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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 및 건국
백양 왕조는 정확히 말하자면 단일 정체가 아니라 여러 유목부족들이 모여 만들어진 부족 연맹체인데, 그 가운데서 중심을 이루던 부족인 바얀두르족은 본래 중앙아시아에서 키메크-킵차크 연맹[1]을 구성했던 7개의 튀르크계 부족 중 하나였으나, 연맹이 붕괴된 이후에는 오구즈 튀르크에 합류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유목생활을 계속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연대기에 따르면 바얀두르족을 위시로 한 투르코만인들은 이미 14세기 초부터 폰토스 산맥 이남의 바이부르트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었다고 하는데,[2] 이들이 언제 소아시아 지역에 유입되었는지는 아직까지도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지만 학자들의 추측에 따르면 아마도 11~12세기 무렵 셀주크 제국이 팽창할 무렵에 다른 투르코만 부족들과 함께 중앙아시아 방면에서 이주해 온 것으로 보인다.
룸 술탄국의 붕괴, 그리고 동로마 제국의 쇠퇴 및 분열과 함께 몽골의 침공까지 겹치면서 당시의 소아시아 정세는 급박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여기서 바얀두르족은 투르 알리 베그의 영도 아래 트라페준타 제국으로 쳐들어가 그 수도 트라브존을 약탈하면서 위세를 떨쳤다. 이에 당시 트라페준타 황제였던 알렉시오스 3세는 이들과 관계도 개선하고 자신의 입지도 강화할 겸 자신의 누이였던 마리아와 투르 알리 베그의 아들 파크르 앗 딘을 정략 결혼시켰다.
14세기 중반 일 칸국의 시대가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이 지역의 투르코만 부족들은 여름에는 티그리스 강 상류 아르메니아의 목초지에서 생활하다가, 겨울에는 튀르키예 북동부의 디야르바크르와 시바스 등지로 이동하는 양상을 보였다.
1378년, 당시 바얀두르족의 수장이었던 카라 율루크 오스만의 주도 하에 여러 투르코만 부족들이 결집하여 백양 왕조(아크 코윤루 연맹)을 건국하였다. 이후 오스만은 자신에게 대항하는 주변 세력들을 철저하게 격파하는 동시에, 오스만 베이국 지배 하에 있던 인근의 대도시 에르진잔 공격에 나섰으나, 술레이만 첼레비가 이끄는 오스만군이 재빨리 이를 격퇴하자 철수하였다.
2. 소규모 연맹
14세기 후반, 칭기즈 칸의 먼 후손이자 튀르크-몽골 혈통의 정복군주였던 티무르가 당대의 패자로 부상했다. 이때 백양 왕조는 티무르의 동부 아나톨리아 원정에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며, 앙카라 전투에서 오스만군을 상대로 분전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티무르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1402년, 카라 율루크 오스만에게 디야르바크르 일대를 공식적으로 할양해주었으며 이 덕분에 백양 왕조는 디야르바크르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이후 1405년에 티무르가 명나라 원정을 떠났다가 오트라르에서 병사하자, 카라 율루크 오스만은 남동부 아나톨리아로의 세력 확장을 노리는 한편으로 1407년에 쳐들어온 맘루크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하였다.
그러나 또 다른 투르코만계 유목 부족 연맹체였던 흑양 왕조(카라 코윤루)의 세력이 급격하게 성장하자, 15세기부터 백양 왕조는 그들과 경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당시 흑양 왕조의 수장이었던 카라 유수프는 아제르바이잔 방면에 있던 티무르 제국의 군대를 수 차례 물리치는 한편, 티무르의 3남 미란 샤를 사르드루드 전투에서 패사(敗死)시키면서 페르시아 서부와 이라크 북동부에 걸친 영토를 확보하였다. 이후 그는 1409년과 1410년에 티무르 제국의 봉신국이었던 아르투크 왕조 및 잘라이르 왕조를 각각 침공하여 아나톨리아 동부와 이라크 전역을 합병함으로써 티무르의 서아시아 정복을 무위로 돌렸다.
