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嘉禾三寶 / 골든 트리오 | ||
성룡 | 홍금보 | 원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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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표 元彪|Yuen Biao[1] | |
본명 | 하령진 (夏令震, Ha Ling-Chun) |
출생 | 1957년 7월 26일 ([age(1957-07-26)]세) |
영국령 홍콩 구룡성구 청산도 | |
국적 | [[틀:국기| ]][[틀:국기| ]][[영국령 홍콩| ]] → [[틀:국기| ]][[홍콩| ]][[틀:국기| ]][2] |
신체 | 172cm, 60kg, O형[3] |
가족 관계 | 부: 하 퀑타이, 모: 하 사우잉 누나 셋, 형 하나, 여동생 셋[4] |
배우자: 팽수하(彭秀霞)(1984 결혼 ~ 현재) 자녀: 1남 1녀 | |
직업 | 배우, 감독, 제작자 |
데뷔 | 1966년 영화 '대취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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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콩의 액션 배우, 스턴트 맨, 무술감독, 무술가, 제작자. 날씬하고 가벼운 체구로 재빠른 움직임과 고난도 동작을 선보이며 가화삼보 중 잘생긴 외모로 배우와 스턴트맨의 경계를 오고 간 영화인이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홍콩 구룡의 청산도(青山道)에서 8남매 중 다섯번째로 태어났으며 누나 3명, 형 1명, 여동생 3명이 있다. 아버지 하광태(夏廣泰)와 어머니 서수영(徐秀英)은 중국 장쑤성 난징출신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홍콩으로 이주하였으며, 작은 스웨터 공장을 운영하였다.5세 때의 원표 (1962년) (좌) |
2.1.1. 중국희극학원과 칠소복
원표는 경극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권유로 5세에 우점원(于占元)이 운영하던 중국희극학원에 입학하였다. 홍콩 구룡 침사추이에 위치하였으며 경극 배우 양성학교 같은 곳이지만 정식 학교는 아니었다. 성룡의 자서전에 따르면, 원표는 학원에 입학한 첫 날 우점원 사부가 덤블링을 해보라고 하자 바른 자세로 단번에 해냈다고 한다.중극희극학원 시절의 하루는 매우 고되었다. 우선, 훈련이 매우 고단한데다가 한창 자랄 나이에 식사를 푸짐하게 할 수 없었다. 아침 5시 기상, 달리기, 스트레칭, 낙법 연습 후 10시에 아침 식사를 하였는데, 우점원 사부가 학원을 여유있게 운영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양념빵 하나만을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원표는 세면장에서 배가 부를 때까지 물로 배를 채웠다고 한다. 아침 식사 후 개별 연습을 마친 뒤 점심 시간을 가졌다. 점심으로는 콩나물과 시장에서 팔다가 남은 오래된 상태의 생선을 주로 먹었는데, 그 마저도 사형들이 다 가져가[5] 원표는 맨밥만 먹을 때가 많았다. 점심 시간이 끝난 뒤에는 사부로부터 유교 교육을 받았고, 그 후에는 중국 본토와 대만에서 초빙된 선생님들로부터 도술, 봉술, 쌍절곤과 같은 곡예 훈련을 받았다.
8,9세 경의 원표 |
또한, 사부의 교습 방법이 지금의 기준으로는 거의 아동학대 수준이었다고 한다. 연습할 때 북경어 대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면 광동어를 사용하는 홍콩인이라 서투른 게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젓가락으로 목을 찔러서 피가 날 정도였고, 종아리를 맞을 때는 막내라서 형, 누나들이 조금이라도 덜 아프게 하려고 자기 바지를 안에 입혔다고 한다. 그렇지만, 원표는 사부로부터 꾸중을 들었던 것 못지 않게 시비를 가리고, 어른을 공경하고, 계속해서 이상을 가지는 것을 배웠다며 사부에 대한 큰 존경심을 가지고 있다.
