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4:28:01

에리히 폰 팔켄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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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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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서가 있는 경우만 기재
※ 독일 제국군의 상급대장과 대장, 중장, 소장은 각각 미군의 대장, 중장, 소장, 준장에 상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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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 독일 제국군 5대 참모총장
에리히 폰 팔켄하인
Erich von Falkenhayn
파일:Erich_Von_Falkenhayn.jpg
이름 Erich Georg Sebastian Anton von Falkenhayn
에리히 게오르크 제바스티안 안톤 폰 팔켄하인[1]
출생 1861년 9월 11일
프로이센 왕국
사망 1922년 4월 8일(향년 60세)
바이마르 공화국 포츠담
복무 파일:독일 제국 전쟁기.svg 독일 제국군(1880년 ~ 1918년)
국가방위군(1918년~1919년)
최종계급 파일:General_(Wurttenburg).gif 독일 제국군 보병대장
(General der Infanterie)
파일:오트만 제국 원수 견장.png 오스만 제국군 원수
주요참전 의화단의 난
제1차 세계 대전
마른 전투
바다로의 경주
베르됭 전투
서훈 백엽 푸르 르 메리트
1급 붉은 독수리 훈장
프로이센 왕관 훈장 2급
검은 독수리 훈장
철십자 훈장 1,2급
가족 아버지: 페도어 폰 팔켄하인
형: 오이겐 폰 팔켄하인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독일 제국의 전쟁장관2.3. 독일 제국의 참모총장2.4. 참모총장 해임 이후
3. 전후4. 가족5. 평가

[clearfix]

1. 개요

에리히 폰 팔켄하인은 제1차 세계 대전기의 독일 제국군의 보병대장이자 오스만 제국의 원수이다. 그의 형 오이겐 폰 팔켄하인도 1차 세계 대전기의 장군이었으며, 최종계급은 기병대장이었다.[2]

1914년부터 1916년까지 독일군의 참모총장을 역임했지만 1916년 8월 29일에 해임된다.

해임 이후에도 루마니아에서 활약했으나 이스라엘을 방어해내지 못했다. 그 이후 벨라루스에서 별다른 활약 없이 있다가 종전을 맞았다.

2. 생애

2.1. 초기

팔켄하인은 1861년에 태어나 18세의 나이로 1880년 소위로 입대하였다. 베를린 사관학교에서 3년간 공부한 뒤 중위가 되었다. 이후 1893년 대위가 되었다. 이후 1894년 팔켄하인은 제9군단의 참모장교가 되었다. 당시 9군단의 지휘관은 알프레트 폰 발더제였다.

1896년 6월 25일, 군사 고문으로 청나라에 갔다. 프로이센식 군사학교를 세웠지만, 중국 정부에서 지원을 받지는 못하였다. 1900년 독일로 귀국하였으며 그해 2월 24일, 베를린의 수석 장군참모가 되었다. 이후 제14군단의 참모총장이 되었다. 하지만 곧 의화단의 난의 진압을 위해 다시 청나라로 파견되었다. 그때 팔켄하인은 알프레트의 참모장이었다.

아시아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1903년 다시 독일로 돌아왔다. 1903년 10월 18일 브라운슈바이크 제92보병연대의 연대장으로 임명되었고, 1905년 9월 15일 중령이 되었다. 이후 장군참모를 밟으며, 1912년 4월 22일, 팔켄하인은 소장이 되었다.

2.2. 독일 제국의 전쟁장관

놀랍게도 요시아스 폰 헤링겐의 후임으로 1913년 팔켄하인은 독일 제국의 전쟁장관[3]으로 임명되었다.

