중이 던 Kicker에서 예외를 둔 몇 안 되는 사례기도 하다. 80년대의 WK 등급에 선정되기 위해서는 리그에서 활약도 활약이지만 각 소속 국가대표에서 최소 IK(인터내셔널 클래스) 정도의 활약을 해야 했다. 당시 국가대표를 뛰지 않던 차범근은 이런 WK 등급 기준을 충족할 수 없었지만 키커지에서는 국가대표 활약과 상관없이 차범근의 분데스리가와 UEFA 컵에서의 활약만으로도 WK 등급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에 이번만큼은 예외를 뒀다는 코멘트를 남긴다. 후반기가 시작되고 차범근의 플레이를 분석한 각 구단에서 대비책을 내놓자 차범근은 전반기만큼의 퍼포먼스를 보여주지는 못했는데, 키커 역시 상대의 집요한 견제와 주변 동료들의 부족한 지원 속에 홀로 고군분투했지만 전반기만큼의 매서움을 보여주지 못했다며 IK(인터내셔널클래스) 등급을 매겼다. 다시 말하자면 평가가 떨어졌는데도 국제적 수준의 선수에게 부여하는 인터내셔널 등급을 받은 것이다. 79/80 시즌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퍼포먼스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평가이다.
헨샤인트의 차범근 찬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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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이와 같은 활약에 감명을 받은 독일의 작가 에크하르트 헨샤인트(eckhard henscheid)[32]가 차범근을 찬양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국내에 '차붐, 자네를 오랫동안 사랑하리'라는 구절로 유명한 바로 그 시다. 헨샤인트의 글은 관찰을 통한 숭배 속에 풍자를 담는 것을 기조로 삼고 있는데, 이 시 역시 그 특징을 물씬 살려 엄청난 찬양이 담겨있다.[33]
차범근의 4-3-3 포메이션 위치 | 차범근의 4-4-2 포메이션 위치 |
그들의 전술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높은 평가를 받았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차범근이었다. 센터 포워드임에도 불구하고 좌우 중앙 할 것 없이 빠른 주력을 이용해 돌파하거나 미드필더 라인까지 내려와 공격의 흐름을 통제하고 활로를 모색하는 차범근의 플레이 스타일은 80년대 분데스리가에서 높게 평가되었고 당시로서는 드물게 수비 가담까지 적극 참여했던 만큼 경기장에서 득점 여부와 상관없이 돋보이는 존재감을 과시했다.
팀 공격진을 서포터 해주며 이타적인 플레이를 선보였던 차범근은[34] 현재로 따지면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 활약했다고 할 수 있는데, 79/80~82/83 시즌 동안 분데스리가 상위 5위권 팀들을 상대로 55경기 23골을 기록하는 등 강팀 약팀 할 것 없이 균일한 득점력을 선보이며 주력 득점원으로서의 역할도 훌륭히 소화해내었다.[35]
비슷한 스타일의 공격수 중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케빈 키건과 같이 한 차원 높은 수준의 선수보다 완성도나 유연함이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도 있지만 주어진 기회를 마무리하는 능력과 상대방 진영 전체를 활보하는 플레이를 통해 당대 분데스리가 공격수들과 비교했을 때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여기에 탁월한 피지컬과[36] 강력한 슈팅 및 헤더 능력까지 겸비한 차범근은 당대 발롱도르 위너들과 꾸준히 비견되는 정상급 선수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79/80 시즌 분데스리가 세 경기 연속 득점 | 79/80 시즌 분데스리가 20-25 라운드 득점 기록 |
당시 득점랭킹 상위에 존재하는 공격수들 대부분이 무득점 경기에서 3점~4점의 평점을 받는 경우가 많은 것에 비해 차범근은 상대적으로 무득점 경기임에도 2점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프랑크푸르트 시절은 그 빈도가 유독 높았는데, 심지어 무득점임에도 1점을 받은 경기도 존재한다. 한마디로 골을 넣는 것만큼의 활약을 보여준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무득점이 이어져도 다른 공격수들에 비해 부진하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가 덜 한 편이었다.[37]
79/80 시즌 분데스리가 공격수 부문 평점 순위 | 82/83 시즌 분데스리가 공격수 부문 평점 순위 |
각 시즌별 평점은 전체 분데스리가 선수 중 25-77-78-20위에 해당한다. 수치만 놓고 보면 생각보다 낮은 순위라 느껴지겠지만 당시 80년대 분데스리가의 평점은 공격수에게 굉장히 짠 편이어서 보통 10위 안쪽의 선수 대부분은 골키퍼나 수비수였고, 20위 안쪽 역시 수비수 혹은 미드필더 포지션의 선수가 차지했다.
80년대 통틀어 공격수로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것이 루메니게가 오른 7위였을 정도로 공격수에게 상당히 박한 평점을 주었는데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뛰었던 4년간 평점 순위 20위 안에 들어간 공격수는 단 4명, 30위 안에 들어간 공격수로 쳐도 겨우 한 명이 추가된 5명에 불과하다. 차범근은 이 모든 그룹에 포함되며 특히 두 차례 이상 30위 안에 들어간 선수는 루메니게와 차범근 단둘뿐이다.
또한 분데스리가에서 1점과 2점을 받은 경기가 50회에 이르는데(1점 13회+2점 37회) 골을 기록해도 3~4점을 받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41] 7~80년대 분데스리가 공격수들에게 1점과 2점은 득점 유무를 떠나 경기 자체를 이끈 선수만이 받을 수 있는 점수였다. 다시 말하자면 차범근은 10경기를 뛰면 4경기는 이런 최상위 점수를 받은 것이다. 여기에 Good 정도에 해당하는 3점을 받은 경기 역시 50회나 되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차범근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뛴 122경기 중 82%에 해당하는 100경기에서 발군의 기량을 선보였다고 할 수 있다.
79/80 시즌 분데스리가 전반기 공격수 평점 순위 |
동양인 선수가 이토록 적응기와 기복 없이 활약했다는 것도 대단하지만 가장 놀라운 점은 시즌마다 모든 출전 경기를 선발로 뛰었다는 점과 경기 대다수를 풀타임 소화했다는 점인데, 특히 데뷔 시즌은 무려 45경기 풀타임을 뛰었으며. 유일한 교체 경기인 UEFA컵 8강 2차전 역시 86분을 뛰고 교체되었다. 한창 손흥민의 혹사 논쟁 때 못지않은 수준으로 당시 차범근의 체력이나 신체능력을 어렴풋이나마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차범근 역시 혹사의 여파를 피해가진 못했고, 79년 8월 11일부터 80년 3월 1일까지 총 33경기(리그 23경기+포칼 4경기+UEFA 6경기)를 연속해서 선발 풀타임 출전을 하던 중 오른쪽 허벅지 근육에 문제가 생겨 치료를 받았다.# 이로 인해 24라운드 함부르크 전에 결장했는데, 25라운드 뮌헨글라드바흐 전에 바로 복귀하여 선발 풀타임 출전과 1골을 기록하며 팀의 5:2 승리를 이끌었다.(...)
1980년 스위스 Edi Naegeli 토너먼트 대회 결승 관련 기사[42] | 1981년 헤르타 BSC와의 친선 경기 관련 기사[43] |
79/80 시즌 8-9라운드 프랑크푸르트 경기 일정 |
물론 매번 풀타임으로 출전하지는 않았고 선발 출전 후 교체되거나 교체 출전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당시의 친선대회는 요즘처럼 2군을 운용하는 경기가 아닌 주전 선수 대부분이 뛰었기 때문에 경기의 피로도가 상당했다. 이런 상황이 가능했던 이유는 친선 경기가 구단에게 꽤나 쏠쏠한 수익을 안겨주었기 때문인데 당시 선수와 구단 간의 계약 관계가 구단에게 유리해 출전이 불가피한 것도 있었지만 수익의 50%를 떼어가는 독일의 세금정책 상 많은 선수들이 부가적인 수익을 위해 광고나 사인회를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시대였고 이 친선경기 역시 그 일환이었기 때문에 프랑크푸르트뿐만 아니라 다른 팀의 주전 선수들 대부분이 친선 경기를 뛰었다. 이에 따라 친선경기임에도 대단한 규모의 관중이 모여들었는데, 프랑크푸르트만 해도 적게는 2,000여 명 많게는 40,000명이 넘는 관중들이 친선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찾아왔다. 특히 단순히 단판 경기가 아닌 각종 친선 토너먼트 대회도 진행되었기 때문에 독일 내 구단끼리의 대결뿐 아니라 타국 리그의 프로 팀과의 경기가 대회 규모로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 시절 이런 친선 경기만 143경기를 뛰었고 101골을 넣었다.
1981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실내축구 대회 관련 기사 | 1982년 베를린에서 열린 실내축구 대회 관련 기사 |
1981년 벤츠를 타고 훈련장에 도착한 차범근[46] | 1980년 프랑크푸르트 팬 사인회에 참여한 차범근[47] |
1979년 프랑크푸르트와의 첫 계약 당시 차범근은 연봉과 더불어 디첸바흐(Dietzenbach)에 위치한 20평 규모의 아파트와 79년형 벤츠 S 클래스 280 SEL를 제공받았는데 1980년 재계약을 하며 연봉이 오르자 구단에서 제공하던 아파트와 차량을 처분하고 프랑크푸르트 교외 지역인 바트필벨(Bad Vilbel)에 위치한 대저택[50]과 80년형 벤츠 S 클래스 450SEL 모델을 구입했다.[51] 특히 벤츠 450SEL은 당시 서독의 부유층들이 타고 다니는 차로 유명했기 때문에 차범근이 훈련장에 차를 타고 올 때마다 동료 선수들이 굉장히 부러워했다고 한다.[52]
또한 팬 사인회를 통해 부가적인 수입도 가져갔다. 당시 팬 사인회는 분데스리가 선수들의 주요한 수익원 중 하나로써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팀 내의 주요 선수 몇 명만 참여할 수 있었다. 팬 사인회의 참여로 받는 금액은 모든 선수가 동일했지만 횟수의 차이가 있었다.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활동하던 시기인 1979년~1983년 사이에 사인회에서 받는 금액은 보통 1회당 4,600 마르크에서 5,600 마르크, 당시 한화로 140~170만 원 선이었는데 이는 사인회에 참여하는 모든 선수가 동일하게 받는 금액이었다. 다만 선수의 인기에 따라 사인회를 할 수 있는 기회가 달랐는데 보통 구단에서 진행하는 사인회보다 백화점이나 기업이 주최하는 사인회에서 수익이 났고 이런 행사는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인기 있는 선수들이 좀 더 많은 사인회에 초청받을 수 있었다.