중국희극학원 학생들과 우점원 사부의 단체사진 |
칠소복의 일원이 되면서 여러 행사와 해외로 나가 경극과 쿵후를 보여주며 맛있는 음식과 과자 등을 실컷 먹을 수 있었다. 원표는 실력이 출중하기도 하였지만, 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과 더불어 혹독한 훈련 대신 공연에서 박수를 받으며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고 싶었기 때문에 칠소복의 일원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바라던대로 원표는 가진 재능을 인정받아 우점원 사부의 '원'자를 따고 표범 '표'자를 사부로부터 부여받으며 '원표'라는 예명으로 홍금보, 성룡 등과 함께 칠소복(七小福)의 일원이 되었고 원표는 이들 중 가장 막내였다.
칠소복 |
2.2. 1970년대
15세에 중국희극학원을 졸업하고, 영화계로 진출해 엑스트라, 스턴트맨, 무술지도[6] 등으로 활동했다. 체구가 큰 편이 아닌데다가 어려보이고 선량해보이는 마스크 때문에 오히려 배역을 따내기 힘들어서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스턴트맨을 많이 했었다고. 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에서 이소룡의 대역으로 캐스팅 된 김태정(당룡)의 스턴트 대역[7]을 맡기도 했다. 그리고 홍콩판 중반부와 미국판 사망유희2(사망탑) 초반에 등장하는 왕호와의 온실 격투장면에서도 원표가 부분대역을 했다.《사망유희 (死亡遊戯, 1978)》 |
2.3. 1980년대
원표는 어설프게 배우가 되는 것보다 스턴트맨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생각을 가지며 무술지도와 감독에 뜻을 두고 있었다. 그렇지만, 홍금보는 《잡가소자(雜家小子, 1979)》[8]의 주연으로 원표를 전격 발탁하였고 역시 홍금보가 연출을 맡은 《패가자(敗家仔, 1981)》[9]에서도 주연으로 출연하였다.《잡가소자(雜家小子, 1979)》 |
《인자무적(林世榮, 1979》 |
《패가자(敗家仔, 1981)》 |
비슷한 시기 성룡이 제작과 주연을 맡은 《사제출마(師弟出馬, 1980)》에 출연하여 의자를 소품으로 활용한 액션의 진수를 보여줬다.
《사제출마(師弟出馬, 1980)》 |
이렇게 홍금보에 의해 발탁된 이래 성룡과도 친분이 생겨 이렇게 셋은 계속 같이 붙어다니면서 프로젝트 A, 쾌찬차 등 여러 영화를 촬영했다.
프로젝트 A(A計劃, 1983), 쾌찬차(快餐車, 1984) 등의 작품을 통해 일본에 얼굴을 알리고 원표의 단독 주연작 《파우(波牛, 1983)》[11]가 1985년 일본에서 히트를 치며, 홍금보와 성룡에 못지않은 인기스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른바 가화삼보(嘉禾三寶 : 일명 골든 트리오)의 전성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사실 이 시기에는 성룡, 홍금보와 원표가 셋이 함께 영화를 촬영하던 시기였고 감독은 셋 중에서 순번을 정해 돌려가면서 하는 방식이었다.
프로젝트 A(A計劃, 1983) |
파우는 1940-5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하며 스포츠 승부조작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플롯만 보면 주성치의 소림축구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영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스포츠 영화가 그렇듯 한국에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 했고, 제목의 뜻을 알 수 없는 저질 홍콩 영화의 예시로 거론되며 국내 언론에서 까였다(...) 결국 성룡이나 홍금보가 동반 출연하지 않은 원표의 단독 작품은 망한다는 공식만을 확인해주었다. 파우는 사실 표준 중국어도 아니라 광동어로서 축구광이나 축구팬을 의미한다고 한다.[12]
《파우(波牛, 1983)》 |
외모(...) 때문인지는 몰라도 까칠하고 괴랄한 연기도 곧잘했는데, 일명 비대칭 헤어컷의 우스꽝스러운 캐릭터로 나온 동방독응(東方禿鷹, 1987)[13][14]에서도 그렇고, 《비룡맹장》에서는 그 연기의 정점을 찍는데... 무려 중2병 증세를 보이는 캐릭터로 나온다.
