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8 04:16:07

독립 리그


1. 설명2. 역사3. 야구의 독립 리그4. 기타 종목5. 기타

[clearfix]

1. 설명

Independent League
한 국가의 주된 스포츠 관할 단체와는 별개인 채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리그.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통합형 리그의 대표적인 스포츠인 축구는 각 나라에 축구협회가 단독으로 존재하고 그 나라에서 열리는 모든 축구경기는 축구협회의 주관하에 이루어진다. 프로리그건 아마추어 리그건 공통 사항. 축구협회란 공식적으로 그 나라내의 축구경기의 관할에 대해 독점적 지위를 가진 협의체인 것, 그래서 이런 협회는 축구경기를 공식이냐 비공식이냐라고 판정할 권한, 경기 시설, 경기 장비, 경기 운영에 대한 통제가 가능하다.

반면, 이런 독점 협의체가 없는 프로 스포츠 종목의 경우는 각각 팀들이 연합해 리그별로 독자적인 활동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독립 리그들이 존재할 수 있다. 축구처럼 글로벌한 기준과 조항에 따라 선수의 입단, 퇴단 규정이 결정되지 않고, 리그 내의 규정에 따라서만 선수의 입단, 퇴단이 결정되는 폐쇄적인 운영방식이 많아서 주로 독립 리그 = 폐쇄형 리그 = Closed League의 성격을 갖는다. 때문에 단순히 리그 운영만 독립적인 게 아니라 내부 규정도 독립적으로 할 수 있어서 리그 별로 특이한 규칙이 존재하기도 하며 그게 심하면 거의 마개조 수준으로 경기 스타일이 바뀌기도 한다.

미국에서 야구는 반독점법 규제를 피해갔지만 다른 종목은 다 걸렸다. 그래서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축구협회처럼 독점적 지위를 확보하고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를 제외한 나머지 리그를 마이너 리그로 흡수한 것. 미국 스포츠의 1960~1970년대는 한참 미국 서부의 개발과 함께, 미식축구의 AFL, 농구ABA, 아이스하키의 WHA 등 NFL, NBA, NHL을 위협하던 정도로 성장한 독립 리그가 존재했다. AFL을 합병한 후의 NFL 미식축구의 경우도 지속적으로 시장의 빈틈을 노리는 USFL, CFL 등의 독립리그가 존재해왔고 지금도 존재한다. WWE로 유명한 빈스 맥마흔이 야심차게 시도했다가 2001년 한 번만 운영하고 망한 XFL 같은 흑역사도 있다. 맥마흔은 2020년을 목표로 XFL 재건에 나섰지만 또 코로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계속 독립리그가 시도되는 것은 프로 스포츠에 대한 수요가 지속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프로리그와 '독립'된 리그라고는 하지만 프로리그와 뚜렷한 신념이나 입장 차이가 있어서 갈라진 경우는 드물고, 보통 독립리그는 프로에 진입하지 못한 선수들이 경기감각을 유지하면서 프로 팀에 어필하기 위한 수단으로 쓰인다. 미국의 야구 독립 리그 일부는 아예 MLB와 제휴를 맺고 여러 급진적인 규칙 개정을 실험해보는 리그로 쓰이기도 한다.