워낙 수요가 적다 보니 웬만한 선수들은 사인회 자체를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차범근 역시 많은 기회를 갖진 못했지만 프랑크푸르트 선수 중에는 베른트 횔첸바인, 브루노 페차이와 함께 팬 사인회에 참여하는 단골 선수 중 한 명이었고 보통 한 달에 2~4회 정도 참여하여 한 달에 최대 23,000 마르크, 당시 한화로 약 700만 원 정도의 수익을 얻었다.[53] 참고로 차범근은 당시 360여 명 가량의 분데스리가 선수들 중 12~18위 정도의 인기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54]
여담으로 이런 차범근의 사인회의 수익은 대한민국 스포츠계에 큰 충격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의 사인회는 일종의 서비스 차원의 개념이라 기업이든 구단이든 선수에게 사인회에 대한 금액을 지불하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한국에서도 해외 취재팀의 인터뷰를 비롯한 각종 행사에 선수들이 일정 금액을 받기 시작하는 등 부가 수입에 대한 개념이 성립되기 시작했다. 다만 차범근이 받은 사인회 수익은 말 그대로 행사 차원에서 섭외비 명목으로 지급받은 것인데 이것이 분데스리가에서는 경기 후 팬들에게 사인해 줄 때 돈을 받는다는 식으로 와전되어 80년대 한국 프로 선수들 중 "앞으로 우리도 해외처럼 팬들에게 사인해 줄 때 돈을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선수가 생기기도 했다.
1980년 Bild Sport에 실린 차범근 부상 관련 기사 및 자필 편지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발트슈타디온에 설치된 한글 전광판 |
차범근은 데뷔 이후 상대팀에게 엄청난 견제를 받았고, 폭발적인 돌파로 경기장을 휘젓고 다니는 차범근을 막기 위해 거친 반칙을 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애초부터 유럽에서 거칠기로 유명한 분데스리가인데다 자존심에 금이 간 독일 선수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담긴 태클로 인해 차범근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인터뷰했다.
대표적으로 두 번째 시즌인 80/81 시즌에 겔스도르프에 의한 부상을 들 수 있는데, 요추뼈가 부러지는 선수 생명에 위협을 받을 정도의 큰 부상을 당했다. 당시 분노한 프랑크푸르트 팬들이 겔스도르프에게 살해 위협을 가하기도 했고 구단에서도 고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미디어 매체에서도 이 사건을 크게 보도했는데 서독 헤센 방송국에서는 차범근의 부상을 특집으로 다룬 토크쇼를 방송했고 bild-sport 신문에서는 부상을 걱정하는 팬들에게 보내는 차범근의 자필 편지를 한글 그대로 1면에 실어 발간하기도 했다.
차범근은 이 상황에서 겔스도르프를 용서하겠다며 고소를 취하했는데 이 결정이 독일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켜 차범근의 평가가 더욱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56] 현재까지도 분데스리가 부상 관련 사례로 언급되기도 한다.#
차범근이 당한 부상이라고 하면 흔히 갤스도르프에 의한 부상만 언급되지만 사실 그에 못지않게 큰 부상을 한 번 더 당하게 되는데, 바로 한스 페터 브리겔에 의한 부상이었다. 한스 페터 브리겔은 당대 서독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이었지만[57] 유독 차범근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차범근이 강한 면모를 보이던 팀 중 하나가 브리겔의 소속팀이던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이었다보니[58] 매번 경기를 하면 키커나 푸스발 등 당시 독일 유수의 축구 전문지에서 차범근을 막지 못한 브리겔 때문에 졌다든지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는 식의 기사를 냈고, 이에 자존심이 상했던 브리겔은 결국 겔스도르프의 부상에서 돌아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차범근의 대퇴부를 들이받아 68분 만에 교체 아웃되게 만들었다.[59] 부상 수준은 갤스도르프 때의 부상이 더 컸지만 이 사건은 차범근의 부상으로 인해 분데스리가에 전반적으로 파울 완화 분위기가 형성된진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벌어진 일이다 보니 차범근 역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분데스리가내에서도 상당한 파장을 몰고 왔다.
1981년 차범근 관련 키커 특집 기사 |
키커는 81/82 시즌 분데스리가 14 라운드 SV 베르더 브레멘전에서 멀티골을 뽑아내며 팀의 9:2 승리[60]를 이끈 차범근의 활약을 집중 조명하며 특집 기사를 냈는데 타이틀 제목은 '발트[61]가 다시 붐을 일으키게 하다'였다. 키커에 따르면 당시 팀 동료였던 브루노 페차이[62]와 카를하인츠 쾨르벨[63]은 차범근의 연이은 부상을 걱정하며 감독에게 대처를 요구했고 이에 로타르 부크만 감독은 차범근에게 한동안 득점보다 어시스트 위주의 플레이를 하도록 지시했다고 하며 구단에서도 차범근의 전담 심리치료팀을 꾸려 한동안 경기가 끝날 때마다 케어를 하게끔 했다고 한다.
이와 함께 키커는 차범근을 가리켜 분데스리가에서 활약 중인 선수들 가운데 살인적인 태클로 연거푸 부상당한 선수라고 강조하며 스타플레이어에 대한 견제에 앞서 상대방을 존중하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기사를 쓰기도 했다.
이런 거친 반칙에도 불구하고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시절 경고 1번을 받을 정도로 페어플레이를 보였는데, 프랑크푸르트 시절에는 前 서독 대통령인 발터 셸이 수여하는 80년도 분데스리가 페어플레이상을 받았고,[64] 부상으로 상금 170만 원과 순은제 트로피를 받았다.##
80년대 차범근 이적 관련 독일 기사 | 80년대 차범근 이적 관련 한국 기사 |
이미 유명한 이야기지만 당시 특파원으로 파견된 기자들의 갑질로 차범근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극히 꺼린 것도 한몫했다. 이를 고깝게 보던 기자들은 멋대로 사실 확인도 안된 기사를 쏟아냈는데, 대표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겔스도르프와 브리겔에 당한 연이은 부상으로 출전을 못하던 80/81 시즌 상황을 마치 감독에게 배제당했다는 식으로 보도했고 심지어 부상 복귀 후에는 어린 선수들에게 포지션 경쟁에서 밀려 교체 출전 위주의 벤치 멤버로 전락했고,[67] 출전 경기마다 무명의 수비수들에게 공격이 막히며 홈 팬들에게 야유를 받고 있으며,[68] 분데스리가에서의 몸싸움 경쟁을 위해 근육량을 늘린 것을 진출했을 때보다 몸무게가 4kg 늘어 헤딩도 못한다, 안 뛰어도 수당을 받을 수 있어 게으름을 피운다 등 악의적으로 왜곡된 기사를 썼다. '차붐은 사라지는가'라는 제목은 덤. #
1980년 11월 25일 프랑스 풋볼 표지 | 80/81 시즌 프랑스 풋볼 차범근 관련 기사 |
당시 UEFA 컵 16강 전에서 프랑스 팀인 FC 소쇼몽벨리아르와 AS 생테티엔이 각각 독일 팀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SV와 맞붙게 되었는데 풋볼지에서 상대팀의 대표 에이스인 차범근과 호르스트 흐루베슈(차범근 뒤에 서있는 선수)를 표지 메인으로 선택한 것이다.
'우리(프랑스 팀)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priez pour nous!)라는 풋볼지의 표지 타이틀이 인상적인데 프랑스 팀들과 맞붙는 상대가 하필 세계 1위 리그였던 분데스리가의 팀인데다 함부르크는 당시 78/79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 79/80 시즌 준우승의 성적을 거두고 있던 분데스리가 최상위 팀이었고 프랑크푸르트는 UEFA 컵 디펜딩 챔피언이었기 때문에 프랑스 언론의 결과 예측은 회의적이었다.
무엇보다 프랑스 풋볼은 차범근의 존재를 경계했다. 풋볼지에 수록된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당시 소쇼의 감독인 장 포베르그는 프랑크푸르트와의 UEFA 컵 16강 1차전을 앞두고 차범근을 '슈퍼 선수'(Super-joueur)라고 칭하며 '모든 팀들의 가장 큰 적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했으며 풋볼지 역시 '경계 대상 1호'로 차범근을 꼽으며 그를 잘 막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코멘트를 적었다.
