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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룡(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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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1885년 6월 18일
경기도 이천군 부발면 가산리
사망 1951년 12월 4일 (향년 66세)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가족 아버지 이정의(李定儀)
어머니 남씨
서훈 대통령표창 (1963년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1991년 추서)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4.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임시정부 계열 독립유공자. 해방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활동하였고, 제2대 이천군수를 지냈다.

2. 생애

1885년 6월 18일 경기도 이천군(利川郡) 부발면(夫鉢面) 가산리(柯山里)에서 아버지 이정의(李定儀)와 어머니 남씨(南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간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아 1919년 이전에 도항한 것으로 보인다.1919년 4월 22일 임시의정원 제2회 회의에 출석하여 임시정부 차장제 폐지와 위원제 시행 및 임시의정원 성립 반포 등의 사안을 의결하였다.1919년 4월 25일 임시의정원 제3회 회의에 출석하여 임시의정원법안의 검토에 필요한 심사위원 선거에 대한 사항을 의결하였다. 1919년 4월 30일 의정원 제4회 회의에도 참석하여, 임시정부 장정, 국무총리 대리의 선거, 의회 방청권, 선출의원의 재원(財源) 방침, 구급의연금 모집방법 및 위원 선거, 의원자격 심사, 국무총리대리 및 법무총장의 사면청원과 보선, 외교 전권위원 선거, 노령(露領) 국민의회 문제, 의정원 세칙규정 등의 의안을 처리하였다. 국무총리 대리에 조성환(曹成煥)을 추천·투표하였으나 이동녕(李東寧)이 당선되었다.1919년 7월 7일부터 7월 19일까지 개회된 임시의정원 제5회 회의에서 상임위원회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청원위원회 이사로 선출되었다. 이때 위원장은 고일청(高一淸), 위원은 이규갑(李奎甲)으로 함께 활동하였다. 1919년 8월 1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요구로 개회한 제6회 임시의정원 회기를 끝으로 신익희(申翼熙)·최창식(崔昌植)과 함께 의원직에서 해임되었다.또한 1919년 7월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 안창호(安昌浩) 등이 발기하고 내무부로부터 인가를 받아 조직된 대한적십자회에 가입하여 1921년 11월까지 상의원(常議員)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적십자회는 전쟁 혹은 재난이 발생했을 때 부상자를 구호하기 위해 조직한 보건후생단체로 회장은 이희경(李喜儆), 부회장은 김성겸(金聖謙), 이사에는 여운형(呂運亨)이 임명되었다.1921년 10월에 국민대표회의 개최가 제기되자 “임시정부가 성립된 지 3년도 안되었는데, 이를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것은 한 두 사람 야심가의 사욕에 기인한 것이며 믿음을 중외에 잃는 행동”이라는 이유를 들어 반대하였다.1922년 7월 13일 국민대표회의 개최 등 현안으로 제기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동녕 주재 하에 조직된 시사책진회(時事策進會)에 가입하였다. 시사책진회는 단체를 통할할 만한 최고 단체로서 임시정부 이상의 기관으로 하여 시국을 수습할 권위를 갖도록 하는데 목표가 있었다. 그러나 시사책진회의 분쟁이 계속되자, 같은 달 26일 개최된 회의에서 조소앙(趙索昻)·연병호(延秉昊)·이필규(李駜珪)·김용철(金容喆)·조완(趙完) 등과 함께 의사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 탈퇴하였다.광복 후 귀국하여 1945년 10월 18일부터 다음 해 12월까지 제2대 이천군수를 지냈다. 1949년 1월 12일 국회에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경기도 조사책임자로 선임되었으나, 특위활동이 성과 없이 끝나자 공직에서 물러나 칩거생활을 하였다.대한민국

3. 대중매체

4.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