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6:43:37

김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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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치선
金致善 | Kim Chi-sun
파일:김치선 목사.jpg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초명 김억만석(金億萬石)
고봉(高峯)
출생 1899년[1] 음력 8월 10일[2][3]
함경남도 함흥군 동명면 서호리[4] 서호진
(現 함경남도 함흥시 흥남구역 서호일동·서호이동)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사망 1968년 2월 24일 (향년 68세)
직업 목사
학력 함흥 영생중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 졸업)
평양신학교 (중퇴)
고베중앙신학교 (졸업)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학 / 석사)
달라스 신학교 (구약학 연구과 / 박사[5])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주요 신력3. 생애
3.1. 유년기와 학창시절3.2. 유학 및 전도 활동3.3. 국내 전도 및 대한신학교 설립3.4.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설립
4. 이모저모
4.1. 김구와의 인연4.2. 손양원 목사와의 인연4.3. 박형룡 목사와의 인연4.4. 박태선과의 인연
5. 여담6.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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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팔천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6]
-그가 전개했던 우물파기운동의 슬로건-
"내가 한국에서 얻은 유일한 소득은 김치선을 얻은 것이다."
- 영재형(Luther Lisger Young) 선교사 -[7]

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목사. 3.1 운동에 참여해 투옥된 공적을 인정받아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영실 박사와 함께 안양대학교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고 안양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신학교의 설립자이자 2대 교장[8]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를 세운 목사이자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한국의 예레미야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삼백만 전도 운동을 펼친 것으로 개신교계에서 유명하다.

2. 주요 신력[9]

  • 고베중앙교회 담임목사
  • 도쿄 신주쿠중앙교회 담임목사
  • 도쿄 메구로교회 개척 및 담임목사
  • 남대문교회 담임목사
  • 장로교 야간신학교 설립
  • 창동교회 개척 및 담임목사

3. 생애

3.1. 유년기와 학창시절

1899년 음력 8월 10일 함경남도 함흥군 동명면 서호리 서호진(現 함흥시 흥남구역 서호일동·서호이동)에서 아버지 김영준과 어머니 최현숙 사이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영준은 본래 선박 40척을 가진 부호였지만 태풍으로 할아버지를 비롯해 재산까지 잃어 가족 모두가 화전민으로 전락했다. 이에 가족들은 모두 장진군 신남면[10] 연직리(現 장진군 늪직리)로 이주해 이곳에 본적을 옮겼으나, 김치선은 서당 선생 김응보가 만류하여 고향 서호리에 남아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캐나다 장로회 소속 루터 영(Luther Lisgar Young, 한국명 영재형榮在馨, ? ~ 1950. 2) 선교사[11]가 서호진을 방문하였다. 이때 김응보의 추천으로 김치선은 1916년부터 함흥에서 영재형 선교사에게 길러지며 공부할 수 있었고, 이후 김치선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영재형 선교사는 함흥군 함흥면 신창리(現 함흥시 서문동)에 집을 마련해 김치선 가족이 함흥에서 모여 살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었다. 그렇게 김치선은 영재형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던 영생중학교에 입학했다.

영생중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함흥군 함흥면에서 이근재(李根裁)의 권유로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참여하기로 했고, 이튿날인 3월 2일에 조영신(趙永信)이 원산부에서 가지고 온 기미독립선언서 3천여 매를 동지들과 함께 인쇄하고, 동시에 태극기 18매를 제작했다. 다음날인 3월 3일에는 함흥면 풍양리·풍서리(現 함흥시 삼일동)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와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배포한 뒤 군중 수백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파일:김치선(1899).jpg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12]

그 뒤 체포된 김치선은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에 상고했으나 9월 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위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선고 당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며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으며, 1920년 4월 28일 특별사면으로 출옥했다. 그 뒤 영재형 선교사의 지원 아래 영생중학교에 복학해 23세 되던 1922년 3월 13일 졸업했고, 연희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23년, 캐나다계 한국인이었던 영재형 선교사가 영생중학교 교장에 재직한다는 것에 지역민들이 불만을 품고 영생중학교에 불을 질러[13] 김치선은 사망 위기에 놓인 영재형 선교사를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겨우 구했다. 은혜를 보답받은 영재형 선교사는 매우 감격하며 김치선을 양자로 삼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14]

1927년 3월 7일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가 되려고 했으나, 재일교포들을 전도하려고 했던 영재형 선교사의 호출을 받아 평양신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중앙신학교로 편입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을 시작하고, 31세 되던 1930년 2월 23일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하며 목사 안수를 받았다.