2. 역사

19세기 이전부터 공을 던지고 방망이로 치는 운동은 여기저기서 했지만 특히 미국에서 인기가 있었는데, 여기도 처음에는 공통된 규칙같은것은 없었다. 그나마 처음으로 오늘날의 야구 규칙과 유사한 규칙이 만들어진 것이 1848년 'Knickerbocker Rule'이었는데 이것은 뉴욕스타일로 불렸으나 미국전역에 퍼지지는 않았다.(미국이 워낙 땅덩이가 크기도 했고) 이후로도 미국 각지에서 자기 나름대로 공을 던지고 치는 운동을 했는데 1875년 처음으로 오늘날의 메이저리그의 원형이 되는 내셔널 리그가 만들어진다. 그러나 내셔널 리그 협회가 야구란 스포츠를 만든 것은 아니므로 영국의 축구 협회와는 달리 야구 전체를 관장하는 협회가 아니라 내셔널 리그만 관리하는 단체였다. 게다가 내셔널 리그는 초창기엔 1882년에 설립된 강력한 경쟁자인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1]과 1901년 설립된 아메리칸 리그와도 경쟁해야 했다. 규칙 또한 내셔널리그가 하나씩 바꿔갔으나 [2] 내셔널리그가 아닌 다른 리그의 경우에는 내셔널리그의 규칙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 예를들어 내셔널리그는 1895년에 파울스트라이크로 간주한다고 했으나 아메리칸 리그가 이를 받아들인것은 1903년의 일이다. 그러다가 1902년 최초로 내셔널과 아메리칸 두 리그간에 서로 선수를 빼가지 않는다는 협약이 만들어졌고, 오늘날과 같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사무국이 만들어진 것은 블랙삭스 스캔들이 끝난 1920년 랜디스가 커미셔너로 임명되면서부터 였다.

한편 미국에서 내셔널 리그아메리칸 리그가 가장 큰 인기를 끌게 되자, 자연스럽게 자본도 두 리그에 속한 팀에 몰리게 되었고, 그 결과 다른 리그의 선수들은 유명해지면 저 두리그로 이적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러자 인기가 없어져 폐쇄된 Federal League 소속팀의 구단주가 내셔널 리그와 아메리칸 리그를 반독점법 위반으로 고소했으나 소송에 졌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다른 야구 리그들은 메이저리그에 속한 구단들과 팜리그로서의 계약을 하게 되어 마이너리그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나 당연히 모든 리그가 마이너리그가 된 것은 아니었고 메이저리그와 계약을 맺지 않고 독자적으로 운영하는 리그도 생겨났는데 그게 바로 독립 리그였다.

다시말해 오늘날 종목내에서의 위상은 메이저리그 사무국이 잉글랜드의 축구협회와 비교해도 낮다고 할 수 없지만 초창기 야구에는 잉글랜드의 FA처럼 처음부터 종목을 총괄하는 협회같은건 없었다. 그 결과 과거 미국에는 Union Association, Players' League, Federal League 등등 수 많은 야구 리그가 생겨났다가 몇 년 뒤에 없어지는 일이 계속 일어났다. 이렇게 NFL, MLB, NBA, NHL 등 4대 빅리그가 존재하고, 빅리그의 물량공세와 견제에도 불구하고 자기네끼리 리그를 만들어서 경기하는 일이 흔했으며 이들도 잊을만 하면 반독점법 소송을 걸거나 해서 새로운 리그를 만들려는 시도는 꾸준히 있었다. 메이저리그가 미국 전체를 주관하는 주요 야구 리그가 된 뒤에도 이런 식의 독립적인 리그는 계속 만들어졌고,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독립리그와 같은 형태를 지니게 되었다. 농구미식축구 같은 경우에도 야구와 비슷한 길을 걸었다.

'독립 리그'(Independent League)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쓴 리그 - 정확히는 독립 야구 리그(Independent baseball league)라고 불렀다 - 는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존속한 캐롤리나 리그였으며 이 때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와 관련없다는 점에서 무참히도 Outlaw(무법)리그 라고도 불렸다. 이후 다른 프로스포츠도 활발해지면서 이런 종목들도 독립 야구 리그와 비슷한 형태를 띈 리그들이 생겨났으며 이런 리그들을 독립 리그라고 부르게 되었다.

3. 야구의 독립 리그

해당 국가의 가장 큰 프로야구 리그와는 별도로 다른 팀들이 모여서 하는 리그. 마이너리그와 같은 2군 성격의 팀이 모여서 하는 리그와는 별개로 운영된다. 독립 리그에 참가하는 구단들은 독립 구단이라고 일컬으며, 프로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다뤄지는 프로야구 리그와는 상관없이 자체적으로 운영되는 팀들이다.

미국이나 일본에서 특히 융성하고 있다.

아무래도 각 국의 독립 리그는 정규 리그에 비해 규모가 작은 경우가 많고, 선수의 수준도 뒤떨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규 야구팀이 들어오지 않는 지역에서도 야구를 즐길 수 있게 해 주는 이득이 있는 것도 사실.

