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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의 파블레 왕자

<colbgcolor=#CDE1F6><colcolor=#000> 유고슬라비아의 파블레 왕자
Knez Pavle od Jugoslavije
파일:201FCA434EB75AE435.jpg
이름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
(Pavle Karađorđević)
출생 1893년 4월 27일
러시아 제국 상트페테르부르크
사망 1976년 9월 14일 (향년 83세)
프랑스 파리
배우자 그리스와 덴마크의 올가 공주 (1923년 결혼)
자녀 알렉산다르, 니콜라, 옐리사베타
아버지 유고슬라비아의 아르세니예 왕자
어머니 아브로라 파블로브나 데미도바
종교 정교회 (세르비아 정교회)
1. 개요2. 페타르 2세 치하3. 친독파?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5. 자녀6. 매체에서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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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페타르 1세의 조카이자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인 페타르 2세의 당숙으로 페타르 2세 제위 기간 도중 섭정 자격으로 국가를 통치하였다.

1923년요르요스 1세의 친손녀 그리스와 덴마크의 올가 공주[1]와 결혼하여 2남 1녀를 두었다.

2. 페타르 2세 치하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 이후 갑작스레 즉위한 페타르 2세는 11살에 불과했기에 파블레 왕자가 섭정을 맡았다.

파블레 왕자는 스스로를 유고슬라브인이라고 칭할 정도로 유고슬라비아에 애착이 깊었기에 불안정한 유고슬라비아를 안정시키려 했고, 1939년 8월에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이었던 크로아티아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크로아티아 농민당과의 협의로 자치주 '크로아티아 바노비나(Banovina Hrvatska)'를 만들었다.

파블레 대공은 친독정치를 펼치던 총리이자 외무장관 밀란 스토야디노비치가 1939년 사임하자 받아들였고, 그가 친독 정권의 괴뢰 지도자가 될 것을 우려해 1940년에 체포했다. 그러면서도 독일에는 스토야디노비치의 해임이 유고슬라비아의 내정에서 비롯된 문제였으며, 이것이 독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스토야디노비치의 최측근이자 외교관 이보 안드리치보내 독일에 해명했다.

1941년 3월 25일, 한참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던 시기에 파블레 왕자는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을 막기 위해 전국민적 반대를 무릅쓰고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하여 유고슬라비아를 추축국에 가입시켰다. 사실 말이 추축국 가입이지 '독일의 전쟁을 돕지 않아도 된다'고 명시되어 있는, 사실상의 중립 조약이었다.

그런데 사흘도 안 돼 파블레 왕자의 독단과 전횡에 불만을 품고 있던 페타르 2세가 친연합 장교들과 결탁하여 친위 쿠데타를 일으켰고, 파블레 왕자는 유고슬라비아를 떠나 남아프리카 연방으로 망명하려다 영국령 케냐에서 억류되었다.[2]

물론 페타르 2세 역시 삼국 동맹 조약을 물릴 생각은 없었지만 독일이 원치 않았던 친연합 쿠데타에 더해서 유고슬라비아의 국민들이 독일의 외교관과 국기를 모욕하는 일이 벌어지자 결국 독일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게 된다.

3. 친독파?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모두가 반대하던 친독 정책을 관철시켰다가 쿠데타까지 당해 밀려난 행적 때문에 파블레 왕자는 골수 친독파로 인식되고는 한다. 그러나 이는 파블레 왕자 본인이 본다면 억울하다 못해 어이가 없을 오해이다.