흑양조의 팽창에 위협을 느낀 카라 율루크 오스만은 카라 유수프를 선제공격하였으나 1412년과 1417년에 그에게 잇달아 패배하였으며, 또한 1418년의 마르딘 침공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갔다. -
3. 침체기
이후로도 백양 왕조는 영토확장의 의지를 계속해서 천명하였으나, 서쪽으로는 아무리 티무르에게 털렸다고 해도 여전히 힘을 가진 오스만 술탄국이 버티고 있었고, 동쪽으로는 티무르가 철수하면서 여러 유목부족들에게 땅을 나눠주어 단위국가들이 난립한 까닭에 쉽지 않았으며, 무엇보다 최대 경쟁자였던 흑양 왕조에 번번히 가로막혀 영토확장에 애로사항을 꽃피웠다.4. 전성기
4.1. 우준 하산
하지만 1467년 백양 왕조의 군주 우준 하산 이븐 알리가 흑양 왕조를 박살내면서 마침내 동쪽으로의 활로가 뚫렸다. 이후 국가 막장 테크로 비실거리던 티무르 제국을 탈탈 털어먹으면서 동쪽으로 나아갔고 현재의 이라크, 페르시아 만 연안지역, 이란 고원을 점령하면서 서아시아의 패자로 급부상하였다. 그리고 1468년 오스만 제국과 너무 인접한 위치에 있던 기존 수도인 디야르바크르를 버리고 아제르바이잔 방면의 타브리즈로 천도하였다.
그 덕분에 수니파[3] 국가였음에도 오스만 제국의 대항마로 지목되면서 유럽쪽 국가와 외교관계를 맺기도 하였다. 동로마 제국의 몰락 이후 오스만의 압박에 시달리던 트라페준타 제국은 황제의 딸을 백양조에 시집보내면서 국가의 안위를 보장받으려 하였고, 베네치아 공화국에서는 아예 공수동맹을 제안하여 대오스만 연합전선을 구축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우준 하산 역시 이에 긍정적으로 답변하여 병력을 몰아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였으나 오히려 오틀루크벨리 전투에서 메흐메트 2세에게 패배하였으며, 베네치아 역시 내외부적인 사정으로 군사활동을 하지 못하면서 결국 이 동맹은 흐지부지됐다. 이후 백양 왕조는 디야르바크르를 비롯한 아나톨리아 동부 지역을 오스만 제국에게 넘겨줬는데 이때문에 사실상 아나톨리아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말년에 우준 하산은 『쿠란』을 튀르크어로 번역하거나 재정부와 행정부의 개혁을 실시하는 등 내치에도 힘을 기울였다. 1470년, 그는 자신의 궁정에서 일하던 서기관 아부 바크르 티흐라니를 시켜 책을 집필하게 했다. 『키타브 이 디야르바크리야』라고 이름붙여진 이 책은 흑양 왕조와 백양 왕조의 역사를 다룬 거의 유일무이한 책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한편으로 우준 하산은 제국 내에서 활동하던 여러 수피즘 종단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려 애썼고 그들에게 기부금을 제공하거나 세금을 감면해주는 등의 특권을 베풀어 도시 지역에서 종교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도록 촉진시켰다.
4.2. 야쿱 베그
우준 하산의 사후 차남인 할릴 미르자가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그해 6월 반란을 일으킨 동생 야쿱 베그에게 코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처형당했다.[4] 1달 뒤인 1478년 7월에 야쿱은 정식으로 백양 왕조의 술탄으로 즉위식을 거행하였다.그의 재위 기간은 대체로 평화로웠다. 야쿱은 백양 왕조에 도전하는 여러 세력들과 내부의 반란을 모두 격파하면서 제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였는데, 이를 두고 15세기 페르시아의 사가였던 파즐라 쿤지 이스파하니는 자신의 저서 『타리크 이 알람 아라이 아미니』에서 야쿱을 '우준 하산의 훌륭하고 위대한 통치자'라고 묘사하기도 하였을 정도였다. 그의 치세에 백양 왕조는 별다른 영토 상실을 겪지 않았으며, 오히려 1468년경에는 조지아 지역을 침공하여 이메레티, 삼츠헤, 카르틀리 등을 잠시 봉신국으로 만들고 그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까지 했다. 야쿱은 또한 문학과 예술에도 관심을 보여 시인 및 학자들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학문이나 과학 등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기도 했다.
그의 치세 말기에는 아제르바이잔 일대에서 수피즘 시아파 종단인 사파비야의 세력이 강력해졌다. 당시 사파비야의 수장이자 야쿱의 사촌이었던 셰이흐 하이다르[5]는 다게스탄과 오세티야 일대의 '이교도'들과 전쟁을 벌이면서 자신의 사병인 키질바시를 강화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다. 사파비야의 성장에 위협을 느낀 야쿱은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맹주였던 시르반샤 왕조와 은밀하게 협약을 맺고, 1488년 타바사란에서 하이다르를 제거하여 사파비야를 일시적으로 와해시켰다. 이후 야쿱은 하이다르의 아들인 알리 미르자와 이스마일마저 죽여 후환을 완전히 없애고자 하였으나, 그의 어머니가 이를 필사적으로 만류하는 바람에 결국 이들을 이란 남부의 파르스 지방으로 유배시키는 데 만족해야 했다.
