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에티오피아 본토의 유대인 공동체들(예멘계 유대인들과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들)은[1] 1949년부터 2022년까지 이스라엘 정부가 치밀하게 구상한 일련의 탈출 작전에 연속으로 참가하여 귀순이민(알리야)을 실행했다.한국인들의 관점에서는 대한민국 정부가 실행한 1949년의 중화민국 탈출과 1975년의 남베트남 탈출 및 1991년의 소말리아 탈출과 2021년의 아프가니스탄 탈출을 연상할 법한데 이런 사례들은 재외교민의 긴급피난에 중점을 뒀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사례와는 차이가 있다. 즉 본국의 영토에 도착하면 그것으로 작전이 종료된 것이며 경우에 따라서 여비의 지급이 있었을 뿐이다.
반면 예멘계 유대인들과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들의 탈출 작전은 이스라엘의 민방위체계와 사회복지정책을 거국적으로 총동원하는 대규모의 귀순이민 프로그램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에[2] 그들의 행적은 북한을 탈출한 탈북민 또는 동독 탈출 주민의 처지와 다를 바가 없고, 당연히 이스라엘 국민으로서 다양한 사회복지 혜택(아파트 제공, 보건의료, 산업기술훈련)을 누릴 수 있다.
2. 오스만 제국 시절
러시아의 황제인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하자 그 배후가 유대인이라는 소문이 러시아 전역에 돌았다. 그러자 많은 러시아인들이 유대인에게 폭력을 가하는 포그롬이 발생하였다. 1881년 4월 26일 현재 우크라이나의 수도인 키이우에서 발생한 포그롬을 시작으로 현재 우크라이나 영토 전역에 포그롬이 발생하였다. 차르 당국은 이러한 유대인 박해를 막으려 들지 않았고 결국 동유럽계 유대인들의 약속의 땅으로 돌아가야한다는 시오니즘 운동이 시작되었다. 특히 1882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3세가 재정한 5월 법률로 유대인이 게토 밖에 정착하는 것을 금지하고 3~5%의 유대인 제한령이 제정되어서 많은 유대인들이 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술을 팔 수 있는 권리가 박탈되거나 지방 선거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결국 1881년부터 1903년까지 첫 번째 알리야가 시작되어 25,000여명이 오스만령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였다. 하지만 자금 부족으로 결국 중단되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에서는 유대인 탄압이 지속되었다. 특히 1903년 러시아 제국 베사라비아 총독부의 수도인 키시네프에서 포그롬이 일어나 49명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92명이 중상을 입고 1,500채의 주택이 파괴되었다. 또한 1905년 10월에 키시네프에서는 차르에 항의하는 시위가 일어났다. 하지만 이 시위는 포그롬으로 발전하여서 19명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56명이 부상을 입었다. 그래서 제2차 알리야가 시작되었다. 이 기간 35,000여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였으며 주로 러시아 출신들이었다.
3. 영국령 팔레스타인 시절
제1차 세계 대전 때 영국은 유대인들에게 독립 국가를 약속하는 밸푸어 선언을 하였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이를 이행하기 위해 영국은 배를 동원해 동유럽에 살던 유대인들을 팔레스타인으로 이송시켰다. 특히 러시아에서 혁명과 내전이 발생하고 미국이 남유럽인과 동유럽인이 미국에 오는 것을 막는 할당법을 제정해 동유럽 출신이 대부분이던 유대인들은 미국으로 이주하는 것 마저 막혔다. 이 것은 제3차 알리야로 35,000명에서 40,000명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였다. 제3차 알리야는 제1차, 제2차와 다르게 지식인과 기술직들이 많아서 이 지역이 발전하는데 크나큰 역할을 하였다.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졌다. 그 와중에 유대인이 많이 살았던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반유대주의와 경제위기가 동시에 찾아오자 사업, 산업, 무역에 종사했던 중산층 유대인들 80,000명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다. 이 것이 바로 제4차 알리야이다.
1929년 경제 대공황과 독일에서 나치즘의 부상으로 유대인 박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래서 동유럽뿐만아니라 독일, 오스트리아를 위시한 중유럽의 유대인들도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까지 지속되었으며 25만명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였다. 이를 제5차 알리야라고 부른다.