독립 리그도 프로 리그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프로와 아마추어 사이에 어중간하게 걸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국내에서 고교나 대학을 졸업한 후 곧바로 미국이나 일본으로 진출했다가 뒤늦게 KBO 리그에서 뛰려고 하는 선수들은 최종 소속 팀과의 계약 종료 시점부터 2년 동안 소속 팀이 없는 유예 기간을 보내야 하는데, 독립 리그에서 뛰는 기간은 소속 팀이 없는 것으로 취급되어 만약 독립 리그 팀에 입단하더라도 유예 기간이 초기화되진 않는다. 이학주하재훈이 대표적인 사례.[3]

3.1. 대한민국의 상황

대한민국의 독립 야구단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파일: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 엠블럼.png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 소속 구단
파일:Yeon_Cheon_ Miracle_logo_2nd.png 파일:파주 챌린저스(NEW-2).png 파일:고양 원더스 엠블럼.svg 파일:성남 맥파이스 소공백 휘장.png
연천 미라클 파주 챌린저스 고양 원더스 성남 맥파이스
파일:가평 웨일스 엠블럼.png 파일:포천 몬스터 엠블럼.png 파일:수원파인이그스_로고.png 파일:0001033208_002_20240223173502529.jpg
가평 웨일스 포천 몬스터 수원 파인 이그스 화성 코리요
해체 구단 ▶
}}}}}}}}}}}} ||
한국야구위원회(KBO)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경험이 있는 성남 투아이센터 야구학교 이상일 사장은 "한국의 독립야구리그 팀은 아카데미(학원)로 규정하는 게 맞다. 미국, 일본의 경우는 선수들이 일정액의 월급을 받는 구조라서 정확하게 독립야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선수가 돈을 지불하고 있는 것은 아카데미다"라고 강조했다.
2018년 KBS 취재 <독립리그 야구팀? 실체는 학원>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 구단별 2023년 후원 및 선수회비 현황 (출처: 각구단)
가평 고양 성남 수원 연천 파주 포천 화성
지자체 지원 없음 없음 700만원[4] 2천만원 3억원 자료없음 자료없음 계획없음
후원 5천만원[5] 1500만원 2천만원 1억2천만원 2천만원[6] 자료없음 자료없음 1억원(예정)
선수 회비 50만원 없음 35만원 35만원 없음 자료없음 자료없음 없음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 구단별 2023년 후원 및 선수회비 현황 (출처: 각구단, 취재:경인일)
엄밀한 의미에서 2024년 현재 대한민국에 독립 야구단은 없다. 한국 "독립야구리그" 팀들은 선수들에게 교육비와 회비를 납부받으며 이는 숙소, 식사, 버스 등 운영 비용으로 쓰인다.[7] 좋게 말하면 야구 레슨장 내지는 유급 코치가 딸린 럭셔리한 사회인 야구. 이것은 직업이라 할 수 없다.

한국독립야구연맹(KIBA)과 독립야구단 경기도리그(경기도야구소프트볼협회)가 갈라선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KIBA측은 직업선수들의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리그를 출범시켰기 때문에 선수에게 돈을 내게 하는 경기도리그의 취지에 동의할 수 없었고, 결국 실질적으로 선수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KIBA쪽이 와해되었다.

물론 야구 아카데미라는게 나쁜 의미가 되지는 않는다. 일본에는 이런 취지의 제대로 된 스포츠 학원법인들이 많다. 일본 사회인에서 재기를 도모하는 미지명자들의 케이스 중 일부 역시 이 쪽이다. 이런 아카데미들에 등록하면 대학들과의 연습 경기나 지역 협회에서 주관하는 야구 대회에 출전해 실적을 내고 제대로 된 유급 선수로서 실업 야구단에 취업할 수도 있다. 경기도리그 소속 독립구단 중 일부는 이러한 일본식 아카데미들과 마찬가지로 선수들에게 스포츠 관련 다른 진로(재활 트레이너, 심판원, 기록원 등)를 소개하고 지원하기도 한다. 문제는 이런 구단들이 학원법인도 아니면서 걷는 돈 만큼의 커리큘럼[8]을 제공해 주는지 모니터링이 되는지 여부고, 어쨌든 이것은 독립 야구단이 아니다.