《동방독응(東方禿鷹, 1987)》 |
그밖에 《집법선봉(執法先鋒, 1986)》[15][16] 《급동기협(急凍奇俠, 1989》[17], 《공작왕(孔雀王子, 1989)》[18] 등의 단독 주연작도 꾸준히 찍었다. 다만 가화삼보와 결별하고 찍은 90년대의 단독 주연작들은 하나같이 결과가 시망이었다. 특히 본격적인 느와르물이었던 《망명원앙(亡命鴛鴦, 1988)》[19]에서는 아내를 잃은 형사로 등장하는데, 영화 자체는 홍콩의 중국 반환을 앞둔 홍콩의 불안정한 사회 분위기를 잘 녹였다는 평을 들었으나 정작 주연을 맡은 원표의 연기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망했다는 평이 있다. 이 영화의 실패 이후로 원표는 이런 류의 영화 시나리오를 거의 받아본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지만, 원표의 진지한 연기를 볼 수 있는 몇 안되는 작품 중 하나이다.
《집법선봉(執法先鋒, 1986)》 |
《공작왕(孔雀王子, 1989)》 |
2.4. 1990년대~현재
80년대 후반의 쿵푸 영화는 홍콩 느와르에 그 인기를 상당수 빼앗겼으나, 90년대 초반의 《황비홍(黃飛鴻, 1991)》과 《동방불패(東方不敗, 1992)》가 [20]연달아 히트를 치면서 무협물의 붐이 일어난다. 이 시기에 원표는 《황비홍》, 《비각칠(黃飛鴻之鬼腳七, 1992)》, 《육지금마(六指琴魔, 1994)》, 《용재소림(龍在少林, 1996)》[21] 등에 출연했다.90년대 후반의 홍콩 영화계는 홍콩 반환과 불경기라는 두 가지 악재와 마주치게 되었고, 결국 원표는 《중화영웅(中華英雄 1999)》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다른 홍콩 영화계의 인사들처럼 영화에서 손을 떼고 해외(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했다.
2000년 제37회 대만 금마장 시상식에서의 원표와 당계례 |
은퇴 이후, 홍콩과 미국 영화계의 출연 요청을 사양하고 골프를 치며 소일하다가, 결국 5년 만에 친구 장국강(張國强)[22]의 요청을 받아들여 복귀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5년 동안 홍콩 일본 합작영화 《무문제2(無問題2, 2002)》에 출연하는 등 온전히 은퇴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반쯤 활동중지 상태였다는 편이 정확할 듯. 이후 성룡의 《BB 프로젝트(寶貝計劃, 2006)》에 카메오로 출연하여 간만에 녹슬지 않은 합을 과시했고, 드라마 《불산찬사부(佛山贊師父, 2005)》, 《영춘(詠春, 2007)》, 《통천간탐(通天幹探, 2007)》등에 출연했다.
최근에는 TV 드라마 출연과 무술감독으로서 간간이 일하고 있다. 매체에는 가끔 얼굴을 내미는 수준. 2012년에는 토크쇼에도 출연했는데 55세의 나이에도 백 덤블링을 휙휙 도는 것으로 보아 운동신경은 여전한 듯. 그러나 간만에 복귀작이었던 2010년의 《쿵푸마스터》는 팬들조차 OME를 외칠 수준으로 패망. 2012년에는 드라마 <십이금전표>의 주연으로 발탁되어 촬영했으며, 2013년 7월 대륙에서 방영되었다. 2014년에는 <천사투강시>를 통해 모습을 보였고 2016년에는 <홍금보의 보디가드>에서 카메오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3. 수상경력 및 후보
연도 | 시상식 | 부문 | 작품 | 수상여부 | 비고 |
1983 | 제 2회 홍콩 금상장 | 최우수 무술지도상 (最佳動作指導) | 패가자 | 수상 | 홍금보, 임정영, 진회의 공동 수상 |
1984 | 제 3회 홍콩 금상장 | 최우수 무술지도상 (最佳動作指導) | 오복성 | 수상 | 임정영, 진회의 공동 수상 |
1985 | 제 4회 홍콩 금상장 | 최우수 무술지도상 (最佳動作指導) | 귀타귀 2 - 인혁인 | 후보 | 홍가반이 후보로 오름 |
