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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2·3대 의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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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생 | 1890년 4월 27일 |
| 충청남도 홍성군 고도면 상촌리 | |
| 사망 | 1952년 12월 31일 (향년 62세) |
| 본관 | 신 안동 김씨 |
| 이명 | 김무(金武), 김우종(金宇鐘), 김우진(金宇震) |
| 가족 | 아버지 김희규(金羲圭), 어머니 이씨 |
| 학력 | 서당 (졸업) 경성공업전습소 (졸업) |
| 서훈 | 건국훈장 애국장 (1995년 추서) |
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이다.2. 생애
1890년 4월 27일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고도면(高道面) 상촌리(上村里)에서 아버지 김희규(金羲圭)와 어머니 이씨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김좌진(金佐鎭)의 친족이다. 이명으로 김무(金武), 김우종(金宇鐘), 김우진(金宇震) 등을 사용하였다.어렸을 때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1916년 3월경 경성공업전습소(京城工業傳習所)에 입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하여 구류 처분을 받았다. 이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제2·3차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제2차 회의에서는 국무원 비서장과 4부 차장의 사면 청원을 수리하고, 차장제를 폐지하고 위원제를 실시하는 법규 개정에 참여하였다. 또한 임시정부 각 부 위원을 선임하였다. 제3회 회의에도 출석하여 「임시의정원법」 의결에 관여하였고, ‘의원 선거의 건’과 ‘선거세칙’, ‘임시정부관제 제정에 관한 건’에 대해 임시정부 국무원에 위임할 것을 의결하였다. 1920년 1월 28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서기에 임명되어 그 해 6월 10일까지 활동하였다.
1923년 말 상하이 대한인교민단의 치안 조직인 의경대(義警隊)의 대원으로 활동하였다. 상하이 대한인교민단은 1920년 10월 7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에 설립된 한인 교민 단체로, 한인 교민들의 생활 보호와 임시정부의 기반 조직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 수립된 단체였다. 의경대는 당시 상하이 인근 지역이 중국 내전으로 인해 혼란에 빠지자 독립운동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프랑스 경찰을 도와 상하이 교민사회의 치안유지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경단원 19명은 모두 3조로 편성되었는데, 그 중 1조에 편성되어 근무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결렬된 이후 1924년 4월 5일 창립된 단체인 상하이 한인청년동맹(上海韓人靑年同盟)에서 후보감찰위원을 맡아 적극 활동하였다. 이 단체의 설립 목표는 청년들의 혁명정신을 고취하고 단합적 행동을 훈련함으로써 민족독립을 완성하는 데 두고 있었다.
1925년 1월 초순 김구(金九)·윤기섭(尹琦燮) 등이 조직한 의열단체인 한혈단(韓血團)에 입단하였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베이징으로 옮겨 새로 오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편의를 제공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학생회가 조직되자 조사부 위원을 맡아 참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1925년 작성된 조선총독부의 요시찰인 명부에 이름이 올라 체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상하이로 이동했던 것으로 보이며, 1933년 6월경에는 상하이에서 설립된 한인 친목 단체의 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조선총독부 경무국에서는 1934년까지 이른바 ‘용의조선인’으로 분류하고 끊임없이 감시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