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내의 교회
2019년 터키군의 폭격 하에 놓인 시가지
1. 개요
아랍어 رَأْس ٱلْعَيْن쿠르드어 سەرێ کانیێ
시리아어 ܪܝܫ ܥܝܢܐ
영어 Ras al-Ayn / Ras al-Ain
시리아 동북부의 도시. 라카에서 동북쪽으로 110km, 하사카에서 서북쪽으로 60km, 카미실리에서 서쪽으로 80km 떨어진 평지에 위치한다. 시리아 내전 이전 인구는 3만이었다. 터키와의 국경 도시로, 국경 너머의 제이란프나르와 마주하고 있다. 지명은 아랍어로 '샘의 언덕'이란 뜻으로[1], 실제로 카부르 강 서쪽 지류를 따라 백여개에 달하는 샘이 흩어져 있어 토양이 비옥하다. 자지라 서부 지방에서 유서깊은 도시 중 하나로, 기원전 2천년 전부터 역사에 등장한다. 유프라테스 - 티그리스 강의 중간 지대에 자리하여 중세 시기 시리아 / 이라크 방면 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요충지였다.
20세기 초에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주요 거점이던 라스알아인 수용소가 있었다. 내전 시기 2012-13년 시리아 반군과 쿠르드 인민 방위대 간의 격전 끝에 후자가 승리하여 북시리아 (로자바) 연방에 소속되었으나, 2019년 터키 쿠르드 침공 당시 또한번의 격전 끝에 터키군에게 점령되어 터키와 로자바 / 시리아 정부군 지역 사이의 일종의 완충지로 남아있다. 문명의 교차로에 입지한 도시답게 주민들은 아랍인, 쿠르드인, 아시리아인, 체첸인, 튀르크멘 등으로 다양했으나 2019년 가을 터키군의 점령 후 비아랍계가 피난가고 아랍계 난민들이 이주되었다.
2. 역사
텔 엘 파크리야 (تل الفخيرية) 에서 발굴된 유물들. 좌측은 기원전 850년경 구자나-시카니 총독 하다드 이티의 석상 (다마스쿠스 국립 박물관 소장) |
2.1. 상고대
카부르 강의 상류 일대는 여러 지류들이 얽혀 있어 토지가 비옥하여 초기부터 인류가 정착하였다. 현대 라스 알 아인에서 서남쪽으로 3km 지점, 카부르 서쪽 지류의 서안에 자리한 텔 할라프는 토기 시대로 들어선 메소포타미아의 전기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이곳을 기준으로 삼은 텔 할라프 문화는 기원전 6천 ~ 5천년간 지속된 후 수메르 지역의 우바이드 기로 이어진다. 금석병용기를 거쳐 청동기 시대에 들어 텔 할라프는 히타이트의 주요 도시를 거쳐 기원전 10세기에는 아람 / 아시리아계 도시 국가 구자나로 불렸다. 한편 시가지 남쪽의 텔 파크리예는 기원전 2천년 전에 아람계 도시 식칸 (시카니)이 형성되었고, 기원전 1500년경 후르리 인들이 세운 미탄니 제국의 수도 와슈칸니가 이곳으로 비정되기도 한다.[2] 미탄니 멸망 후 기원전 1000년 경에는 텔 할라프의 구자나와 함께 식칸은 아람계 비트 바히아니 왕국에 속하였다가 기원전 900년경 아시리아 제국령이 되었다.2.2. 고대
아시리아 지배 하에 식칸은 셈계 아카드어로 '샘의 머리 / 언덕'이란 의미인 레스 이나라 불리게 되었고, 천년 후 프톨레마에오스 지도에 카보라스 (카부르) 강의 수원지 라이세나로 표기되었다. 기원전후 무렵 일대는 아랍-아람계 오스로에네 왕국에 속하였다. 본래 파르티아에 복속했던 오스로에네는 2세기 들어 로마 제국의 잦은 침공을 당한 끝에 198년 사실상 정복되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라이세나를 로마 식민도시로 지정하였다. 이후 라틴어로 레사이나 (Resaina)로 혹은 레사이나이 (Rhesaenae)라 불리게 된 도시에는 로마군이 주둔하였다. 3-6세기 카부르 강은 로마-페르시아 국경이 되었기에 레사이나는 칼리니쿰[3], 아미다[4]와 함께 로마령 시리아의 대이란 방어선을 이루었다. 242년 사산 제국의 샤푸르 1세가 시리아 북부를 점령하자 반격에 나선 고르디아누스 3세와 섭정 티메시테우스가 레사이나 전투에서 이란군을 격파하고 일대를 수복하였다.[하지만]2.3. 중세
