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쟁송제도 | |||
신문고(申聞鼓) | 상언(上言) 격쟁(擊錚) | 민사소송 사송(詞訟) | 형사소송 옥송(獄訟) |
1. 개요
상언(上言)과 격쟁(擊錚)은 조선시대 일반 백성들이 '합법적'으로 국왕에게 직접 민원을 제기하는 제도를 말한다.2. 특징
- '상언'은 백성이 임금에게 글월을 올리는 것으로, 규정에 의하면 한문으로 쓰여진 문서의 형태로 당사자가 직접 작성하고 직접 바치고 정해진 기한 내에 직접 나와 본인이 상언했는가의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 이처럼 상언은 한문으로 작성해야 했으므로 문자에 익숙하지 못한 일반 백성들에게는 작성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상언은 문자에 익숙한 관원, 생원, 진사, 유생, 양반부인, 잡직관인 등의 양반과 중인이 주로 하였다. 상언은 두 차례로 한정하였으며, 승정원에서 내용에 따라 분류한 후 각방 승지에게 넘기면 이들이 검토한 후 자신의 의견을 첨부하여 국왕에게 올렸다.
- '격쟁'은 일반 백성이 궁에 들어가거나, 임금의 외부행차 시 징이나 꽹과리를 쳐 직접적으로 왕에게 자신의 사연을 고하는 것이다. 글을 올려 자신의 민원을 제기하는 것을 상언(上言)이라 하였고, 행차시에 해당 상언을 수리하는 관리가 길가에서 민원을 걷어 이후 왕에게 올렸으며, 글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은 꽹과 징을 올려 자신의 민원을 제기하였고 대기하고 있던 관리가 이를 받아 적었는데 이를 격쟁이라 했다. 오늘날로 치면 국민청원과 비슷하다.. 다만, 격쟁을 하려면 일단 관아에 고한 뒤에, 자신이 죄인임을 말하고 '형식적으로' 곤장 몇 대는 맞아야 하는 차이점이 있다[1].
본디 신문고라는 제도가 있었으나 일반 백성들과의 거리감도 있었으며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고, 영조때 되살아나기도 하였지만 형식적인 의미로만 남았다.[2] 반면에 격쟁과 상언제도는 그러한 백성과 왕과의 거리감을 줄여줄 수 있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격쟁은 성종대부터 기록이 나타나는데 신문고 제도의 복잡성에 학을 뗀 백성들이 신문고 대신에 비제도적인 방식인 격쟁을 이용한 것으로 수백년에 걸쳐 오랜기간 동안 격쟁이 이루어졌지만 입법화되지 않아, 빈번히 이루어지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영조가 속대전에 격쟁을 임금에게 고할수 있는 방법 중 하나로 명시하면서 마침내 제도화되었다. 특히 정조때 이러한 격쟁이 매우 활발했으며, 약 4천 4백여 건의 민원을 상언과 격쟁[3]을 통해 직접 처리하였다. 평균 횟수로 따지면 정조는 한 번 행차시 50여 건의 민원을 수리하였다고 한다. 정조는 주로 밖에서 백성들의 민원을 수리하였고, 영조는 홍화문 근처에서 백성들의 의견을 수렴하였다.[4]
일단 민원 수리가 확정되면, 평균 3일 만에 백성들은 그 민원에 대한 답을 들을 수 있었다. 격쟁은 합법이었으며, 격쟁과 상언 제기의 계급 비율을 보면 평민과 천민이 과반 이상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양반도 격쟁을 많이 했다는 의미다. 그 예로 추사 김정희가 있다. 그는 아버지의 복귀를 위해 나름 명성을 떨치던 중임에도 직접 격쟁을 하기도 했다.