하지만 너무 많은 유대인이 영국령 팔레스타인에 몰려들자 이 지역에 살던 아랍인들은 크게 반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유대인들이 유대 민족 기금을 창립하여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부동산을 비싼 값에 마구잡이로 사들이자 아랍인들은 두메산골로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아랍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이라고 부른다. 반란은 실패로 끝났지만, 영국은 유대인 이민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나치 독일이 전유럽을 휩쓸면서 유대인들을 게토나 강제 수용소로 보내자 이들을 팔레스타인으로 탈출시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는 영국의 법률을 위반하는 행위이지만 유대인들은 유럽에서 박해받고 있는 유대인들을 돕기 위해 영국 당국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70,000여명의 유대인을 탈출시켰다. 이를 알리야 베트라고 부른다.
히브리어로 탈출 도피라 부르는 브리차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영국령 팔레스타인으로 이주시키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수용소에서 풀려난 이후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자신이 살던 집은 다른 사람의 차지가 되었고 아직 많은 유대인들은 반유대주의에 절여있었다. 1946년 7월 1일 폴란드 키엘체에서 폴란드 소년 헨리크 브와슈치크가 실종되자, 그의 아버지는 유대인이나 집시로 추정되는 남자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격분한 폴란드인들은 유대인 저택을 강제적으로 수색하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벌어진 실랑이가 포그롬으로 발전해 42명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을 당했다. 결국 키엘체 포그롬 이후 10만명의 유대인이 동유럽을 떠났고 이들 대부분이 영국령 팔레스타인으로 밀입국하였다.
4. 마법의 양탄자 작전
1947년 UN이 영국령 팔레스타인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으로 분할하자 이에 격분한 예멘인들은 아덴의 유대인 공동체를 공격해 82명의 유대인을 죽였다. 또한 1948년 초 유대인이 무슬림 소녀를 살해했다는 소문이 돌자 예멘인들은 유대인들의 죽이거나 그들의 재산을 강탈하였다. 이스라엘 유대인 기구의 사절인 랍비 야코프 슈라이봄인 이 사실을 당시 이스라엘 총리였던 다비드 벤구리온에게 보고하였다. 다비드 벤구리온은 이들을 이스라엘로 이주시키려는 것을 꺼렸지만 예멘 유대인들이 지속적으로 현지인들에게 탄압받자 이들을 구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비행기를 예멘에 보내 49,000여명의 예멘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이주시켰다.5. 에즈라-느헤미야 작전
1941년 이라크에 이탈리아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가 일어나자 영국은 이라크에 군대를 보냈다. 이 전쟁에서 이라크가 패배하자 이에 격분한 무슬림들이 영국을 도왔다는 의혹을 유대인에게 보냈다. 결국 포그롬이 일어나 180명 이상의 유대인이 사망하고 1,000여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를 파르후드라고 부른다.그러한 와중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이라크 당국은 유대인들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48년 10월 23일 유대인 사업가인 샤피크 아데스가 이라크 공산당에 무기를 팔았다는 죄목으로 바스라에서 공개 처형을 당한 것을 시작하여 1950년에서 1951년 사이에 바그다드의 유대인 관련 건물에 테러가 일어났다. 하지만 이라크 당국은 이 테러를 유대인이 일으켰다고 주장하였고 졸속 재판 끝에 이들을 처형하였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들을 이스라엘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하였고 1951년 3월 부터 공수 작전이 시작되어서 5만명의 유대인이 이스라엘에 정착하였다. 이 때 이스라엘 당국은 이라크 유대인들에게 이민 신청을 촉구하는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오 시온아, 도망쳐라, 이스라엘이 당신을 부르고 있다. 바빌론에서 나와라."였다.
6. 벽화 작전 & 야친 작전
1956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모로코는 유대인의 해외 여행을 제한하였고, 아랍 연맹의 압력으로 목적지가 이스라엘일 경우 유대인의 이주를 금하였다. 하지만 모로코의 국왕 하산 2세는 이스라엘과 비밀 리에 협정을 체결해 모로코 어린이들을 스위스로 휴가를 가장한 여행을 시켰다. 그 중 유대인들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스라엘로 이주시켰다. 이를 벽화 작전이라고 부른다.하지만 이러한 작전만으로는 모로코 유대인들을 대규모로 탈출시킬 수 없었다. 결국 이스라엘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은 미국의 중재로 하산 2세와 협정을 맺었다. 이스라엘은 계약금으로 50만 달러를 주고, 유대인 1명당 100달러를 모로코에 지불하기로 했다. 이를 야친 작전이라 부르는 데 야친은 성경에서 유래한 말로,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에 세운 성전을 지탱하는 두 중심 기둥 중 하나이다. 이 작전으로 9만 7천명의 모로코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였다.
