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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 국가유산 명칭 | 기장 죽성리왜성(機張竹城里倭城) |
이칭 | 두모포왜성(豆毛浦倭城) |
형태 | 왜성 |
면적 | 39,929㎡ |
건설 | 1593년 (선조 26년, 추정) |
쿠로다 나가마사, 쿠로다 요시타카 | |
폐성 | 1598년 (선조 31년, 추정) |
위치 |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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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에 있는 일본식 평산성. 임진왜란 당시 쿠로다 나가마사 부자가 축성했으며 축성 년도는 1593년으로 추정된다.2. 역사
기장왜성이 위치한 두모포 지역은 기장현의 해상 교통 요충지로, 삼포왜란이 발발한 직후 두모포만호영(豆毛浦萬戶營)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2년에 두모포영은 현재의 동구 초량동 일대로 이전되었는데, 왜란이 발발하자 이곳에 남아있던 빈 성을 이용해 일본군이 왜성을 신축한다. 쿠로다 나가마사와 쿠로다 요시타카 부자가 약 33,000명을 동원해 쌓았다고 알려져 있고, 1593년 6월경에는 주요부의 축성이 끝났을 것으로 추정한다.1595년, 왜란이 치열한 외교전으로 접어든 시점에서 명과 일본이 화의 분위기를 내비치면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6월 28일 왜장들을 본국으로 대거 물린다. 이때 최전방이었던 서생포왜성이 잠시 폐성되고 가토 기요마사의 주둔군이 거점을 기장왜성으로 옮기면서 최전방 요새의 역할을 이어받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대규모의 증개축이 이루어진다. 현재 잔존하는 시설물은 대부분 이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권형이 아뢰기를, "(...) 왜적은 밤낮으로 몰래싣고 도해(渡海)하여 머물러 있는 왜가 매우 적었습니다. (...) 청정(淸正)은 서생포(西生浦)에서 두모포(豆毛浦)로 이주(移駐)하여 바야흐로 성지(城池)를 수선하고 있다 합니다. 진중의 모든 왜인은 토목 공사가 끊이지 않아서 ‘이영차’ 소리가 곳곳에서 우레처럼 울렸습니다. 대개 16개 진영 중에 반수 이상은 도해하고 현재 남아있는 것은 두모포 · 동래 · 부산 · 죽도(竹島) · 가덕(加德) · 안골포(安骨浦) 6개 진영이라 합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선조 28) 12월 3일자 기사
『조선왕조실록』, 1595년(선조 28) 12월 3일자 기사
접반사 사섬시정(司贍寺正) 황신(黃愼)이 치계하기를, "본월 10일에 신이 본도 순찰사(本道巡察使)가 차견(差遣)한 양산 품관(梁山品官) 최기(崔沂)를 장사꾼으로 꾸며서 두모포(豆毛浦) · 서생포(西生浦) · 임랑포(林浪浦) 등지에 가서 왜영의 형편을 탐지하게 하였더니, 당일 돌아와서 말하기를 ‘기장(機張)의 두모포에 도착하였더니, 진중의 왜인들이 바야흐로 축성(築城)하는 역사(役事)를 일으켜서 나무를 끌어오고 돌을 실어나르는 왜인이 도로를 메웠으며 옛 현(縣)의 성(城)에서 돌을 반수 이상이나 뽑아내고 또 근처의 암석을 채취하여 끊임없이 실어날랐다. 