파일:erich-von-falkenhayn-1913-C45HC5.jpg
1913년의 팔켄하인. 피켈하우베를 착용하고 있다.
파일:suv-00292385.jpg
1913년 실레시아에서의 행진
왼쪽부터 콘스탄티노스 1세, 프리드리히 폰 숄, 에리히 폰 팔켄하인, 한스 폰 케셀, 에곤 폰 푸에르스텐베르크,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한스 폰 플레센

전쟁장관으로서 그는 유럽에서의 전쟁을 예상한 사람은 아니었다.[4] 독일 제국의 전쟁장관으로 있을 때 팔켄하인은 독일 내의 군수품 공급 시스템을 크게 발전시켰고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았다. 사라예보 사건 이후 팔켄하인은 이를 빌헬름 2세에게 알리며 오스트리아를 지원할 것을 요청했는데 이는 사실상 빌헬름 2세에게 선전포고를 요구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3. 독일 제국의 참모총장

1914년 9월 14일, 국경 전투 이후, 팔켄하인은 독일 제국군의 참모총장이 되었으나, 제1차 마른 전투의 패배가 그의 책임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가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헬무트 폰 몰트케 장군의 권고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른 전투에서의 패배로 몰트케는 해임되었고 빌헬름 2세는 자신이 개인적으로 높게 평가하던 에리히 폰 팔켄하인을 후임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군부는 1914년 겨울에 서부전선을 무너뜨리지 못한 것으로 인해 팔켄하인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군부의 힌덴부르크를 비롯한 反팔켄하인 세력이 빌헬름 2세에게 그를 해임하기 위해서 압박을 가했다. 그것을 막기 위해 한동안 전쟁장관과 참모총장, 참모차장을 동시에 지내다, 측근이었던 아돌프 빌트 폰 호엔보른을 전쟁장관으로 임명하였다. 어쨌든 1915년 1월 20일 팔켄하인은 보병대장 진급을 하면서 푸르 르 메리트를 수훈받았다. 참모총장으로서 그는 독일은 방어적 위치에서 적들을 상대해 이겨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그는 영프 연합군을 바다로의 경주로 포위하려고 하였다. 제1차 이프르 전투까지 영프 연합군은 독일군의 진격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기에 당시 독일 제국의 총리였던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가 협상을 통해 전쟁을 끝내자고 재촉하였지만, 팔켄하인은 듣지 않았다. 그렇다고 평화를 아예 원하지 않은 것은 아니라서, 팔켄하인은 협상국 중에서 한 국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원하였는데, 팔켄하인의 후보는 이전에 독일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던 러시아 제국이었다. 그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가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크나큰 승리를 가져다주었지만, 러시아 제국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팔켄하인은 동부전선보다는 서부전선에 많은 병력을 배치하였고,[5] 이 때문에 동부전선의 병력 보강을 원했던 파울 폰 힌덴부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의견충돌이 있었다. 동부전선에 배치되었던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 외에도 막스 호프만[6]과 같은 고위 장교들도 팔켄하인을 매우 적대하였다.[7] 그외에도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8] 등 수많은 군 관계자들이 그를 싫어하였다. 그의 반대파들은 팔켄하인을 아예 범죄자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총리였던 베트만홀베크도 포함되었다.[9]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카이저는 팔켄하인의 편이었다. 힌덴부르크가 팔켄하인을 사임시키려 하였을 때, 카이저는 격분하였다.

그래도 어느정도 같은편은 있었는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의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는 그의 몇 안되는 우군이었다. 회첸도르프는 어느정도 팔켄하인과 의견이 비슷하였다. 그렇지만, 무엇을 원하냐가 달랐다. 회첸도르프는 러시아 제국과의 전쟁을 원하였지만, 팔켄하인은 프랑스와의 전쟁을 원하였다.

전선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과 합작으로 많은 성공적인 공세들과 전투들을 이끌었다. 고를리체-타르누프 공세는 그가 참모총장으로 부임하던 시기 최고의 작품이었다. 이후 세르비아를 점령하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오스만 제국과의 육지 연결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다른 이유 때문에 실질적으로 병력이 배치되지는 못하였다.