1490년, 야쿱은 갑작스럽게 중병에 걸렸고 그해 12월 24일경 카라바흐에서 급사하였다. 일설에 따르면 정적들에게 매수된 그의 아내가 야쿱을 독살하였다고 하는데, 학자들은 이 설이 제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 중이다. 어쨌든 야쿱이 사망하면서 백양 왕조에는 더이상 장성한 군주가 남아있지 않게 되었고, 이에 신하들은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야쿱의 8살 난 아들인 바이숭쿠르를 즉위시켰다.
5. 쇠퇴
야쿱의 사후, 그의 아들은 바이숭쿠르가 백양 왕조의 12대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다만 실권은 그를 왕위에 올린 섭정 수피 칼릴 마우실루에게 있었다. 그는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백양 왕조의 지배층을 구성하던 3대 부족(바얀두르, 마우실루, 미란샤히) 중 자신의 출신 부족인 마우실루를 제외한 나머지 두 부족을 고의적으로 정치에서 배제시켰고, 백양 왕조의 일부 왕공들을 반역과 같은 여러 죄목을 뒤집어씌워 유폐하거나 처형시켰다. 또한 수피 칼릴 마우실루는 야쿱 대부터 궁정의 업무를 담당해왔던 유능한 재상 카지 이사 사바지를 1491년에 살해하는 등의 막장 짓을 자행하였다.[6]이는 많은 이들의 반발을 불러왔고, 결국 수피 칼릴 마우실루는 그해 7월 정적 쉴레이만 베그 비잔과의 전투에서 패배한 뒤 사망하였다. 그러나 그다음에 집권한 쉴레이만 역시 수피 칼릴과 똑같이(...) 막장 행보를 보였고 채 1년도 안되어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한 자객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한편 야쿱의 조카이자 바이숭쿠르의 사촌이었던 루스탐 왕자는 백양 왕조의 왕위를 찬탈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493년, 루스탐은 파르스에 유배되어 있던 사파비야의 수장 알리 미르자를 풀어주면서, '자신이 죽으면 왕위를 알리 미르자에게 넘기겠다'라는 조건으로 사파비야의 전폭적인 지원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루스탐은 사파비야의 막강한 군사력에 힘입어 곧장 수도 타브리즈로 진격, 바이숭쿠르를 사로잡아 처형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런 다음에는 알리 미르자의 뒤통수를 쳐 사파비야를 또다시 와해시켜 버려 후환도 완전히 제거해버렸다.
그러나 루스탐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오스만 제국에 망명해있던 우준 하산의 손자 아흐메드 베그가 되돌아와 백양 왕조의 왕위를 주장한 것이다. 1497년, 아흐메드는 오스만 술탄 바예지트 2세의 지원을 받아 루스탐을 축출하고 백양 왕조의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1달 뒤에 루스탐은 카자르 부족의 지원을 받아 다시금 아흐메드에게 도전하였으나, 재차 패배한 뒤 사망하였다.
백양 왕조의 14대 군주 -
아흐메드 사후에 백양 왕조는 이전보다 훨씬 더 격렬한 내분에 휩싸였다. 1498년, 야쿱의 손자 알반드 미르자가 타브리즈에서 술탄을 자칭하면서 그 시작을 알렸고, 뒤이어 그의 형제 중 한명인 무함마드가 이란 남부를 장악하면서 제국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1499년, 무함마드는 아지즈 켄디데 전투에서 알반드를 패배시키고 일시적으로 백양 왕조를 재통일하는데 성공하였으나, 1년 뒤인 1500년 술탄 무라드가 무함마드를 죽이면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디야르바크르 방면으로 후퇴했던 알반드는 술탄 무라드와 화의를 맺어, 자신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그리고 이라크 북동부를 통치하고, 무라드는 이라크 남서부와 페르시아 영토를 통치하기로 합의하였다. 한편 디야르바크르는 알반드의 형제 카심이 지배하였으나, 1504년 아흐메드의 아들인 자이드 알아비딘으로 대체되었다.
