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안준생 安俊生 | |
출생 | 1907년 3월 22일 |
대한제국 황해남도 해주군 | |
사망 | 1951년[1][2] 4월 30일 (향년 44세) |
경상남도 부산시 | |
종교 | 가톨릭 (세례명 : 마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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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토 분키치(사진 앞줄 오른쪽)와 안준생(사진 앞줄 왼쪽). |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 영웅인 안중근의 차남. 일본 제국의 지시에 따라 안중근 의거 30주년인 1939년 박문사를 방문하여 이토 히로부미의 유족에게 사죄를 하여 조선인들의 공분을 샀다.
2. 생애
1907년 황해도 해주군(현 황해도 해주시)에서 아버지 안중근과 어머니 안릉 김씨(安陵 金氏) 김아려(金亞麗)[3] 사이의 2남 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4세 때 부친을 잃고 불령선인으로 찍혀 비참한 성장기를 보냈다. 형 안문생(安文生)[4]은 어린 시절 길에서 누군가가 준 과자를 먹고 중독돼 일찍 죽었고, 어머니는 안준생을 이끌고 망명생활을 하며 떠돌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원으로 중국 상하이에 정착했다. 그러나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일본의 수색 때문에 급히 상해를 떠났으며 안준생 일가는 남겨진다. 이후 일본군이 이들 가족을 찾아냈고, 그의 가족들은 일본의 감시하에 살아야만 했다. 안준생은 나이 서른이 돼서도 일본의 탄압 때문에 회사에서 일할 수조차 없었고 구걸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미나미 지로 당시 제7대 조선 총독이 그에게 다가왔다.
미나미 총독은 그를 찾아와 경기도 경성부 서사헌정(현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2가) 박문사에서 위령제가 열리는데, 그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차남 이토 분키치[5]에게 사과하면 삶과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제의를 받는다.
결국 1939년 10월 16일, 박문사에서 사죄와 함께 일제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한 후로는 제 부친께서 어리석은 생각으로 당신의 아버님을 죽게 만들었는데 이에 아들로서 아버지의 오만방자한 만행을 진심으로 사죄한다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는 일제에 의해 널리 선전되었으며, 매일신보, 조선일보, 동아일보에도 대서특필되었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물론 아버지의 훌륭한 업적을 반겼던 조선인들으로부터 천하의 불효 자식, 친일 매국노,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한 더러운 개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에 백범 김구는 해방이 되면 바로 죽여야할 대상이라 말하며 중국 측에 처벌을 요청했으나 중국 측이 이를 면제하게 되었다.[6]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에게 이를 갈던 중국에서도 안준생을 별로 반기지 않았으며, 결국 광복 이후에 중국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1946년 간신히 귀국하여 남한에서 숨어살았다. 그러다가 6.25 전쟁 와중인 1951년에 안경근과 안춘생, 그리고 몇몇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다. 향년 44세.
안준생을 다룬 소설로 前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이태진[7]이 쓴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가 있으며, 인터넷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다.
2.1. 논쟁
사실은 사죄하는 것이 일제에 의해 조작된 퍼포먼스라는 말이 나왔다. 일부 독립운동가도 친일을 옹호하는 글이 있지만, 대부분 독립운동가 본인이 쓴 게 아닌 일제가 독립운동가의 명의를 도용한 것과 비슷한 맥락에서 제기되는 주장이다. (캡쳐본) 요약하자면 안준생은 그럴 의도로 행한 것이 아니지만 일제에 의해 발언 등이 편집, 조작되었다는 내용.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MBC가 취재한 인물들의 주장이라 많은 검토가 필요한 상황이다.독립운동에 투신한 안중근 일가가 안준생과의 연을 끊지 않았던 점을 거론하며 이 사건이 조작된 것이라는 근거가 있다고 주장도 있는데 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사람들의 행적을 따라가 보면 같은 독립운동한다고 서로 사이 좋기만 한 것도 아니었고, 오늘날 반민족행위자라고 분류된 소위 친일파들이 독립운동가와 교류하고 도움을 주고받는 일도 흔했다.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의 가족을 지원해 준 게 일본육군사관학교 동기이자 일본제국 육군 중장 홍사익이었다. 그들의 동기이자 일본 육군 대좌 이응준은 장인 이갑이 독립운동가였고, 이들의 육사 1년 후배이자 독립운동가인 이종혁은 수감을 마치고 산송장이 되었을 때 동기 김석원 육군 대좌에게 다방면으로 도움을 받았다. 자칫하면 서로 총부리 겨누게 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도 이랬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해방후 일제때 금광부자가 된 친일성향의 최창학이 마련해준 경교장에서 지냈고 그의 저작 백범일지를 윤문해준 사람은 그 이광수였다.[8], 친일파로 전향한 최근우 같은 경우는, 사실 독립군의 스파이었기 때문에 친일반민족행위자 사전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여러 증언들을 보면 독립운동가 안중근의 후손으로서는 용서할 수 없고 가슴을 치며 서러워했지만 핍박받는 안준생의 친척으로서는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라는 이해도 든다는 얘기가 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그와 계속 인연을 이어갔을 수 있다.
