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빈 올즈 Robin Olds | |
<colbgcolor=#003458><colcolor=#fff> 출생 | 1922년 7월 14일 |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 | |
사망 | 2007년 8월 6일 (향년 84세) |
미국 콜로라도 스팀보트 스프링즈 | |
복무 | 미합중국 육군 항공대 미합중국 공군(1941~1967) |
최종 계급 | 공군 준장[1] |
주요 이력 | 미 공군 에이스 파일럿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베트남 전쟁 |
주요 서훈 | 공군 십자 훈장 공군 수훈 근무 훈장 은성 훈장 공로 훈장 수훈 비행 십자 훈장 항공 훈장 공군십자장 전쟁 십자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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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합중국 공군 제8전투비행단 홈페이지에서 올려놓은 사진이다. | 미국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 시절. |
Robin Olds[2]는 미합중국 공군의 트리플 에이스이자, 미사일 만능주의라는 늪에 빠져 허덕이던 미군에게 도그파이트의 가치를 일깨운 명장. 평생을 현장에 머무르고자 노력한 타고난 투사이기도 하다.
2. 어릴 적
아버지는 미합중국 육군의 초기 항공부대가 꿈틀거릴 적 전략폭격과 항공력의 중요성을 일깨웠던 빌리 미첼 장군의 전속부관으로 활동하며 훗날 육군항공 소장까지 지내는 로버트 올즈(Robert Olds)였다. 어릴 적부터 미 육군 항공대의 주요 장교단과 어울리던 가족 덕에 인맥의 퀄리티가 참으로 엄청난데, 어릴적 옆집 아저씨 중에는 훗날 1대 미 공군참모총장을 지내는 칼 스파츠 소령이 있었고, 미첼 장군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강제 예편당하는 장면을 아버지를 따라 직접 법정에서 목격했다고 한다. 아버지도 자주 복엽기로 로빈을 태우고 비행하며 즐거운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이래저래 어릴 적부터 비행기 조종사의 꿈을 꾸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하지만 그 외에 어린 로빈은 미식축구에도 환장해 있었다. 그것도 그냥 좋아하는게 아니라 올 아메리칸급으로 잘해서 프로리그 스카우터들이 군침을 흘렸을 정도.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따라 군대에 입대하기로 결심, 미국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서 풋볼과 비행기 조종을 병행하기로 결심한다. 버지니아 군사대학과 다트머스 대학교의 미식축구 장학금을 쌩깠다고 하니 대단한 각오를 했던 듯. 하지만 나치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전투기 조종사로서 일찍 활동하고 싶었던 로빈은 캐나다 공군에 입대한다고 땡깡을 부리기도 했다. 아버지한테 혼나고 얌전히 웨스트포인트에 들어가긴 했다만.
로빈은 웨스트포인트에서 풋볼로 특히 절륜한 활약을 펼쳤는데[3], 온갖 풋볼 명문은 죄다 박살내고 미국해군사관학교를 진주만 공습 8일 후에 짓밟는 만행을 저질러 악명을 높였다. 전국의 풋볼 스카우트들이 군대 가지 말고 풋볼이나 하자고 계속 꼬시기도 했다고. 다만 몰래 술을 홀짝거리다가[4] 대위생도(Cadet Captain)에서 이등병생도(Cadet Private)로 쫙 강등되는 흑역사도 있긴 했다. 어쨌든 이 시절의 아찔한 흑역사는 훗날 미국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이 되었을 때도 훈육에 있어 좋은 경험이 되었다.
이후 전시체제에 들어가면서 미군이 사관생도들을 1년 일찍 임관시킬 때 올즈는 예정대로 항공장교를 지원했다. 이 시절 육사는 상황이 워낙 급했던지라 지상군 지원하는 생도들과 항공 지원하는 생도들을 아예 따로 교육시켰다고. 올즈는 1943년 5월 30일 조종교육을 수료하며 햅 아놀드 장군에게 배지를 받은 뒤 소위로 임관했다.