6. 멸망
16세기 초, 백양 왕조의 영토는 크게 타브리즈의 알반드, 디야르바크르의 자이드 알아비딘, 그리고 페르시아의 술탄 무라드로 나뉘어져 있었다. 비록 술탄 무라드의 세력이 가장 강대하기는 하였으나 그 역시 페르시아 영토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은 똑같았고 내전은 여전히 끝날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내전이 점점 장기화되면서, 백양 왕조는 대부분의 영토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더이상 주변 세력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많은 지역들이 끊임없는 전쟁과 전염병, 기근, 수탈로 인해 황폐화되었고 군소 세력들이나 지방의 토후들은 백양 왕조의 내분을 기회로 삼아 각지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 할거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알리 미르자가 루스탐에 의해 사망할 무렵, 7살이었던 그의 동생 이스마일은 백양 왕조의 추격대로부터 기적적으로 도망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후 이스마일은 5년 동안 데일람 지방[7]의 카르키야 왕조에서 은신하면서 가르침을 받았고, 12살이 되던 해 가문의 본거지였던 아르다빌로 돌아올 수 있었다. 1499년, 이스마일은 휘하의 우스타줄루, 룸루, 타칼루, 카자르, 아프샤르 등의 투르코만 부족들로 구성된 약 7,000명의 키질바시 군대들을 사파비야의 이름 아래 다시금 소집하였다. 각지에 흩어져있던 키질바시들은 옛 주군의 혈육이었던 그의 명령에 다시금 결집하였다. 이듬해 이스마일은 먼저 부친의 복수를 하기 위해 인근의 시르반샤로 쳐들어가, 카바니 전투[8]에서 시르반샤의 군주 파루크 야사르가 이끌던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여세를 몰아 수도인 바쿠마저 점령하면서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했다.
이 놀라운 승리는 당시 타브리즈에서 통치하고 있던 백양조 왕공 알반드 미르자를 크게 놀라게 했다. 이스마일에게 위협을 느낀 그는 약 30,000명의 대군을 이끌고 이스마일이 있는 아제르바이잔으로 곧장 진격하기 시작했다. 양측은 1501년 샤루르 평원에서 격돌했는데, 이스마일은 자신의 군대가 숫적으로 4배나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지휘 능력으로 백양조 군대를 대파하였다. 패배한 알반드는 타브리즈를 버리고 에르진잔으로 후퇴하였다. 얼마 후 이스마일은 타브리즈에 입성하여 자신을 '전 이란의 황제(Pādshāh-i Irān)'로 칭하니, 그가 바로 사파비 왕조의 개창자인 이스마일 1세이다.
술탄 무라드는 알반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형세를 조용하게 관망하고 있었으나, 이스마일 1세가 '페르시아 영토를 내게 내놓고 항복하지 않으면 곧바로 쳐들어가겠다'며 협박하는 내용의 서신을 보내자 곧장 70,000명의 군세를 이끌고 출정하였다. 1503년 하마단에서 일어난 12,000명의 사파비 군대와 70,000명의 백양조 군대 간의 전투는 완벽한 사파비 제국의 승리로 끝났다. 무라드는 급하게 패주하였고, 백양 왕조의 영토는 메소포타미아 일대로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이 전투로 인해 이스마일 1세는 백양 왕조를 대신하여 페르시아의 대부분을 다스리는 군주로 자리매김하였다. 이후로도 끊임없이 원정길에 오른 이스마일 1세는 1510년까지 아르메니아, 동부 아나톨리아, 메소포타미아, 페르시아 서부를 정복하여 사파비 왕조의 영토를 급격히 확장시켰다.
1514년, 백양조 최후의 보루였던 우르파가 함락되면서 1세기 반 동안 존속되었던 백양조의 역사가 마침내 마무리되었다. 그곳에 있던 술탄 무라드는 사파비 군대에게 붙잡힌 후 처형되었으며, 그 수급은 이스마일 1세에게 보내졌다. 이후 바얀두르족을 포함한 백양조의 대부분 부족들은 사파비 제국의 키질바시에 흡수된 뒤 점차 동화되었으며, 카자르 왕조 건국 시점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
[1] 9세기부터 11세기 초까지 오늘날의 카자흐스탄과 시베리아 남부에 존재했던 유목 연맹체. 위구르 제국의 붕괴 이후 튀르크계 유목집단들이 서진하면서 형성되었으며, 나중에 쿠만을 비롯한 킵차크인들에게 해체당했다.[2] 여기서는 바얀두르족의 수장이 일 칸국의 가잔 칸으로부터 '아미다(오늘날 디야르바크르) 지역의 영주'로 임명되었다고 나와있다.[3] 흑양 왕조를 점령한 이후에는 시아파도 존재했다.[4] 할릴 미르자는 자신이 왕위를 찬탈당할까 두려워하여 자신의 동생들을 차례차례 처형시켰는데, 이에 반발한 야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었다.[5] 셰이흐 하이다르의 어머니가 우준 하산의 딸이었다.[6] 일설에는 카지 이사 사바지가 야쿱에게 여태껏 귀족들이 누려왔던 경제적인 특권을 폐지하라고 조언했는데 이때문에 큰 손실을 입은 수피 칼릴 마우실루가 그에게 원한을 품었다고 한다.[7] 오늘날 이란 북부의 마잔다란주 일대를 가리키는 역사적인 지명. 고대 사산 왕조 이전부터 존재했던 유서깊은 명칭이다.[8]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의 사마키 라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