세르비아 엘리트들은 파리나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유학을 가는 것이 관례이던 시절, 파블레 대공은 굳이 옥스퍼드 대학교로 유학을 갔다 온 '별종'이었다. 그가 옥스퍼드 대학교 상류 클럽에서 만나서 절친이 된 사람이 조지 6세의 동생인 켄트 공작 조지 왕자다. 아예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파블레의 결혼식에 신랑 측 들러리로 선 사람이 당시 요크 공작이었던 조지 6세였다. 사적으로 보면 오히려 특이할 정도로 골수 친영파인 셈이다.[3]

그런 사람이 히틀러의 요구를 받아들인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유고슬라비아에게 일방적으로 불합리한 강요를 한 것도 아니다. 전 유럽을 추축국이 틀어쥔 상황에서 로마 제국을 재건하겠다며 설치던 무솔리니가 스파치오 비탈레를 내세워 지중해를 '마레 노스트룸'으로 만들기 위해 유고를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으나 발칸에서 전선을 확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히틀러가 이탈리아를 압박하며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호의적으로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연합국 편을 들어봤자 격노한 독일, 지중해 연안을 노리는 이탈리아 그리고 보이보디나를 노리는 헝가리에게 두드려 맞을 뿐이다.

파블레 왕자는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 만연한 반독 정서는 물론 본인의 친영 성향까지 접어두고 현실적으로 친독 외교를 펼친 것이다. 반독 정서를 이용해 집권한 페타르 2세도 파블레 왕자의 정책을 철회하지 않겠다고 히틀러를 달래보려 했을 정도이니 말 다한 셈이다.

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후 파블레 왕자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전범으로 낙인찍혀 다시는 유고슬라비아로 귀환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에서 살다가 1976년에 사망하였다.

5.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 / 자녀
1남 알렉산다르 왕자
(Prince Alexander)
1924년 8월 13일 2016년 5월 12일 사보이아의 마리아 피아 공주[4]
슬하 3남 1녀
리히텐슈타인의 바르바라 공녀
슬하 1남
2남 니콜라 왕자[5]
(Prince Nikola)
1928년 6월 29일 1954년 4월 12일
1녀 옐리사베타 공주
(Princess Elizabeth)
1936년 4월 7일 하워드 옥센버그
슬하 2녀[6]
닐 벨푸어
슬하 1남
마누엘 울로아 엘리아스[7]

6. 매체에서

전간기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한 게임 Hearts of Iron IV에서는 실제 역사에서 그가 섭정이었음을 반영해 국왕인 페타르 2세는 국민정신으로 나오고, 파블레 왕자가 대신 유고슬라비아의 지도자로 나온다. 게임 진행 중 '삼국 동맹 조약 체결' 중점을 완료하면 유고슬라비아 파시즘 정당의 지도자가 되며, 이 상황에서 파시즘을 채택하면 스스로 왕이 되어 파블레 1세로 즉위한다.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원 역사처럼 페타르 2세에게 축출당했으나 유고슬라비아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된 후 세르비아의 국왕인 파블레 1세로 즉위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에서 신 흑수단이 결성되어 유고슬라비아 시절로의 회귀를 외치며 활개치고 다니자 이들을 탄압하고 반독을 외치는 국민들을 달래느라 진땀을 빼지만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상황이 안 좋아지다 결국 폭동이 터지자 황급히 루마니아로 도피하고, 독일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도움을 받아 폭동을 진압한다.

7. 여담


[1] 요르요스 1세의 3남 니콜라오스 왕자와 옐레나 블라디미로브나 여대공의 세 딸 중 장녀.[2] 삼국 동맹 조약에 서명했다는 이유였다.[3] 더군다나 조지 왕자가 1934년 자신의 처제인 마리나와 결혼하게 되면서 영국 왕실과 인척 관계까지 형성된다.[4] 이탈리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 움베르토 2세의 장녀. 움베르토 2세는 페타르 2세의 부왕 알렉산다르 1세와 이종사촌간이고, 파블레 왕자는 알렉산다르 1세와 친사촌간이니 알렉산다르 및 마리아 피아는 둘다 페타르 2세와 6촌이다. 1955년 결혼했다가 1967년 이혼했다.[5] 런던에 거주하던 중 영국의 마거릿 공주를 만나러 가다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6] 그중 첫째가 미국의 여배우 캐서린 옥센버그이다.[7] 페루의 정치인, 페루 국회의장과 총리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