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로렌스 하비 Laurence Harvey | |
본명 | 라루쉬카 미샤 스키크네 Laruška Miša Skikne |
히브리어 이름 쯔비 모쉐 צְבִי מֹשֶׁה | |
출생 | 1928년 10월 1일 |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 요니슈키스 | |
사망 | 1973년 11월 25일 (향년 45세) |
영국 런던 햄스티드 | |
국적 | [[리투아니아| ]][[틀:국기| ]][[틀:국기| ]]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남아프리카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묘지 |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 공동묘지[1] |
신장 | 185cm |
학력 | 왕립연극학교[2] |
직업 | 배우, 감독 |
영화 데뷔 | 1948년, 'House of Darkness' |
활동 기간 | 1948년 ~ 1973년 |
배우자 | 마거릿 레이튼(1957년 결혼~1961년 이혼) 조운 페리(1968년 결혼~1972년 이혼) 폴린 스톤(1972년 결혼) |
가족 | 딸 도미노 하비(1969년 출생~2005년 사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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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리투아니아 태생의 영국 배우.2. 위상
대표작으로 <꼭대기 방>(1959), <알라모>(1960), <버터필드 8>(1960), <맨추리안 캔디데이트>(1962) 등이 있다. 이후 잊혀져갔으나 오히려 사후에 독특한 연기와 인상적인 배역들로 인해 고정팬층이 형성됐다.3. 생애 및 활동
1928년 리투아니아 제1공화국에서 태어났으나 1934년 남아프리카 연방 요하네스버그로 이민했다. 10대 시절 남아프리카 연방 육군 연예 부대에 들어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집트와 이탈리아를 돌며 공연했다.제대 후 런던의 왕립연극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갔다. 이때부터 로런스 하비(Laurence Harvey)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영국의 고급 백화점 체인인 하비 니컬즈[3]에서 따왔다는 설과 하비스 브리스톨 크림 셰리[4]에서 따왔다는 설이 존재한다. 맨체스터의 라이브러리 극장(The Library Theatre)에 출연하던 때부터 사치 성향이 심한 걸로 유명했는데 이를 남창 일을 하며 충당했다.
저예산 스릴러 <House of Darkness>(1948)로 장편영화 데뷔를 했다. 어소시에이티드 브리티쉬 스튜디오즈[5]에 이어 로뮬러스 픽쳐스[6]와 계약하며 비유명작들에 출연했다. 스트랫퍼드의 머모리얼 극장(Memorial Theatre)에서 연극계 스타가 되었으나 연기 자체는 비판 받았다.
1954년 <King Richard and the Crusaders>로 할리우드 데뷔를 했지만 반응은 크지 않았다. 1955년 브로드웨이 데뷔작인 Island of Goats(염소의 섬)은 겨우 일주일 만에 막을 내렸는데, 그래도 시어터 월드 어워드[7]를 탔다. 결국 영국으로 돌아와 로뮬러스 픽쳐스와 계약을 갱신했지만 혹평만 받았다.
<꼭대기 방>(1959)과 <Expresso Bongo>(1959)에서의 연기가 극찬을 받으면서 존 웨인이 연출한 서부극 <알라모>(1960)와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나온 <버터필드 8>(1960)의 주연 자리를 쟁취했고, <더 원더풀 월드 오브 더 브라더스 그림>(1962)으로도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 <맨추리안 캔디데이트>(1962)는 경력 내 최고작이 되었고 영국영화사에서 중요한 작품이 되는 <달링>(1965)에도 출연했다. <꼭대기 방>(1965)의 속편 <Life at the Top>(1965)에도 나왔다.
그러나 감독 데뷔작이며 제작, 주연까지 했던 범죄 영화 <The Ceremony>(1963)와 감독 앤서니 맨이 제작 도중 사망해서 대타로 연출을 떠맡았으며 역시 주연도 한 냉전시대 스릴러 <A Dandy in Aspic>(1968)은 혹평을 받았다. 이어 1970년대에 출연한 영화들도 거의 다 실패했다.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등과 나온 <WUSA>(1970)는 평가가 좋지 않았고, 잔느 모로와 나온 오슨 웰스의 <The Deep>(1970)은 미완성작으로 끝났다.
유작 <Welcome to Arrow Beach>(1973)의 촬영 완료 직후 1973년 위암으로 요절했다.