이후 격쟁이 난잡해지고 사사로운 개인의 송사까지[5] 궁에 들어와 격쟁을 거는 일이 빈발하자 철종때는 왕의 행차 시에만 격쟁을 수리하도록 규정을 변경했다.[6]
여담으로, 이런 것과 관련된 인식이나 제도는 전근대가 지난 현대에도 유지 중인데 대표적으로 기관장에게 바란다(또는 열린 기관장실)식의 민원 게시판과 악성 진상 민원인들이 기분이 좀만 잡치면 하는 기관장 나와 드립. 현재는 행정도 법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악성 진상들이 원하는대로 하는 건 절대 불가한데도 저런 식의 사고를 가진 민원인이 지천에 널렸으며, 좀 다른 얘기지만 지방관(지자체장)을 왕 또는 왕의 대리인이라 여겨 이 사람 잘못임에도 그 잘못을 아전(지방직 하급 공직자들)한테 덮어씌워 아전을 죽이거나 해코지하는[7] 문화나 인식이 절찬리에 퍼져있다.
3. 종류
3.1. 간은(干恩)
각종 은전(恩典)을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날로 따지면 급부행정처분의 신청 정도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전체 소원(訴願)의 40%이상을 차지하고 격쟁에 비해 상언이 압도적으로 많으며, 양반 중에서도 유학(幼學)이 주도하였다.이하의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 후손 또는 후학이 조상이나 선현의 학행과 공덕을 추앙하기 위해 왕이 시호를 내려주는 증시(贈諡), 종 묘안의 위패를 영녕전으로 모시는 부조(不伯), 공신의 신주를 죵묘에 모시거나 학덕 있는 사람의 신주를 문묘나 서원에 모시는 배향(配享), 임금이 사당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을 내리는 사액(賜額), 비석이나 사당을 세워달라는 건비건사(建碑建祀) 등을 요구하는 경우.
- 자손이 그 선조에게 당상관 품계로 올려달라는 가자(加資), 부친의 봉작을 이어받는 승습(承襲), 관원으로 채용하거나 훈공을 장부에 기록하는 녹용(錄用), 사후에 벼슬을 주거나 높여주는 증직(贈職)을 요구하는 경우.
- 효(孝), 충(忠), 열(烈) 등 삼강오륜의 덕목을 기려 은전을 베풀어 달라는 경우. 여기에는 호(戶)에 부과되는 부역을 면제해 주는 급복(給復),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들이 살던 고장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정려(旌閭), 상을 주며 장려하는 포상(褒賞)과 포장(褒奬) 등이 있었다.
이러한 간은은 크게 자손이 부모와 조상의 덕을 드높이기 위한 것과 한 고을에서 동향인을 기리는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18세기에 이처럼 선조를 현양 하려는 분위기가 강화된 배경은 사회변동으로 인해 사족들이 향촌사회에서 지배력이 현저히 약화되자 자신들의 지배력을 혈연적 기반 위에서 구축하고자 친족 결속을 강화하는 노력으로 문중계(門中契),족계(族契), 학계(學契) 등이 성행하고 문중서원, 사당, 가묘 등을 마구 설치한 것과 연관이 있다. 그리고 동향인을 효 • 충 • 열등의 윤리로 포장하려는 상언 격쟁은 이를 통해서 마을 공동체의 지위를 선양하고 각종 잡역을 면제 받으려는 사회경제적 목적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3.2. 민은(民隱)
이는 사회 경제적인 비리와 침탈을 호소한 내용으로, 소원 전체의 20%이상을 차지하며 주로 격쟁을 통해 호소하였으며 평민이 거의 절반을 차지하였고 그 중에서도 양인이 가장 많았다. 또한 민은을 호소할 때 여럿이 함께 하여 집단성을 띤 등소(等訴)형식의 상언 격쟁과 외람된 내용으로 저항적 성격을 엿볼 수 있는 모람(冒濫)된 상언 격쟁의 형태가 많았다.구체적인 내용은 부세수탈, 토지침탈, 상공업이익의 침탈, 노비추쇄(奴婢推刷), 징채남징(徵債濫徵), 비리횡침(非理橫侵), 토호무단(土豪武斷), 읍폐(邑弊)등이 있다.
이하에서 각 유형별로 자세히 알아본다.