3.2. 유학 및 전도 활동

이후 영재형 선교사가 주선하여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수학하며 1933년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5년에는 텍사스 댈러스 신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귀국해 고향 서호진에서 목회 활동에 종사했으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심해지자 1937년 8월 가족과 함께 영재형 선교사가 살고 있는 일본 고베시로 떠났다.[15] 정착 후 고베중앙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활동을 시작하였고, 민족주의적인 설교로 당시 재일교포들과 불신자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목사와 교인 모두 교회에서 한복을 입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도 순회목사 자격으로 설교를 자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이 시행되고 나서 사상범으로 구속되고, 일본어로만 설교하라고 강요받았다. 또, 도쿄 신주쿠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된 이후 그의 열광적인 인기를 질투해서 당회장직을 탈취하려는 다른 목사들이 많았고, 할 수 없이 개척해 두었던 메구로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되어 목회를 하였다. 또한, 영재형 선교사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이후 일본에게 강제 출국조치되었다.

3.3. 국내 전도 및 대한신학교 설립

일본 제국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할 징조가 보이자 해방을 직감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전도 활동을 시작한다.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되어 제6대 담임목사로 위임되었고, 일제가 패망하여 1945년 광복이 되자 정부의 핍박이라는 장애물이 사라졌기에 전도에 모든 힘을 매진한다. 당시 한반도 인구 3천만 명이 십일조 300만 환을 낼 수 있도록 [16] 한반도 각 지역의 마다 교회를 세우자는 '삼백만 전도 운동'이라는 대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나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에서 '한국의 예레미야'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는 이러한 대부흥운동을 전개하면서 제자 양성의 필요성을 느껴 남대문 교회에서 장로회야간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신학교를 개교하여 제2대 교장으로 재직했다.

그 기쁨도 잠시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하여 미처 피난가지 못한 목사와 교인들이 조선인민군 치하에서 '기독교연맹'이라는 어용단체에서 이용당하지만 공산군에게 이용당하기 싫었던 김치선 목사는 부산으로 피난하였고,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부산중앙교회에서 생활하였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문교부에서 4년제 신학교 인가를 받아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의 어원이 되는 '대한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개칭했다. 그리고 1951년부터 1960년까지 장로교총회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임하며 구약학, 신약학,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 사이 1955년에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소문동[17] 58번지에 거주했다.#

3.4.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설립

그러다 큰 위기가 찾아왔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가 남산대한신학교 땅을 빼앗아 그 자리에 KBS 방송국, 중앙정보부 청사를 지어버렸다. 학교를 빼앗긴 김치선 목사는 난감해하다가 반WCC단체인 ICCC(국제기독교연합)의 칼 맥킨타이어 총재를 만나 한국에서 성경장로회를 창립한다는 조건으로 용산구에서 신학교 건물을 매입했다. 그 후 김치선 목사는 더 이상 외국의 선교비를 받지 않고, 한국 내의 자본으로 대한신학교 중흥의 길을 나섰는데, '한국인에 의해, 한국인의 돈'으로 대한신학교 건물을 세우려고 했다. 나름 '한국인의 힘으로 세워진 자생교단'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웠다.

이후 ICCC와 한 계약 내용에 따라 1961년 마두원 선교사와 함께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를 설립하고 총회장직에 선출되었고,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는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이하 예장대신)으로 개칭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가 극심한 분립 과정을 겪는 동안, 예장 대신은 순전히 김치선 목사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단이라 예장 계열 교단 중 분립 과정과 상관없는 자생 교단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후 뇌암 판정을 받고 병세 악화로 1968년 2월 24일 사망하였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4. 이모저모

4.1. 김구와의 인연

남대문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던 시절, 김구는 남대문 교회의 교인이었다. 상술했듯이 김치선 또한 민족주의적인 설교를 자주했던 독립운동가였기에 굉장히 막역했던 사이였다. 김구의 아들 김신의 주례도 김치선 목사가 서주었을 정도였다.

