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16 21:50:21

김보연(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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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pad> 파일:독립운동가 김보연.jpg
출생 1886년
황해도 장연군
사망 1928년 (향년 42세)
상하이시
가족 아버지 김두원(金斗源), 아들 김원영 (金元英)
학력 장연광진학교 (졸업)
서훈 건국훈장 애국장 (2011년 추서)

1. 개요2. 생애3. 대중매체4. 여담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대한적십자회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아들인 김원영한국광복군국민혁명군에서 활약한 독립유공자이다.

2. 생애

1886년 황해도 장연군(長淵郡)에서 김두원(金斗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말 애국계몽운동 시기 백범 김구(金九)가 장연 광진학교(光進學校) 교사로 교육구국운동을 할 때, 나이든 학생으로서 김구를 매우 따랐다고 한다.

1909년 서북학회에 가입하여 장연군지회 서기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전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가,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직후 4월 13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황해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의정원 제2회 회의부터 출석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1월 상하이 대한인거류민단(大韓人居留民團)에 여운형(呂運亨)이 단장으로 선출될 때 간사로 선임되었다. 1920년 말 여운형이 사임하고 1921년부터 장붕(張鵬)이 단장에 취임하자, 거류민단 총무에 선임되었다. 거류민단은 교민의 단결과 독립운동 지원에 온 힘을 기울였다.

안창호(安昌浩)가 주도하여 1919년 7월 상하이에서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를 창립하여 이희경(李喜儆)이 회장으로 선출될 때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대한적십자회는 한국 독립운동이 독립전쟁으로 전개될 경우 부상병 치료를 담당할 뿐만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대한적십자회를 일본적십자회에서 분리하여 한국 민족의 독립을 세계에 홍보하는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창립한 조직이다. 1920년 말 대한적십자회 독립대(獨立隊) 대장으로 선임되어 회원과 자금 모집 활동에 진력하였다.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김구가 내무총장을 맡게 되자, 임시정부 경무국원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밀정을 가려내고 임시정부를 호위하는 지원 활동에 참여하였다.

1922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자, 그해 6월 12일 상하이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열린 유호청년임시대회(留滬靑年臨時大會)에 참석하여 임시정부를 옹호하였다.

1926년 1월 22일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노백린(盧伯麟)이 별세하자, 호상인(護喪人)을 맡아 장례를 관리하였다. 1926년 5월 도산 안창호가 미국에 다녀와서 ‘임시정부경제후원회’臨時政府經濟後援會를 조직하자, 재무위원을 맡아 활동하였다. 1928년경 상하이에서 병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 대중매체

4. 여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