실질적으로 아카데미인 구단이나, 또는 정말 경기 뛰는 데 필요한 최소 회비를 걷는 구단이나 전부 잘못된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집객 가능한 홈 구장[9]이 없다시피 한 대한민국 상황에서 연 운영비 5억짜리 독립야구단 만들어서 흑자 낼테니 200억짜리 야구장을 새로 지어 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심지어 노는 야구장을 지자체 협조로 거저먹을 수 있는 일본에서조차 그러한 수익 모델은 실패했다.

현재 대한민국 "독립 야구단"이 아마추어 선수에게 소구하는 장점은 최강야구 등 국내 방송을 타고 화제가 될 가능성이 조금 있다는 정도. 물론 프로 구단이 화제성이라는 등쌀에 치여 필요없는 선수를 지명하거나 육성 계약을 맺는 일은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에 스스로 잘 해야만 한다. 다른 장점을 찾자면 어쨌든 국내에서 프로가 아니면 선수로서 몸을 만들고 프로 재진입을 노리기 위해 머물 수 있는 곳이 여기라도 있다는 점이다. 정말 실력에 자신이 있으면 일본 실업을 노려볼 수도 있겠지만 언어장벽과 외국생활, 외국인 신분이라는 다양한 문제는 웬만한 확신이 있어도 극복하기 어렵다.

3.1.1. 역사

2004년 일본프로야구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의 해체 이후인 2005~2007년에 걸쳐 일본 시코쿠간토 등지에 NPB 확대 논의의 대안으로 독립 야구 리그인 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베이스볼 챌린지 리그가 창설된다. 같은 시기 2002년 실업야구 해체, 2007년까지에 걸친 현대 유니콘스의 파행 운영으로 고민이 많던 KBO 리그는 이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지자체와 공공기관의 체육 지원은 거의 축구에 집중되었다.

2011년 허민(기업인)이 일본 모델을 직수입한 독립 야구단 고양 원더스(2011)를 창단한다. 문제는 독립 리그를 구성하기 위한 추가 창단팀이 나오지 않았고, 원더스는 KBO 퓨처스리그에 신세를 지며 3년간 번외전만 치르다가 2014시즌을 마친 뒤 퓨처스리그 가입 불발을 이유로 해체한다.

원더스는 2024년까지를 기준으로 선수단에게 일본에 준하는 소정의 급여를 제공한 처음이자 마지막 독립 야구단이었는데, 홈 구장으로 1,200석짜리 고양 국가대표 야구훈련장에 얹혀 살면서 전경기 유료관중 매진을 기록해도 손익분기점을 맞출 수 없는 환경인데다[10] 원더스가 유료관중으로 수익을 발생시키기 어려운 여건[11]이었던 등 김성근의 기행으로 인한 프로와의 갈등 외에도 구조적인 장애물들이 많았다.

2014년에는 경기도수원시kt wiz를 창단하는 조건으로 도내 인구 40만 이상 도시를 연고지로 한 야구 독립 리그 창설을 내세웠고, 실제로 이를 위해서 연구가 이뤄진 적도 있지만 수익성 문제로 인해 당시에는 독립 리그가 창설되지는 않았다.

2014년 9월 11일 고양 원더스의 해체로부터 5개월 후인 2015년 2월 24일 연천 미라클의 창단식이 2015년 3월 20일 열린다고 발표된다.# 2개월 뒤인 2015년 11월 말에는 한국야구독립리그 창설 추진위원회가 결성돼 2016년 3월 4팀으로 리그를 출범시키고 2017년도부터 점차 팀을 늘리기로 계획한다. # 2016년에는 연천 미라클에 이어 저니맨 외인구단, 파주 챌린저스가 창단되었고 2017년 4월24일에 첫번째 독립리그인 KIBA 드림 리그가 출범한다.