3.1. 딸 도미노 하비
로런스 하비는 두 번째 아내와 결혼 생활 중에 모델 폴린 스톤[8]과의 사이에서 딸 도미노 하비(Domino Harvey)를 가졌다. 폴린 스톤은 패션지 보그의 표지에 등장하던 유명 패션모델이었다."도미노"는 1969년 8월 7일 런던 해머스미스에서 태어났을 때 어머니 폴린 스톤이 지어준 본명이다. 폴린 스톤은 언젠가 도미노란 이름을 가진 사람을 우연히 만났을 때 굉장히 멋진 이름이라고 생각했고 나중에 딸을 낳으면 꼭 도미노란 이름을 주겠다고 다짐했었다고 한다.
로런스 하비는 1972년 두 번째 아내와의 이혼이 성립되자마자 폴린 스톤과 재혼했지만 곧 사망했다. 폴린 스톤은 딸 도미노 하비를 데리고 런던의 부촌 벨그레이비어(Belgravia)로 이사했다.
10대 시절 도미노 하비는 무술을 배웠으며 동급생들과 싸워대 기숙학교에서 몇 번 쫓겨났다. 자퇴 후 모델, 클럽 DJ, 티셔츠 디자이너 등 다양한 일을 하다가 어머니가 새 남편과 살기 시작한 캘리포니아로 넘어와 의용소방대에서 일하며 총기류를 익혔다. 1993년 현상금 사냥꾼("bail recovery agent")으로 전직해 에이전시 소속으로 마약 밀수, 절도, 살인 현상범들을 추적했다. 다른 현상금 사냥꾼들과 협업할 때는 길 잃은 여행객인 척 하는 게 특기였다고 한다. FBI 10대 지명수배자들을 쫓은 적도 있다.
당시 현상금 사냥꾼들은 현상수배범들에게서 압수한 마약들을 자기들 소유로 몰래 빼돌리곤 했고, 도미노 하비도 곧 대마, 코카인, 헤로인에 중독되었다. 2003년과 2005년에 메스암페타민 밀매로 적발되었고, 가택 연금에 처해졌다. 결국 2005년 펜타닐 과다복용으로 요절했다.
매우 드문 여성 현상금 사냥꾼이었고 실력이 좋았기 때문에 생전 언론에 소개됐는데, 영화감독 토니 스콧이 기사 중 하나를 읽고 연락하면서 연이 닿았다. 토니 스콧은 장장 12년을 준비해 영화 <도미노>(2005)를 만들었다. 토니 스콧은 도미노 하비가 현상금 사냥을 나갈 때 참여해 곁에서 관찰했고, 인터뷰 과정을 몇 시간 넘게 녹화하기도 했다. 도미노 하비는 영화 촬영장에 몇 주간 머물렀고 삽입곡에도 참여했으나 영화가 사후 개봉해 최종완성본은 보지 못했다. 도미노 하비 역은 키이라 나이틀리가 연기했다. 엔딩 크레딧에 도미노 하비 본인이 등장한다.
4. 주요 출연 작품
- House of Darkness, 1948
- 사자왕 리차드와 십자군들(King Richard and the Crusaders), 1954
- Romeo and Juliet, 1954
- 나는 카메라(I Am a Camera), 1955
- The Truth About Women, 1957
- 꼭대기 방(Room at the Top), 1959[9]
- Expresso Bongo, 1959
- 알라모(The Alamo), 1960
- 버터필드 8(Butterfield 8), 1960
- 여름과 연기(Summer and Smoke), 1961
- 황야를 걸어라(Walk on the Wild Side), 1962
- 더 원더풀 월드 오브 더 브라더스 그림(The Wonderful World of the Brothers Grimm), 1962
- 맨추리안 캔디데이트(The Manchurian Candidate), 1962
- The Ceremony, 1963
- The Outrage, 1964
- 인간의 굴레(Of Human Bondage), 1964
- 달링(Darling), 1965
- Life at the Top, 1965
- A Dandy in Aspic, 1968
- WUSA, 1970
- 나이트 워치(Night Watch), 1973
- Welcome to Arrow Beach, 1974
5. 여담
- 까다로운 성격이라 동료 배우들에게서 여러 차례 공개 비난을 받았다.
- <Walk on the Wild Side>(1962)에 같이 나왔던 카퓌신은 하비가 애정 상대역을 하기엔 외모적으로 떨어진다고 공개적으로 모욕한 적이 있다.
-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좋은 친구 사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