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1-14 18:26:55

디터 린트너

독일의 前 축구 행정가
파일:Dieter_Lindner.jpg
<colbgcolor=#eee><colcolor=#000,#e5e5e5> 이름 디터 린트너
Dieter Lindner
출생 1939년 6월 11일
독일국 브레슬라우
사망 2024년 12월 22일 (향년 85세)
독일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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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미상|체중 미상
직업 축구 선수(공격수미드필더수비수 / 은퇴)
축구 행정가
소속 <colbgcolor=#eee> 선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54~1956 / 유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57~1971)
국가대표 없음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
3. 은퇴 후4. 사망

1. 개요

독일축구 선수 출신 前 축구 행정가. 선수 시절에는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를 모두 소화한 멀티 플레이어였다. 평생을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 보낸 원클럽맨이며, 이 시기에 독일 축구 챔피언십유러피언컵 준우승을 차지했다. 은퇴 후에는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부회장, 임시 회장, 감사위원장을 역임하며 클럽 행정에도 기여했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린트너는 유소년 시절부터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에서만 뛰었다. 재능 있는 공격형 유소년 선수였던 그는 17세의 나이에 오버리가 쥐트 1군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1957년 2월 10일 얀 레겐스부르크와의 원정경기에서 3-1 승리를 거두며 오버리가 데뷔를 했다. 아돌프 파테크 감독 하에서 중앙 공격수 역할을 맡았고, 60분에 팀의 선제골을 넣었다. 첫 정규 시즌인 1957-58 시즌에 22경기에 출전하여 8골을 기록했다.

1958-59 시즌에는 파울 오스발트 감독 하에서 플레이메이커였던 알프레트 파프를 비롯하여 리하르트 크레스, 이슈트반 스터니, 에케하르트 파이겐슈판 등과 함께 오버리가 쥐트 우승을 차지했다. 공격진 어디서든 활약할 수 있었던 그는 22경기에서 5골을 넣었다. 아인트라흐트는 지역 라이벌 키커스 오펜바흐를 2점 차로 누르고 1. FC 뉘른베르크를 6점 차로 따돌리며 1위를 차지했다. 독일 챔피언십 토너먼트에서는 6월 11일 20세 생일을 맞은 공격수가 속한 아인트라흐트가 12승 무패, 골득실 26-11이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SV 베르더 브레멘, FK 피르마젠스, 1. FC 쾰른을 차례로 꺾고 올라온 것이다. 그 과정에서 린트너는 6경기 2골을 넣었다.

1959년 6월 28일 베를린올림피아슈타디온에서 열린 결승전에서는 남부 준우승팀 키커스 오펜바흐와 맞붙었다. 극적인 경기 끝에 아인트라흐트가 연장전에서 5-3으로 승리하며 독일 챔피언에 올랐다. 《키커》의 프리데베르트 베커는 "1959년 결승전은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숨막히는 경기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라고 격찬했다.

독일 챔피언에 오른 다음 해인 1959-60 시즌, 아인트라흐트는 남부에서 우승팀 카를스루에 SC와 키커스 오펜바흐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개인적으로 린트너는 29경기 16골로 자신의 오버리가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새로운 중앙 공격수 에르빈 슈타인이 24골로 팀 내 득점왕을 차지했고, 1959년 10월 3일 콘스탄스에서 열린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서독 B대표팀에 발탁되었다. 이전 팀 동료 파이겐슈판을 대신해 우측 윙어로 교체 투입되어 팀 동료 프리델 루츠, 디터 슈팅카와 함께 뛰었다.

하지만 진정한 하이라이트는 1959-60 유러피언컵이었다. DFB 우승팀 아인트라흐트는 영 보이즈 베른, 비너 슈포르트클럽을 차례로 꺾고 준결승에서는 스코틀랜드 챔피언 글래스고 레인저스를 제압하며 1960년 5월 18일 글래스고에서 열릴 결승전에서 연속 우승팀 레알 마드리드 CF와 맞붙게 되었다.