1986 | 제 5회 홍콩 금상장 | 최우수 무술지도상 (最佳動作指導) | 복성고조 | 후보 | 임정영과 함께 오름 |
1986 | 제 5회 홍콩 금상장 | 최우수 무술지도상 (最佳動作指導) | 용적심 | 후보 | 홍가반이 후보로 오름 |
1987 | 제 6회 홍콩 금상장 | 최우수 무술지도상 (最佳動作指導) | 집법선봉 | 후보 | 원규, 맹해, 서하가 함께 오름 |
1988 | 제 7회 홍콩 금상장 | 최우수 무술지도상 (最佳動作指導) | 동방독응 | 후보 | 홍가반이 후보로 오름 |
1990 | 제 9회 홍콩 금상장 | 최우수 무술지도상 (最佳動作指導) | 급동기협 | 후보 | 홍가반, 원화, 원덕이 후보로 오름 |
4. 평가
4.1. 원표의 인지도
탁월한 운동신경을 바탕으로 보여주는 고난도 액션과 스턴트 연기는 가화삼보 중에서도 으뜸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지만, 워낙에 홍금보와 성룡 두 형님이 넘사벽 스타인지라 막내인 원표는 아쉽게도 묻힌 감이 없지 않다.[23] 작은 체구를 이용한 매우 빠른 속도의 발차기 실력은 가화삼보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수준.한국에서는 성룡과 홍금보에 비해 인지도가 딸리지만, 80년대 일본에서는 성룡과 함께 투탑으로 인기를 양분했을 정도로 원표의 인기가 드높았다. 샤프하면서도 귀여운 얼굴과 쿵푸 청년의 이미지가 일본에서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던 듯. 원표 본인도 일본에 방문했다가 공항을 가득 메운 팬들을 보고 꽤 놀랐다고. 그 때문에 원표의 리즈 시절 사진은 일본 웹사이트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잡지 화보집도 꽤 발간된 편이다. 일본에서의 높은 인기에 힘입어 급조한 음반도 몇 장 있다. 그중 하나가 <파우>의 일본어판 주제곡인 챔피언.[24] 일본 쪽에서 밀었던 이미지는 귀여운 얼굴에 운동을 잘하는 청춘스타였는데, 홍콩 쪽에서는 왠지 병맛의 임팩트가 느껴지는(...) 캐릭터를 주로 연기해서 아쉬워하는 팬들도 많았다.
원표의 일본에서의 인지도를 알려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바로 일본의 액션배우인 오시마 유카리의 일화. 원래 체육교사가 장래 희망이었던 그녀가 《사제출마》에서의 원표를 보고 액션배우로 전향했고, 원표가 출연하는 신작 액션영화(1985년작 《부귀열차》)에 외국인 배역[25]의 오디션이 있다는 소식을 듣자 곧장 원서를 접수해버렸을 정도. 덤으로 이 때 오시마 유카리는 중국어는 단 한마디도 못하는 상태였는데 그냥 무작정 지원했다고 한다. 그녀의 배우 인생을 다룬 다큐멘터리에서도 원표에 대한 이야기가 틈틈이 나올 정도다.
원표가 자신의 우상이었다고 밝힌 오시마 유카리 |
4.2. 영화인으로서의 원표
일찌감치 제작자로 나서서 흥행에 성공한 홍금보나 성룡에 비해 원표가 직접 연출했던 영화는 《서장소자》하나뿐이라 상대적으로 저평가되는 측면이 있다. 또한 원표의 성향도 제작과 같은 복잡한 업무보다는, 몸으로 직접 뛰는 스턴트나 액션 쪽에 더 관심을 두는 편이었다. 그래서 출연한 영화에서도 본인 역할 하랴, 다른 배우의 역할까지 가발쓰고 대역해주랴(...) 이리저리 바쁜 원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미국에서 제작한 무술영화 관련 다큐멘터리[26] 1990년대 초반에 국내에 비디오 출시된 '액션 진기명기'에서 성룡은 "서로가 실제로 싸운다는 가정을 했을 때, 체급 차이 때문에 나는 절대로 홍금보를 못 이긴다. 