차범근에 대한 우려는 현실이 되어 UEFA 컵 16강 1차전은 프랑크푸르트가 4:2로 승리를 거두었는데 차범근은 골을 넣지는 못했지만 경기 이후 프랑스 언론에서 '날렵한 고양이 같은 선수', '활력이 넘치는 선수'라고 호평할 정도로 맹활약했다.# 경기 시작 전 프랑스 중계방송에서 몸을 푸는 차범근을 카메라에 담으며 가장 경계해야 할 선수 중 한 명으로 언급하기도 했는데, 그에 상응하듯 4-4-2 포메이션의 왼쪽 최전방 공격수로 출전한 차범근은 좌우 중앙 할 것 없이 말 그대로 상대 진영 전체를 휘젓고 다니며 끊임없이 소쇼를 괴롭혔다. 특히 하프라인 아래까지 내려가 수비 가담까지 하는 등 엄청난 활동량을 선보였으며 심지어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공중볼까지 경합하니 소쇼로서는 차범근 한 선수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느낌이 컸다.[70]
다만 이러한 1차전 승리에도 불구하고 최종 결과는 예상외로 소쇼가 8강에 진출했다. 진출 가능성이 희박하던 소쇼는 2차전 홈경기에서 기적적으로 2:0 승리를 거두며 원정 다득점 원칙에 따라 8강 진출에 성공하였는데[71] 1차전 4:0 이후 선수들의 무질서로 인해 후반 막판 2실점을 한 것에 강한 질타를 했던 로타르 부흐만 프랑크푸르트 감독은 2차전 경기 이후 부주의와 오만에 따른 끔찍한 패배라고 말했고 프랑스 풋볼에서는 이러한 소쇼의 8강 진출을 기적이라 평하기도 했다. 프랑스 내에서도 이 경기의 임팩트가 컸는지 40년이 지난 2020년 프랑스 일간지 L'Est Republicain에서 해당 경기를 FC 소쇼 몽벨리아르의 유럽 클럽 대항전 역사상 최고의 승리로 꼽기도 했다.#
82/83 시즌 차범근 분데스리가 100경기 관련 기사 |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 소속으로 뛴 분데스리가 100경기에서 37골을 기록했으며, 이는 당시 구단에서 100경기를 뛴 선수들 중 역대 4위에 해당하는 득점 기록이었다.[72]
사실 차범근 개인적인 분데스리가 100경기 출전은 이 전 경기인 10월 23일 헤르타 BSC와의 분데스리가 10라운드 경기였는데, 78/79 시즌 SV 다름슈타트 98 소속으로 치른 1경기가 있기 때문이다. 단 한경기 출전 후 군대로 복귀했기 때문인지 당시 서독 신문이나 국내 신문에서 차범근의 100회 출전을 위의 쾰른 전으로 착각한 기사들이 꽤 있다. 차범근은 본인의 분데스리가 100번째 경기에서도 팀 내 최고 평점인 2점을 받으며 맹활약했는데, 아쉽게도 팀은 0:1로 패배했다. 당시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100경기를 취재 나간 프랑크 루셈 키커 편집장의 회고에 따르면[73] 헤르타 베를린의 골키퍼 그레고르 콰스텐의 '인생 경기'급 선방으로 경기는 아쉽게 패배했지만 차범근을 막을 수 있던 필드 플레이어는 없었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활약을 했다고 한다.#[74]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로 이 헤르타 베를린과의 경기가 레버쿠젠이 차범근을 영입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바로 현장에 레버쿠젠의 칼문트 단장이 와있었기 때문인데, 베를린과의 경기에서 활약한 차범근의 모습을 보고 "골운이 없었을 뿐 혼자서 베를린을 헤집어 놨다"라는 평가와 함께 구단 간부들에게 차범근을 영입해야 하는 이유와 계약 추진 의사를 보고하기에 이른다. 프랑크 루셈 편집장의 얘기로는 레버쿠젠에서는 같은 해 8월 24일에 열린 분데스리가 2라운드의 경기 후 이미 차범근을 영입 대상에 올려두고 있었는데, 프랑크푸르트가 5:0 승리한 레버쿠젠과의 2라운드 경기에서 2골을 넣는 등 압도적인 경기력을 보인 차범근을 보며 레버쿠젠 관계자들이 "대체 그라운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라는 평을 남겼다고 한다.
79/80 시즌 UEFA컵 64강 2차전 퍼거슨 인터뷰 |
80년대 분데스리가를 함께한 오쿠데라와 차범근 |
오쿠데라와는 별개로 프랑크푸르트 시절 차범근은 1. FC 쾰른에게 천적과도 같은 존재였는데 본인이 출전한 쾰른과의 여섯 차례의 경기에서 4골을 기록하고 팀 전적 4승 2무를 이끌며 단 한차례의 패배도 허용하지 않았다.
쾰른의 구단 신문에서도 이런 차범근을 '프랑크푸르트 최고의 선수'라고(der starksten frankfurter spieler) 지칭했으며 # 이 강력하고 거슬리는 존재를 막아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특히 차범근이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한 두 번의 경기에서는[81] 프랑크푸르트를 이길 절호의 기회가 왔다며 승리를 촉구하기도 했는데 실제로 이 두 번의 경기에서 프랑크푸르트는 0:5, 0:2로 무득점 패배하였다.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시절 서독 신문 기사를 찾아보면 차범근과 함께 자주 언급되는 선수가 있는데 바로 팀 동료인 미드필더 베른트 니켈이다.[82] 수비의 브루노 페차이, 공격의 차범근과 함께 프랑크푸르트를 이끈 선수 중 한 명인데 특히 차범근과 콤비를 이루며 서독 내에서 이 둘을 '꿈의 파트너'라고 불렸다고 한다. 니켈 스스로도 차범근과의 합이 만족스러웠는지 당시 키커와의 인터뷰에서 "차범근과 나의 콤비 플레이는 몸이 움직이는 축구에 국한되는 게 아니다. 텔레파시처럼 정신적으로 알 수 없는 연결고리가 있는 것 같다"라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차범근과 프리델 라우쉬 감독 | 차범근과 로타르 부흐만 감독 |
헬무트 제네코비치 감독 | 베른트 니켈, 브란코 제베츠 감독, 차범근 |
차범근을 영입한 프리델 라우쉬(Friedel Rausch) 감독 역시 78/79 시즌 감독이었던 오토 크네플러(Otto Knefler)가 뜬금없이 교통사고를 당해 시즌 중 조기 사퇴한 상황에서 급히 부임했었던 상황이었다. 독일 출신인 라우쉬 감독은 어수선한 팀을 추스르며 분데스리가 5위에 안착시키고 UEFA 컵 진출을 이끌며 팬들에게 큰 사랑을 받던 감독이었지만 다음 시즌인 79/80 시즌을 맞아 점진적인 세대교체를 주장하며 당시 팀 주장이자 구단의 레전드 선수였던 위르겐 그라보브스키에게 은퇴를 권고하여 구단 선수진들과 불화를 야기했다.[84] 원클럽맨인데다 분데스리가에서도 손꼽히는 공격 자원이던 선수를 대우하지 않았다는 불만이 가득하던 상황에서 때마침 대체자처럼 등장한 차범근은 억울하게도 팀 동료들에게 한동안 견제와 미움을 받기도 했다.[85] 하지만 그라보브스키는 차범근을 마음에 들어 해 직접 나서서 팀 동료들의 오해를 풀고 구단 생활에 적응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고, 1979년 10월에 진행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팀 창단 80주년 기념 파티에 차범근과 함께 단둘만 초대되기도 하는 등[86] 여전히 구단의 주요 선수로 남아 있었다. 이렇게 선수들과 감독 간의 마찰은 있었지만 곧 다시 화합한 프랑크푸르트는 UEFA 컵 우승이라는 큰 영예를 안았는데 결국 라우쉬 감독은 이 시즌을 끝으로 페네르바흐체 SK로 감독직을 옮겼고, 갈등의 원인이었던 그라보브스키는 시즌 말미에 로타어 마테우스에 의해 큰 부상을 당하며 은퇴를 하게 된다. 차범근은 라우쉬 감독과 함께했던 1시즌 동안 46경기 15골을 기록했다.
이후 독일 출신 로타르 부흐만(Lothar Buchmann) 감독이 부임하여 80/81부터 81/82 시즌까지 지휘하게 된다. 하필 새로운 감독의 부임 첫 시즌에 선수 생명에 영향을 끼칠만한 큰 부상을 당해 경쟁에서 밀리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부흐만 감독은 78/79 시즌 당시 차범근을 SV 다름슈타트 98로 영입한 감독으로 여전히 꾸준한 신뢰를 보내고 있었고, 군문제로 한 경기만 보냈던 지난날을 보상받듯 함께 DFB-포칼 우승을 일궈내었고 자신의 생일에 집에 차범근의 가족을 초대하는 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하지만 리그 5위와 DFB 포칼 우승을 일구며 성공적인 시즌을 보내던 부흐만 감독은 경영진의 미비한 투자와 성적 압박에 갈등을 빚다 사퇴한다. 차범근은 부흐만 감독과 함께했던 2시즌 동안 77경기 28골을 기록했다.
차범근의 프랑크푸르트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82/83 시즌 역시 감독의 교체는 계속되었는데 새로 부임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헬무트 제네코비치(Helmut Senekowitsch) 감독은 구단의 역대 4번째 외국인 감독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초반 5경기에서 1승 4패를 거두며 조기 경질되었고[87] 유고슬라비아 출신의 브란코 제베츠(Branko Zebec)가 감독으로 부임한다. 제베츠의 경우 지금까지 차범근이 만난 감독 중 가장 인지도가 높은 감독이었는데, 애초에 제베츠 본인부터 유고슬라비아의 전설적인 선수였을 뿐 아니라 감독으로서는 GNK 디나모 자그레브를 이끌고 인터-시티 페어스컵을 우승시키며 동유럽 클럽 최초의 국제 타이틀을 따냈으며[88] FC 바이에른 뮌헨을 이끌고 분데스리가 우승과 DFB 포칼 우승을 이뤘으며[89] 함부르크 SV로 부임한 후도 분데스리가 우승과 유러피언컵 준우승을 이끈 분데스리가의 대표적인 명장 중 하나였다. 다만 제베츠 감독 역시 말년으로 갈수록 음주 문제를 비롯해 사생활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감독인데다 강압적인 훈련 방식을 선호하다 보니 구단 및 선수들과 불화와 성적 부진으로 한 시즌만에 경질되며 프랑크푸르트의 불명예스러운 감독 교체 역사에 한 페이지를 작성하고 만다. 차범근은 제베츠 감독과 함께했던 1시즌 동안 27경기 12골을 기록했다.