그랬기에 이승만은 김치선 목사를 요주의 인물로 생각하고 감시했다.[18] 이승만 정부 시절 난데없이 형사들이 집에 들이닥쳐 인천구치소에 연행했다가 풀어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대신측 목사들이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을 띄는 경우가 많은 이유가 김구의 영향이 컸다고 봐도 된다. 이승만 정부나 박정희 정부나 김치선 목사와 대한신학교를 핍박한 전력이 있기에 김치선 목사와 김구의 인연이 없었더라면 대신은 정치는 진보적이되 신학은 보수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4.2. 손양원 목사와의 인연

김 목사가 귀국하여 1945년 3백만 부흥 운동을 펼칠 때 손양원 목사가 강사로 참여할 정도로 매우 좋은 사이였다고 한다.# 게다가 손양원 목사뿐만 아니라 박재봉[19], 배은희[20], 김인서[21], 이성봉[22] 등 여러 부흥사들이 강사로 참여하였다. 당시 김치선 목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그래서 김치선 목사는 손양원 목사가 아들을 잃자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김치선 목사와 손양원 목사의 관계가 현재까지 이어져, 예장 대신은 예장 통합과도 관계가 원만한 편이다. 다만 신학 성향이 약간 다르다보니 종교계 관련 이슈에서는 의견차가 꽤 있다.

4.3. 박형룡 목사와의 인연

일제강점기 당시 신사참배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숭실대학교 교수이자 목사였던 박형룡 목사가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던 김치선 목사에게 일본으로의 피신을 위해 편지를 보냈고 김치선 목사는 주택을 매입해 그를 위한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인연 덕분에 박형룡 목사와 김치선 목사는 이후로도 형제지간처럼 지냈다고 한다.

박형룡 목사는 광복 이후로도 숭실대학교 교수로 일하였고,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신학을 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지만, 숭실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할 때 300만 환 규모의 사기를 당해버려 숭실대학교에서 축출당했다. 결국 박형룡 목사는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WCC 반대를 내세우며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가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총신대학교를 세운다. 그리고 예장 대신을 따라 ICCC에 가입했다.

김치선 목사와 박형룡 목사의 관계가 각자의 교단으로 내려와 예장 대신과 예장 합동의 관계는 현재도 돈독한 편이다. 김치선 목사가 사하고나서 예장 대신이 ICCC에서 탈퇴할 때, 예장 합동도 ICCC의 정책이 교단의 방향성과 안 맞는다는 이유로 같이 탈퇴했다. 둘다 보수 개혁주의 장로회 신학을 내세우고 있어서 학술, 목사 청빙 등에서 교류가 잦다.

2018~2019년에는 공교롭게도 총신대학교의 사유화 논란이 터져버리자마자 안양대학교에 대진성주회 매각 논란이 터져버렸기에 총신대 신학생들과 안양대 신학생들의 교류가 있었다.

4.4. 박태선과의 인연

1953년 한국 전쟁이 휴전되고 김 목사는 서울로 돌아와 서울특별시 중구 남창동 10번지에 '창동교회'를 설립하고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는데 과거 시무했던 남대문교회 성도들이 김 목사가 창동교회를 개척했다는 소식에 따라왔다. 그 성도들 중 한 사람이 훗날 사이비 종교 천부교의 교주가 되는 박태선 집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 집사는 봉사와 친교에 충실하고 성도들과 교역자 간의 관계도 아주 돈독하여 창동교회의 공동의회에서 장로로 선출되었다.

장로안수를 받은 박 장로에게 김 목사가 "많은 은혜를 받다보면 자칫 교만하여 탈선할 수 있으니 대한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해보라." 하고 권유했지만, 본업에 바빴던 박태선이 미루고 미루면서 당대 부흥사들의 부흥 집회를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성령의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여 일개 장로가 안수기도를 하니 실제로 많은 환자가 치료되어 그 인기(?)로 1955년 3월 28일 남산 조선신궁 터 광장 (현재 남산공원)에서 열린 부흥집회가 많은 교회의 목사들의 지원으로 열렸고, 참석자 가운데 기적을 경험한 성도들이 귀중품과 식료품을 바치고 박태선의 인기는 급상승하면서 교리가 변질되자 김 목사는 결국 박태선을 제명처분했다. 김치선 목사는 자신의 교회의 독실한 장로가 사이비 교주로 타락하자 안타까워했다.

박태선이 세운 천부교가 개신교계에 계속해서 막대한 피해를 끼치자[23] 일부 개신교계[24]는 김치선 목사가 박태선 장로를 통제하지 못해 천부교가 세워졌다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김치선 목사가 박태선을 방조한 게 아니라 대한신학교에 입학하라며 정통 신학을 배우라고 권유했지만 박태선이 마음대로 엇나간 거라서 김치선 목사의 실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개신교계 전체는 이러한 비판을 억까로 받아들이고 있다.