성문을 들어가서 두루 살펴보니, 구진(舊鎭)의 방옥(房屋)이 드문 곳에는 여기 저기 더 만들었고, 서생포 논밭에서 수확한 곡식을 배로 실어다가 진영 안에 쌓아둔 것이 36개소나 되고 곡초(穀草)를 남쪽에 쌓아둔 것이 50여 개소나 되었으며 군병이 많기로는 부산의 버금이었으나 시장의 점포는 그 반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바다 어귀에 정박한 왜선이 매우 많았는데 우리 나라의 큰 판옥선(板屋船) 2척도 그 가운데 있었다. 거류민에게 물어보았더니, 머물러 있는 왜인의 수효가 거의 8천 명이나 되고 전일 일본으로 들어간 자도 많으며 양곡과 기계 및 잡물을 일찍이 나누어 운반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다고 하였다. (...)' 하였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5년(선조 28) 12월 3일자 기사
이후 정유재란이 재차 발발하자 가토 기요마사는 다시 기장왜성을 거쳐 폐성되었던 서생포왜성에 입성했고, 기장왜성은 서생포왜성의 보조성이 되어 종속 부대 하나가 수비했는데 이때 한 차례 더 개보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1598년 11월에 울산왜성이 폐성되어 왜군이 철수하면서 기장왜성도 함께 폐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조선왕조실록』, 1595년(선조 28) 12월 3일자 기사
3. 위치 및 구조
기장왜성 위치도 | 기장왜성 위성사진 (1948) |
크게 본성 구역과 외곽 구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본성은 ㄴ자로 연속된 구릉지의 가운데에 가장 높이 솟아 있는 해발 46m 정상부를 중심으로 부곽(副郭)을 사다리꼴로 배치하면서 구릉 전체에 뻗어 있는 제곽식 형태를 띠고 있다. 본성의 서쪽으로는 외곽부 가장자리로 연결되는 해자가 설치되어 있다. 외곽은 청강천의 서쪽 및 북쪽과 남쪽으로 이어진 해발 37m의 소구릉 정상부에 위치한다. 외곽부는 총 5개의 부곽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연곽식 평면 구조를 띠고, 동쪽으로는 청강천이 자연 해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본성과 외곽이 있는 두 구릉의 서쪽으로는 북쪽에서 동남쪽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해자가 확인된다. 이는 두모포 전체를 방어 라인으로 설계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외곽의 북쪽에서도 해자가 확인되었는데, 청강천 쪽으로 이어진 외성의 북쪽 끝에는 문지와 석축이 잔존하고 그 동남쪽 지역 발굴 조사에서 성벽이 확인되었으나 경작 등으로 내부는 파괴되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부산박물관의 조사 결과, 본성 동쪽 아래 주차장 부지에서도 왜성의 유구 일부로 보이는 석렬과 주혈(柱穴)이 조사되었다. 1595년 10월과 11월 기록에서 보이는 부산 왜성의 주둔병에 버금가는 8천 명의 왜병이 주둔하거나 왜적에 붙은 2백여 호의 부역자가 거주할 수 있는 기장 죽성리성의 외곽 공간으로는 이 공간이 유력하기 때문에 지형상 본성 능선의 연장선에 있는 동쪽 죽성리 해송이 있는 소구릉 지역도 왜성의 범위에 포함되며 왜성 유구가 잔존할 가능성이 크다. 일단 대부분 육안으로 확인되는 석축 성벽을 기준으로 본성의 6개 곽과 동남쪽의 수석원(竪石垣) 부분, 본성의 제1곽 남쪽과 제2곽의 남쪽 성벽, 두모포진성의 서벽 일부만이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호로 지정된 상태다.
