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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신(1904)

<col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904년[1] 1월 14일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 송내리
(현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해저1리 바래미마을[2] 691번지)[3]
사망 2002년 5월 25일 (향년 98세)
사망지 미상
본관 의성 김씨[4]
초명 김응수(金應壽)
인재(隣哉)
학력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 (강습과 / 졸업)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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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독립유공자. 양아버지 김헌식 또한 독립유공자이다.

2. 생애

1904년 1월 14일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면 송내리(현 봉화군 봉화읍 해저1리 바래미마을 691번지)에서 아버지 희당(希堂) 김한식(金漢植, 1878 ~ 1941.6.23.)[5]과 어머니 안동 권씨(1875 ~ 1953.12.3.)[6] 사이에서 3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5촌 당숙(堂叔)인 운당(雲塘) 김헌식에 입양되었다.

1925년 3월 경상북도공립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한 뒤 1925년 3월 31일부터 1929년 8월 30일까지 대구수창공립보통학교에서 훈도(訓導)로 근무하였고, 1929년 8월 31일 칠곡군 신동공립보통학교로 전근하였다. 교직에 있을 시절부터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상호부조론』, 『아나키스트혁명』, 『근대과학과 무정부주의』, 『무정부주의의 조직론』, 『계급투쟁론의 오류』 등 아나키즘 관련 서적을 즐겨 읽으면서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하는 아나키즘에 심취하게 되었다. 아나키즘이 정치적으로는 지배-피지배의 관계를 인정하지 않고, 경제적으로는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를 추구한다는 것을 알고 이러한 사회의 실현을 지향하게 되었다.

1930년 5월 19일 교직에서 퇴임한 뒤 낙향했고, 1년간 농업에 종사하였다. 1931년 6월 13일 동아일보사 봉화지국 기자에 임명되어[7] 활동하다가 1932년 1월 4일 사직하였다.[8] 또한 1931년 12월부터 1932년 4월 말까지 조선중앙일보 봉화지국장으로도 재직하였다. 1932년 10월부터는 내성면에서 미곡상을 경영하였다.

한편, 1930년 가을부터 21촌 지간의 족질(族姪) 김중문·김덕기와 또다른 족질 김중헌(金重憲)·김중렬(金重烈), 김동열(金東烈) 등에게 아나키즘 관련 서적을 건네준 뒤 아나키즘 사상을 전수해주었다. 그리고 1932년 11월 말에는, 자택에서 위 5명의 족질들과 만나 일본 제국의 식민통치를 타도한 뒤 사유재산 제도와 봉건적 불평등이 소멸된 절대적으로 자유롭고 평등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목적으로 아나키즘 비밀결사 흑색청년자유연합회(黑色靑年自由聯合會)를 조직하였다. 이후 이들은 『자유연합신문』, 『흑기혁명단상(黑旗革命斷想)』 등 관련 서적과 신문을 구독하며 아나키즘 사상을 연구·토의하는 한편 1933년부터 봉화군 내성면과 물야면 일대에서 사방공사(砂防工事)에 종사하는 인부들을 대상으로 항일 및 전쟁에 반대하는 선전활동을 펼쳐 동지를 포섭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던 1933년 4월 8일 김중문과 김덕기 등이 10촌 지간의 족제(族弟) 김창정(金昌鼎, 1911 ~ ?)[9]을 폭행한 권시약(權時鑰, 1910 ~ 1950.4.7.)[10]과 김정옥(金正玉)을 보복 폭행한 사건에 연루되었고, 이어 5월 23일 김중문이 물야면 북지리 사방공사장에서 난동을 부린 사건으로 일본 제국 경찰에 체포되었는데, 조사를 받던 중 이 과정에서 흑색청년자유연합회의 조직이 발각되었다. 결국 그 또한 5월 말에 김덕기·김중헌·김동열 등 15명의 회원들과 함께 봉화경찰서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다.

1933년 7월 17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김중문·김덕기·김중헌·김동열과 함께 구속 송치되었고[11], 1933년 10월 14일 및 1934년 1월 16일, 두 차례에 걸쳐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구류 갱신이 결정되었다.[12] 1934년 2월 2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대구지방법원 공판에 회부되었다.[13] 1934년 4월 2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 공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미결 구류일수 중 18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고[14], 이에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934년 5월 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및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혐의에 대해 공소 이유 없음으로 공소가 기각되었다.[15] 이에 곧 상고를 제기하였다가 이튿날인 1934년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상고를 취하하면서[16] 결국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36년 3월 30일 가출옥하였고[17], 1937년 10월부터 11일까지 동아일보에 3차례에 걸쳐 영주군 부석면 북지리 부석사를 다녀온 뒤 쓴 '2일 소선기(騷仙記)'를 연재하기도 하였다.

2002년 5월 25일 사망했다. 200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1] 의성김씨대동보 권11 292쪽에는 1906년생으로 등재되어 있다.[2] 의성 김씨 개암공파(開巖公派)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김뇌식·김덕기·김중문도 이 마을 출신이다.[3] 1910년대 작성된 지적원도에 따르면, 당시 본 지번은 김창신의 양아버지 운당(雲塘) 김헌식의 소유였다.[4] 개암공파(開巖公派) 33세 창(昌) 항렬.[5] 자는 탁여(濯汝).[6] 하서(荷西) 권준헌(權準憲, 1854 ~ 1902.2.20.)의 장녀이다.[7] 1931년 6월 18일 동아일보 기사[8] 1932년 1월 13일 동아일보 기사[9] 이명 김도길[10] 안동 권씨 복야공파(僕射公派) 두원(斗元)계 35세로, 명종병조판서를 지낸 충재(冲齋) 권벌의 15대손이다. 자는 을수(乙壽).[11] 1933년 7월 19일 동아일보 기사. 다른 7명은 불구속 송치되었다.[12] 1933년 10월 14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 1934년 1월 16일 대구지방법원 집행원부[13] 1934년 2월 27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14] 1934년 4월 2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 판결문[15] 1934년 5월 9일 대구복심법원 집행원부[16] 1934년 5월 10일 대구복심법원 형사사건부[17] 1936년 4월 16일 동아일보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