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06 11:50:00

모하마드 다우드 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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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 아프가니스탄 왕국 총리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대통령

사르다르 모하마드 다우드 칸
سردار محمدداوود خان
Sardar Mohammed Daoud Khan
<colbgcolor=#ce0000>
파일:Mohammed Daoud Khan.jpg
출생 1909년 7월 18일
아프가니스탄 아미르국 카불
사망 1978년 4월 28일 (향년 68세)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카불
국적 파일:아프가니스탄 공화국 국기(1974-1978).svg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부족 파슈툰족
직업 왕족, 정치인
배우자 자미나 베굼 (Zamina Begum)[1]
종교 수니파 이슬람
정당 아프가니스탄 국가 혁명당
경력 칸다하르 주지사 (1935 ~ 1938)
아프가니스탄 왕국 총리 (1953 ~ 1963)
아프가니스탄 공화국 대통령 (1973 ~ 1978)
자녀 4남 4녀[2]
1. 개요2. 생애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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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프가니스탄 왕국총리이자 아프가니스탄 공화국대통령이었던 인물로, 아프가니스탄을 최빈국으로 만든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다.

2. 생애

파일:brezhnev and daoud khan.jpg
1977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와 악수하는 모하마드 다우드 칸[3]

1909년 아프가니스탄 왕가의 모하마드 나디르 샤의 이복형인 모하마드 아지즈 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군주인 모하마드 자히르 샤와는 사촌 관계이다. 프랑스 유학파 출신으로 26살에 칸다하르 지사, 이후 여러 장관직을 거쳐 1953년 아프가니스탄의 총리로 임명되었다.

총리가 된 다우드 칸은 내부적으론 여성의 권리를 향상시키고 남부 지방에서 대규모 관개 사업을 진행하는 등 개혁 정책을 폈으나, 외교적으로는 파키스탄과 충돌하면서 친소 정책을 폈다. 다우드 칸이 총리가 된 당시 아프가니스탄은 신생 파키스탄과 국경선[4] 문제로 이미 상당히 관계가 악화된 상태였는데, 다우드 칸은 파슈툰 민족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파키스탄과 적대했으며, 자연스레 친미 성향의 팔레비 왕조가 있던 파키스탄의 적국인 소련과 가까워졌다. 동시에 내부적으로도 비파슈툰인들을 고위직에서 배제하여 소수 민족들 사이에서 불만이 커져갔다.

1961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 단교하고 파키스탄이 국경을 봉쇄하자 아프가니스탄의 경제사정은 심각하게 악화되었고, 결국 모하마드 자히르 샤는 1963년 다우드 칸에게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다우드 칸은 역으로 일당제 헌법을 모하마드 자히르 샤에게 제안했으나 거부당하자 사임하고, 자히르 샤는 1964년의 제3차 헌법에서 왕족의 내각 등용을 금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1973년 7월 17일, 모하마드 다우드 칸은 사촌이자 처남 모하마드 자히르 샤가 해외에 외교를 위해 나가있는 동안 권력에 욕심을 부리며 무혈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 본인이 왕족이었기에 자기가 군주가 될수도 있었지만, 이미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있던 그는 바라크자이 왕조를 폐지시킨 뒤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선포하고,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대통령이 된 다우드 칸은 국내로는 많은 개혁을 단행했고, 친소에 가까운 비동맹주의 정책을 이어갔다. 그러나 쿠데타 과정에서 힘을 합친 공산주의자들과 그 정당인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을 탄압하고, 급격한 개혁으로 이슬람 보수주의자들을 적으로 돌리면서 몰락과 붕괴를 가속화시켰으며 아프가니스탄을 최빈국으로 만들어 버리는 계기가 되어버린다.

1978년 4월 28일, 공산주의 사상을 추종하는 군부의 쿠데타[5]로 다우드 칸은 대통령궁에서 쿠데타군에 의해 영부인, 자식들과 함께 살해당했다.[6] 그의 죽음은 알려지지 않았고, 건강상의 이유로 사퇴한다고만 공표되었다. 그가 사망하고 아프가니스탄은 다우드 칸 정권이 붕괴된 직후에 수립된 인민민주당 공산 정권 내의 분열, 여기에 이어진 공산 정권과 무자헤딘 사이의 내전으로 혼란에 빠지고, 뒤이어 소련군의 침공으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벌어지면서 아프가니스탄은 그대로 처참한 전쟁터로 전락하고 말았다.

2008년 6월 28일, 암살된지 30년이 지나서 그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영문기사 다음 해 3월 17일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쿠데타 당시 살아남은 자녀 1명이 장례에 참석했다.

