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03 08:03:22

이상헌(1975)

이상헌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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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서울 역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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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인
파일:1_남동구_유소년축구단_감독_임명장_수여식-771x514.jpg
이름 이상헌
Lee Sang-Hun
생년월일 1975년 10월 11일 ([age(1975-10-11)]세)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5cm, 83kg
직업 축구선수 (센터백 / 은퇴)
축구코치
학력 부평동중학교
부평고등학교
동국대학교 (1994~1997)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안양 LG 치타스 (1998~2003)
인천 유나이티드 FC (2004~2006)
용인시민축구단 (2009)
코치 한성디지털대학교
신갈고등학교 (2009~2012 / 코치)
인천하이텍고등학교
신갈고등학교 (2016 / 코치)
FC 예산 U-18 (2017~? / 수석코치)
감독 인천 남동구청 유소년축구단 (2020~)
국가대표 4경기 (대한민국 U-20 / 1994)
23경기 2골 (대한민국 U-23 / 1995~1996)
17경기 (대한민국 / 1997~2003)

1. 개요2. 클럽 경력3. 국가대표 경력4. 플레이 스타일5. 지도자 경력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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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로, 현역 시절 포지션은 센터백.

2. 클럽 경력

2.1. 유소년 시절

경주에서 태어난 이상헌은 인천으로 이사를 간 후 자라면서 사실상 인천이 고향인 선수로 성장했다. 부개초등학교 시절에는 축구를 배우지 않고 씨름, 태권도, 육상 등을 했고, 이후 중학교 시절 축구하러 가는 친구를 따라갔다가 선배의 권유로 부평동중학교 축구부에 들어가게 됐다.[1] 신체조건이 좋았던 이상헌은 저학년 시절부터 주전으로 출전하며 기회를 많이 받았고, 청소년 대표팀에도 들어가는 등 촉망받는 유망주로 성장했다.

다른 포지션에서 전향하는 선수가 정말 많지만, 이상헌은 처음부터 센터백으로 시작해서 그 후에도 이 포지션을 쭉 소화했다. 부평동중 졸업 후에는 부평고등학교에 진학했고, 당시 전력이 막강했던 부평고에서도 핵심으로 활약했다. 동국대학교에 들어간 뒤에는 대표팀에서 활약하면서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선수였다.

2.2. 안양 LG 치타스

1998 시즌을 앞두고 드래프트에 참가한 이상헌은 안양 LG 치타스에 지명되면서 본격적으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드래프트에서 이상헌은 장대일, 곽경근 등과 함께 최대어로 꼽혔고, 그 기대에 걸맞게 전체에서 3번째로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소속팀에서의 활약상은 부족했는데, 잦은 국가대표 차출과 부상으로 인해 경기를 자주 나서지 못했다. 1998 월드컵에도 출전한 이상헌이었지만, 정작 1998 시즌 안양에서는 리그 2경기, 리그컵 1경기까지 총 3경기 출전에 그쳤다. 월드컵 종료 직후에 블랙번 로버스 등 유럽 팀들과의 링크가 있었지만 흐지부지됐고, 팀 복귀 후 경기를 치르다가 팔에 골절상을 입으면서 전열을 이탈하기도 했다.

1999 시즌에는 이상헌도 팀에서 출전 기회가 전보다 늘어났다. 리그 10경기, 리그컵 9경기, FA컵 2경기까지 총 21경기에 나서면서 전보다 확실히 얼굴을 자주 비췄다. 2000 시즌에는 완벽히 주전 수비수로 도약하여 리그 21경기, 리그컵 10경기 2득점, 아시안컵 위너스컵 2경기까지 총 33경기를 소화했다.

이러한 활약으로 2001 시즌에는 주장 완장을 차게 됐지만, 정작 긴 부상으로 인해 출전 기회가 오지 않았다. 결국 시즌 중반에 손현준에게 완장을 내줬고, 1년간 리그 1경기 출전에 그치고 말았다. 이러한 불운은 2002년에도 이어져 계속되는 허리 부상으로 두 시즌 연속 1경기 출전에서 멈췄다.

2003 시즌에는 컨디션을 어느 정도 회복하면서 리그 20경기 1득점 1도움, FA컵 1경기 등 총 21경기 출전을 기록했다. 오랫동안 부상에 시달리던 상황을 털어버리고 부활했으며 국가대표팀에도 복귀했었다.

2.3. 인천 유나이티드 FC

안양에서 쭉 커리어를 이어가던 이상헌은 사실상 자신의 고향인 인천에 팀이 창단되자 이적을 선택했다. 사실 이적하던 당시 어느 정도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고, 프리시즌에 제난 라돈치치를 영입하기 위해 동유럽 구단과 접촉하던 도중 파르티잔의 관심을 받아 해외 이적설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팀에 잔류하여 시즌을 치르게 됐다.

