잭 그린웰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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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의 축구감독 | ||
<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이름 | 잭 그린웰 Jack Greenwell | |
본명 | 존 리차드 그린웰 John Richard Greenwell | |
출생 | 1884년 1월 2일 | |
잉글랜드 더럼 크룩 | ||
사망 | 1942년 11월 20일 (향년 58세) | |
콜롬비아 보고타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 |
직업 | 축구 선수(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 |
소속 | <colbgcolor=#f0f0f0,#222222><colcolor=black,white> 선수 | 크룩 타운 AFC (1901~1912) FC 바르셀로나(1912~1917) |
감독 | FC 바르셀로나 (1917~1923) UE Sants (1923~1926) CD 카스테욘 (1926~1927) RCD 에스파뇰 (1927~1929) RCD 마요르카 (1929~1931) FC 바르셀로나 (1931~1933) 발렌시아 CF (1933~1934) 스포르팅 히혼 (1935~1936) 리오 데 데포르테스 (1939~1940) 페루 대표팀 (1939~1940) 인데펜디엔테 산타페 (19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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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의 前축구선수 이자 前축구감독FC 바르셀로나를 좋은 클럽으로 만들어준 바르셀로나의 두번째 명장.
2. 일생
잭 그린웰은 1884년 1월 2일 더럼 주의 크룩에서 태어났다.2.1. 선수 경력
광부의 아들인 그는 학교를 떠난 후 스스로 광부가 되었고 17살부터 노던리그의 크룩 타운[1]에서 윙 하프 선수로 뛰었다.크룩 타운 시절의 잭 그린웰. |
1913년, 그린웰은 그의 친정인 크룩 타운을 위하여 바르셀로나와의 친선경기를 어필하였다. 결국 이는 이루어 졌고,원정 영국팀은 그들을 4-2로 이긴 다음, 1-1, 2-2 무승부를 기록했다.
가운데 아래에 있는 눈감는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그린웰이다. |
2.2. 감독 경력
2.2.1. FC 바르셀로나 1기
33세의 나이에 바르셀로나에서 은퇴한 후, 그는 조안 감페르에 의해 바르셀로나 감독으로 임명되었고[3], 1917년 7월 7일, 3-1로 이긴 CE 유로파와의 경기에서 감독 데뷔전을 치렀다.잭 그린웰은 첫 시즌에 팀 동료에 의해 사임하라는 초기 요구를 받았지만, 조안 감페르의 변호 안에 살아남았고, 6년동안 4개의 카탈루냐컵과 2개의 코파 델 레이 우승으로 클럽을 이끌었다.
그의 팀에는 파울리노 알칸타라뿐만 아니라 리카르도 사모라, 주젭 사미티에르, 플러트코 페렌츠등의 엄청난 선수단이 있었기에 스페인 최강의 팀중 하나로 오를수 있게 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 그린웰은 과거 상대 드리블에 집중하기보다는 패싱 게임 개발과 후방 공격력 구축에 주력하는 등 혁신적인 전술 접근으로 주목받았다.
2.2.2. RCD 에스파뇰
1923년 계약이 끝난 FC 바르셀로나를 떠난 후, 다른 클럽을 이동하다가, FC 바르셀로나의지역 라이벌인 RCD 에스파뇰의 감독을 맡았다.그는 RCD 에스파뇰을 라리가로 이끌었지만, 클럽은 겨우 7위를 했다.
그러나 에스파뇰은 1929년 카탈루냐컵과 사상 구단 최초로 코파 델 레이를 우승함으로써 실망스러운 리그를 만회했다.
리카르도 자모라와리카르도 사브리사가 속해있던 에스파뇰은 강했다.
그는 코파 델 레이에서 스포르팅 히혼과 아레나스 클럽 데 게초 사라고사를 제쳤고, 준준결승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를 9:3으로, 준결승에서 친정팀인 FC 바르셀로나를 3:1로, 결승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2:1로 격파하면서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이변을 일으켰다.
그린웰은 한 시즌 더 에스파뇰의 감독을 맡았으나 또 다른 트로피를 획득하는 데는 실패했다.
2.2.3. FC 바르셀로나 2기
맨 왼쪽에 있는 사람이 그린웰이다. |
2.2.4. 발렌시아 CF
FC 바르셀로나를 떠난 후, 그린웰은 발렌시아 CF에 1933-34 시즌에 감독을 부임하였다.발렌시아는 라리가 7위에 그쳤지만, 코파 델 레이결승전에 진출하고. 레알 마드리드와의 결승전에서 2-1로 지며,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2.2.5. 그 이후
그는 다음시즌에 스포르팅 히혼에서 감독을 지내다, 스페인 내전으로 인해 그린웰은 아내와 함께 스페인을 떠났다.그는 터키로 잠시 이주하고, 1939년 페루에서 페루리그팀인 리오 데 데포르테스와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활약하였다.
그린웰의 리오 데 데포르테스는 무서울것이 없었으며, 리그우승을 차지하였다.
같은해에 페루는 1939년 남미 축구 선수권 대회를 주최했다.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은 대회를 불참했기 때문에 나머지 5개국인 칠레, 에콰도르, 파라과이, 우루과이, 페루가 각팀들이 한번에 한번씩 플레이하는 단일 미니 리그를 구성했다.
우루과이와 페루는 둘다 처음 세경기를 이겼기 때문에 만났을때 경기는 사실상 결승전이었다. 페루는 2-1로 승리하고 남미 챔피언이되었다.
1942년 그는 콜롬비아에 이주해 콜롬비아팀인 인데펜디엔테 산타페에 부임하여 토르네오 데 쿤디나마르카[4] 결승전에서 아메리카 데 칼리에게 패배하여 준우승을 차지하였다. 준우승의 아픔을 잊으며 다음시즌을 준비하는데....
2.3. 사망
1942년 11월 20일, 그는 훈련을 마치고 집으로 운전하던 중 심장마비로 병원으로 이송되었지만,끝내 사망했다.
3. 기록
3.1. 선수
3.1.1. 대회 기록
3.2. 감독
3.2.1. 대회 기록
- FC 바르셀로나 (1917~1923, 1930~1931)
- 코파 델 레이: 1919-1920, 1921-1922
- 카탈루냐 선수권 대회: 1918-19, 1919-20, 1920-21, 1921-22, 1923-24
- 발렌시아 CF (1933~1934)
- 발렌시아 챔피언십: 1933-34
- 리오 데 데포르테스 (1939~1940)
- 페루 리그: 1939
- 페루 축구 국가대표팀 (1939~19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