3.2.1. 토지침탈
토지침탈에 관한 상언 격쟁은 민은 전체의 약 17%를 차지하여 부세수탈 다음으로 많다. 그 이유는 18세기에 이르러 중앙권세가, 지방수령, 토호, 궁방[8], 각 아문[9] 등에 의한 토지 집적이 심화되면서 소농민의 몰락이 가속화되어 이들이 토지로부터 분리되어 유랑민으로 떠돌거나 도적집단으로 전락하여 약탈 행위를 하는 등 사회적 불안의 요인이 되었고, 토지 소유권을 둘러싼 계층간의 대립이 격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토지침탈에 관한 상언 격쟁의 내용은 주로 소유권 추심(推尋:찾아내어 가져오는 것)을 둘러싼 쟁송, 토호나 궁방의 민전침탈(民田侵奪), 궁방이나 아문의 지대남징(地貸濫徵) 등이었다.
먼저, 소유권 추심을 둘러싼 쟁송에는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침탈되거나 몰수된 전토의 추심과 전답문권의 위조를 통한 투매(偸賣) 도매(盜賣)문제, 토지매매 관행을 둘러싼 소송의 제기 등이 있었다.
그 다음으로 토호나 궁방에 의한 민전침탈에서 특히 기경전[10]에 대한 궁방과 아문의 침탈이 빈번하였다. 궁방이 백성들이 개간한 땅을 권력을 매개로 빼앗는 과정에서 궁방의 명목적 소유권과 개간자인 백성의 실질적 소유권이 중첩되면서 이중적 소유구조의 형성이라는 문제점이 야기되었고, 궁방전의 확대는 국가적으로도 수세지의 감소 라는 문제점을 야기하였다.
한편 토호들은 향촌에서 고리대를 통해 농민을 괴롭히고 고리대는 결국 농촌사회의 피폐와 민전의 강제수탈로 이어졌다. 끝으로 궁방이나 아문에 의한 지대남징의 호소는 소유주가 궁방인 유토면세(有土免稅)와 소유주가 일반 농민인 무토면세(無土免稅) 모두에서 있었는데 특히 무토면세에 집중되었다.
수세액의 차이를 무시하고 무토면세에서도 유토면세와 같이 1결당 조(租) 200두를 거두어들였고, 무토면세의 궁방 수세권은 10년으로 정해져 이 기한이 지나면 수세권이 호조로 이관됨에도 불구하고 궁방에서 계속 수세함으로 인해 농민들은 이중 수세라는 고통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다.
3.2.2. 부세수탈
부세와 관련되는 민은은 전정, 군정, 환곡 등의 삼정(三政)과 대동공물, 잡역, 천역(세)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부세는 민생과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민은 중에서도 부세문제가 전체의 23%정도를 차지하여 가장 많았고 그 중에서도 삼정과 관련된 것이 부세 전체의 60% 가까이 된다.
18, 19세기 조선왕조에서 재정의 주종을 이루었던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정(還政) 세 가지 수취 행정을 삼정이라 하고 그 경영의 파탄상을 삼정의 문란이라 한다.
이로 인해 가장 피해를 본 계층은 양민 중에도 가난한 소농민이었고 삼정 가운데에서도 환정의 폐해가 가장 극심하여 결국 19세기 초 중엽의 민란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3.2.3. 상공업이익의 침해(자본시장 내 부당경쟁방지)
상공업이익의 침해에 관한 민은은 부세침탈에 관한 민은 다음으로 많았다.18세기 후반 이후 조선 시회에는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도시발달을 배경으로 상공업 분야에서 막대한 이권이 발생하고 이를 둘러싼 사회 세력간의 갈등과 대립이 첨예하게 드러나고 있었다.
이에 관한 상언 격쟁은 거의 서울에서 올렸으며, 특히 신흥 상공업 중심지로서 한강 연안을 따라 인구가 집중된 마포, 서강, 용산 등의 서울 서부지역이 가장 많이 하였다. 그 내용은 주로 금난전(禁亂廛), 공인권(貢人權), 운송권(運送權) 등을 들 수 있다.
그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한 것은 금난전권을 둘러 싼 대립으로, 오늘날로 치면은 행정법상 제3자효적 취소소송 중 경원자관계 또는 경업자관계 소송을 생각하면 된다.
이외에도 원료구입 및 제품 판매를 둘러싼 상인과 수공업자간의 대립이 있고, 또 하나는 취급품목 및 상권확보를 둘러싼 상인 상호간의 대립을 다루는 내용이 있다.