고양 위너스팀이 창단을 준비하였고# 양주 레볼루션이 두번째 독립리그인 경기도 챌린지 리그에 가입한다. 2017년 성남 블루팬더스가 창단하고, 2018년에는 고양 위너스, 양주 레볼루션, 성남 블루팬더스 3팀이 모여 경기도 챌린지 리그를 개막했다. 수원 로보츠는 선수를 모으지 못해 참가하지 못했다. 2019년 리그에서 초대 우승을 차지한 성남 블루팬더스는 프로진출 이라는 궁극적 성과를 못 거두는 등 어려움으로 인해 해체를 결정했다.

2019시즌을 앞두고 양대 독립 리그의 경기도 소속 구단들이 경기도 챌린지 리그로 헤쳐모이며 KIBA가 와해된다. 독립 리그답게 자력으로 리그와 사무국을 꾸리고 스폰서를 받아 발생시킨 매출로 선수단에게 급여를 준다는 KIBA 드림 리그측의 취지는 아름다웠지만 현실성이 없었다. 어쨌든 이 뒤로 한국의 독립 야구단들은 아마협회인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휘하로 들어가 지원을 받고 있고, 프로 지망생들만 모인 좀 특이한 사야팀으로서 운영되고 있다. 일본에서 여기에 대응되는 포맷은 독립 리그가 아니라 사회인야구 클럽 팀이다.

2022년에는 김동연 경기도지사가 독립리그 선수들에게 출전 수당을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취지상 선수들의 회비 부담을 없애주기 위함이다.#

2023년부터는 KBO 리그 측에서 기존의 KBO 챌린저스 직장인 야구 대회를 엎고 스폰서인 문화체육관광부와 동아오츠카를 그대로 들고 와서 KBO DREAM CUP을 개최하며 독립 구단들을 지원하고 있다.

2024년 클럽 현황은 아래와 같다.

3.1.2. 처우

요란했던 고양 원더스(2011)의 후광을 업고 나타난 야구단들이 '독립'이라는 간판을 달고는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선수와 감독과 후원자만 있는 전형적인 아마협회 소속 사회인 클럽이다. 모든 구단 선수들이 무급이고 일부 구단은 회비 납부가 필요하다. 명목상의 홈 구장은 있지만 관중석이 없고, 홈에서 리그도 치르지 않는다. 3월에는 KBO 리그에 신세를 져서 수원, 이천, 서산 등에서 경기를 치르고 KBO가 개막한 뒤에는 모든 구단이 곤지암 팀업캠퍼스에 모여서 시즌을 치른다.

일본에도 무급 리그로 악명 높은 간사이 독립 리그가 있지만 한국의 사례와는 비교할 수 없다. 간사이 리그 구단들은 모두 자기 현에 홈 구장을 가지고 있고 당일권 1,500엔짜리[12] 입장권을 팔아서 유료관중을 유치하며, 리그 사무국 자체적으로 심판원을 수급해 신인 심판 육성을 한다. 한국의 독립 야구단들은 입장수입을 발생시킬 방법이 없고, 사무국과 심판원 문제는 모두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 지원으로 충당하고 있다.

눈높이를 낮춰서 한국의 독립 야구단을 일본의 사회인야구 클럽 팀이라고 본다면 처우는 그렇게 나쁘지 않다. 일본의 사회인 클럽 상당수는 변변한 후원처 없이 십시일반해서 굴러가며 대회 나갈 참가비도 무서워한다. 육성이나 전지훈련같은 건 웃기는 소리. 시합 상대 찾기도 쉽지 않은데 촌구석 팀들이면 개학 시즌에 스파링 파트너를 찾는 대학팀 상대로 몇 경기 하고 나머지 시즌 내내 월 2~3경기도 못 잡고 놀기도 한다.[13] 여기에 비하면 한국의 독립 야구단들은 경기도의 지원과 KBSA 협조로 40경기짜리 리그도 치르고 KBO의 관심도 받고 있어 2주짜리 토너먼트 컵도 무료로 열고 상금도 준다. 그러나 이런 점 때문에 독립 리그의 근본 취지와는 더욱 멀어지고 있다.