3-4세기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오리엔트 교구의 주교구가 된 레사이나는 380년 테오도시우스 1세의 명으로 시가지가 확장되었고, 이를 기념하여 테오도시오폴리스라 명명되었다. 다만 비슷한 시기 아르메니아 도시 카린 역시 (에르주룸) 역시 같은 이름으로 개명하여 사료 검증에 있어 혼선을 준다. 사산 제국과의 전쟁이 가열화된 6세기 중반에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다른 동방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요새화되었다. 하지만 578년 호스로 1세, 580년 호르미즈드 4세 시기 사산 제국군에 점령되어 파괴되었다. 다만 7세기 초엽 호스로 2세 시기 재차 점령한 후에는 재건되어 크테시폰, 군데샤푸르, 니시비스에 이른 사산 조의 주요 교육 시설이 세워졌다. 하지만 20년도 못가 이라클리오스의 동로마 제국군이 탈환했고, 다시 10여년 후인 640년에는 이슬람 제국군이 점령하였다. 아랍 무슬림 이주민들은 기존 주민들이 버린 구역에 정착하였다.중세 이슬람 시기 도시는 아랍어로 '꽃의 샘'이란 의미인 아인 와르다로 불렸고, 시리아와 이라크 간 교통의 거점이었다. 2차 피트나 시기인 중 685년 1월에는 카르발라 참극에서 후세인 빈 알리의 죽음을 막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참회자들 (앗 타와빈)의 시아파 반군이 시리아로 진격하다 이곳에서 우마이야 왕조 정규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3천에 불과한 타와빈 군대는 2만에 달하는 우마이야 군을 상대로 3일간 분전했으나 결국 전멸하였다. (아인 와르다 전투) 이로써 첫 쉬아 반란은 종식되었고, 잔당은 쿠파에 남았던 무크타르의 카이사니야 반란에 합세하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해당문서 참고. 한편 10세기 압바스 왕조와 함께 고토 회복에 나선 동로마 제국은 934년 멜리테네에 이어 942년 아인 와르다를 점령, 다수의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 회군하였다. 다만 이후로 카부르 강 유역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침공은 없었고, 11세기에는 함단 왕조와 우카일 왕조의 영토였다.
한편 도시는 점차 옛 아시리아 ~ 로마 시기 지명에서 유래한 라스 알 아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12세기의 지리가 알 이드리시는 이곳을 직접 방문한 후 지명을 라스 알 아인이라 기록하였고, 디야르 라비아에 속한 도시로써 카부르 강의 수원을 담당하는 3백여개의 샘이 있기에 물이 풍부하다는 설명을 덧붙혔다. 십자군 전쟁 초기에 일대는 무슬림측 최전방에 속하였다. 1104년 5월 모술 총독 제케르미슈와 마르딘 태수 소크만의 연합군이 라스 알 아인에 집결하여 에데사 백국과 안티오크 공국의 십자군에 포위된 하란의 구원에 나섰다. 이어진 하란 전투는 무슬림 연합군의 승리였고, 에데사 백작 보두앵 2세와 부관 조슬랭이 포로로 잡혔다. 3년 후에 석방된 조슬랭은 1118년 에데사 백작에 올랐고, 1129년 라스 알 아인을 일시 점령한 후 아랍 주민들을 살해하였다. 1152년 에데사 백국이 멸망하며 일대는 십자군의 위협에서 벗어났고, 12세기 말엽 아이유브 왕조령이 되었다.
살라흐 앗 딘 사후 벌어진 내전에서 1201년 알 아딜은 조카 알 아프달이 조카 앗 자히르 가지를 배신하고 다마스쿠스 포위를 푸는 대가로 그에게 삼사트 (사모사타)에 더하여 수루츠와 라스 알 아인을 영지로 더해주었다. 한편 13세기 중반 자지라 지방은 몽골 제국의 위협에 직면하였다. 1252년 봄 몽골의 아제르바이잔 총독 바이추가 마야파리킨 (실반)을 포위하며 습격대를 보내 일대를 습격하였다. 다만 1259년부터 반세기간 이어진 맘루크-몽골 전쟁에서 황폐화된 티그리스-발리크 강 유역과 달리 카부르 강 유역은 1299년 맘루크 군의 습격 외에는 일 칸국의 수중 하에 안정을 유지하였다. 6세기 간의 이슬람 지배에도 라스 알 아인에는 시리아 정교회의 주교구와 많은 수도원이 있었다. 그외에 2개의 모스크와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다수의 학교, 목욕탕, 정원 등이 있는 자지라 지방의 주요 도시였다. 하지만 1393년 티무르가 이라크의 잘라이르 왕조 원정 중 파괴하여 쇠락하였다.