같은 이유로 원표 역시 나에게 이길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원표는 체격을 살려 날아오르거나 발차기 액션을 집중적으로 수련했고, 나 역시 주변의 사물을 이용하는 액션을 배웠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반대로 이런 점이 가화삼보 3인의 개성을 확실히 부여해서 서로 공연할 때 절묘한 조합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가화삼보와 결별한 이후에는 항상 단조로운 연기력이 문제점으로 지적받곤 했다. 일찌감치 제작자로서 두각을 드러낸 홍금보와 기획력에 연기력까지 갖춘 성룡에 비해, 원표는 애초부터 배우가 아니라 외모가 받쳐주는 스턴트맨으로 출발한 경우였다. 코믹 액션을 찍을 때는 어찌어찌 부족한 연기력을 커버할만했는데, 점차 홍콩 영화계의 트렌드가 변화하면서 부족한 연기력으로 인해 영화를 단독으로 끌고 갈 만한 파워가 떨어져 버렸다. 깨지고 넘어지고 구르는 리얼 스턴트를 표방했던 80년대와는 달리, 90년대에는 와이어 액션을 이용한 촬영법으로 변화하면서 점차 무술 실력보다는 연기력이 되는 스타들로 물갈이되고, 90년대 이후에는 다른 가화삼보 멤버들만큼 A급 스타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5. 여담
- 《용적심》, 《복성고조》, 《하일복성》 등의 작품에서 성룡의 스턴트를 한 적이 있다. 《쾌찬차》에서는 간간히 성룡을 포함한 다른 배우의 스턴트와 홍금보가 악당과 펜싱으로 대결하는 장면에서 악당역의 스턴트를 원표가 맡았다. 잘 보면 머리 보호구 사이로 원표의 얼굴이 대놓고 보인다(...) 성룡이 감독과 주연한 영화 미라클에서는 거지로 나와 성룡에게 돈받고 고맙다고 한마디하는 카메오로 나오기도 했다...
- 영화 《패가자》에서 영춘권의 종사 양찬(梁贊)을 연기했는데, 이후 드라마《불산찬사부》와 《영춘》에서 다시 양찬 역을 맡았다.
- 뺨의 사마귀는 사실 피부병이라고... 영화를 유심히 보면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없어지기도 한다.
- 수권전대 게키레인저의 권성인 푠 표우의 모티브가 되었다.
- 가화삼보 중에서는 결혼을 빨리 한 편이다. 1982년 영화 《제방소수》에서 무술 감독을 맡으며 여주인공인 코디네이터 겸 배우인 팽수하(Didi Pang)를 만나 1984년 원표의 나이 27살에 결혼하였고 슬하에 딸과 아들을 두고 있다. 아내가 싫어한다는 이유로 러브씬을 거의 찍지 않는 편이고 실제로도 여배우와 커플로 나오는 영화가 촬영 편수에 비해 적은 편이다. 다만, 1983년 <Zu: The Warriors from the Magic Mountain>[27]에서의 이새봉, 1985년 <시래운전>, 1986년 <부귀열차>[28]에서 관지림 등과 키스신을 찍은 적이 있다.
- 한국에서는 90년대 성룡 영화들이 지상파로 더빙 방영으로 한꺼번에 마구 방영할 당시 김민석, 김승준(성우), 김준, 구자형이 번갈아 맡았다. 이 중 제일 많이 맡은 사람이 김민석, 구자형이다.
- 젊었을 때만 해도 덧니와 뺨의 사마귀가 합쳐져 귀엽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면서 사마귀 점도 빼고[29] 나잇살도 붙고 그러다 보니 어째 인상이 험악해졌다. 유독 사진마다 얼굴 크기가 들쑥날쑥한데, 젊은 시절 때도 그랬던 걸 보면 유독 얼굴 살이 잘 찌는 체질인 듯. 피부도 모공이 큰 편이고 여드름 흉터가 많은데, 젊을 때는 그런 것도 귀여운 이미지로 커버할 수 있었으나, 서른이 넘어가면서 얼굴이 확 삭아버렸다. 오랜 세월 이미지 변화가 거의 없었던 성룡과 비교해봐도 원표의 이미지 변화는 거의 역변 수준이다.
- 젊은 시절의 외모가 상당히 잘생겼기에 팬들이 얼굴을 보고 입덕한 경우도 상당히 많지만 안경빨이 정말로 극악하다 싶을 정도로 안받는 연예인이다. 그로 인해 그가 끝까지 안경을 쓰고 나온 영화인 쾌찬차와 강시선생 2는 원표 팬들이 썩 좋아하지 않는 영화들로도 유명하다.