열악하다면 열악하지만 성인부 프로 아래에 실업도 클럽도 없이 선출부 동아리 레벨로 떨어져야 했던 한국 야구 현실상 원래 없던 중간 레벨이 생겼으니 없는 것보다야 나아진 셈. 야구가 그렇게 잘나간다는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에도 어차피 독립 리그로 생계를 유지할 거라고 기대하고 야구를 하는 경우는 없다. 샐러리캡이 명시되어 있고 은근히 무명선수들의 연령제한도 따지기 때문에 오래 있을 수가 없다. 그들도 다수는 독립 구단에서 야구에 대한 미련을 천천히 접으면서 건설업이든 운수업이든 다른 쪽으로 취직을 알아본다.

한국의 독립 야구단도 현실적으로 오래 뛰기는 어려운 구조다. 89년생 진야곱가평 웨일스 감독이다. 특별히 연령 제한을 두고 있지는 않지만 경기도리그의 경우 30인 엔트리를 쓰고 있고 구단들도 선수단을 과잉보유하지 않기 때문에 매년 어린 선수들이 문을 두드리는 만큼 나이든 선수들은 자연스럽게 나가야 한다. 급여가 안 나오기 때문에 버티는 데도 한계가 있기 마련이고, 구단 입장에서도 선수를 많이 끌고 다니는 만큼 적자인데 엔트리에 넣지도 않을 선수를 남겨둘 이유가 없다. 보통 3년 정도 버텨 보고 프로에서 문의가 없으면 나간다. 코로나 시즌까지 감안해도 5년을 독립 리그에서, 그것도 고양 위너스 한 팀에서 구른 길나온이 좀 특이한 경우다.[14] 4년 이상 뛴 경우도 황영묵[15]이나 최수현[16] 정도를 제외하면 없다.

독립 출신들이 프로에 가서 잘 될 가능성을 논하기는 어렵다. 밥 먹고 학생 선수 관찰만 하는 스카우트들이 10개 대기업 야구단에서 월급을 받고 있다. 이들이 모두 동시에 놓쳐서 드래프트에서 소외당한 숨겨진 원석이 있겠는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런 선수들은 육성선수 트라이아웃을 하면서 또 프로 판으로 들어간다. 그렇다고 미지명자들이 전부 실패하는 것은 아니지만, 졸업 시즌까지만 해도 아무 매력이 없었지만 그 이후 갑자기 성장곡선이 가파르게 상승세를 그리면서 갑자기 대어가 되는 경우는 그야말로 독립의 기적이 되고, 그 숫자는 해마다 한 명도 안 된다. 황영묵처럼 아예 대학을 중퇴하고 독립리그에 뛰어든 케이스라면 모를까.

물론 독립 출신의 프로 커리어가 쉽지 않은 건 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당장 일본만 봐도 독립리그 출신은 정규 드래프트 지명자든 육성선수 입단이든 카쿠나카 카츠야 한 명을 제외하면 스타플레이어 반열에 든 선수가 전혀 없으며, 미와 마사요시(전 야쿠르트)처럼 1군에서 백업 정도로 오래 버티는 선수만 돼도 대성공 취급을 받는 판이다. 미지명자들이 육성지명을 받고 올라가도 고졸연령이면 3년, 대졸/사회인연령이면 1~2년을 기다려 준다는 통념대로 독립에서 시간을 보낸 선수들은 기다려줄 수 있는 여유가 더 짧고, 성공하기도 어렵다. 미국도 마찬가지라 독립리그 출신은 MLB 로스터에 다시 이름만 올려도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방출자나 미지명자들이 독립 리그를 거쳐 프로에 (재)진입하는 경우 기적이라며 잠깐 띄워주기도 하지만 거기에 해당하는 모든 선수가 한선태처럼 관심을 받는 것은 아니고, 나갈 때는 당연히 관심에서 멀어지며 조용히 사라지게 된다. 섭섭하겠지만 계약금 받고 지명된 선수들도 웨이버 클리어되면 똑같이 잊힌다.[17]

안타깝게도 위에 표시한 몇몇 기사를 제외하면 매체나 팬들이나 독립 리그의 열악한 현실에 대해서는 별반 관심이 없다.