참고로 게르트 뮐러나 베켄바워, 케빈 키건, 호르스트 흐루베슈같은 역대급 선수들을 지도해왔던 제베츠의 눈에도 차범근의 기량이 무척 만족스러웠는지 굉장한 애정을 보였다. 특히 공격적인 성향의 전술을 구사하던 만큼 그 핵심으로 차범근을 두었는데 이로 인해 시즌 말미 함부르크가 차범근에게 강력한 러브콜을 보내자 다음 시즌에 반드시 필요한 선수라며 결사반대를 하기도 했으며 결국 구단의 재정 악화로 레버쿠젠으로 이적을 하자 잘못된 경영으로 귀중한 선수를 잃었다며 구단 경영진을 비난하기도 했다.[90][91]
1983년 2월 17일 Kicker 메인 표지 | 1983년 7월 21일 Kicker 메인 표지 |
3.3. 이적
1980년대 분데스리가에는 큰 재정적 위기가 찾아왔고 많은 대형 선수들이 해외로 이적하기에 이른다. 프랑크푸르트 역시 이런 재정적 위기를 피해 가지 못하고 차범근을 비롯한 주력 선수들을 매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했다.특히 차범근의 이적은 당시 분데스리가에서도 상당한 이목이 집중되던 사안이었다. 독일의 대표적인 축구 전문지였던 키커에서도 '차범근이 없는 프랑크푸르트는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타이틀을 내걸며 차범근의 이적에 따른 프랑크푸르트의 전력 손실과 그로 인한 영향에 대해 다루는 특집 기사를 쓰기도 했으며 '숨바꼭질하는 차범근, 모두를 안달 나게 하다'라는 타이틀과 함께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차범근에게 오퍼를 넣었던 함부르크 SV, FC 바이에른 뮌헨, 1. FC 뉘른베르크, 바이어 04 레버쿠젠, VfB 슈투트가르트를 비롯하여 세리에 A의 SSC 나폴리, AC 밀란,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등 각 구단들의 조건들을 비교하며 뚜렷한 결정을 내리지 않고 있던 차범근의 이적 향방을 다루기도 했다.
기사에 따르면 이외에도 프랑스, 스페인, 스위스 등 다른 나라에서도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내용과 함께 여러 구단 중 가장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팀은 AC 밀란으로 이탈리아 생활에 필요한 집과 차는 물론 자녀들의 학비를 지원해 줄 뿐 아니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받던 연봉을 그대로 유지하는 대신 국가에 내는 연봉의 세금을 구단에서 전액 부담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고 한다.[92]
차범근 역시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의 우승국이었던 이탈리아에서 뛰고 싶은 의중을 비췄다고 하는데 사실 차범근은 이 당시 부동산 사기로 인해 자금적인 문제가 크게 온 상황이었어서 당시 막대한 자본으로 세계 유수의 선수들을 모으던 이탈리아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인즉, 차범근은 1980년 재계약을 맺은 뒤 프랑크푸르트의 부회장이자 건축업자였던 볼프강 젠커( Wolfgang Zenker)에게 약 90만 마르크(당시 약 2억 7천만 원 상당) 금액으로 바트필벨(Bad Vilbel)에 위치한 저택을 매입했는데 알고 보니 원래 부동산 가격의 2배를 더 주고 매입한 것이었다. 이는 당시 차범근의 회계 담당이었던 홀게르 클레머(Holger Klemme)에 의해 밝혀졌는데 매입할 때 구입 금액의 50만 마르크를 융자 받아 매년 4만 5천 마르크의 이자를 내고 있던 차범근은 젠커 부회장에게 강하게 항의하며 이자 납부를 중지하게 된다. 하지만 법에 저촉되지 않게 미리 조치를 해놓았던 젠커 부회장은 오히려 이것을 꼬투리 잡아 법적 절차를 통해 차범근의 급료를 압류처분하는 적반하장식 태도를 보였다.[93] 부동산 사기의 피해자였던 차범근은 융자금을 낼 수도, 집을 팔수도 없는 와중에[94] 급료까지 압류당하는 상황에 처해버린 것인데 결국 해당 사안이 수면 위로 올라와 팬들을 비롯한 서독 사회의 맹렬한 비난을 받으며 젠커 부회장은 파면되었고 프랑크푸르트 이사회 자체가 와해되기에 이른다.[95]
이런 상황들과는 별개로 여전히 부동산을 처분해야 했던 차범근은 당면한 금전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풍족한 조건을 제시하던 이탈리아로 이적을 타진했는데 하필 이 시점에 법적인 문제가 있는 선수는 그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해외로의 이적이 불가하도록 분데스리가 이적 관련 법이 바뀌어버려서 합의 직전까지 갔던 이탈리아 진출은 무산되고 분데스리가 내에서 이적 팀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다.[96]
부동산 사기를 비롯해 당면한 상황에 진절머리가 난 차범근은 때마침 슈퍼리그의 대우 축구단에서 적극적으로 오퍼가 들어와[97] 유럽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할지 고민했고 실제로 한국에 한동안 체류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좀 더 유럽 무대를 경험하고 싶다는 일념 하에 서독에 머물기로 한 차범근은 상황을 주시하며 기회를 엿보던 바이어 04 레버쿠젠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98]
차범근 이적 관련 제베츠 감독 인터뷰 | 82/83시즌 27R 헤르타 BSC전 차범근 평가 기사 |
추가적으로 기사 내용을 살펴보면 헤르타 BSC의 게오르그 갈리첵(Georg Gawliczek) 감독이 "아인트라흐트가 차범근을 가지고 있는 것은 행운이라 생각한다. 우리에게 저런 선수가 있었다면 5,6점은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차범근은 절대적으로 월드클래스이다."라고 차범근을 극찬한 인터뷰가 실려있고 이에 대해 프랑크푸르트 구단 신문은 '차범근 혹은 그와 동등한 선수가 없다면 프랑크푸르트는 내년에 강등과 싸우게 될 것'이라는 걱정과[104] '분데스리가에는 대체할 수 없는 두 명의 선수가 있는데, FC 바이에른의 루메니게와 우리와 함께하고 있는 차범근이다. 그는 아직 가지 않았다.'라는 애틋한 일말의 희망, 그리고 '차범근의 절친한 동료인 카를하인츠 쾨르벨이 "차범근은 한번 '아니오'라고 하면, 그 결정을 고수하는 매우 강인한 성격이다."라고 말했다'라며 어떤 식으로든 차범근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예감하는 듯한 기사가 쓰여있다.