7. 음지의 협력자
이 작전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및 인접 아랍 국가에서 이스라엘과 협력한 인물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이스라엘로 이송하는 비밀 작전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은 점령지(서안지구, 가자지구) 및 레바논, 시리아 등에서 팔레스타인 무장 세력과의 갈등을 지속해 왔으며, 이 과정에서 현지에서 이스라엘을 위해 정보를 제공하거나 협력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반역자로 간주되어 팔레스타인 및 아랍 사회 내에서 극심한 보복의 위협에 직면하였다.결국 협력자와 그 가족들을 보호, 정보 유출 차단 그리고 이스라엘과 협력하는 요원들이 안전하다는 신뢰를 주어 추가적인 협력을 유도하기 위해 음지의 협력자 작전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및 레바논 내의 협력자들이 이스라엘로 이송되었고 이는 현재도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8. 형제 작전
1970년대 에티오피아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을 이스라엘로 대피시키는 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들은 수단을 경유해 탈출하거나 아니면 모사드가 유럽의 NGO로 위장하여 수단 해안가에 가짜 관광 리조트를 세우고 이를 통해 에티오피아 유대인을 구출하거나 자국의 해군 함정과 수송기를 동원해 이스라엘로 공수하였다. 이 형제 작전을 통해 8,000명 이상의 에티오피아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이주하였고, 이 작전은 후일 있을 모세 작전과 솔로몬 작전의 발판이 되었다.9. 모세 작전
1984년 에티오피아에 대규모 기근이 발생하였다. 이로인해 30만에서 120만명에 가까운 사람이 굶어죽었지만 당시 에티오피아의 독재자인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은 기근을 방치하였다. 그러자 1984년 이스라엘 총리인 시몬 페레스는 이들을 구출하기로 결정하고 이스라엘 방위군, CIA, 하르툼 주재 미국 대사관, 용병, 수단 국가 보안군과 협력하였다. 1984년 11월 21일부터 1985년 1월 5일까지 8,000명의 에피오티아 유대인들을 구출하였다. 하지만 시몬 페레스가 이 사실을 공표하자, 이스라엘과 협력했다는 사실을 감추고 싶었던 수단은 공수 작전 협력을 중단하였다.10. 여호수아 작전
여호수아 작전 혹은 시바 작전이라 부르는 이작전은 1985년 에티오피아 유대인들을 수단의 난민 캠프에서 이스라엘로 이주시키는 작전이었다. 모세 작전이 중단되자 미국의 상원의원 100명 전원이 로널드 레이건대통령에게 대피를 재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1985년 3월 22일 미 공군 C-130 6대가 1,600여명의 에티오피아 유대인을 이스라엘로 이송하였다.11. 솔로몬 작전
솔로몬 작전 מבצע שלמ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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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5월 24일 에티오피아에서 살고 있던 에티오피아계 유대인 15,000여명+α을 피난시킨 탈출 작전.
1단계 탈출작전, 2단계 탈출작전, 3단계 탈출작전이 있었는데 2단계 탈출작전이 가장 유명하다. 1단계 작전은 멩기스투 정권과 거래하는 대신 이산가족 상봉사업을 내세워서 성사시켰다. 3단계 작전은 새로운 정부를 세운 멜레스 제나위와 담판하여 아디스아바바와 곤다르와 쿠아라 지방의 소위 '길 잃은 어린 양'[3]들을 싹쓸이로 모셔온 뒤 이스라엘행 비행기에 태워서 모조리 귀국시킨 것이다.[4]
11.1. 배경
1974년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의 쿠데타 집권 이후, 에티오피아 인민민주공화국은 내전과 잇따른 정책 실패로 혼란에 빠져 1991년 5월에는 수도 아디스아바바가 티그라이 반군와 에리트레아 반군의 공격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1991년 3월 7일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이스라엘 정부와 미국 정부는 에티오피아 내의 유대인들을 구출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이스라엘 외무부는 가장 먼저 에티오피아 내의 유대인들을 이스라엘 대사관으로 소집하는 한편, 유대인들의 구출을 대가로 에티오피아 공산정권에 3500만 달러를 지불했다(해당 금액은 미국의 유대계 자선단체가 모금했으며 불과 3일만에 목표 금액을 달성했다). 또 반군들과도 교섭해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밀약을 받아냈다.