아직 20세였던 린트너는 스코틀랜드의 프로팀들과의 준결승에서 최고의 폼을 보여줬다. 4월 13일 홈에서 6-1로 대승을 거둔 후 언론에서는 "아직 20세인 디터 린트너가 아들러 유니폼을 입고 지금까지 최고의 경기력을 보여주며 바일베허의 프리킥 후 헤딩골과 알프레트 파프의 패스를 받아 근거리에서 5-1 골을 넣었다"고 기록했다. 린트너는 후에 인터뷰에서 "글래스고와의 홈경기는 내가 치른 최고의 경기 중 하나였다. 2골을 넣고 2번의 환상적인 어시스트를 했다"고 회상했다. 5월 5일 아이브록스 스타디움에서 열린 원정 경기에서도 6-3 승리를 거두며 아인트라흐트의 핵심 선수로 활약했다. "6분 만에 23미터 거리에서 왼쪽 상단 구석에 정확히 꽂힌 린트너의 환상적인 슛이 헤센 팀이 단순히 페널티 박스에서 수비만 하러 온 것이 아님을 보여줬다"고 평가받았다.

하지만 햄던 파크에서 127,621명의 관중 앞에서 열린 결승전에서는 팀 동료들과 함께 레알 마드리드의 압도적인 경기력 앞에 7-3으로 패하며 '하얀 발레단'의 우승을 지켜봐야 했다. 특히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페렌츠 푸스카스의 개인 기량 앞에 독일 챔피언의 훌륭한 팀워크도 승리로 이어지지 못했다. 더욱이 레알 마드리드는 사전 정찰을 통해 아인트라흐트에 대해 철저히 준비해온 상태였다. 린트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들은 우리에 대해 잘 알고 있었어요. 저는 당시 헤딩이 꽤 좋은 선수였고 머리로 많은 골을 넣었거든요. 그런데 우리의 장단점을 그들이 알고 있었어요. 저는 사라가와 맞붙었는데, 코너킥이나 프리킥 때마다 제 옆에 서서 제 유니폼을 살짝 잡아당겼어요. 아주 살짝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어요. 그 순간 끝이죠. 제대로 점프할 수 없고, 특히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서요. 우리가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로 1-0으로 앞서고 있을 때, 그리고 골대를 맞혔을 때도 있었는데, 그때 디 스테파노를 봤어야 했어요. 그가 팀의 최고 선수였거든요. 그가 경기장을 어떻게 뛰어다녔는지, 한 골대에서 다른 골대까지, 마치 수도승처럼요. 그리고 팀 동료들을 어떻게 다그쳤는지요. 정말 믿을 수 없었어요. 팀 주장에게서 그런 모습을 본 적이 없어요. 그 후 팀이 어떻게 각성했는지 눈으로 볼 수 있었어요. 정말 대단했어요!"

1960-61 시즌과 1961-62 시즌에도 린트너가 속한 아인트라흐트는 남부 오버리가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며 두 번 더 독일 챔피언십 토너먼트에 진출했다. 1961년에는 7승 5패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 동점을 기록했지만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고, 1962년에는 후에 독일 챔피언이 된 1. FC 쾰른에 막혔다. 1959년부터 1962년까지 총 16경기의 토너먼트에서 5골을 기록했다.

1962-63 시즌 4위로 오버리가 쥐트 시대를 마감했다. 프랑크푸르트 토박이는 132경기에서 49골을 넣었다. 토너먼트 진출과 1960년 유러피언컵 외에도 1962년 5월부터 한달 동안 아테네, 카이로, 봄베이, 캘커타, 방콕, 쿠알라룸푸르, 도쿄,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밴쿠버, 위니펙, 토론토, 뉴욕을 거치는 한 달간의 세계 순회 투어도 디터 린트너의 선수 경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린트너는 1963년 8월 24일 새로 만들어진 단일 리그의 출범이었던 분데스리가 개막일에 참여한 선수이기도 했다. 아인트라흐트는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과 1-1 무승부로 분데스리가를 시작했다. 이제 그는 아웃사이드 하프로 활약하며 알프레트 호른, 호르스트 트림홀트, 빌헬름 후베르츠와 함께 당시 여전히 사용되던 WM 시스템에서 "마법의 사각형"을 이뤘다. 프랑크푸르트는 분데스리가 데뷔 시즌에 3위를 차지했고[1], DFB-포칼에서는 VfL 볼프스부르크, KSV 헤센 카셀, FC 샬케 04, 헤르타 BSC를 차례로 꺾고 1964년 6월 13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남부 라이벌 TSV 1860 뮌헨과 결승전을 치렀다. 하지만 슈투트가르트 네카어슈타디온의 "용광로" 같은 더위 속에서 뮌헨 "라이온즈"에게 0-2로 패하며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였다. 린트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완전히 녹다운 상태였어요. 힘이 하나도 없었죠.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결정적인 차이는 뮌헨이 더 잘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에요. 그들은 정오의 무더위 속에서 훈련했고 높은 기온에 익숙했어요. 우리는 저녁 6시에 훈련했거든요. 1959년 오펜바흐 키커스와의 결승전 전에는 오후 3시에 훈련이 잡혔어요. 그때는 경기에서 다른 모습을 보였죠."