5. 여담

아들로는 김세창 목사가 있다. 하지만 김치선 목사와 다르게 김세창 목사는 예장대신에게 잊고 싶은 역사로 취급받는다.

둘째 딸인 김동화 씨는 대한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수년간 강의하였다. 최순직 목사와 결혼하였고 201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2020년 8월 13일 사망하였다.

6. 같이 보기



[1] 1955년 간행된 대한연감 4288에는 1898년생으로 기재되어 있다.[2]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등 참조. 양력 9월 14일.[3] 10월 6일생이라고도 한다.[4] 1919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참조.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함흥군 서호면 서호리가 되었고, 1930년 함주군 서호면 서호리, 1939년 함주군 흥남읍 서호리, 1949년 흥남시 서호동, 현재 함흥시 흥남구역 서호일동·서호이동.[5] 국내 최초 Th.D. (신학박사) 학위 취득[6] 대한민국의 모든 읍동리(약 28000개)의 지역사회에 녹아들어 교회를 개척하라는 뜻이다.[7] 후술할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김치선에게 있어 양아버지 같은 존재였다.[8] 초대 교장은 평양여자신학교 교장을 지냈던 윤필성 목사[9] 신력은 교회 사역 약력을 의미한다.[10] 본래 군내면(동문면) 읍상리에 있던 장진군청이 제3장진호(낭림호) 건설로 인해 수몰되어 1938년 신남면 경하리로 이전해 오면서 장진면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1] 캐나다계 한국인. 에큐메니컬 운동의 일환으로 당시 캐나다 교회는 서로 연합했는데, 캐나다 연합교회에 합류하지 않은 잔류파 캐나다 장로교회에 소속된 철저한 개혁주의자 선교사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의 신학적 정체성이 이 선교사의 신학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생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였다.[12] 옷에 붙어 있는 이름표를 보면 알겠지만, 이 당시에는 개명하기 전 이름인 김억만석(金億萬石)을 쓰고 있었다.[13] 당시의 심각한 순혈주의는 혈통적으로 황인 한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매우 배타적이었다. 이는 백인에게도 예외가 없었다.[14] 영재형 선교사는 지역민들에게 배푼 은혜가 배신으로 돌아오는 것에 엄청난 충격을 얻었고 아내 또한 이 충격으로 홧병을 얻어 죽자 정신적으로 견딜 수 없었기에 잠시 캐나다로 휴양하러 다녀온다.[15]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일본 본토로 간 이유가 있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조선인에게 신사참배를 극심하게 강요한 반면, 일본 본토에서는 덜 했기 때문이었다. 조선인이 대다수일 수밖에 없는 조선에서는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꺾으려는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더욱 강요했다.[16] 당시엔 십일조는 자금난이 심했던 교회 운영에 있어서 구세주 같은 것이었다. 헌금을 강압적으로 내라는 의미도 아니었다.[17] 1975년 중구 관할이 되었다.[18] 공교롭게도 이승만은 한국인(조선인) 최초로 박사 학위(Ph.D)를 취득한 사람이고 김치선 목사는 한국인 최초로 신학 박사 학위(Th.M)를 취득한 사람이다.[19] 감리회의 대표적인 부흥사로 회자되는 목사[20] 전북 지역에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저항파 민족주의 장로회 목사 2명 중 하나이자 대한국민당 총재를 지냈던 정치인[21] "조선은 조선 사람의 조선이니 조선 사람이 통치해야 한다." 하는 명언을 남겼고 민족교회론은 설파하여 개신교의 독립운동을 지도한 목사[22] '한국의 무디'라고 불렸던 독립운동가이자 성결교회의 대표적인 부흥사[23] 1950~60년대의 천부교는 지금의 신천지보다 규모가 더 컸고 사회에 끼치는 해악도 더욱 컸다. 하지만 박태선이 죽고나서 방향성을 잃은 천부교는 신도들이 뿔뿔히 흩어져 교세가 지리멸렬해졌다. 한편 천부교 출신인 이만희는 신천지를 세운다.[24] 합동과 대신이 돈독한 관계를 맺고있기에 합동에게 원한을 갖고있던 일부 고신, 통합측 목사들이 대신을 비판하려고 이 레퍼토리를 사용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