3.2. 미국 야구 독립 리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독립 리그/미국 야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3. 일본 야구 독립 리그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독립 리그/일본 야구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4. 기타 종목

미국에서 야구를 제외하고 반독점법에 걸리던 모든 스포츠의 경우 작게나마 꾸준하게 독립리그가 활동하고 있다.

가장 독립리그 활동이 많은 스포츠는 다름아닌 미식축구. NCAA에서 엄청난 양의 풋볼 선수가 쏟아지지만 이를 흡수하는 NFL의 규모가 전체 드래프트신청자의 5%도 되지 않을만큼 바늘구멍이기 때문에 이들을 받아줄 독립리그의 필요성이 많았고 꾸준하게 수요는 있었다. 대표적인 독립리그로는 실내 미식축구 리그인 아레나 풋볼 리그와 캐나다 기반의 CFL이 있으며, 빈스 맥마흔이 창설한 XFL도 존재한다.

역사는 짧았지만 독립리그로 강한 족적을 남긴 리그로는 농구의 ABA가 있다. 한때 NBA와 대등한 레벨까지 올라갔지만 돈 싸움과 미디어의 경쟁에서 패해 결국 NBA에 흡수합병되고만 비운의 리그.

그리고 2014년 한국독립아이스하키리그가 창설되었다.

5. 기타

축구의 경우에는 전세계의 축구를 관리하는 FIFA와 그 산하단체인 AFC, 다시 그 산하단체인 대한축구협회 이런식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선수 이적 등에 관해서도 공통된 룰을 따르게 되는데[18] 다만 독립 리그는 아니지만 독립 국제 연맹인 ConIFA 같은 조직이 있어서 독자적인 세계 대회를 개최하기도 한다. 또한 독립리그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니라서 잉글랜드 축구사 초창기에 존재했던 풋볼 얼라이언스[19] 같은 사례가 있다. 미국의 야구나 농구 같은 경우는 전 세계적인 관리 기구가 존재하지 않으므로 각 나라별, 리그별로 독자적인 운영 시스템으로 돌아가게 된다.[20]