상인 상호간의 대립은 다시 시전상인 간의 대립, 시전상인과 사상인과의 대립, 사상인 상호간의 대립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중에서 시전상인과 사상인과의 대립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였는데, 그 이유는 사상도고의 출현과 이들이 특히 서울의 외곽상권을 장악하면서 시전상인의 해체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었다.
공인권에 있어서는 공인들의 몰락을 지적하면서 그 해결책을 제시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18세기 들어와 공물에 대한 국가의 용도가 많아짐에 따라 원공 외에 바치는 물품이 증대되었으나 호조에서 이에 대한 대가 지급이 원활하지 않음으로 인한 문제점이 컸었다. 이에 따라 공인들은 공가(貢價)의 변통 및 공가를 더 지급할 것, 축소된 원공 복구, 경작공(京作貢)을 설치하여 각지방에서 공납하는 물품을 서울의 해당 공계(貢契)를 통해 공납하게 할 것과 이를 위해 공계를 다시 설치 할 것 등을 호소하였다.
한편 상공업의 발달로 화물 운송량이 크게 증대돠어 경강 중심의 하역운수업을 둘러싼 세력간의 대립이 형성되었고, 신흥세력이 대두하여 강상(江商)들이 장악해온 운송권에 대한 침탈이 빈발하자, 이에 대한 상언 격쟁의 주를 이루었다.
3.2.4. 노비추쇄
도망친 노비를 찾아내는 노비추쇄(奴婢推刷)에는 두 가지 경우가 있었다.- 노비 주인이 노비신공[11]을 받기 위해 노비대장에 올라 있지 않은 노비를 찾아내는 것.
- 이미 종의 신분을 면하여 양인이 된 속량(贖良) 노비를 다시 천민으로 떨어뜨리는 압량위천(壓良爲賤)을 통한 노비신공의 강제징수.
노비추쇄가 성행한 이유는 노비로 부리기 보다는 노비신공을 받기 위함에 있었다. 즉 신분적 요소보다도 채무적 요소에 의해 자행됐던 것이다.
이 중에서 압량위천에 대해 주로 상언 격쟁이 이루어졌다. 압량위천은 주로 토호에 의해 자행되었으며 이들은 속량된 양인에 대해 가혹한 형벌을 가하거나 고리대를 빙자하거나 문권위조 등을 하였다. 이는 군현, 내수사, 향교, 성균관 등에 의해서도 자행 되었다.
노비추쇄에 대한 정부대책으로 영조는 노비신공을 줄여 나가는 정책을 추진하여 18세기 중엽에 역노비(驛奴妃)와 시노비[12]의 신공은 거의 폐지돠었고, '속대전(續大典)'에 은루노비 추쇄시 3년 이상 신공을 받을 수 없음과 속량노비에 대한 압량위천의 엄금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정조는 정조2년(1778)에 내수사의 노비추쇄관을 혁파하였다.
3.2.5. 징체남징
상업활동 관련 부채와 지방세력자의 침탈, 역(役)운영을 둘러싼 과정에서 발생한 부채가 불공정계약에 의해 발생하였고 이러한 행사가 현저히 위법, 부당한 경우 고발하였다. 이를 징채남징이라고 하는데, 특히 사채에서 고리대의 형태로 지방세력가에 의해 자행되었다. 이들은 무단적인 형벌과 살인 등의 행위로 빚진 돈을 마구 거두어들이거나 집과 논밭을 빼앗기도 하였다. 또한 봄에 돈으로 빌려주고 가을에 곡식으로 받는 전분곡렴(錢分穀斂)도 징채남징의 한 형태였다.
이에 대한 대책으로 '속대전'에 징채남징에 관한 규정을 개정하여 공사채의 이자를 상한선을 어기거나 곡식으로 나누어주고 돈으로 받는 곡분전렴(穀分錢斂)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였다. 징채범위를 한정하여 공사채로 인해 친부자 이외 형제 일족 지인을 일체 침해하지 못하도록 하고 사채를 빌미로 타인의 전토(田土)를 탈취하거나 자녀를 강제로 노비삼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에도 불구하고 징채남징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3.2.6. 관원의 비위사실 고발
수령이나 관속들의 법을 어긴 비리와 위법행위는, 이들이 제멋대로 지나친 형벌을 가하는 남형(濫刑)과 표리관계를 이루고 있다.