또한 안준생의 당시 처했던 상황도 고려해봐야 하는 것이, 일제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아직 한반도에서 살고 있으면 앞서 말했듯이 취직에 제한을 주었으며 계속 감시를 했다.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던 시절에는 그의 가족들을 데리고 보호했으나 윤봉길의 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일본의 수색 때문에 급히 상하이를 떠났으며 안준생 일가는 남겨진다. 이후 일본군이 이들 가족을 찾아냈고, 그의 가족들은 일본의 감시하에 살아야만 했다. 안준생이 서른이 돼서도 일본의 탄압 때문에 취직을 못했으며 구걸로 연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가 반강제적으로 그를 회유했기에 안준생에 대한 평가도 다각도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3. 가족 관계
- 할머니 : 조마리아
- 아버지 : 안중근
- 어머니 : 안릉 김씨(安陵 金氏) 김아려(金亞麗)
- 형 : 안문생
- 누나 : 안현생
- 부인 : 동래 정씨 정옥녀(鄭玉女, 1908 ~ 1991. 8. 13)
- 아들 : 안웅호(安雄浩, Anthony Ahn, 1933 ~ 2013. 1. 31)
- 며느리 : 청즈잉(程志英,중국계 미국인)
- 손자 : 안도영(토니안 주니어)
- 딸 : 안선호(安善浩), 안연호(安蓮浩)
- 작은아버지 : 안정근, 안공근
- 고모 : 안성녀
- 4촌 형제 : 안낙생, 안원생
- 5촌 당숙 : 안명근, 안홍근, 안경근
- 6촌 형제 : 안봉생, 안춘생
- 처가 친척 : 정진석
안준생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외아들 안웅호는 안준생 사후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교 졸업 후 의사가 되었다. 2013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조부 안중근의 독립운동을 추모하며 살았다.[9] 차녀 안연호는 어린 나이에 아예 미국인 가정에 입양되었다.
안준생의 부인 정옥녀는 정진석 추기경의 5촌 당고모이다. 그래서 외아들 안웅호와 정진석 추기경은 어릴 때부터 서로 교류하며 지냈다고 하는데, 외가 쪽으로 6촌 지간인데다 정진석의 종조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도 했다고 한다.[10]
안준생의 외아들 안웅호의 부인은 중국 광둥(廣東) 출신 미국 하와이 이민자의 후손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어났다. 안 의사의 손자인 안웅호씨를 미국에서 만나 결혼해 슬하에 안보영과 두딸을 뒀다. 2013년 10월 30일에 아들 보영과 함께 한국을 방문하였다.
4. 대중매체에서
- 2022년 영화 영웅에서는 아역배우 임율이 연기했다.
5. 같이 보기
[1] #[2] 1991년 8월 14일 조선일보 기사 등에는 1950년에 사망한 것으로 오기되어 있다.[3] 김홍섭(金鴻燮)의 딸이다.[4] 혹은 안분도(安芬道)로도 알려졌는데, 분도는 세례명인 베네딕토를 한자로 음차한 것이다.[5] 소설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에서는 이토 히로쿠니(博邦)에게 사과를 했다고 잘못 알렸다. 그러나 이토 히로쿠니는 안준생이 사과하기 이전인 1931년에 사망했다. 당시의 기사에서 안준생이 이토의 서자였던 분키치(文吉)에게 사죄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사과를 받은 사람은 이토 분키치가 맞다.[6] 당연하지만 안경근(안준생의 당숙)이 눈물로 호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전 주석에는 안경근과 김구가 연을 끊었다고 했지만 이후에도 안경근이 김구와 가까이 지낸 행적들로 보아 사실무근인 듯하다.[7]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석좌교수.[8] 미래에 글로써 배우는 사람들은 이 부분을 무미건조하게 이분법적으로 바라보겠지만, 실제 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바라는 이상, 신념과는 다르게 당장 살을 부딪히며 만나는 지인, 가족이라는 관계 역시 고려해야하는 복잡한 상황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친일과 변절자들을 선 그으며 지내기도 했지만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모든 독립운동가가 똑같은 사상을 가진것이 아니고 모든 친일파가 똑같은 생각을 가진 게 아니듯 사람을 대하는 시선, 방법은 모두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어떤 이는 능력을 높게 사서 친일파임에도 긍정할 수 있고, 어떤 이는 능력과 관계 없이 변절했다는 것에 중점을 둘 수 있다.[9] 2004년 3월 26일 미주한국일보 기사[10] 서울대교구 보도 자료[11] 사실상 한국에서는 이 사자성어의 대표격인 인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