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 1913년 2월 11일 |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 송내리 (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1리 바래미마을[1] 740번지)[2] | |
사망 | 2009년 7월 30일 (향년 96세) |
경상북도 경산시 경산병원[3] | |
본관 | 의성 김씨[4] |
자 | 순부(純夫) |
학력 | 내성공립보통학교 (졸업) |
가족 | 배우자 류삼종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123호 |
상훈 |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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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2. 생애
1913년 2월 11일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 송내리(현 봉화군 봉화읍 해저1리 바래미마을 740번지)에서 아버지 가석(可石) 김창한(金昌翰, 1892 ~ ?.3.11.)[5]과 어머니 안동 권씨(? ~ 1949.1.2.)[6] 사이에서 2남 6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후 내성면 해저리 737번지로 주소지를 옮겼다.[7] 1927년 3월 내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3년간 집에서 독학하였다. 1930년 가을부터 교사 출신으로 미곡상 및 언론인으로 종사하던 21촌 지간의 족숙(族叔) 김창신(金昌臣)[8]으로부터 아나키즘 관련 서적을 건네받아 읽게 되면서 아나키즘 사상을 전수받게 되었다. 1931년 8월 경상남도 부산부로 가서 약 1년간 방랑생활을 하다가 1932년 8월 귀향하여 특별한 직업없이 줄곧 집에서 지냈다.1932년 11월 말에는, 김창신의 집에서 김창신과 18촌 지간의 족제(族弟) 김덕기, 또다른 집안 형제 김중헌(金重憲)·김중렬(金重烈), 김동열(金東烈)과 만나 일본 제국의 식민통치를 타도한 뒤 사유재산 제도와 봉건적 불평등이 소멸된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목적으로 아나키즘 비밀결사 흑색청년자유연합회(黑色靑年自由聯合會)를 조직하였다. 이후 이들은 『자유연합신문』, 『흑기혁명단상(黑旗革命斷想)』 등 관련 서적과 신문을 구독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연구·토의하는 한편 1933년부터 봉화군 내성면과 물야면 일대에서 사방공사(砂防工事)에 종사하는 인부들을 대상으로 항일 및 전쟁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을 펼쳐 동지를 포섭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던 1933년 4월 6일, 자택에서 김덕기·김창엽(金昌曄)·김창선(金昌先)·권헌(權憲) 등과 함께 있던 중, 같은 동네에 살던 17촌 지간의 족숙 김창정(金昌鼎, 1911 ~ ?)[9]이 찾아와 4월 2일에 있었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김창정은 그날 저녁 내성면 도촌리의 김정옥(金正玉)이 경영하던 음식점에서 술을 마시다가 권시약(權時鑰, 1910 ~ 1950.4.7.)[10]과 싸우게 되었고, 급기야는 권시약과 김정옥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것이다. 권시약은 물야면 사방공사(砂防工事) 현장의 노역 책임자로 일본 제국의 밀정으로 활동하던 자였다. 이에 크게 분노하여 자리에 함께 있던 김덕기·김창선 등 10여 명의 동네 청년과 함께 치욕을 씻고자 권시약·김정옥 등을 구타·응징하여 복수하기로 결심하였다.