4. 기록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시절 기록[참고1][참고2](1979.08.11~1983.06.04)[107]
4.1. 1979-80 시즌
1979/80 시즌: 46경기(선발 46경기) 15골 19도움풀타임 45경기(UEFA 1경기 교체 아웃)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31 | 12 | 11 |
DFB-포칼 | 4 | - | 5 |
UEFA컵 | 11 | 3 | 3 |
합계 | 46 | 15 | 19 |
(1점 5회, 2점 10회, 3점 13회, 4점 3회)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2.12
(WK 월드클래스/외국인 선수 1위)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2.86
(IK 인터내셔널클래스/외국인 선수 5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MVP: 1회 (14 라운드) #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8회 (1,3,5,11,14,16,20,21 라운드) # # # # # # # #
79/80 시즌 Kicker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BEST 11) #
팀 성적: 분데스리가 9위, DFB포칼 16강, UEFA컵 우승(구단 역사 최초)
4.2. 1980-81 시즌
1980/81 시즌: 38경기(선발 38경기) 16골 10도움풀타임 34경기(리그 3경기/UEFA 1경기 교체 아웃)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27 | 8 | 8 |
DFB-포칼 | 6 | 6 | 2 |
UEFA컵 | 5 | 2 | - |
합계 | 38 | 16 | 10 |
(1점 2회, 2점 8회, 3점 8회, 4점 8회)
※ 3라운드 부상 전반 16분 교체로 평점 X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2.55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4위)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3.07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7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MVP: 1회 (10 라운드) #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4회 (2,10,18,21 라운드) # # # #
팀 성적: 분데스리가 5위, DFB-포칼 우승, UEFA컵 16강
4.3. 1981-82 시즌
1981/82 시즌: 38경기(선발 38경기) 12골 7도움[108]풀타임 35경기(리그 3경기 교체 아웃)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31 | 11 | 6[109] |
DFB-포칼 | 1 | - | - |
UEFA컵 위너스컵 | 6 | 1 | 1 |
합계 | 38 | 12 | 7 |
(1점 1회, 2점 10회, 3점 13회, 4점 6회, 5점 1회)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2.87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7위)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2.88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6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1회 (26 라운드) #
팀 성적: 분데스리가 8위, DFB포칼 64강, UEFA 위너스컵 8강
4.4. 1982-83 시즌
1982/83 시즌: 34경기(선발 34경기) 15골 10도움[110]풀타임 32경기(리그 2경기 교체 아웃)
대회 | 경기 | 득점 | 도움 |
분데스리가 | 33 | 15 | 10[111] |
DFB-포칼 | 1 | - | - |
합계 | 34 | 15 | 10 |
(1점 5회, 2점 9회, 3점 16회, 4점 3회)
Kicker 랑리스테 전반기: 2.38
(IK 인터내셔널클래스/외국인 선수 2위)
Kicker 랑리스테 후반기: 2.65
(K 리그 내 경쟁력 있는/외국인 선수 2위)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MVP: 3회 (9,25,27 라운드) # # #
Kicker 분데스리가 주간 베스트 11: 6회 (2,9,11,13,25,27 라운드) # # # # # #
팀 성적: 분데스리가 10위, DFB포칼 64강
[1] 1979-80 시즌 14R / 1980-81 시즌 10R / 1981-82 시즌 26R / 1982-83 시즌 9,25,27R[2] 1979-80 시즌 1,3,5,11,14,16,20,21R / 1980-81 시즌 2,10,18,21R / 1981-82 시즌 2,9,11,13,25,27R[3] 1979-80 시즌[4] 2014년 분데스리가 선정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역대 Top 10 Goals 10위[5] 1982년 10월 30일 차범근의 프랑크푸르트 소속 100번째 분데스리가 출전 경기로 팀의 3:0 승리와 함께 평점 10점과 라운드 베스트11, 라운드 MVP를 차지하였다.[6] 당초 SV 베르더 브레멘에서 강력히 계약을 희망했는데, 사실 프랑크푸르트보다 앞선 7월 11일 테스트 경기를 치렀다. 여기서 차범근은 4골을 기록했고, 다음 날인 12일 계약 직전까지 갔으나 당시 프랑크푸르트 코치였던 슐터가 여우종 서독 교민회장을 통해 급하게 접선했다고 한다.#[7] 프랑크푸르트 슐테 코치 인터뷰[8] 71/72 시즌에 뛴 터키 출신의 엔더 콘카의 경우 터키 1부 리그(쉬페르리그 옛 이름)가 UEFA 리그로 분류되고 있었기 때문에 제외하였다.[9] 당초 SV 베르더 브레멘에서 강력히 계약을 희망했는데, 사실 프랑크푸르트보다 앞선 7월 11일 테스트 경기를 치렀다. 여기서 차범근은 4골을 기록했고, 다음 날인 12일 계약 직전까지 갔으나 당시 프랑크푸르트 코치였던 슐터가 여우종 서독 교민회장을 통해 급하게 접선했다고 한다.#[10] 프랑크푸르트 슐테 코치 인터뷰[11] 71/72 시즌에 뛴 터키 출신의 엔더 콘카의 경우 터키 1부 리그(쉬페르리그 옛 이름)가 UEFA 리그로 분류되고 있었기 때문에 제외하였다.[12] WK-1, 포지션 통틀어 외국인 전체 1위[13] 공격수 평점 1위는 뮌헨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2위는 함부르크의 케빈 키건. 누군지 잘 모르겠다면 키건은 78, 79년, 루메니게는 80, 81년 발롱도르 수상자.[14] 현 UEFA 유로파 리그의 전신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준UEFA 챔피언스 리그쪽에 더 가깝다. 당시 유러피언컵(현재의 UEFA 챔피언스 리그)은 유럽 각국의 리그 우승 팀만이 참가할 수 있었고, 자국 리그 우승을 놓친 팀 중 FA컵 우승 팀을 제외하고 아무리 강팀이라도 UEFA컵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소수의 팀이 경쟁하는 유러피언컵보다 오히려 UEFA컵이 흥행성이 더 높았다. 물론 흥행성 얘기다. 더 많은 팀들이 출전하는 UEFA컵이 흥행성은 더 높았다고 볼 수도 있지만 권위나 위상은 각 리그 우승 팀들이 맞붙는 유러피언컵이 언제나 최고였다. 하지만 차범근의 UEFA컵 우승이 지금의 유로파리그 우승보다 대단한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참고로 20/21 시즌 결과를 가지고 차범근 시절 기준 UEFA컵에 진출할 팀을 뽑자면 4대 리그만 해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리버풀 FC, 첼시 FC,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FC, 레알 마드리드 CF, 세비야 FC, 레알 소시에다드, 레알 베티스 발롬피에,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아탈란타 BC, SSC 나폴리, SS 라치오, RB 라이프치히, VfL 볼프스부르크,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이다.[15] 2021-22시즌 프랑크푸르트는 42년만의 우승을 차지했다.[16] '엘프 데스 타게스'라 불리는 주간 베스트 11은 선정된 횟수를 합산하여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을 뽑을 정도로 중요도가 높은 선정이었다. 특히 지금처럼 분데스리가나 독일 축구선수협회(VDV)에서 주는 공식적인 올해의 팀과 올 시즌의 선수와 같은 상이 전혀 없던 시절이기 때문에, 키커에서 선정하는 주간 베스트 11과 올해의 팀은 당시 선수들에게 자신의 활약을 인정받는 주요한 수상으로 인식되었다. 참고로 2011/12 시즌 이후부터 키커 올해의 팀의 선정 방식이 평점을 보고 뽑는 것으로 변경되었다.[17] 시즌 15골[18] 차범근은 아시아 및 비유럽 선수 최초로 키커지 메인 표지를 장식했으며 해당 호에서 발표된 랑리스테에서 WK(월드클래스) 등급을 받고 분데스리가 최고의 외국인 선수에 선정되었다.[19] 1960년부터 시상한 독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 있는 축구상이며, 분데스리가에 소속된 전체 선수 및 해외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독일 국적의 축구 선수를 대상으로 독일 스포츠 기자 협회 회원들의 투표를 통해 선정되었다. 대부분 독일 국적의 선수가 뽑혔고 상위 득표수를 차지했다. 비 독일인으로는 2004년에 아이우통이 최초로 수상하였는데 비 독일 수상자는 아이우통을 포함해 2021년까지 6명에 불과하다.[20] 공식적인 명칭은 Berliner Fußballwoche로 1923년 설립되어(1950년 재창간) 베를린에 본사를 두고 한 달 발행부수 200만 부 규모를 자랑하던 서독 스포츠 주간지다. 현재 SPM 스포츠 플라츠 미디어(SPM sportplatz media)에 속해있다. 당시 한 달 발행부수 350만 부를 기록하던 키커 다음으로 꼽히던 스포츠 전문 매체였다. 키커에 비해 공신력은 다소 떨어졌지만 자체적인 점수 체계와 '톱스타 퍼레이드'라는 선수 랭킹이 존재하기도 했다.[21] 푸스발 보헤와 빌트 모두 당시 키커처럼 라운드 베스트 11과 선수 랭킹을 부여했는데 차범근도 굉장히 많은 주간 베스트와 높은 랭킹을 획득하였다. 다만 공신력을 떠나 키커에 비해 인터넷으로 확인 가능한 기사나 자료가 현저히 부족해 추가하기가 어렵고 이 문서는 키커의 자료를 기본 골자로 삼고 있기 때문에 굳이 추가하지 않는다.