계속된 소모전으로 인해 각 나라의 정치인들은 전쟁을 중단하길 원했으나 그는 계속된 소모전을 펼쳐서 베르됭 전투에서 25만명의 병사를 사망하게 하여 '베르됭의 고기분쇄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힌덴부르크 원수는 팔켄하인을 해임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사임하겠다고 협박하여 빌헬름 2세를 경악시키기도 했다.[10] 격노한 황제는 힌덴부르크를 군사 재판으로 넘기는 것까지 고려했지만, 국민 영웅으로 여겨지던 힌덴부르크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독일군과는 다르게 병력 소모가 별로 없었다.[11] 또한 팔켄하인은 루마니아의 중립을 확신했는데, 1916년 8월 27일 저녁, 팔켄하인은 전화로 아우구스트 폰 크라몬에게 루마니아 왕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트란실바니아로 진공한 것은 그의 해임에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사실, 오헝제국의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과 함께 만일 대비하여 루마니아 왕국의 침공 작전을 계획하여 두기는 하였지만, 이를 실제로 쓰게 될 줄은 알리가 없었다. 이 때문에, 독일 제국군 내각의 사기는 매우 떨어졌다. 육군 내각, 모리츠 폰 린커는 아예 전쟁에서 졌다고까지 하였다. 아무튼, 팔켄하인의 해임 이후 참모총장은 그와 의견 충돌이 많았던 힌덴부르크로 교체되었다. 팔켄하인은 빌헬름 2세에게 힌덴부르크를 선임하는 것은 그를 무력한 군주로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카이저에겐 더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이렇게 독일 제국은 군사정권이 되어버렸다.

팔켄하인은 적이 굉장히 많았던 탓에 제대로 된 정보를 받지 못하였으며 이로 인해 베르됭 전투가 굉장히 많은 병사들을 희생시키고 있었을 때 그것을 알 방법이 없었고, 원래 문제였던 역습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팔켄하인은 베르됭 전투가 굉장히 많은 병사들을 희생시키고 있다는것을 나중에야 알았고 그제서야 베르됭에서 철수를 명령하였다. 어떻게 보면을 팔켄하인은 꽤나 억울하였을 것이다. 심지어 원래 목표는 베르됭이 아니라 벨포르였다고 한다. 베르됭은 차선책이었는데, 본인도 원치 않게 베르됭에 공격을 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무조건 팔켄하인이 베르됭의 고기분쇄기였음을 주장하기보다는 팔켄하인의 베르됭 전투라는 실책의 이유를 찾고 있는 편이다.

2.4. 참모총장 해임 이후

그렇게 팔켄하인은 루마니아 전선의 트란실바니아에 투입되어 제9군을 1916년 9월 6일부터 10개월동안 지휘하였다. 팔켄하인은 지휘관으로서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팔켄하인의 군대는 숫적으로 열세였지만 적극적인 공세와 포병 및 항공전력의 우세를 바탕으로 루마니아군의 트란실바니아 침공을 격퇴했으며, 그해 겨울이 가기 전에 카르파티아 산맥의 방어선을 무너뜨렸다. 뒤이어 팔켄하인은 남쪽의 도브루자에서 올라오는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원수와 협력하여 왈라키아에서 거대한 포위섬멸을 실현하였다. 그는 그의 9군을 브라쇼브(Brașov)에 주둔시키고 동쪽에서의 공세가 없는 척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공세를 계속 미뤄 카를 1세와 갈등을 빚었다. 그는 좋지 않은 도로사정 등을 핑계로 공세의 지연을 정당화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이 경험 많은 장군이라며 큰소리쳤다. [12] 삐걱삐걱하긴 하였지만, 결국 12월 6일 루마니아의 수도 부쿠레슈티를 함락시켰다.

루마니아군의 피해는 포로 15만을 포함해 총 45만 명에 달했지만, 독일군의 피해는 6만에 불과했다.[13] 팔켄하인은 1918년 말까지 루마니아에서 100만톤의 석유와 200만톤의 곡물을 징발할 수 있다고 하였다.
파일:440px-Paracin_meeting.jpg
파라친에서 찍은 사진. 오른쪽부터 에리히 폰 팔켄하인, 보리스 왕태자, 한스 폰 젝트, 게르하르트 타펜, 간추프 대령, 니콜라 제코프, 불명의 장교,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루마니아에서의 승전 이후 그는 오스만 제국의 이을드름(Yıldırım) 군을 지휘하였다. 두개의 야전군을 지휘하게 되었고, 1917년 7월 9일, 팔켄하인은 오스만 제국의 원수가 되었다.
파일:iam-wha-055-0175.jpg
예루살렘에 입성한 팔켄하인.
그러나 예루살렘을 두고 그의 군대는 영국군과 싸우게 되었고, 수적 열세에도 필사적으로 분전하여 영국군에 막대한 소모를 강요했지만[14] 결국 예루살렘은 영국군의 차지가 되었다. 그는 팔레스타인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그는 그의 직책을 오토 리만 폰 잔더스에게 넘겼다. 팔레스타인을 지키지는 못하였지만, 팔레스타인에 있는 유대인들을 쫒아내는 데에는 크나큰 성공을 거두었다. 팔레스타인에서의 실책 이후 그는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의 후임으로 벨라루스의 제10군의 사령관이 되었지만 별다른 활약 없이 종전을 맞았다.

