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비서실 서무국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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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익 | }}}}}}}}} |
<colbgcolor=#330066><colcolor=#fff>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원 비서실 서무국장 이원익 李元益 | Lee Won-ik | |||
임시사료편찬위원회 기념 사진[위치] | |||
출생 | 1885년 10월 17일 | ||
평안북도 선천군 | |||
사망 | 1963년 9월 27일 (향년 75세)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 ||
재임기간 | 초대 국무원 비서실 서무국장 | ||
1920년 7월 29일 ~ 1921년 3월 14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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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훈 | 대통령표창 추서 (1977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990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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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2. 생애
1919년 평북 의주의 고령(古寧)교회 목사로 재직 중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여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유여대(劉如大)를 비롯하여 안석응(安碩應) 김창수(金昌洙) 등과 함께 양실학원(養實學院) 운동장에 모여서 독립선언서를 각 관서에 보내고 청년들을 통해 시내와 인근 농촌에까지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게 하여 모두들 태극기를 들고 운동장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불렀다. 유여대(劉如大)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뒤 시가행진을 전개하자 일본 경찰과의 격돌로 일대 혼란이 야기되었다.그는 일본 경찰에 쫓기게 되자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으로 피신하여 비밀리에 의용군(義勇軍)을 모집하여 태천경찰서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사전 발각되어 실패하고 4월 13일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한편, 상해에서는 많은 독립지사들이 곳곳에서 모여들어 임시정부를 설립하고 임시의정원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4월 22일과 23일에 개최된 제2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그는 평안도 의원으로 피선되었다. 제2차 의정원 회의에서는 국무원 비서장 조소앙(趙素昻) 내무차장 신익희(申翼熙) 등의 사직청원 수리와 차장제 폐지 및 위원제 사용의 결의, 각 부 위원의 선정, 임시의정원 성립 발포의 결의 등을 의결하기도 하였다.
1919년 5월 12일에 개최된 제4차 의정원 회의에서는 국무위원인 조완구(趙琬九)가 시정방침을 밝힌 가운데 외교항목에서 사료편찬 사업계획을 강조하고 있으며 7월 8일에 개최된 제5회 의정원 회의에서도 안창호(安昌浩)가 이를 강조하고 있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 내에 임시사료편찬회를 조직하게 되었다.
임시사료편찬회는 한국의 독립운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역사 전적(典籍)으로 구비하자는 의도와 한국의 독립운동을 올바로 국제적으로 이해시킨다는 선전 외교의 의도에서 만들어진 기관이다.
임시사료편찬회의 총재는 안창호(安昌浩) 주임에는 이광수(李光洙) 간사에는 김홍식(金弘植)이 선임되었으며, 그는 김병조(金秉祚) 장 붕(張鵬) 김 한(金翰) 김두봉(金枓奉) 박현환(朴賢煥) 김여제(金輿濟) 이영근(李永根)과 함께 위원으로 피임되어 근무하였다.
이 편찬회는 1919년 7월 2일에 조직되어 그해 9월 23일에 "한일관계사료집" 전4권을 편찬 완료하고 해산하였다.
또한 그는 같은 해 5월 목사 안승원(安承源) 김병조(金秉祚) 손정도(孫貞道) 장덕로(張德櫓) 등과 연서(連署)한 진정서를 여운형 편에 만국장로교연합회(萬國長老敎聯合會)에 탁송하여 일제의 탄압정책을 폭로 규탄하였으며, 국민대표회기성위원회(國民代表會期成委員會) 집행위원, 그리고 동년 8월에는 임시의정원 외교위원회위원 등으로 독립운동에 이바지하였다.
또한 동년 12월에는 대한 적십자회에 가입하여 자유대(自由隊) 대원으로도 활약하였다.
1920년 1월에는 임시정부 서무국장에 임명되어 동년 7월까지 근무하였으며, 동년 9월에는 중 한(中韓) 양국민이 일제에 공동으로 대적하기 위한 조직으로 중 한국민호조사(中韓國民互助社)가 설치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1년 3월에는 다시 대한야소교진정회(大韓耶蘇敎陳情會)를 조직하게 되었는데 그 서기에 임명되어 한국 독립의 불가피함을 각국에 널리 알렸으며, 동년 5월에는 임시정부 내에 알력이 일자 국민대표회기성위원회(國民代表會期成委員會)를 조직하고 그는 집행위원이 되어 활약하기도 하였다. 이후 1924년에는 임시정부 인사국장, 1925년에는 비준국장에 임명되어 계속 활동하다가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서 입국하였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3. 대중매체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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