4월 8일,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김창선 등 10여 명과 함께 내성면 해저리 김응출(金應出)의 집에 모였고, 이어 오전 10시에 그곳을 출발하여 내성면 적덕리 정숙이(鄭淑伊)의 집에 들러 술을 마시고 기세를 돋구었다. 그리고 정오가 되자 권시약의 집에 일제히 몰려들어 가서 처음에는 시정을 요구하였으나, 나중에는 "때려라, 끌어내라"며 소리치며 방으로 들어가 권시약을 구타하였고, 이어 다른 이들이 끌고 온 김정옥 또한 구타하였다.[11]
한편, 1933년 5월부터 물야면 북지리 사방공사 현장에 인부로 출근하였는데, 같은 달 20일부터 21일 사이에 공사 담당자측에서 앞으로 공사에 참여하는 인부들은 출근할 때 지게를 지참하지 않으면 근무할 수 없다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5월 23일 김창선 등 같은 동네 청년 10여 명과 함께 일부러 지게를 지참하지 않고 공사 현장에 갔고, 미리 통지한 바와 같이 근무에 투입되지 못하고 거절당하였다. 이에 같은 날 오전 10시에 지게를 지참하지 않아 문전박대당한 다른 인부 수십명과 함께 사방공사 조장 김두련(金斗鍊), 기술자 유신목(兪信穆)에게 근무에 투입시키든지 아니면 임금을 지불하라며 윽박지르고, 만약 응하지 않으면 때려 죽이겠노라고 협박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이 일로 인하여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던 중 흑색청년자유연합회의 주도격 인물임이 발각되었고, 김창신·김덕기·김중헌·김동열 등 다른 회원 15명 또한 5월 말에 차례로 봉화경찰서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다.
1933년 7월 17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김창신·김덕기·김중헌·김동열과 함께 구속 송치되었고[12], 1933년 10월 14일 및 1934년 1월 16일, 두 차례에 걸쳐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류 갱신이 결정되었다.[13] 1934년 2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14] 1934년 4월 2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 공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18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고[15], 이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934년 5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주거침입죄,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건 위반 혐의에 대해 공소 이유 없음으로 공소가 기각되었다.[16] 이에 곧 상고를 제기하였다가 이튿날인 1934년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상고를 취하하면서[17] 결국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6년 5월 13일 만기출옥한 후에는[18] 은거하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대통령표창을 수상하였고,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훈하였다. 2009년 7월 30일 새벽 2시 30분에 경상북도 경산시 경산병원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19] 2009년 8월 1일 배우자 풍산 류씨(豊山 柳氏) 류삼종(1909 ~ ?.2.13.)[20]과 함께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안장되었다.
[1] 의성 김씨 개암공파(開巖公派) 집성촌이다. 입향조 팔오헌(八吾軒) 김성구(金聲久)는 김중문의 10대조이다. 독립유공자 김뇌식·김덕기·김창신도 이 마을 출신이다.[2] 독립유공자 공적정보 기준. 1934년 2월 27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 등 기록에는 737번지로 기재되어 있다.[3] 국립대전현충원묘적부에는 경기도 용인시에서 사망한 것으로 등재되어 있다.[4] 개암공파(開巖公派) 34세 중(重) 기(基) 주(周) 항렬.[5] 자는 운상(雲祥).[6] 명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충재(冲齋) 권벌의 후손으로, 권응연(權膺淵, 1864 ~ 1914.1.4.)의 차녀이다.[7] 1934년 5월 9일 대구복심법원 수형인명부[8] 1925년 3월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 강습과 졸업 후 교사로 근무, 1930년 퇴직. 내성면에서 미곡상 경영, 조선중앙일보 봉화지국장, 동아일보 봉화지국 기자 겸임[9] 이명 김도길[10] 안동 권씨 복야공파(僕射公派) 두원(斗元)계 35세로, 명종 때 병조판서를 지낸 충재(冲齋) 권벌의 15대손이다. 자는 을수(乙壽).[11] 정확히는 김창엽(金昌曄)이 권시약의 왼뺨과 오른뺨을 손바닥으로 각각 한 대씩 때렸고, 김창선(金昌先)과 권헌(權憲)이 김정옥의 왼뺨과 오른뺨을 손바닥으로 몇 대 때렸고, 발로 볼기를 걷어찼다.[12] 1933년 7월 19일 동아일보 기사. 다른 7명은 불구속 송치되었다.[13] 1933년 10월 14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 1934년 1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14] 1934년 2월 27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15] 1934년 4월 2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 판결문[16] 1934년 5월 9일 대구복심법원 집행원부[17] 1934년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사건부[18] 1936년 4월 16일 동아일보 기사[19] #[20]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서애(西厓) 류성룡의 후손으로, 류도상(柳道庠)의 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