3. 제2차 세계 대전 : 최후의 라이트닝 에이스
P-38 조종사로 유럽전선에 배치. 1944년 8월 14일 독일군의 Fw190을 격추하며 첫 격추 기록을 세웠다. 1944년 9월에는 P-51 머스탱으로 기종을 교체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총 12기의 적기를 격추하고 11.5기 지상격파 전과를 올려 에이스 파일럿의 반열에 올랐다.1947년에는 인기 여배우 엘라 레인스(Ella Raines)와 결혼했다. 이후 한국 전쟁이 벌어지자 UN군으로 참전하고자 했으나 부인인 엘라 레인스가 결혼 3년만에 과부가 되고 싶지 않았는지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하여 참전을 막고 NATO 지역 근무로 발령받게 했다. 다만 로빈 올스는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못한 것을 평생 천추의 한으로 생각했다고.
4.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이 한창 절정을 항해가던 1965년, 주영 미 공군에서 F-101 비행단을 이끌던 로빈 올즈 대령은 펜타곤의 동기로부터 준장 진급과 본토 발령이 내정됐다는 연락을 받는다. 보통 사람이라면 뛸듯이 기뻐했을 이 소식에 올즈는 오히려 좌절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전투조종사로서 실전을 경험할 방법이 완전히 사라진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죽어도 베트남 전쟁에서 전투기를 몰고 싶었던 로빈 올즈는 딱 군법재판만 안 가면서 징계로 진급이 누락될만한 사고를 하나 궁리해냈는데, 바로 기지 개방 행사 때 방문객들 앞에서 F-101으로는 시도도 말아야 할 위험천만한 곡예비행을 벌여버리는 것이었다. 초저공 4방향 교차라는 정신나간 기동으로 마무리 된 이 비행을 직접 보고 꼭지가 돌아버린 지역 사령관(2성 장군)은 그를 불러다 길길이 날뛰며 원래 당사자에겐 보여줘서도 안 되는 진급 추천서를 들이민 뒤 눈앞에서 찢어버렸고, 계획된 목적을 완벽하게 달성한 올즈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감사합니다!"라고 우렁차게 외쳤다고 한다.
그리고 1966년 10월 30일, F-4 팬텀 II로 기종전환을 마친 로빈 올즈 대령은 드디어 태국 우본 공군기지에 주둔한 제8전투비행단의 비행단장으로 부임하여 그토록 염원하던 베트남 전쟁 참전을 시작한다.
올즈가 들어오던 첫 날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죠. "난 이번에 새로 왔다. 지금부터 너희들을 가르칠텐데, 난 여기있는 누구보다도 뛰어나다"며 우리를 하나씩 하나씩 손가락으로 가리켰어요. 훈련내용은 개선됐고, 비로소 진짜 '전투비행단'이 됐죠.
-히스토리 채널, <실전최강 전투기대전> 볼로 작전 中.
-히스토리 채널, <실전최강 전투기대전> 볼로 작전 中.
베트남전 당시 허접하다고 얕봤던 북베트남군의 MiG-17, MiG-21이 의외로 뛰어난 고기동성을 이용해 크고 빠른 대신 둔중하고 미사일 만능주의에 빠져 기관포도 없던 미군의 F-4를 농락하자 북베트남군의 약점은 소련식의 경직된 지상관제 체제임을 간파하여 크게 한방을 먹여주니 그게 바로 볼로 작전이다. 자세한 설명은 해당 문서를 참조.
F-4C-21-MC 일련번호 63-7680 미합중국 태평양공군 제13공군, 제8전투비행단, 433 전술전투비행대대 태국, 우본 왕립 태국 공군기지 1972년 5월 10일 MiG-17 2기, MiG-21 2기 격추 |
이처럼 그의 눈물나는 현역생활 연장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느 사이에 그 실력이 상층부의 귀에 들어가버려 본인에겐 안타깝지만 1967년 9월에 본토로 전출되어 준장으로 진급하고 미국공군사관학교 생도대장으로 발령났다. 사실 본토 발령 직전에 격추 기회가 한 번 더 있었는데, 베트남을 떠나는 것도 확정됐겠다 더는 전과를 양보할 필요가 없던 올즈 본인이 이번에는 직접 미그를 잡으려고 들어갔지만 그 악명높은 AIM-4 팰콘이 또 죄다 오작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베트남 최초의 에이스 타이틀 획득은 수포로 돌아갔다.
1972년에 베트남전 최후의 대규모 항공작전인 라인배커 작전이 발동되자, 자신의 계급을 대령으로 자진 강등하고서라도 일선으로 돌아가고자 청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더 이상 전투조종사으로 활동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망하여 1973년에 퇴역했다.