수령의 남형과 뇌물수수는 유리(由吏), 이방(吏房), 좌수(座首) 등 관속과 구조적 결탁을 통해 저질러졌다. 이러한 관리의 비리에 대해 백성들은 상언 격쟁을 통한 고발도 했지만 이임하는 수령의 짐을 탈취하거나 방화하는 등 보복을 가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남형이란 수령이 집행할 수 있는 형의 상한선인 태형(笞刑) 50을 넘는 경우를 말한다. 신장[13]과 곤장(棍杖)은 군문(軍門)이나 도적을 다스릴 때 사용할 수 있는 형벌로 수령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이를 지키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한 대책으로 영조는 명화적(明火賊) 강도 절도인 등을 다스리기 위한 난장[14], 주뢰[15]와 같은 혹형과 악법을 폐기하였다. 정조는 '흠휼전칙(欽恤典則)'을 작성하여 형구지식(刑具之式)을 제정 반포하고 법식에 어긋나는 형구는 모두 거두어들이고 어사를 파견하여 이를 어기는 지방관은 엄중 처벌할 것을 천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에도 불구하고 수령들의 비리와 불법적인 남형은 줄어들지 않았다.
3.2.7. 지방세력의 불법행위
지방세력가들의 불법행위는 주로 자기 가문 내에서 사사로이 백성들에게 형벌을 가하고 이를 통해 각종 침탈을 자행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향촌에서 일상적으로 행하는 무단행위로 민전징납(民錢徵納), 남의 땅을 억지로 헐값에 사들이는 전토억매(田土抑買), 땅이나 집문서를 형벌로 협박 빼앗는 문기탈취(文記奪取) 등이 있었다. 정부는 이러한 지방세력의 불법적인 행위를 법으로 금지하였으나 효과를 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18.19세기를 거치면서 더욱 기승을 부렸다.3.3. 산송
자세한 것은 산송 문서 참조. 산송은 전체의 13%정도 차지하며 상언의 형태가 더 많았고 가묘를 지어야하는 양반이 압도적으로 많이 호소했으며 역시 유학이 주도하였다.3.4. 신원(伸寃)
이는 옥송 사안이나 고발적 내용을 의미한다.옥사(獄事)와 관련된 것이 신원 전체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옥사에는 살인사건, 억울한 옥살이, 역적 관련 죄, 국고유용과 절도(국곡투절(國穀偸竊))[16], 문서 위조[17], 불근전수(不謹典守)[18], 윤리범죄[19], 능멸[20], 과거장 문란죄[21]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이는 소원 전체의 13%정도 차지하며 격쟁이 더 우세하였다. 양반, 평민 가릴 것 없이 제기되었다.
3.5. 입후(立後)
후사(後嗣)가 없을 때 제사를 받들 자손을 맞아 들이도록 허락해 줄 것을 청원하거나 적자와 서자의 판단, 양자관계를 끝내는 파양(罷養), 지파(支派)의 자손인 지손(支孫)이 종손을 대신하게 되는 탈종(奪宗) 등의 문제를 호소하는 내용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분법적 요소들은 언제나 가족법상 상속 또는 유증, 증여와 결부되는 만큼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한 양반의 상언이 많았고 소원 전체의 10% 정도를 차지하였다.4. 등소 형식의 상언격쟁
여러 사람이 연명(連名)하여 집단적으로 호소하는 것을 등소형식의 상언 격쟁이라 한다.등소 형태의 상언 격쟁은 성명 뒤에 '모모인(某某人) 등' 이라 표기한 것, 상언 격쟁의 내용에서 거등(渠等)이라 표기한 것, 각사(各司)에서 상언 격쟁을 처리하면서 호소인을 장두(狀頭) 또는 두목(頭目)으로 표기하는 것 등 세가지가 있다.
정조대의 상언격쟁 중 등소형식은 4,427건 중 737건으로 16.5%를 차지하여 등소형식이 상당히 많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주제가 확인된 등소형식 729건 중 간은(干恩)은 58.3%, 민은(民隱)은 35.8%로 간은이 민은보다 높다.