[22] 2021년 교통편으로도 자동차로 4시간 50분, 비행기로 1시간 5분 거리다.[23] 포칼 최다 득점이 6-7골 선에서 나오는 걸 생각해 보면 대단한 기록이다. 참고로 80/81 시즌 DFB 포칼 최다 득점 역시 7골이었다.[24] 유럽 축구 통계 사이트인 트랜스퍼마크트(transfermarkt)에는 79/80 시즌 프랑크푸르트의 DFB-포칼 1라운드와 2라운드 경기 기록이 소실되어 차범근의 DFB 포칼 기록이 5경기 4골로 기재되어 있는데 Kicker를 비롯한 당시 언론사의 경기 기사를 보면 1980년 10월 4일 VFB Friedrichshafend와의 2라운드 경기에서 41분과 79분에 골을 기록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Kicker의 경우 모바일앱으로 확인해야 경기 상세 기록이 뜬다.) 분데스리가 공식 기록에도 차범근의 80/81 시즌 포칼 기록이 6경기 6골로 되어 있다.[25] 시즌 12골[26] 이해를 돕기 위해 당시의 유명 선수의 팀 리그 득점에 대한 비중을 살펴보면 82/83 시즌 당시 루메니게는 팀 리그 득점의 27.08% 정도를 기록했으며 현재 선수 중 팀 리그 득점의 30% 이상을 책임진 선수로는 20/21 시즌 해리 케인과 모하메드 살라가 각각 33.82%와 32.35%를 기록했다. 물론 이는 팀에서의 영향력을 느낄 수 있는 지표일 뿐이지 해당 선수들과 득점력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다.[27]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에서 활약한 4시즌 동안 팀의 리그 득점 17.89%에 해당하는 골을 기록했다. 당시 정상급 공격수였던 케빈 키건이 함부르크 SV에서 팀 리그 득점의 14.22%를 기록한 것을 보면 차범근이 팀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해당 수치가 와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좀 더 최근 선수에 대입해 본다면 첼시 FC에서 4시즌 동안(15/16~18/19 시즌) 팀 리그 득점의 17.84%를 기록한 에당 아자르나 리버풀 FC에서 4시즌 동안(17/18~20/21 시즌) 팀 리그 득점의 18.71%을 기록한 사디오 마네와 비슷한 수준이다.[28] '슈필러 데스 타게스'라 불리며 선정 횟수가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과 직결되는 Elf des Tages에 비해 중요도는 떨어졌지만 말 그대로 해당 라운드 MVP를 선정하는 만큼 선수들에게 영예로운 수상 중 하나였다. 보통 한 시즌 최다 선정 횟수가 2회 정도였는데 기본적으로 라운드 베스트 11에 해당하는 선수들 중 가장 잘한 1인을 뽑는 것이다 보니 선수들의 활약도가 비등할 경우 선정하지 않는 라운드도 존재했으며 한 시즌 동안 선정이 없던 적도 7~80년대에 세 차례나 존재한다. 70~80년대 통틀어 한 시즌 최다 선정 횟수는 3회로 70년대에는 71/72 시즌 프란츠 베켄바워와 게르트 뮐러, 귄터 네처, 73/74 시즌 울리 회네스가 3회 선정되었고 80년대는 82/83 시즌에 차범근이 최초로 3회 선정되었다. 참고로 70/71 시즌부터 89/90 시즌까지 20년간 한 시즌에 Spieler des Tages 3회 선정된 선수는 12명에 불과하다.[29] 리그 9회+포칼 2회+UEFA 1회[30] 랑리스테란 Kicker지에서 전반기와 후반기에 선정하는 선수들의 등급으로 분데스리가 창설 이전인 1955년부터 독일에서 뛰던 선수들에게 부여하던 평가 등급이다. 한 시즌에 아예 나오질 않거나 웬만한 선수는 평생에 한 번 받기도 어렵다는 WK(월드클래스) 등급, 국제적 수준의 리그 톱클래스 선수에게 부여하는 IK(인터내셔널 클래스), 독일 내에서(분데스리가+DFB 포칼 등) 두각을 나타내며 국가대표로 거론될만한 선수인 K 등급, 기복은 있지만 주목할 만한 경기력을 보여주는 선수에게 부여하는 B 등급 등 총 4가지 등급으로 나뉘는데, 현재는 20/21시즌을 기점으로 K 등급의 세부 명칭이 'im weiteren Kreis'에서 'Nationale Klasse'(내셔널 클래스)로 변경되었고 B 등급은 뽑지 않게 되며 3가지 등급이 부여된다. 참고로 2. 분데스리가의 선수들은 Herausragend(뛰어난 수준)과 Auffallig(눈여겨볼 만한 수준)으로 평가된다.[31] 흔히 차범근이 WK(월드클래스) 등급을 받은 것에 집중하지만 사실 랑리스테 등급을 받는 것 자체도 어려운 편이다. 일례로 아시아 출신 중 차범근 이후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성공했다는 카가와 신지는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7시즌 동안 14차례의 랑리스테 등급에서 8회(WK 1회, IK 2회, K 4회, B 1회)만 받았고 손흥민 역시 6시즌 중 4회(K 2회, B 2회), 구자철은 12시즌 동안 3회(K 1회, B 2회)를 받은 게 전부다.[32] 국내에는 단순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시, 소설, 동화, 논평, 수필 등 다양한 장르를 다루는 작가로 독일 문학 관련 상을 여럿 수상한 독일 문학계에서 꽤 명성 있는 작가다.#[33] 좀 더 깊게 들어가자면 '신' 혹은 '영웅'을 찬양하는 독일 전통 시 찬가(Hymne) 형식을 빌려 쓴 것으로 워낙 고문체(古文體)인데다 어려운 단어가 많고 문장이 이어지다 다음 행으로 뚝뚝 끊어지게 쓴 글이다 보니 부분적인 번역은 있어도 시 전체의 정확한 번역은 없던 시였다. 위에 첨부한 것은 도깨비뉴스에서 김원익 연세대 독문학 박사를 통해 완역한 것으로 풍자 작가답게 차범근 외 프랑크푸르트 선수들의 부진과 구단 내부 문제를 풍자하는 것은 물론 다른 팀 선수들을 은근 까내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34] 이런 플레이 스타일로 인해 득점만큼 다수의 키패스와 어시스트를 기록했다고 하는데 이런 종류의 기록이 공식적으로 측정되지 않던 시절이라 정확한 수치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35] 함부르크 SV(2-2-1-1위) 6경기 2골,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3-4-4-6위) 9경기 4골, VfB 슈투트가르트(3-3-9-3위) 9경기 4골, 1. FC 쾰른(5-8-2-5위) 6경기 4골, SV 베르더 브레멘(17-X-5-2) 5경기 3골, FC 바이에른 뮌헨(1-1-3-4위) 10경기 1골을 기록했다. 다른 팀들에 비해 바이에른 뮌헨에겐 유독 득점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바이에른과의 리그 8경기에서 평균 평점 2.875를 받을 정도의 준수한 활약을 보였으며 UEFA 컵 4강전에서 두 차례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승리를 거두는 데에 큰 일조를 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위팀 외에도 70년대에만 분데스리가 5회 우승, DFB-포칼 1회 우승, UEFA 컵 2회 우승, 유러피언 컵 준우승 등 압도적인 성적을 거두며 당대 분데스리가의 대표적인 강팀으로 꼽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상대로도 10경기 5골을 기록했다.[36] 피지컬적인 부분은 차범근 본인 스스로도 공을 많이 들였는데 초창기 독일 무대에서 가장 어려움을 겪었던 유럽의 선수들과의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식사관리를 비롯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애초에 허벅지로 확인 가능한 타고난 피지컬에 노력이 더 해진 것이다.[37] 물론 덜한 편이지 없진 않다. 가히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 데뷔 시즌조차 전반기 이후 차범근에 대한 분석과 대응책이 나오기 시작하자 한동안 부침을 겪었고, 특히 과도한 출전으로 인해 허벅지 부상을 당하고도 1주일 만에 복귀한 25라운드 이후로는 드문드문 4점을 받기도 하며 부진한 평가를 받는다. 이런 차범근의 부진은 팀에 있어서도 큰 타격이어서 시즌 종료 7경기를 남겨둔 25라운드까지 리그 4위에 있던 구단이 내리 5연패를 당하며 9위까지 떨어져 시즌을 마감하고 만다.[38] 애초에 시즌 평점 2점대는 쉽게 받을 수 있는 점수가 아니었기 때문에, 당시 유명한 공격수들 중에서도 연속은커녕 전체 커리어 동안 시즌 평점 2점을 못 받거나 한두 번 받는 공격수들이 많았다. 일례로 1.FC 쾰른에서만 248경기 159골을 넣고 2년 연속 분데스리가 득점왕과 발롱도르 후보에 오른 디터 뮐러는 분데스리가 11시즌 동안 단 한 번을 제외하고(76/77 시즌 2.88) 모든 시즌에 3점대의 평점을 받았다.[39] 1위는 당시 분데스리가의 독보적인 공격수였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2.305)이다.[40] 키커의 평점은 공격수와 공격형 미드필더를 구분하는 키커 랑리스테와 달리 공격수 부문(Sturm)에 공격형 미드필더(OFFENSIVES MITTELFELD)로 분류되는 선수들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미드필더가 공격수보다 평점을 좀 더 후하게 받았던 것을 생각한다면 새삼 차범근의 평점 순위가 대단하게 다가온다.[41] 멀티골을 기록하고도 3점을 받은 공격수도 있었다.[42] 해당 기사는 FC 취리히와의 결승전에 관한 키커지의 기사로 차범근은 이날 2골을 넣으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타이틀을 직역하자면 "또 돌고 있는 차(범근)"으로 기사 내용상 경기장을 양쪽 가리지 않고 이리저리 휘젓는 차범근의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당시 차범근의 플레이 스타일을 짐작할 수 있는 제목이다. 링크를 보면 다른 신문사들의 기사도 볼 수 있다. 대충 주요 내용을 적는다면 아벤트포스트에서는 가장 뛰어났던 선수로 차범근을 언급하며 대부분의 공격을 이끌었고 너무 빨라 아무도 따라잡질 못했으며 예술적인 2번의 득점으로 기립박수를 받았다고 쓰여있다. 빌트지의 경우 스위스에서 일명 '터보'라 불리는 Ruedi Elsener라는 선수가 양쪽 날개에서의 빠른 스피드와 갑작스레 골라인으로 나타나 멋진 골을 집어넣는 차범근의 모습을 보며 "정말 무섭다"라고 인터뷰를 한 내용과 파울로도 차범근을 막을 수 없었다는 내용이 쓰여있다.[43] 기사 타이틀을 번역하면 '헤르타 BSC를 폭격하는 차붐'[44] 80년대 중반 대한민국 첫 프로 축구리그인 슈퍼리그가 개막하고 국내 프로팀들이 독일로 전지훈련을 갔을 때 가끔 참가하기도 했다.[45] 국내 기사에서는 82년 1월 실내 축구 대회라고 나와있지만 정확히는 81년 12월 29, 30일동안 벌어진 대회의 이야기이고 당시 팀은 2위를 했다. 