- 국내에는 <급동기협> 촬영차 1988년~89년경에 내한한 적이 있다. 눈 내리는 설원에서 풍삼(원화)와 결투를 벌이는 씬이 한국의 설악산이다. 이를 위해 약 5회 정도 한국에 오갔으며 눈 내리는 장면을 촬영해야 했는데, 매번 눈이 내리지 않아 철수 하려던 차에 3월 중순 경 눈이 내려 무사히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고 한다. 열흘을 예상했지만 한 달 정도를 소비했다고.
《급동기협 (急凍奇俠, 1989)》 촬영현장 |
5.1. 성격
- 활발할 것 같은 이미지와는 달리, 겸손하고 수줍음이 많은 성격이라고 한다. 칠소복 멤버 중에서도 가장 내성적이라고. 그래서 가화삼보끼리 나온 인터뷰에서는 혼자서만 거의 말이 없다. 홍금보나 성룡은 촬영이 끝나면 사람들을 만나거나 모임에 나가서 술을 마시는 것과는 달리 원표는 곧장 귀가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룡이 밝히길, 공처가 성향이 있다고 한다(...). 홍금보와 성룡이 뒷세계에 대한 루머나 여자 문제로 구설수에 자주 올랐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사생활 면에서는 구설수에 오른 일이 한 번도 없다.
- 중국희극학원의 동기들에 의하면 우점원 사부가 홍금보는 큰 형이었기에 잘 때리지 않았고, 성룡도 타고난 변죽으로 제법 체벌을 면했는데[30] 막내인 원표는 워낙 FM적인 성격이라 체벌을 당해도 가만히 맞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 학창 시절에 공부는 너무 싫고, 운동하는 것을 좋아해서 경극학교에 들어갔다고 한다. 성격도 유쾌하고 복잡한 걸 싫어하는 단순한 성격이라고 한다. 제작자보다 배우로 오래 활동한 것은 이런 성향과 연관이 없지는 않을 듯하다. 그렇지만, 중국희극학원 시절 밤 11시 부터 새벽 5시 까지가 취침 시간이었는데, 잠자는 시간을 쪼개어 약 두 시간 동안 차가운 물로 잠을 깨어가며 잘 되지 않는 기술을 연마할 정도로 끈기와 독기가 있기도 하였다.
- 팬들이 팬레터를 보내면 일일이 답장을 해 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가할 때는 본인이 직접 써 주고, 바쁠 때는 매니저가 대신 맡는다고. 팬들이 돈 쓰는 것을 싫어하는 탓에 기왕 팬레터를 보내려면 EMS보다는 이메일을 주로 추천한다고. 혹여나 원표의 이메일 주소를 알게 된다면 메일을 한번 보내 보자. 십중팔구 답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31]
5.2. 중국희극학원 동문들과의 관계
매년 모임을 크게 가질 정도로 매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성룡, 홍금보, 원규, 원화, 원빈, 원무, 원덕 등과 같이 영화계에서 일하며 홍콩 액션 영화계에 한 획을 긋는 동문들이 있는가 하면 영화와는 관련 없는 일을 하는 동문들도 있다고 한다.- 홍금보 - 중국희극학원 재학 당시의 이름은 원룡(元龍). 원표의 영화 인생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원표가 어릴 적 아버지를 따라 중국희극학원에 입학하기 전 견학을 갔을 때, 가장 먼저 마주친 학생이라고 한다. 학원 졸업 후, 원표가 스턴트맨과 무술지도를 위주로 활동을 할 때 홍금보는 자신의 초기 연출작인 《잡가소자》에 원표를 주연으로 발탁한다. 그 후에도 《패가자》, 《부귀열차》, 《동방독응》, 《쾌찬차》, 《비룡맹장》 등에서 원표에게 적지 않은 비중을 부여하여 원표가 자신의 특기를 최대한 발휘함으로써 액션 배우로 돋보일 수 있게 하였다.
- 성룡 - 중국희극학원 재학 당시의 이름은 원루(元樓). 원표가 중국희극학원에 입학하기 전 까지 막내였기에 사형들로부터 갖은 구박을 받다가 원표가 입학한 후에는 그 화살이 원표에게 돌아갔다고 한다. 원표가 부모님과 헤어진 첫 날, 눈물범벅이 된 모습을 보고 자신의 예전 모습이 생각나기도 하고 공중제비가 노련하고 출중해 시샘을 받는 모습을 보고 원표를 많이 챙겨주었다고 한다.