그러나 민은 전체(920건)로 볼 때는 등소형식은 28.4%이고 간은 전체(1,795)의 등소형식은 23.7%가 된다. 따라서 민은과 관련된 내용에서 등소형식의 상언 격쟁이 상대적으로 가장 많이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729건 가운데 상언은 87.5%, 격쟁은 12.5%로 상언이 격쟁의 8배에 이른다. 등소형식에 있어서는 격쟁보다는 상언을 선호하여 압도적으로 많이 행했음을 알 수 있다.
신분적으로 보았을 때는 신분이 확인된 682건 중 양반이 64.1%, 평민이 24.3%로 양반과 평민이 주도했으며, 직역별로 보았을 때 유학이 57.3%, 양인이 15.8%이므로 주로 유학과 양인이 주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상대적으로 등소형식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민은을 내용별로 알아보면 등소형식인 261건 중 상공업문제, 부세문제, 읍폐가 주를 이루고 있으며 특히 상공업 문제를 둘러싸고 등소가 활발한 이유는 상공업인이 높은 결속력과 집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18세기 후반 일반 백성들은 각종 사회 경제적 침탈에 맞서 높은 응집력을 보이면서 결속력을 다져서 위와 같은 문서를 통한 등소 이외에도 집단적인 행동을 통한 호소도 하였다.
5. 모람(冒濫)[22]된 상언격쟁
'모람'은 사전적으로는 '윗사람에게 버릇없이 덤비다'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상언격쟁의 법률상 보충성 원칙을 무시하고 속대전에서 규정하고 있는 소원절차를 건너뛴 채 직소한 경우를 의미한다. 이하의 경우를 말한다.- 영읍이나 각사에 정소해도 될 미세한 일을 국왕에게 직소함으로써 소원 절차를 무시한 경우
- 소원의 내용이 심의중인 관계로 아직 국왕의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는데도 거듭 상언, 격쟁을 올리는 경우
- 국왕이 이미 판결을 내려 기판력이 이미 발생한 동종 청구, 동일 당사자에 대한 사건을 불복하고 거듭 상언 격쟁을 올리는 경우
- 국왕의 판결이 아직 집행되지 않은 것에 항의하여 다시 시행을 촉구하는 상언, 격쟁을 올리는 경우
- 상언 격쟁의 내용 자체가 법률상 원시적 불능 상태라 단순한 소원 수준을 넘어서는 경우
오늘날이야 각하되고 말 일이지만, 당대에 모람된 상언격쟁은 위법하므로 처벌의 대상이었다. 이하의 사례가 있다.
- 서부 사람 김조이가 양반 정도형과의 가옥매매대금(家屋賣買代金)의 문제로 인해 한성부에 잡혀 있던 남편 이정수를 위해 격쟁하였다. 그러나 정도형이 이미 소송을 제기한 상태였고 아직 판결이 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격쟁하였다고 하여 외월지죄[23]가 적용되어 처벌을 받았다.