3. 평가

다우드 칸은 왕국의 총리 시절에는 여성의 권리 향상과 관개 사업 등 이슬람 전통주의를 부정하며 개혁을 이뤄나갔다. 그러나 자히르 샤가 미국소련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양측의 러브콜을 잘 이용하는 외교를 한 반면 다우드 칸은 소련처럼 일당제를 도입하려 하고 괜스레 파슈툰족 편애로 친미 국가인 파키스탄과 갈등을 빚어 단교를 하는 트롤짓을 저지른다. 이에 파키스탄과 교류가 끓어지면서 경제를 악화시켰다. 이에 사촌이자 국왕인 모하마드 자히르 샤는 이 책임을 물어 그를 해임하고 더이상 왕을 제외한 왕가 혈통들은 국정운영에 관여하지 말 것이라는 헌법을 만들면서 다우드가 생각하던 개혁이 막히자 한계를 느꼈고 자신의 방식대로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 권력을 탐하기 시작, 자히르 샤가 잠시 외교로 인해 나라에서 벗어난 사이 무혈 쿠데타로 대통령이 된 이후 군부를 만족시키기 위해 군 현대화 등 개혁을 이어갔다.

그러나 다우드 칸 총리시절 자히르 샤가 이슬람 보수층도 어느정도 받아들일 수 있는 개혁은 받아들이면서 조율해나가며 점진적으로 개혁을 해나갔기에 자히드 샤랑 함께 평판은 좋았지만 자신이 대통령이 된 이후 자신의 급진 개혁을 어느정도 막아줄 최소한의 방지턱이 없어지자 정통 이슬람을 자극하는 막가파식 개혁과 좌파 탄압으로 아프간 내 공산주의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증오를 샀으며, 파슈툰족을 편애하고 대통령에게 초법적인 권한을 몰아주는 개헌을 진행하는 등 권력에 집착하는 독재자의 전철을 밟으며 추후 일어날 분쟁의 불씨를 키웠다.[7]

다우드 칸이 무혈 쿠데타를 벌인 뒤 공화국 체제로 넘어간 이후 자히르 샤 시절 나름 잘살던 아프가니스탄을 최빈국으로 전락시켰고 다우드 칸의 친소정책에 반발해 무자헤딘에 시달렸고 이후 아프간-소련 전쟁에서 승전한 무자헤딘으로부터 파생된 탈레반에게 점거당해 막장이 되자 아프가니스탄을 지옥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다우드 칸의 시신이 발견된 이후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국장이 치러졌으며, 당시 하미드 카르자이 대통령은 다우드 칸을 "항상 국가의 발전과 번영을 생각하고 있었다."[8]라며 칭송했는데, 다우드 칸이 악독한 독재자로만 기억됐다면 이런 예우는 국민정서상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9]

아프가니스탄의 언론인 누신 아르밥자다(Nushin Arbabzadeh)는 더 가디언에서 다우드 칸을 "동정심이 많지만 내성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구식 정치가"라고 회고하며[10], 다우드 칸이 단순하게 평가될 수 없는 복합적인 인물임을 드러냈다. 결국 개혁가로서 국가를 위해 헌신했지만, 개혁을 명분으로 권력에 집착하기 시작, 독재자로서 본인과 국가를 죽음으로 몰고 간 인물로 역사에 남아버리고 말았다.


[1] 모하마드 자히르 샤의 여동생이었다.[2] 1명을 제외한 전원이 1978년 쿠데타 당시 반란군에 의해 살해당했다.[3] 당해 4월 12일부터 15일까지 다우드 칸이 소련에 국빈 방문하면서 열린 회담 당시 찍힌 사진으로 보인다.[4] 파키스탄이 독립하자 아프가니스탄은 1893년 영국의 국경선 획정으로 파키스탄 영토에 포함된 파슈툰인 다수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5] 아프가니스탄에서도 법정역법으로 사용하는 페르시아력의 2번째 달인 사우르 7일에 일어났기에 사우르 혁명(Saur Revolution)이라고 불린다. 그레고리력을 따라 4월 혁명이라고도 한다.[6] 잠 자고 있던 대통령 내외와 자녀들을 강제로 끌고가서 총살했다고 한다.[7] 반면 자히르 샤는 파슈툰, 타지크, 하자라, 우즈베크 등 여러 다민족들의 갈등을 조정, 통합하려는 정책을 취했다.[8] https://www.nytimes.com/2009/03/18/world/asia/18afghan.html[9] 다우드 칸이 그나마 칭송받는 이유는 아프가니스탄을 공화국으로 만들고, 급진적인 개혁 역시 의도는 좋았기 때문이다. 또한 다우드 칸 이후의 정권들이 워낙 막장이었던 탓에 비교적 재평가 받은 면도 없지 않다.[10] https://www.theguardian.com/commentisfree/2009/mar/21/afghanist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