인천 합류 후 초반에는 주전 수비수로 출전하면서 존재감을 보여줬으나, 팀 분위기가 알파이 외잘란의 영향으로 뒤숭숭한지라 성적이 잘 나오지 않았다. 한편 선수 본인도 잔부상에 시달렸고, 김현수나 김학철 등 걸출한 수비수들이 많은 상황에서 임중용까지 센터백으로 보직을 바꾸고 이정수가 합류하면서 주전 경쟁에 직면하였다. 그래도 시즌 최후반부에는 주전으로 복귀하여 나름대로 괜찮은 시즌을 보냈다. 2004 시즌 기록은 리그 17경기 1득점, 리그컵 3경기, FA컵 1경기까지 총 21경기 1득점.

2005 시즌에도 팀에 잔류했지만, 터키 전지훈련에 참여하던 도중 왼쪽 허벅지 부상을 당해 수술을 받았다. 부상의 여파로 오랫동안 재활해야했던 이상헌은 몸을 끌어올린 후 후기리그부터는 본격적으로 다시 출전했는데, 부상의 여파로 사실 복귀 후에도 기회는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플레이오프 부산 아이파크전에 선발로 출전했고, 전반 17분 결승골을 터뜨려 팀을 챔피언 결정전에 올려놓는 대활약을 펼쳤다. 만약 인천이 우승했다면 우승까지 가는 중요한 길목에서 대활약한 선수로 회자됐겠지만, 아쉽게도 준우승에 그치면서 그 성과에 만족해야 했다. 선수 본인도 결승을 앞둔 시점에서 봉와직염을 입어 출전할 수 없게 됐었다. 2005 시즌 기록은 리그 8경기 1득점.

2006 시즌에는 부상의 여파를 어느 정도 떨쳐내면서 전 해보다 많은 경기를 소화했다. 시즌 초부터 주전으로 출전했고, 좋은 기세를 이어가는가 싶었지만 시즌 중반에 다시 부상으로 전열을 이탈했다. 복귀한 후에도 퇴장을 당하는 등 아쉬운 모습을 보여 출전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2006 시즌 기록은 리그 10경기 1득점, 리그컵 1경기, FA컵 1경기까지 총 12경기 1득점.

2006 시즌을 마지막으로 이상헌은 은퇴를 선언했고, 지도자의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독특하게도 인천 시절 잦은 부상으로 출전 시간에 제약이 있는 수비수였지만, 세 시즌 모두 득점을 기록하였다. 특히 그 중 하나는 팀을 우승 직전까지 올려놨으니 이래저래 재밌는 기록.

3. 국가대표 경력

1994년 AFC 청소년 선수권대회, 1996 애틀랜타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어 청소년 대표로 활약했고, 차범근 감독의 눈에 들어 1998년에는 성인 국가대표에서 많은 기회를 부여받았다. 심지어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대표로도 선발되었을 정도. 월드컵 본선에서도 벨기에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활약했지만 차범근 감독이 물러난 이후 국가대표에서도 서서히 밀려났으며, 2003년에 마지막으로 한 경기를 치른 이후 국가대표팀과 멀어졌다. 2005년에 인천을 챔피언결정전으로 이끈 덕분에 잠시 상비군에 뽑혔지만 정식 명단에는 복귀하지 못했고, 2006 시즌 초반에 잠시 그의 국가대표 복귀가 거론되기도 했으나 결국 무산됐다.

4. 플레이 스타일

전형적인 파이터 스타일의 수비수로, 차범근이 이상헌을 중용한 것도 그의 스타일을 눈여겨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피지컬 조건이 상당히 좋아 상대를 압도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약점으로는 드리블러에게 약했던 점과 몸을 사리지 않는 플레이로 부상이 잦았다.

5. 지도자 경력

은퇴 이후 지도자 연수를 받다가 2009년 용인시 축구센터 산하의 신갈고등학교 코치로 부임했다. 이 때 잠시 용인시민축구단에 등록되어 현역 복귀를 하기도 했다. 2012년 이후로 신갈고를 떠났고, 인천하이텍고등학교에서 코치로 생활했다. 이후 2016년 신갈고에 복귀했다가 1년만에 다시 떠났고 FC 예산 U-18(삽교고)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2020년에는 인천 남동구청 유소년 축구단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6. 여담

  • 현역 시절, 민머리에 가까운 짧은 헤어스타일과 강렬한 인상으로 인해 '노지심'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 정작 이상헌이 축구에 입문한 계기가 된 친구는 그 해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축구를 그만뒀다고...[2] 국가대표에 선발된 적은 있으나, 부상으로 데뷔전을 치르지 못했다. 애초에 뽑혔을 시기도 이상헌과 겹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