- 경기도 양근 사람 이광홍은 자신이 인제에서 매입한 나무 600여 주를 총융청(摠戎廳)의 장교(將校) 변광택과 서리(胥吏) 신세철이 빼앗자 법사[24]에 여러 차례 소를 제기하여 승소하였는데 아직 미지급된 부분이 존재한다며 격쟁을 벌였고 정식적인 사송제도를 따르지 않고 직소를 하였는 바, 조정에서는 남소의 죄를 물어 이광홍의 처벌과 관련하여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이광홍의 나이가 당시 80이 넘었다 하여 죄를 묻지 않기로 하였다.[25]
6. 같이 보기
- 청와대 국민청원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 - 상언.격쟁 연구(한상권, 일조각, 1996)
[1] 공무가 아닌 사유로 입궐, 임금의 행차를 방해하였다는 형식적 이유 때문이다. 형식적으로 때리는 것이니 그렇게까지 세게 때리진 않았을 것이다.[2] 이게 무슨 뜻이냐면.. 분명 신문고를 울려서 억울한 사정을 설명을 하면 그 억울함을 풀어주겠다 해 놓고 정작 신문고는 궁궐 안에 설치를 해 놨다. 그런데.. 왕족들과 궁인, 궁녀, (왕의 소집을 받은)대소신료들을 제외하면 일반 평민은 궁궐에 들어갈 수 없었다.[3] 정조대에 올린 상언(上言) 격쟁(擊錚)은 총 4427건으로 이중에서 상언은 3,092건이고 격쟁은 1,335건으로 상언이 격쟁에 비해 2배 이상 많았다. - 조선후기 사회와 소원제도-상언.격쟁 연구- (한상권,일조각,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4] 50년 정도를 재위한 영조보다 20년 정도 재위한 정조의 상언, 격쟁의 숫자가 갑절 가까이 많았다고 한다.[5] 오늘날로 치면 이혼이나 재산권, 경영권, 상속같이 민사소송으로 처리해야 할 일을 대통령에게 청원한 셈이었다.[6] 그래도 동시대(에도 시대)의 일본에 비하면 매우 관대한 제도다. 격쟁을 하려면 내용에 관계없이 일단 곤장은 맞아야되고, 무고로 밝혀지면 곤장 100대에 유배까지 갈수있었지만 그래도 들어줄건 들어주었던데 반해 일본은 쇼군에게 직접 민원을 청하는 건 제도적으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에도 막부 초기, 제2대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행차시에 평민이 읍소하며 길을 막았을 때 수인의 무사가 칼을 뽑았으나 제지하고 감히 베지 않았음을 미담처럼 얘기하는 일화가 있을 뿐이다.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가 메야스바코(目安箱)를 만들어 평민들의 의견을 수집한 적은 있었다.[7] 대표 사례가 담당 주무관한텐 이 XX, 저 XX 육두문자 날리는 인간이 과장급 이상을 만나면 순해지는 걸 예로 들 수 있다.[8] 宮房: 궁가(宮家), 대군 왕자군 공주 옹주의 집[9] 衙門:관청[10] 起耕田,기간전:개간하여 만든 논밭[11] 奴婢身貢:노비가 신역(身役)대신 바치는 공물[12] 寺奴婢:궁중사무를 맡아보는 관아에 소속되어 있는 관노비[13] 訊杖:고문에 사용하는 형장으로 볼기 넙적다리를 침[14] 亂杖:가리지않고 닥치는 대로 마구 치는 매[15] 周牢:주리,죄인을 심문할 때 두 발목을 묶고 다리사이에 두 개의 주릿대를 끼워 엇비슷이 비트는 형벌[16] 고직(庫直), 창색(倉色), 색리(色吏), 궁가(弓家), 감관(監官), 별장(別將), 역리(驛吏) 등이 전세 대동(大同) 환곡(還穀) 결전(結錢) 곡식이나 군포(軍布)를 사사로이 써버리거나 훔치는 경우[17] 문과 회시에 급제한 사람에게 주는 홍패(紅牌)의 위조가 가장 많았고, 도장 위조로 전답을 몰래 파는 행위도 있었으며, 옥새와 옥보를 위조하여 공명첩(空名帖)을 발매하는 행위[18] 색리, 나장(羅將), 수세감관(收稅監官), 이방(吏房), 좌수(座首), 별감(別監), 능속(陵屬) 등 하급관리들이 직무수행을 제대로 하지 못해 직무유기의 죄를 저지르는 경우[19] 강상의 윤리와 관련된 호소로 과녀겁탈, 간통, 음란한 행위 등이 많은 양을 차지하고 양반과 평민, 노비와 주인간의 대립 갈등을 호소하는 경우[20] 읍민이나 이속 하인 등이 고을 수령을 업신여긴 경우 등[21] 활쏘기 시험을 대신하는 차사(借射), 대사(代謝), 제술시험을 대신하는 차술(借述), 남의 성명으로 응시하는 환명(換名), 월장(越牆), 모입(冒入:난입), 작란(作亂) 등[22] 외월(猥越), 외람(猥濫), 무엄(無嚴), 외설(猥屑),설월(屑越)이라고도 한다.[23] 猥越之罪: 외람되게 절차를 뛰어 넘은 죄[24] 法司: 형조와 한성부를 아울러 이르던 말[25] 형정도첩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