한 번은 홍금보가 원표에게 빌려 간 돈을 갚지 않고 되려 욕을 하자 원표는 겁을 먹었고, 성룡이 나서서 대신 싸워주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방송 등을 통해 잘 알려진 사실. 우점원 사부는 돈을 요물이라고 할 정도로 돈 거래에 엄한 모습을 보였고 현금 소지를 절대 허하지 않았다. 그 결과, 원표는 사부님에게 돈을 압수 당했고 매를 맞았다. 애들 돈 삥뜯어 간 거 아닌가
성룡의 스턴트팀인 성가반 출신 박현진 무술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성룡은 원표가 《상하이 나이츠》의 무술감독이 아님에도 거의 무술감독으로 대우해줄만큼 각별히 챙겼다고 한다. 성가반의 뒤풀이에서 다른 스탭들이 원표에게 백핸드 텀블링을 보여달라고 해도 보여주지 않다가 성룡이 한번 해보라고 하면 만취한 상태에서도 동그란 테이블에서 10번씩 돌았다고 한다.
6. 출연작
원표의 영화 및 드라마 출연작 리스트에 대한 내용은 원표/출연작 문서 참고하십시오.
7. 참여작
원표가 참여한 작품 리스트에 대한 내용은 원표/참여작 문서 참고하십시오.
[1] 영문명(Bill Yuen, Jimmy Yuen)[2] 1999년 캐나다 벤쿠버로 이주하였으나 시민권까지 얻은것으로 추정된다.[3] cine21[4] 8남매 중 다섯번째.[5] 그 예가 홍금보로 맛있는 반찬들을 늘 독차지 했음을 성룡이 무릎팍도사에서 인증하며 분노의 디스를 했다(.....)[6] 홍금보를 주축으로 임정영, 진회의와 주로 함께 활동[7] 정확히는 3명의 대역이 있었는데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연기대역이 따로 있었고 메인이라 할수있는 얼굴이 드러나는 액션대역은 한국의 김태정이 맡았다. 그리고 원표는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고난도 아크로바틱 액션 스턴트를 맡았는데, 자세한 것은 《사망유희》에서 로버트 월을 상대로 벌이는 탈의실 액션 장면을 보면 딱봐도 원표라고 알수있는 장면들이 있다. 참고로 이 영화는 홍금보가 무술감독으로 참여했다.[8] 당시 원표는 연기에 크게 뜻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주연 자리를 제안 받았을 때 매우 망설였다고 한다.[9] 이 작품으로 원표는 제2회 홍콩 금상장 홍금보, 임정영, 진회의와 함께 무술지도상을 수상한다. 이들은 제3회 홍콩 금상장에서 역시 오복성(奇謀妙計五福星)으로 무술감독상을 수상하였다.[10] 상대역인 진훈기의 돌려차기 신을 원표 본인이 대역을 하였다. 이 발차기 신은 자신이 이후 하일복성에서 그대로 재연한다.[11] 한국에서는 4년이 늦은 1987년에 개봉되었다.[12] 출저 바이두 백과 (波牛是粤语,意指足球发烧友或踢球者) #[13]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액션물. 미국정부에서 홍콩 출신 불법체류자에게 시민권을 준다는 조건으로 특수훈련을 시켜 베트남에 잠입시킨다는 줄거리. 액션은 상당하지만 대원들 중 가장 먼저 사망한 대원은 말더듬이라서, 숫자를 얼마까지 센 후에 낙하산을 펼치라고 했더니 말을 더듬은 탓에 펼치지 못해서 죽는다는 홍콩 특유의 썰렁한 코미디가 진지한 액션과 대비된다.[14] 원표가 맡은 배역은 원래 성룡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성룡이 당시 《프로젝트 A》 속집을 작업하고 있어서 원표에게 돌아갔다.[15] 국내개봉 제목은 《사대선봉》. 사적제재를 소재로 한 액션과 스토리 모두 상당히 하드코어한 작품으로, 낮에는 검사로 일하며 밤에는 직접 악질 범죄자를 찾아 죽음으로 응징하는 검사 하영정 역을 맡았다. 