참고로 82년 1월 대회에서는 팀 우승과 10경기 5골, 12월 대회 역시 팀 우승과 4경기 12골을 넣었다. 이와 같은 활약 때문에 83년 미국의 실내축구협회에서 동계시즌에 뛰어달라며 20만 달러의 계약금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46] 사진에서 엄지를 치켜든 인물은 당시 프랑크푸르트 팀 골키퍼였던 클라우스 펑크(Klaus Funk)이다.[47] 차범근을 비롯해 베른트 횔첸바인과 브루노 페차이가 참여했다.[48] 첫 시즌이 끝난 뒤 1980년에 재계약 한 금액으로 처음 프랑크푸르트와의 계약 금액은 연봉 25만 마르크로(당시 약 7,500만 원) 팀 내 4위에 해당했다. 세율이 무려 50%나 되어서 생각보다 수입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49] 당시 서독 분데스리가의 평균 연봉은 18만 마르크(당시 5,400만 원 상당)이었고 차범근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는 50만 마르크(약 1억 5,000만 원 상당)를 받는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45만 마르크(약 1억 4,000만 원 상당)의 파울 브라이트너 정도밖에 없었다. 다만 이는 1980년 재계약 당시에 분데스리가 세 번째 수준이었다는 것으로 이후 분데스리가로 복귀한 베켄바워를 비롯해서 차범근보다 높은 연봉을 받는 선수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범근의 연봉은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상위권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는데 1981년 11월 키커지에서 차범근 관련해 특집 기사를 다룬 내용 중 80/81 시즌에 연이은 치명적인 부상으로 출전 시간이 적었던 차범근에 대해 40만 마르크가 넘는 고액 연봉자 중 하나인 차범근이 작년 한해 동안 22만 마르크 값 밖에 하지 못했다고 표현하기도 하였다.[50] 200평 부지에 세워진 연건평 80평 규모의 지하 1층 지상 3층의 고급 주택이었다. 당시 차범근의 집을 방문한 특파원들의 기사에 따르면 정원 외에 별도로 사과나무숲이 있었다고 하며 이 집으로 이사한 바로 다음날 차두리가 태어났다. 후술하겠지만 프랑크푸르트 부회장이 차범근에게 부동산 사기를 친 집으로 레버쿠젠으로의 이적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51] 다른 것에 큰 욕심이 없던 차범근도 자동차에는 광적인 수집력이 있었다고 하는데 본인 스스로도 자산 관리를 부인이 하지 않았었다면 자동차에 모든 수입을 다 소비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52]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분데스리가 선수들의 평균적인 연봉의 절반이 넘는 당시 한화로 3,775만 원 상당의 자동차였다. 참고로 1980년 대한민국의 중형차 한대 값이 389만 원, 강남 은마아파트 31평 매매가가 2,300만 원이던 시절이다.[53] 베켄바워나 루메니게 같은 선수들은 한 달에만 10회 이상의 팬 사인회를 가졌다.[54] 당시에는 선수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는 선수 카드가 굿즈처럼 판매가 되었는데 사인회에서도 일반 종이보다 이 선수 카드에 사인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일명 사인 카드라 불리는 이 카드는 각 구단마다 팀 소속 선수들의 해당 시즌 유니폼 사진과 함께 뒷면 디자인을 다르게 하여 시리즈 형식으로 1년 치 씩 생산했고 이 판매가 선수들의 인기를 가늠하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요즘으로 따지면 유니폼 판매량과 비슷한 느낌으로 볼 수 있는데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선수 중 이 사인 카드 판매량이 매년 상위 5% 안에 들어가는 선수였다. 분데스리가 18개 팀의 베스트 11 선수만 따져도 198명에 이르는 것을 생각했을 때 분데스리가 주전 선수들 중에서도 높은 인기를 구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5] 요즘에도 영국에 가서 손흥민 경기를 직관하면 감동이 밀려오는데, 해외 여행도 어렵던 시절에 교민들이 느낀 감정은 대단했을 것이다.[56] 이후 자고 일어났더니 병실에 팬들이 보낸 꽃이 가득했다고 한다.[57] 80년 유로 우승과 82,86 월드컵 준우승 멤버로 수비수임에도 분데스리가 시절 292경기에서 61골을 넣었고, 4년 연속 분데스리가 베스트 11과 랑리스테 WK(월드클래스) 1회, IK(인터내셔널클래스) 14회, 85년 발롱도르 8위, 독일 올해의 선수를 받았으며 이탈리아로 무대를 옮겨서도 세리에 A와 코파 이탈리아 우승을 거머쥔 독일 역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이다.[58] 쉽게 말해 손흥민이 도르트문트에 강했던 것과 비슷한데, 차범근은 카이저슬라우테른을 상대로 9골을 넣었다.[59] 이날 역시 프랑크푸르트의 3:2 승리였으며 팀의 세 번째 골을 넣은 차범근은 부상으로 교체 아웃 되었음에도 평점 1점과 해당 라운드 MVP 및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60] 참고로 이 경기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80년대 최다 점수 차 승리 경기로 2021년 기준 역대 최다 점수 차 승리 5위에 해당한다.[61] 당시 프랑크푸르트 홈구장의 이름이다.[62] 80년대 최고의 외국인 수비수로, 분데스리가 255경기 45골을 기록하며 공격면에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인 선수이다. 랑리스테 WK(월드클래스) 3회와 IK(인터내셔널 클래스) 7회를 받았으며 4회 연속 발롱도르에 이름을 올린 오스트리아 레전드 선수[63] 프랑크푸르트 원클럽맨으로, 분데스리가 최다 출전자(602경기)이다.[64] 국내에는 빌트지에서 수여한 페어플레이 상이 널리 알려져 있는데, 아무래도 당시 이 상 소식을 대서특필한 빌트지가 준 것으로 와전된 듯하다.[65] 대한민국 첫 프로 축구 리그 명칭[66] 사실 이러한 언론 보도는 시대 상과도 관련이 있는데, 미디어 매체뿐 아니라 해외리그 이적이 생소하던 시절이라 현지에 사는 교민 회장을 통한 전화 인터뷰나 가끔씩 파견되는 소수의 특파원을 통하지 않는 이상 제대로 된 소식을 들을 수 없는 경우가 많았다. 머나먼 이국땅의 분데스리가라는 곳이 유명한 건 알겠는데 당장에 아시아에서 제대로 된 프로 리그로 존재하던 홍콩 리그 역시 굉장히 커 보였던 것이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축구 선수의 해외 진출도 산업 역군으로 취급했었기 때문에 리그의 수준을 고려하기보다 얼마나 돈을 많이 주는가에 초점이 맞춰진 기사도 꽤 보인다. 또한 국내 프로 축구리그가 창설된 83년 이후로는 국내 복귀에 대한 기사가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였다.[67] 차범근은 프랑크푸르트 시절 전 경기를 선발 출전했고, 10년의 독일 선수 생활 중 교체로 출전한 경기는 레버쿠젠 시절 리그와 컵 대회, 유럽 대회 통틀어 단 세 번뿐이다.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루머[68] 기사가 실린 10월 18일 차범근은 선발 출전해 평점 1점을 받았고 해당 라운드 MVP와 BEST 11에 선정됐다. 그 이전 경기 역시 평점 3점과 2점 기록[69] 이 기사를 작성한 박갑철은 아이스하키 선수 출신의 1세대 원로 스포츠 기자로, 김운용 전 IOC 회장 및 조선일보의 방우영 회장과도 돈독한 사이일 정도로 스포츠 기자계의 거물이었다#. 1998년에는 학부모로부터 뇌물을 받고 본인의 모교인 연세대 아이스하키 팀에 부정입학을 알선한 혐의로 구속된 전적이 있다# (...) 2023년 현재 생존.[70] 이 경기에서 소쇼 수비진은 차범근을 막기 급급했고 그로 인해 생긴 허점을 다른 프랑크푸르트 공격진들이 파고들어 골을 넣었다. 차범근은 팀이 4:0으로 앞선 후반 12분이 돼서야 중앙에 머물며 골을 노렸는데 차범근을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선수들 모두 4:0이란 스코어에 방심한 탓에 소극적인 플레이를 하였고 결국 후반 막판 2골을 실점하고 만다. 심지어 그중 한 골은 자책골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원정 다득점 원칙으로 인해 8강이 좌절된 것을 생각해 보면 뼈아픈 실책이 아닐 수 없다.[71] 함부르크의 경우 생테티엔에 1차전 0:5, 2차전 0:1로 패배하며 탈락했다.[72] 1위 빌헬름 후베르츠(Wilhelm Huberts)(63/64~66/67 시즌)/뤼디거 벤첼(Wenzel Rüdiger)(75/76~77/78 시즌) 47골, 3위 볼프강 솔츠(Wolfgang Solz)(63/64~ 66/67 시즌) 41골[73] 키커 서부지역 편집장으로 2015년 10월 23일 네이버 스포츠에서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100경기 출전 33주년을 맞아 인터뷰했다.[74] 다만 해당 링크의 인터뷰 내용은 프랑크 루셈의 기억에 기반한 서술이다 보니 다소 사실 관계가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차범근의 시즌 평점을 3점대로 알고 있다든지 헤르타 베를린전에서 활약한 그레고르 콰스텐 골키퍼의 평점이 3점이었는데도 최고 평점을 받았다고 하는 등 기록적인 디테일의 정확도는 다소 부정확하다.[75] 종합 스코어 2:1 프랑크푸르트 승리[76] 간혹 퍼거슨이 선수로 뛸 당시 만난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당시 퍼거슨은 1974년부터 감독 생활을 시작하여 1978년부터는 에버딘의 감독을 맡고 있었다.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바로 감독직에 뛰어든 것인데 은퇴 당시의 나이는 33세로, 현대 기준에서는 조금 빨라보이긴 해도 은퇴를 못 할 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33세의 나이로 바로 감독직을 수행하는 것은 지금 기준으로 봐도 매우 젊은 편이며, 저 발언을 한 당시 기준인 38세로 잡아도 리그에서 가장 젊은 감독 축에 들어간다. 애초에 40대 초중반만 해도 젊은 감독 소리를 들을 수 있으니.[77] 프랑크 루셈 키커 서부지역 편집장의 인터뷰에 따르면 '차범근이 분데스리가 최고 수준의 선수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가 폭주기관차처럼 수비진을 향해 돌진할 것도 알았다. 