2007년 7월 14일 향년 84세로 별세했다.
5. 기타
- 탁월한 조종 실력, 활달하고 적극적인 성적에 훈련병 시절부터 시작해 현역으로 있는 내내 사고를 치며 좌천을 받는 행적 등이 여러모로 탑건의 주인공 매버릭을 연상시킨다. 특히, 후속작 탑건: 매버릭에서 동기인 아이스맨이 대장 계급을 달고 미합중국 태평양함대의 함대사령관을 지내는 와중에도[5] 정작 자신은 계속해서 비행을 하기 위해 대령 위로는 진급하지 않는 행적을 보여 더욱 유사해졌다.
- 롤링썬더 작전 시기 기관포가 고정무장으로 탑재되지 않은 F-4C/D의 보완책으로 20mm 기관포 포드를 운용하자는 의견이 많았는데, 올즈 대령 본인은 이를 그다지 반기지 않는 입장이었다. 애초에 공중전투기동 및 공대공 전술 훈련이 극히 부실했던 당시의 미 공군 교육훈련 체제 자체가 근본적인 원인이며,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달랑 기관포 포드만 던져줬다간 멋모르고 팬텀에게 불리한 선회전으로 MiG-17과 붙을 젊은 조종사들만 늘어날 뿐이라는 게 그의 시각이었다. 그래서 가장 적극적으로 기관포 포드 도입을 주장하던 프레드릭 블레세(Frederick Blesse) 대령[6]이 근무한 제366전투비행단이 기관포 포드를 먼저 운용하는 동안 제8전투비행단은 기관포 포드 대신 미사일을 주로 사용했다.
제366전투비행단은 SUU-16/A 기관포 포드 도입 겨우 한 달만에 4기의 미그 건킬(gun kill) 전과를 올리면서 그 유용성을 입증했지만, 궁극적으로 기관포의 유무보다 교육훈련의 내실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올즈 대령의 주장 역시 옳았던 것으로 판명되었다. 1972년 라인배커 작전에서 기술적 요인에 집착한 미 공군과 탑건으로 대표되는 교육훈련 및 전술적 요소를 강조한 미 해군의 공대공 전투 성과를 비교해봤을 때 후자가 훨씬 뛰어났던 것이다. 특히 기관포를 거의 운용하지 않은 미 해군 팬텀 특성상 해군항공대 격추 전과는 모두 미사일에 의한 것이었다.
- 술을 너무 좋아했다고 전해진다. 진급이 안 된 이유가 본인의 거부도 있지만 알콜중독 문제도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알려져 있다. 거의 평생 술을 좋아해서 70살도 넘은 2001년에 음주운전이 걸려서 곤혹을 치른 전적이 있다.
- 베트남전 중 연료가 거의 다 떨어진 상태에 공중급유기가 급유를 나름 이유를 들어 거절하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I have a couple of Sidewinders left... before I punch out, I'm going to pull the trigger. Put your parachutes on."나 사이드와인더 2발 남았다. 내가 비상사출하기 전에 방아쇠 당길거야. 니들 낙하산 매라."
-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콧수염이 인상적인데 이 때문에 한국 밀덕 커뮤니티에서는 로빈 올즈를 미국 공군의 이오시프 스탈린이란 밈으로 삼아서 드립을 치곤 했다.
[1] Brigadier General[2] 이 성은 태어날 때는 Oldys라고 쓰다가 어릴 적에 집안 사람들이 전부 y자를 빼버렸다. 참고로 스웨덴계 성씨이다.[3] 아예 풋볼 감독까지 다트머스에서 로빈을 데려가려던 그 감독을 모셔왔다. 마침 그 감독도 웨스트포인트 출신이다.[4] 한국 육군사관학교의 3금제도와 비슷한 금기다.[5] 올즈에게도 비슷한 동료가 한 명 있다. 흑인 최초의 공군 대장이 된 대니얼 "채피" 제임스 주니어 장군으로, 무척 죽이 잘 맞는 사이였다고 한다. 펜타곤 근무 시절 만나 주영 미공군에 부단장으로 데려갔고, 베트남전 때도 마찬가지로 부단장으로 불러내서 볼로 작전에서 함께 싸웠다.[6] 이쪽도 한국전쟁 당시 F-86 세이버로 10기를 격추한 더블 에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