11.2. 작전 개시
1991년 5월 24일 이스라엘 정예군 200여명을 태운 이스라엘 공군 소속의 보잉 707 6기와 C-130 18기가 아디스아바바 볼레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이들 병력은 대사관에서 공항까지 피난민들의 호위를 맡았다. 이후 36시간 동안 엘알 항공 소속 보잉 747과 이스라엘 공군 C-130 34기가 14,325명의 유대인들을 이스라엘의 벤 구리온 국제공항까지 실어 날랐다. 작전에 참가한 대부분의 비행기들은 좌석들을 추가로 탈거했으며 비행기에 타려는 사람들도 최소한의 짐만 가지고 기내에 탑승했기에 최대한 많은 사람을 태울 수 있었다. 덕분에 48시간으로 예상됐던 작전 시간은 36시간까지 단축되었다. | |
벤 구리온 국제공항에 착륙한 이스라엘 공군 소속의 C-130 | 벤 구리온 국제공항에 착륙한 이스라엘 공군 소속의 보잉 707 |
11.2.1.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탑승시킨 비행기
Guinness World Records | |||
Most passengers on an aircraft 가장 많은 승객이 탑승한 항공기 | |||
대상 | 기록 | 장소 | 등재 시일 |
엘알 보잉 747 | 1088명 | 에티오피아(아디스아바바) | 1991년 5월 24일 |
기네스 등재 기록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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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10월 5일, 취리히 공항에서 찍힌 4X-AXD |
엘알 카고 소속의 보잉 747-258C(등록기호 4X-AXD)는 당초 760명의 사람들을 태울 예정이었다. 이미 보잉 747-200의 최대 탑승인원인 480명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으나 대부분의 탑승객들은 영양실조로 저체중이었다. 이에 1086명의 승객들이 747기에 탑승했으며 이스라엘로 비행 도중 2명의 아이가 태어나면서 총 1,088명이 747기에 탑승한 것으로 기록되었다. 이들은 무사히 이스라엘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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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객들을 태우는 4X-AXD |
11.3. 여담
1,088명을 실어 나른 진기록을 세웠던 4X-AXD는 2000년 남아공의 하이드로 에어로 팔려나가 ZS-OOS로 운항되다 2003년 11월 29일 나이지리아 라고스 공항에서 활주로를 이탈하며 파괴되었다.12. 베타 이스라엘들의 이스라엘 정착 이후
이스라엘에 도착한 직후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들의 삶은 에티오피아에서보다는 물론 나았지만 순탄치 못했다. 가장 먼저 이들은 히브리어를 할 줄 몰랐으며 이주 초기에는 인종차별 문제로 고생하기도 하였다. 2006년에는 이들의 80%가 무직자라는 조사가 나온 적도 있었다. 다행히 이는 시간이 지나면서 크게 개선되어 2016년 기준으로 남성은 20%, 여성은 26%까지 실업률이 낮아졌고, 이후 고위직이나 전문직종에도 많이 진출하면서 소득 수준이 많이 향상되어 현재 이스라엘에서는 중산층 지위까지 올라왔다고 한다.13. 기타
14. 같이 보기
[1] 이탈리아계 유대인 공동체도 있는데 평소에 언급을 생략할 정도로 인구가 매우 적다. 즉 에티오피아 주재 이스라엘 대사관은 3개의 각기 다른 유대인 공동체들에 관한 공관업무를 수행하는 것이다.[2] 러시아계 유대인, 이라크계 유대인, 모로코계 유대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들의 재정착을 뒷받침하는 맞춤형 귀순이민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3] 실제로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들의 탈출에 깊이 관여한 이스라엘 외교관들의 회고록과 이스라엘 본토에서 출세한 흑인 유대인 지식인들의 자서전에는 구약성서의 글귀에 비유한 낱말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으며, 1990년대 이전의 이스라엘 정계도 구약성서의 글귀에 비유한 낱말들을 정책 선전 수단으로 자주 활용했다.[4] 아셰르 나임(1929~2016; 주에티오피아 이스라엘 대사 역임)의 회고록(잃어버린 부족 구하기)에 따르면, 그 전의 탈출 작전에서 이스라엘 외교관들이 깜빡 잊고 데려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의 대표가 아디스아바바까지 상경하여 대사관에 호소하였고, 이에 새로운 탈출작전을 전개한 것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