하지만 막을 방법이 없었다'라고 했다고 한다.[78] 오쿠데라 야스히코는 분데스리가에서 열 시즌 동안 234경기에서 26골을 넣었다. 당시 동양인으로서 대단한 활약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흔히들 차범근에 견주면서 오쿠데라는 별 볼일 없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동양인 최초의 분데스리가 진출자로서 아시아 선수로서는 처음으로 분데스리가 우승을 경험했으며, FC 쾰른 소속으로 78/79 유러피언컵에서 골을 넣은 적도 있는 선수이다. 차범근이 거둔 골이나 여러 활약이 엄청났기에 상대적으로 가려졌는데, 84년 일본 축구 전문지 일레븐에서 뽑은 세계 축구계를 주름잡은 스타 100인에 차범근은 들어갔으나 오쿠데라는 제외되는 등 이룬 업적에 비해 여러모로 평가절하를 당한 적이 많다.[79]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첫 번째 멀티골에 해당한다. 참고로 차범근은 선수 시절 공식 경기에서만 20회의 멀티골을 기록했다.[80] 참고로 차범근은 분데스리가 14라운드까지 라운드 베스트 11에 5번 선정되며 공격수 중 1위, 전체 선수들 중 2위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81] 80/81 시즌 분데스리가 11라운드와 81/82 시즌 분데스리가 4라운드, 두 경기 모두 차범근이 부상으로 치료를 받고 있던 기간에 치러진 경기였다.[82] 프랑크푸르트에서만 14시즌을 뛰었으며 강력한 슈팅을 날리는 플레이로 '닥터 해머'라는 별명이 있던 선수로 미드필더임에도 분데스리가 426경기 141골을 넣었다.[83] 76/77시즌부터 88/89시즌까지 감독만 15번 바뀌었다.[84] 해당 사건을 다룬 Kicker 메인 표지[85] 이 때문에 초반 경기에 팀 동료들이 차범근에게 패스를 안 하기도 했는데 이를 본 차범근의 와이프 오은미 씨가 선수들을 불러 음식을 대접하며 선수들에게 남편을 잘 좀 봐달라고 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작 차범근은 말도 안 통하고 첫 진출에 정신도 없어서 그런 상황을 잘 인식하지 못했었다고 회고했다.[86] 축구팀뿐 아니라 테니스, 핸드볼 등 당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가 운영하던 13개 종목의 스포츠 팀 대표 선수들이 초청된 행사였다.[87] 제네코비치 감독과 함께했던 시기에 차범근은 7경기 3골을 기록했다.[88] 이는 다니모 자그레브의 유일한 유럽 클럽 대항전 우승이기도 하다.[89] 바이에른 뮌헨의 분데스리가 첫 우승이자 최초의 더블이었다.[90] 더욱이 차범근의 이적은 구단의 재정적 어려움도 있었지만 결정적인 이유가 다름아닌 구단의 부회장인 젠커(Zenker)가 차범근에게 행한 부동산 사기였기 때문에 대내외적으로 비난이 거셌다.[91] 이와는 별개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차범근은 음주로 문제를 일으키던 제베츠 감독을 크게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92] 당시 분데스리가에서는 연봉의 50%를 세금으로 냈기 때문에 같은 연봉을 받더라도 수익적으로 더 많은 연봉을 받게 되는 셈이었다.[93] 심지어 차범근의 리그 마지막 경기 후 진행될 예정이었던 고별 행사까지 일방적으로 취소하기도 했다. 당시 부동산 상황이 수면 위로 오르지 않았던 시점이라 대다수의 팬들은 당황할 뿐이었고 구단 신문조차 '아무리 매정하게 이적을 한다고 하지만 차범근 같은 선수의 마지막을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라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94] 애초에 시세보다 비싼 가격에 집을 샀기 때문에 추가금에 해당하는 융자금을 마냥 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집을 팔자니 매입가의 절반 가격에 팔아야하는 금전적인 손실이 있고 무엇보다 남은 융자금이 걸림돌이 되었다.[95] 이후에 젠커는 차범근을 포함하여 분데스리가 선수 80명을 대상으로 이런 사기 행각을 벌인 것이 드러나 결국 고소를 통해 법적 처벌을 받았는데 재판에서 젠커는 본인뿐 아니라 모든 중계업자가 이렇게 거래를 한다고 항변하기도 하였다. 말 그대로 당시 서독에 악질 부동산 관행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인데 이 사건을 통해 당시 재정난에 휩싸인 분데스리가는 건전성 문제까지 더해지게 된다.[96] 부동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차범근이 감당하고 있던 융자금을 처리해야 했으며 이것을 완납했다 하더라도 부동산 처분 및 이적 법안 처리에 따른 추가 시일이 소요되었다. 여기에 개인 합의와 별개로 재정 문제로 최대한 많은 금액을 받고 팔려는 프랑크푸르트와의 이적료 협상까지 해야 했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내할 타 리그 구단이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 세리에 A 구단과의 이적 무산은 이적 시장 마감이 얼마 남지 않았던 시점이었던 것도 한몫했다.[97] 분데스리가 시절 내내 러브콜을 보내왔던 대우 축구단은 김우중 대우 회장이 직접 나서서 차범근이 처한 문제를 모두 해결해 줄 테니 한국으로 와달라고 제안을 했다.[98] 사실 레버쿠젠은 차범근이 생각조차 안 하던 구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레버쿠젠은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 입단한 79/80 시즌 2부 리그에서 갓 승격한 팀이었고 차범근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뛰던 기간 동안 10위 안으로 들어가 본 적이 없던 하위권 팀이었기 때문에 굳이 수준이 더 낮은 팀으로 이적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재정난에 시달리던 다른 분데스리가 팀들과 달리 바이엘 주식회사의 재정적 지원을 통해 자금이 충분했던 레버쿠젠은 차범근의 융자 잔액인 약 30만 마르크를 프랑크푸르트에 지불하여 급료 압류 문제를 해결해 줬을 뿐 아니라 부동산 매입에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등 차범근의 문제를 전부 해결해 주었고 여기에 데트마어 크라머 레버쿠젠 감독의 적극적인 설득까지 더해져 차범근의 영입을 성공하게 된다.[99] 브라이트너는 82/83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했다.[100] 슈트트가르트에서만 224경기 81골을 기록했으며 유로 80 우승, 82 월드컵 준우승 멤버이기도 하다. 랑리스테 IK 등급을 7회 연속 받으며 80년대 당시 분데스리가에서 손꼽히는 미드필더였으며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2회 및 유로 80 올해의 팀에 선정되기도 하였다.[101] 81/82 시즌 9위였던 슈투트가르트는 82/83 시즌 리그 3위에 올랐다.[102] 79/80 시즌 강등 당했던 베르더 브레멘은 80/81 시즌 오토 레하겔 부임 후 전술적인 변화와 체질 개선으로 한 시즌만에 분데스리가로 복귀했고 82/83 시즌 2위를 기록했다. 참고로 브레멘은 이후 레하겔 감독과 함께 81년부터 95년까지 분데스리가 2회, DFB 포칼 2회, 위너스 컵 1회 우승을 경험한다.[103] 당시 헤르타 BSC는 16위를 기록 중이었고 결국 최종 18위로 강등되었다.[104] 결과적으로 이는 굉장한 선구안이 돋보이는 기사였는데 실제로 차범근이 레버쿠젠으로 이적 후 프랑크푸르트는 여섯 시즌 동안 16-12-15-15-9-16위로 곤두박질치며 기나긴 침체기를 겪었으며 특히 팀 내에서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한 선수가 여섯 시즌 동안 단 두 번 밖에 없을 정도로 심각한 공격력 부재에 직면하게 된다.[참고1]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평점과 수상 내역은 1920년에 설립된 Kicker를 기반으로 한다. 한 매체의 평가가 절대적일 수는 없겠지만 분데스리가는 공식협회(DFL)에서 주는 올 시즌의 선수가 2019년에 시작되었고, 프로 축구선수협회(VDV)에서 선정하는 올 시즌의 선수와 올해의 팀 역시 1997년부터 시작될 정도로 공식적인 수상이나 평점이 없던 리그다. 이런 분데스리가에서 공식적으로 받아들여지던 수상은 키커가 60년대부터 선정한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상으로 지금까지도 가장 유서 깊고 중요한 상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키커가 선정하는 랑리스테의 경우 분데스리가 설립 이전부터 매겨지며 독일 국가대표 선발에 참고가 되던 등급이었다. 이렇듯 독일에서의 Kicker지의 위상은 대단히 높아서 80년대 분데스리가 역시 키커의 평가는 언론뿐 아니라 리그를 뛰던 선수들에 있어 공식적인 평가로 인식될 정도로 특수한 영향력이 있었고 키커에서 선정하는 주간 베스트 11(Elf des Tages), 올해의 팀은 선수들에게 자신의 활약을 인정받는 유의미한 수상이었다. 따라서 이런 분데스리가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키커의 평가를 기반으로 삼고, 여기에 확인할 수 있는 당시 언론사 평가 및 경기 기사를 최대한 종합하여 서술한다.[참고2] 차범근의 기록 중 어시스트 기록은 집계 누락 및 정보 부족으로 부득이하게 제외한다. 차범근은 플레이 스타일 상 득점만큼 상당히 많은 도움을 기록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당장에 79/80 시즌 UEFA 컵 경기만 하더라도 영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어시스트만 4회가 있음에도 공식 기록에 집계되어 있지 않다. 유럽 축구 통계 사이트인 트랜스퍼마크트(transfermarkt)에도 어시스트 기록이 2022년 1월 16일 기준으로 리그 7회만 측정되어 있고, 키커를 비롯한 각종 사이트에서도 정확한 도움 기록 확인이 어렵기 때문에 해당 문서에서는 어시스트 관련 내용과는 별개로 차범근의 득점 기록만을 통산 기록으로 서술한다.[107] 차범근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이적 후 첫 경기인 도르트문트 전과 마지막 시즌 마지막 경기 뒤셀도르프 전 날짜[108] PK 유도 1회[109] PK 유도 1회[110] PK 유도 3회[111] PK 유도 3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