2.4. 근현대
이후 작은 마을로 남았지만,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지도에는 표기되었다. 19세기 유럽인들의 지도에는 라스 아인, 아인 베르데, 라스 엘 아인 등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던 19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의 캅카스 지배를 피해 난민이 되어 유입된 체첸인들을 일대에 정착시켰다. 동시에 오스만 당국은 체첸 난민들을 보호하고 통제할 목적으로 1천 병력을 주둔시키고 병영과 성채를 세웠다. 1915-16년 라스 알 아인에는 수용소가 세워져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축출된 아르메니아인들이 집결되었고, 매일 수백명씩 끌려가 처형되고 식량도 없이 데이르에조르까지 시리아 사막을 횡단하게 하는 '죽음의 행진'의 방식으로 무려 8만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6] 따라서 라스 알 아인 (레술라인) 캠프는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대명사로도 여겨진다. 1921년 오스만 제국의 해체 후 바그다드 철도를 따라 국경이 그어지며 도시는 양분되어 북부는 터키령 제이한프나르가 되었다.2.5. 시리아 내전
2012년 가을 무렵 라스 알 아인은 카미실리, 하사카와 마찬가지로 시리아 정부군과 쿠르드계 인민방위대가 양분하였다. 다만 애초에 아랍인 다수 지역이었기에 반발이 있었고, 11월 말부터 알 누스라 전선과 시리아 반군이 공세에 나섰다. 초기 전투의 결과 시리아 정부군이 축출되었고, 12월 15일 반군과 인민방위대 모두가 도시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휴전이 체결되었다. 다만 2013년 1월 전투가 재개되었고, 한달 간의 충돌 끝에 두 진영이 도시를 양분한다는 휴전이 체결되었다. 이번에는 휴전이 오래 지속되나 했으나 그해 7월 알 누스라 전선의 도발로 전투가 재개되었고, 3일 간의 격전 끝에 정부군 잔여 세력 및 온건 반군이 합세한 쿠르드 측이 도시 전부를 장악하였다. 교전 동안 군인 2백여와 민간인 20여명이 사망하였다.이로써 라스 알 아인은 이듬해 설립된 북시리아 자치 연방 (로자바)의 자지라 주에 편성되었다. 하지만 2019년 터키 쿠르드 침공으로 도시는 다시 전장이 되었다. 10월 9일 터키군이 남하하자 쿠르드 군은 시내 외곽으로 물러났고, 시내를 장악한 터키군은 수십명의 쿠르드 지도자와 민간인을 처형하였다. 포격을 피해 외곽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쿠르드 군은 10월 13일 대대적인 반격을 가하여 도시를 탈환하였다.[7] 다만 10월 17일 터키군과 시리아 반군이 재차 도시를 포위하여 시가지 절반을 장악하였다. 이에 미국이 개입하여 5일 간의 휴전을 성사시켰으나 산발적인 전투는 계속되었고, 주민들에 의하면 터키군이 백린탄과 같은 화학 무기를 투하했다고 한다. 또한 독일인 1인 등 몇명의 외국인이 병원을 지키다 사망했다 한다.
10월 20일, 터키군의 공세가 심해지자 쿠르드 측은 라스 알 아인에서의 철수를 공표하였다. 아랍인을 제외한 쿠르드, 체첸, 아시리아, 아르메니아인 등 수백의 소수 민족 주민들은 대부분 쿠르드 군대와 함께 미군이 제안한 30km 남쪽의 안전 지대 너머의 텔 타마르로 철수하였다. 이로써 라스 알 아인은 터키군과 터키가 지원하는 시리아 반군에게 장악되었고, 터키 당국은 자국에 몰려들었던 시리아 난민 일부를 정착시켰다. 최근 들어 터키 당국은 일대의 수자원이 하사카 지방으로 분배되는 관개 시설을 차단, 터키와 반군 영역에만 농업 용수를 분배하여 로자바령 지역의 사막화를 초래하고 있다.
3. 갤러리
텔 파크리예. 텔 할라프와 달리 1940년, 1955년과 2000년대 초엽의 간단한 발굴 외에는 제대로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다
3.1. 텔 할라프
궁전 유적. 텔 할라프는 1899년 독일인 외교관 막스 폰 오펜하임에 의해 재발견되어 1911-13년 그가 주도한 발굴이 이루어졌다. 해당 유물은 베를린 텔 할라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는데, 2차 대전 중인 1943년 폭격으로 유물 상당수가 산산조각났다. 이를 90년대 들어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조각을 이어 붙이는 형식으로 대강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다.
발굴 당시 모습
- [텔 할라프 기타 사진들]
알레포 박물관 입구의 복제품
[1] 쿠르드어 지명인 세레 카니에 역시 샘의 언덕이란 의미로, 카미실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훈차이다.[2] 다만 최근 이집트 아마르나에서 출토된 와슈칸니 출신 점토판과 텔 파크리에 출토 점토판의 화학 성분 검사를 해본 결과 불일치 판정이 나왔다[3] 레온토폴리스, 현 라카[4] 현 디야르바크르[하지만] 자신감을 얻고 메소포타미아 정복에 나선 고르디아누스 3세는 미시케 전투에서 전사한다[6] 목격자의 진술에 따르면 기독교 세력에 의해 난민이 되어 기독교도에 대해 적개감이 큰 체첸/튀르크 병사들은 나체로 서 있는 수백명의 여인들에게 달려들어 무참히 살육하였고, 하렘에 데려갈 귀족 자제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죽였다고 한다[7] 다만 같은날 터키군이 텔아비야드를 점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