한국에서는 '미국식 폐쇄형 독립 리그'라며 간혹 이런 시스템을 독립 리그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원래 영어의 Independent League라는 말은 이런 의미로 사용하지 않으며, 이런 경우 독립 리그는 폐쇄 리그(closed league)라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이런 리그는 대체로 선수 영입 및 방출 절차가 독자적인 운영 방식을 거치며 타 리그와의 선수 이동의 제약이 심한 경우가 많아서 웨이버 공시, 지명할당 등 여러가지 신분의 변화가 존재한다.
[1] 1891년 폐쇄. 다만 여기 참가한 팀중 여럿이 내셔널 리그에 합병되었다. 신시내티 레즈, 브루클린 다저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등.[2] 처음에는 아예 볼넷이 없었다가 9볼이 되고 다시 8->6->5볼로 바뀌고 나서야 지금의 볼넷이 되었다. 다른 규칙들도 이런식으로 계속 바뀌어 갔다.[3] 하재훈의 경우 컵스를 떠난 뒤 일본 독립 리그로 진출했다가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하면서 유예 기간이 리셋된 바 있다.(야쿠르트에서 퇴단한 시점부터 다시 유예 기간 계산.)[4] 상당의 물품[5] 지역 체육회 지원[6] 상당의 물품[7] 지자체에서 파격적인 후원을 하는 연천 미라클이나 비영리 구단인 고양 위너스 등 몇몇 구단은 이 문제에서 열외다.[8] 해체한 과거 구단을 제외하면 한국 독립 리그의 회비는 말 그대로 밥값과 공 값을 십시일반 하는 수준으로, 2023년 현재 아카데미 수준의 교육비를 걷는 구단은 남아있지 않다. 일본에서 아카데미 입학을 하려면 연간 학비로만 1,200만원이 깨진다.[9] 일본의 경우 2차대전 패전 이후 폐허가 된 지역들을 재건하면서 상당히 많은 현에 콘크리트 스탠드를 가진 1만석 규모 야구장들이 지어졌다. 한편 한국은 일본 고교 야구부의 1/10도 안되는 규모로 지역별 야구장은 고사하고 2024년 현재 인구 60만이 넘는 시흥시에 종합운동장 하나 없는 형편이다. 참고로 일본의 독립 리그 구단들은 손익분기점을 유료입장관객 평균 1500명 선으로 본다.[10] 롤 모델이 되는 일본의 경우 2차대전으로 전국토가 황폐화된 이후 재건사업 차원에서 지은 1만석 이상 규모의 빈 야구장들이 일부 현들에 있어서 야구단 사업을 차릴 최소한의 여건은 갖추고 있다. 한국의 경우 당시 빈 야구장은 수원 야구장 하나밖에 없었고 이마저도 프로 유치 계획이 있었다.[11] 퓨처스 팀들이 당연히 반발했고, 유료관중을 받되 입장수익을 야구계에 기부하는 쪽으로 합의를 봤다.#[12] 물론 비인기 리그이기 때문에 정가에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예매시 1,300엔.[13] 일본 사회인야구 클럽팀 중에서도 가장 안정적인 팀은 결국 기업 산하 클럽팀이다. 이 팀들은 평일에는 하루 종일 업무만 볼 뿐이지 사실상 기업팀이나 다름없는 수준의 안정성을 갖고 있다. 실제로 이런 팀에서 프로야구 지명자가 나오기도 할 정도니 말 다한 셈. 물론 여기에 소속된 선수들은 거의가 엘리트 선수들이라 직접적인 비교는 어렵다.[14] 단, 길나온은 본인의 잘못된 처신 때문에 프로 복귀가 사실상 불가능한 점도 있었고, 부모님이 돈이 꽤 있어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편이다 보니 마지막까지 돈을 못 벌면서 고생해도 생계에 지장이 덜 갔다. 실제로 일본이든 미국이든 경제적으로 좀 여유가 있는 선수가 독립 리그나 마이너리그에서 오래 버티는 경우가 더 많다.(미국에서 상위 라운더에게 계약금을 퍼주는 데는 마이너리그에서 돈을 거의 못 벌 때 계약금으로 먹고 살고 개인 훈련 하라고 많이 주는 것도 있다.)[15] 이쪽은 애초에 대학 중퇴자 신분이라서 KBO 리그 드래프트 트라이아웃을 신청하거나 육성선수로 입단할 수 없었다. 규정상 대학 중퇴자는 동기 선수들이 대학 졸업 후 드래프트에 참가하는 해가 돼야 드래프트 신청서를 낼 수 있기 때문. 여기에 황영묵은 중퇴 후 군대까지 갔다 와서 드래프트 참가 가능 시점이 더 늦어졌기에 독립리그에서 오래 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16] 2021년부터 연천 미라클 한 팀에서 뛰고 있다.[17] 얼마 못 가서 방출되어 사라진다고 해도 잊혀지지 않으려면 1라운더 급은 되어야 한다. 그나마도 평범한 1라운더면 자기네 팀의 열정적인 팬들이나 기억해주고, 여러 팀에서 경합을 할 정도의 전국구 1라운더 정도는 되어야 전국적으로 기억을 해 주는데, 이 정도면 솔직히 나쁜 말만 더 많이 나와서 잊혀지는 게 차라리 나을 정도. 예를 들면 사이토 유키김주형 같은 사례가 있다. 물론 이 두 사람은 기대치보다 한참 못 해서 그랬지 1군 경기에도 자주 나왔고 각자 1년 정도는 꽤나 활약한 시즌이 있었으니 1군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사라진 선수들과 비교하는 것은 실례다.[18] 그렇다고 FIFA에서 각 회원국의 리그에 일일이 간섭하는 것은 아니다. 한동안 돌았던 '10개 팀 미만인 리그는 FIFA에서 인정하지 않는다'라는 설에 대한축구협회가 적극 해명했던 이유.[19] 1889년 출범, 1892년 잉글랜드 2부리그로 편입.[20] 야구의 경우 세계야구소프트볼총연맹인 WBSC가 있긴 하지만, WBSC는 FIFA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위상이 낮고, 이런 규정을 만들지도 않는다.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