3. 전후

전후 그는 군에서 은퇴했으며 그의 토지에서 회고록을 포함한 책을 쓰다가 1922년 죽었다.

4. 가족

그의 유일한 누이는 페도어 폰 보크의 어머니이며, 그의 두 딸 중 한명은 독일 국방군의 소장이자 반나치 인사였던 헤닝 폰 트레슈코프와 결혼하였다.

5. 평가

팔켄하인은 여러모로 프로이센 왕국군을 대표했다. 그는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가졌지만 철저한 군국주의자였다. 그는 군인으로서 충성스러웠고 시간을 잘 지켰다고 한다. 하지만, 매우 거친 성격의 소유자로 명령적인 말투를 가졌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군사적 능력과는 별개로 독일 제국군 내에서 인망은 썩 좋지 않다는 평을 받았다.

윈스턴 처칠은 팔켄하인을 제1차 세계 대전기의 독일군 장성 중 가장 유능하다고 평가하였다.

베르됭 전투의 책임이 그에게 있다는 주장이 이전까지는 우세하였으나 요즘에는 왜 팔켄하인이 그런 실수를 했는지를 분석하는 추세이다. 팔켄하인의 부하들에 의하면 팔켄하인은 독일 제국군 내에도 굉장히 많은 적을 갖고 있었으며, 베르됭 전투에서의 실상이 그에 귀에 들어가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베르됭 전투가 한창이었을 때도 그는 협상국의 반격만을 고민하였다. 하지만 해임 이후에도 루마니아 전선이나 팔레스타인에서 잘 싸웠던만큼 그의 판단력이 흐려진 것은 또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팔켄하인 동정설이 떠오르고 있는 추세이지만 정확한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군국주의자였지만 적어도 학살자는 아니었는데, 오스만 제국군의 원수로 활동하였을 때,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에 반대하였다고 한다.

논란이 많은 서부전선에서의 행적과는 별개로, 루마니아 전선에서 세운 공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팔켄하인'으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동부전선에서 싸웠다.[3] 육군장관으로 번역되기도 한다.[4] 언젠가는 일어날 줄은 알았지만 그게 1914년에 일어날 줄은 몰랐다고 한다.[5] 슐리펜 계획을 소몰트케보다 더 잘 따랐다.[6] 사실상 타넨베르크 전투의 승리를 만들었던 영관급 장교로 최종계급은 소장이었다.[7] 카이저는 루덴도르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힌덴부르크가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8] 바이에른 왕국군에 대한 차별 때문에 팔켄하인을 싫어하였다.[9] 아이러니하게도 힌덴부르크도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10] 티르피츠 원수도 황제에게 대들 때 사표를 내는 방식을 썼다. 티르피츠는 대전 중에 3번이나 사표를 제출했고, 마지막 사표는 1916년에 수리되었다.[11] 물론 프랑스의 절대적인 소모 규모는 막심했지만, 팔켄하인이 의도했던 규모의 엄청난 피해는 없었다. 사실 프랑스군은 늦어도 베르됭 전투 중반 이후로 벌어진 거의 모든 전투에서 독일군과의 교전비가 거의 1:1을 찍었다.[12] # 해당 책 180-181쪽[13] 하지만 루마니아 전역을 완전히 끝내진 못했다. 루마니아 정부는 항복하지 않고 몰다비아로 퇴각했으며, 러시아와 프랑스의 협조 하에 군대를 재건했다. 1917년 여름과 가을에 벌어진 전투에서 루마니아군은 독일군의 공세를 격퇴하는 놀라운 성과를 낸다.[14] 양측 사상자가 비슷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