1965-66시즌부터는 엘렉 슈바르츠가 아인트라흐트의 감독으로 부임했고, 위르겐 그라보프스키, 페터 쿤터, 카를하인츠 비르트 등 세 명의 새로운 선수가 합류했다. SL 벤피카의 前 감독이었던 그는 오전 훈련과 현대적인 4-2-4 시스템을 헤센 팀에 도입했다. 슈바르츠 하에서 린트너는 중앙 수비수로 후퇴했고, 새 감독의 두 번째 시즌인 1966-67시즌에는 아인트라흐트가 몇 달간 우승을 놓고 치열하게 경쟁했다. 18라운드부터 33라운드까지 린트너와 팀 동료들은 2위를 유지했다. 하지만 34라운드인 6월 3일 1860 뮌헨에게 1-2로 패하고 나서야 4위로 떨어졌다. 린트너는 단 한 경기만 빠졌을 뿐이었다.

동시에 린트너는 아인트라흐트와 함께 메세포칼에서도 아슬아슬하게 두 번째 유럽 대회 결승 진출을 놓쳤다. 드럼콘드라 더블린, 흐비도우레 IF, 페렌츠바로시 TC[2], 번리 FC를 차례로 꺾었지만 준결승 2차전에서 GNK 디나모 자그레브에 막혔다. 브란코 제베츠 감독이 이끄는 팀은 프랑크푸르트에서 0-3으로 패한 상황에서 자그레브 홈에서 연장전 끝에 4-0으로 이기며 극적으로 결승에 진출했다. 골키퍼 즐라트코 슈코리치, 수비 리더 루돌프 벨린, 득점왕 슬라벤 잠바타 등이 있는 팀은 8월 30일과 9월 6일 리즈 유나이티드 FC와의 결승전에서도 우승을 차지했다. 이 시즌 아인트라흐트는 수비에서 주로 골키퍼 페터 쿤터, 4백 라인에서 파흐루딘 유수피, 린트너, 페터 블루쉬, 로타르 셰머로 구성되었고, 그 앞에서 두 미드필더 위르겐 프리드리히, 빌헬름 후베르츠가 뛰었다. 린트너는 메세포칼 10경기 모두에 출전했다.

젊은 감독이었던 에리히 리베크 하에서 1969-70시즌에 단 3경기만 출전한 후, 디터 린트너는 1970년 여름 잠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하지만 1970-71시즌 17라운드 후 아인트라흐트가 11승 23패로 18위에 머물며 지역 리그 강등 위기에 처하자, 수비 보강을 위해 린트너를 다시 불러들였다. 시즌 말까지 17승 11패를 거두며 총 28승 40패로 15위를 기록해 강등을 면했다. 이 "영원한" 아들러는 15경기에 더 출전하며 1골까지 추가했다. 린트너는 1963년부터 1971년까지 분데스리가에서 189경기 5골을 기록했다.

1969년 1월 8일 메세포칼에서 아틀레틱 클루브와의 경기가 아인트라흐트 주장으로서 유럽 클럽 대회에서의 마지막 출전이었다. 총 24경기에서 4골을 기록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59년 10월 3일 콘스탄스에서 열린 아일랜드와의 경기에서 서독 B대표팀에 발탁되어 우측 윙어로 뛰었다. 팀 동료 프리델 루츠, 디터 슈팅카와 함께 경기에 임했다. 다만 A매치에 소집된 적은 없었다.

3. 은퇴 후

프랑크푸르트의 니더엘렌바흐에 거주했던 린트너는 1980-81시즌 아인트라흐트의 부회장을 역임했고, 1996년 5월 5일부터 10월 2일까지는 임시 회장을 맡았다. 또한 오랫동안 감사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명예회원이자 명예 주장이었으며,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박물관 후원회 이사로도 활동했다.

4. 사망

2024년 12월 22일 새벽, 디터 린트너는 오랜 투병 끝에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 린트너는 29경기 2골.[2] 플로리안 알베르트가 소속된 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