유적의 잔존 위치 주소는 아래와 같다.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31 ~ 81, 86, 92 ~ 110, 183, 245 ~ 287, 296 ~ 316, 551 ~ 581, 588 ~ 614, 622 ~ 673, 711 ~ 727, 747 ~ 756, 산31 ~ 33
3.1. 두모포진성
성곽 북서측의 잔존 체성 # |
4. 과거 모습
부산 기장 죽성리성 본환과 천수대[2]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이하 동문) |
부산 기장 죽성리성 본성과 출성 전경[3] |
부산 기장 죽성리성 본성과 출성 전경[4] |
부산 기장 죽성리성 본환과 천수대에서 본 출성[5] |
부산 기장 죽성리성 본환과 천수대에서 본 출성[6] |
5. 가치
기장 죽성리성을 비롯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에 축조된 한국 동남 해안 지역에 위치하는 왜성들은 일본 성곽사에 있어 성곽 축조 전통 기술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일본의 석축 성곽은 근세 초창기인 쇼쿠호우기(織豊期, 1568∼1600)를 중심으로 전통 석축 성곽 기술의 발전이 있었으나 이후 개보수가 진전되어 이 시대 성곽의 특징을 밝혀 내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기장 죽성리성의 내성과 외성을 둘러싸는 외곽 해자 배치는 일본의 전국 시대 말기부터 쇼쿠호우기에 걸쳐서 발달한 '외곽'과 상통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안골진성의 사례와 같이 왜군이 조선 성을 왜성의 성벽으로 이용한 특이한 사례로서 주목된다.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속문화대백과사전
6. 교통
죽성리로 통하는 대중교통은 마을버스 1대가 전부다. 대신 신앙촌 정류장에 하차해 죽성리 627번지 방면으로 이어진 길을 통해 왜성 본성에 오를 수 있다. 또한 따로 길은 없지만 죽성리 공동묘지를 통해 야산으로 오르면 외곽부 유적이 분포하는 구릉지로 통한다. 주변에 죽성성당이 있어 관광객들이 연계해서 둘러보곤 했으나, 현재는 토지 소유권 분쟁으로 인해 본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막힌 탓에 발길이 거의 끊긴 상태다.7. 여담
- 본성 내부가 모 영농법인의 사유지가 된 탓에 부산광역시와 오랜 토지 분쟁이 있어 왔다. 급기야 관계자인 80대가 2019년 혼마루 내부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하고 철조망으로 일반인 출입을 막은 탓에 더 이상 답사가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에 A씨는 기장군의 고소로 형사재판에 넘겨져 3심까지 거친 끝에 결국 2023년 5월 8일 벌금형 400만 원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2024년까지도 철조망은 철거되지 않고 있어 여전히 접근이 불가능하다. # #
8. 외부 링크
9. 부산광역시 기념물 제48호
부산광역시 기장의 죽성리 마을 해안 가까이에 있는 구릉을 이용하여, 임진왜란 때 왜군의 장수 구로다가 조선·명나라 연합군의 공격을 방어하고 남해안에 장기간 머물기 위해 쌓은 성이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는 약 960m, 성벽높이는 약 4m이다.
왜성은 대개 강이나 바다에 가까운 구릉을 택하여 수송·통신 등에 자유롭고 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장소에 성을 쌓는다.
이 성은 부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하며 일본에서는 기장성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다. 또한 양산의 서생포성과 울산의 학성·부산성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 성곽이 남아 있지만 주위는 밭과 민가로 사용되고 있다.
왜성은 대개 강이나 바다에 가까운 구릉을 택하여 수송·통신 등에 자유롭고 선박의 출입이 편리한 장소에 성을 쌓는다.
이 성은 부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하며 일본에서는 기장성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다. 또한 양산의 서생포성과 울산의 학성·부산성을 연결하는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는데 현재 성곽이 남아 있지만 주위는 밭과 민가로 사용되고 있다.
10. 관련 문서
[1] 일본군은 왜성을 쌓을 때 읍성의 성돌을 빼내 왜성의 성돌로 삼거나, 아예 조선 성곽에 신축할 왜성을 이어붙여 하나의 성으로 만들거나, 조선 성곽 내부에 일본식 축대를 쌓아 진을 치는 등 기존의 성곽을 다방면으로 활용했다. 조선 성곽과 이어진 형태를 보이는 왜성은 기장왜성, 안골포왜성, 영등포왜성, 고성왜성 등이 있다.[2] 동북에서 서남으로 바라본 모습.[3] 남에서 북으로 바라본 모습.[4] 서에서 동으로 바라본 모습.[5] 혼마루 북측 이시가키에서 서북으로 바라본 모습.[6] 혼마루 북측 이시가키에서 동북으로 바라본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