열혈 여형사로 나부락이 출연하며 원표와 나부락 모두 자신들이 주연을 맡은 작품중 애착이 가는 작품으로 꼽는다. 국내 비디오에선 많이 잘려나갔는데 꽤나 사람을 잔혹하게 죽이는 장면들이 많다. 80년대 국내 개봉 당시에 삐짜판 비디오로 통해 본 이들이 나중에 서진통상 정발 비디오를 보고 엄청 잘렸다는 걸 확인한 경우도 있다.[16] 이 영화는 특이한게 결말이 개봉국가마다 상이하지만 모두 비극적으로 끝난다.(오리지날 홍콩판 엔딩(한국에서 삐짜판 비디오로도 나온)에서 악당은 여형사를 죽이고 뒤따라온 하영정과 격투끝에 사망하며 하영정도 사망한다. 중국 개봉판에선 여형사는 악당과 격투도중 중상을 입고 하영정은 악당과 격투끝에 죽이고 구조된후 일급살인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당한다. 한국 개봉판및 서진통상 비디오 출시판에서는 여형사는 악당과 격투도중 끔살당하고 악당을 추격해 격투끝에 죽인 하영정은 살인죄로 8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후 풀려나 홍콩을 떠나 행방불명됐지만 여전히 자경단 생활을 하는것처럼 묘사된다.)[17] 국내개봉 제목은 《청옥불》, 영어판 제목은 《Iceman Cometh》. 장만옥과 주연한 작품으로 명말 황제의 호위관이었던 방수정이 공주를 겁간하고 살해한 풍삼이라는 고수를 체포하는 와중에 눈사태에 휘말려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1980년대 홍콩에서 되살아나면서 일어나는 일종의 타임워프물. 2014년에 견자단 주연의 《빙봉협》이라는 영화로 리메이크되었다. 극중 초반에 풍삼과 방수정이 결투를 벌이는 눈 덮인 산은 바로 설악산에서 찍은 것으로 한국에 와서 찍었다.[18] 당시 히트했던 일본만화를 영화로 옮긴 작품으로, 홍콩과 일본의 합작영화다. 홍콩판과 일본판은 내용이 다르다. 일본판은 재편집하고 더빙까지 해서 완전히 새로운 작품이 되어버렸다. 국내에서 구할 수 있는 공작왕의 DVD는 홍콩판.[19] 국내개봉제목은 《마담킬러》, 비디오 제목은 《극도추종》[20] 서극 감독이 연출과 제작[21] 원표 팬들 사이에서 <흑우>, <비각칠 3>과 함께 원표 수면 3종 세트라고 불리는 악명높은 노잼 영화다(...) 아동을 겨냥한 무협물로서 허접한 CG와 엉성한 소품으로 까였다. 이제껏 원표가 주연했던 작품들의 깨알같은 셀프 패러디도 등장한다. 히로인으로는 당시 신인이었던 비비안 수가 등장했다.[22] 《파우》, 《동방독응》에 같이 출연했다.[23] 라디오 스타에 출연한 SG 워너비의 김진호와 윤하에게 세대차 이야기를 하면서 윤종신이 가화삼보를 아느냐고 물었는데, 이들은 원표가 누군지 몰랐다. 결국 김구라의 분노의 일갈은 "원표 모르면 끝이야 끝!"(...)[24] 광동어판이나 보통화판에서는 이중호가 부른 <전사>가 주제곡이다.[25] 오시마 유카리 외에도 황정리, 신시아 로스록, 리처드 노튼, 쿠라타 야스아키 등 당시 홍콩에서 활약하던 외국인 액션배우들이 총출동했다. 게다가 신예였던 오시마와는 달리 다들 본국에선 한가닥 하는 주연급 배우들.[26] 정확히는 "미국에 비디오가 발매된 홍콩 액션영화"에 대한 내용이었다.[27] 촉산 국제판으로 현대식으로 해석한 장면이 20분 가량 추가된 영화. 전생과 현생을 오가는 타입슬립 형식을 차용하였다.[28] 일본판에만 추가.[29] 사마귀 점의 크기가 점점 커져서 빼게 됐다고 한다.[30] 대신 홍금보에게는 자주 얻어맞았다고 한다(......)[31] 페이스북에 오피셜 페이지가 있다. 가끔씩 근황 사진을 올리며 영어로 멘트를 작성하는데, 본인이 영어에 서툴다고 양해를 바란다고 써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