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7 20:50:26

SPEED(일본 가수)

25주년 프로필
파일:SPEED 프로필.jpg
우에하라 타카코 · 시마부쿠로 히로코 · 이마이 에리코 · 아라카키 히토에
{{{#!wiki style="margin: -15px -10px"<tablebordercolor=#F59E2B,#010101> 파일:SPEED 로고.svg SPEED
スピード | 스피드
}}}
<colbgcolor=#F59E2B,#010101><colcolor=#FFFAB6,#DDDDDD> 장르 J-POP
리더 아라카키 히토에
활동 기간 1995년2013년[1]
데뷔 1996년 8월 5일 싱글 Body & Soul
(데뷔일로부터 [dday(1996-08-05)]일, [age(1996-08-05)]주년)
소속사 라이징 프로덕션
레이블 SONIC GROOVE
팬덤 SPEED WAY
공식 사이트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파일:X Corp 아이콘(화이트).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1. 개요2. 멤버3. 특징
3.1. 실력3.2. 인기
4. 활동
4.1. 결성과 데뷔4.2. 전성기4.3. 판매량 하락, 개인활동의 시작4.4. 그룹 해산4.5. 해산 이후4.6. 재결성과 현재
5. 음반
5.1. 싱글5.2. 앨범5.3. 베스트 앨범
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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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5년 11월 11일에 데뷔한 라이징 프로덕션 소속 일본의 4인조 걸그룹이다.

2. 멤버

SP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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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우에하라 타카코 프로필.jpg
파일:이마이 에리코.jpg
파일:시마부쿠로 히로코1.jpg
아라카키 히토에 우에하라 타카코 이마이 에리코 시마부쿠로 히로코
1981. 04. 07. ([age(1981-04-0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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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댄서
1983. 01. 14. ([age(1983-01-1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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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서
1983. 09. 22. ([age(1983-09-2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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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
1984. 04. 07. ([age(1984-04-0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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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컬

2.1. 아라카키 히토에

2.2. 우에하라 타카코

2.3. 이마이 에리코

2.4. 시마부쿠로 히로코

메인보컬. 1984년 4월 7일[2]생([age(1984-04-07)]세)으로 팀에서 막내다. 데뷔 당시 무려 초등학교 6학년. 기노완시 출신이다.

당대 일본 아이돌 중 가창력에 있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 아주 뛰어난 보컬까진 아니지만 고음 소화 능력이 발군이라 막내임에도 팀에서 가장 고음 파트를 주로 맡았다.

99년 hiro 명의로 솔로활동을 시작했다. 에리코와 마찬가지로 초기에는 SPEED의 프로듀서 이지치 히로마사가 곡을 제공했으나, 점점 하야마 히로아키[3] 등 다른 제작자의 곡도 제공받기 시작했다. Coco d'Or라는 프로젝트 그룹 명의로 재즈 리메이크 음반을 내 호평을 받기도 했다. 2013년에는 코자 미사코의 동명의 곡을 리메이크한 싱글 童神(와라비가미)와, 여러 오키나와 출신 가수들의 노래를 리메이크한 앨범 私のオキナワ(나의 오키나와)를 내기도 했다. 현재는 뮤지컬 위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5년에는 에리코와 함께 유닛 ERIHIRO를 결성하기도 했다.

2016년 9월 12일 12살 연하의 일반인 남자와 약혼했다.

2023년 1월 31일 결혼 6년만에 남편과 이혼하였다.

3. 특징

3.1. 실력

  •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준 높은 댄스 실력, 보컬 히로와 에리코의 뛰어난 가창력 등 많은 요소들로 주목받았던 그룹이다.[4] R&B와 힙합을 기반으로 한 노래들과 또래에게 어필하는 공감할 수 있는 가사 등으로 크게 히트를 쳤다. 실제로 남성 팬보다도 또래 팬들, 특히 여학생 팬들이 많은 그룹이었다.
  • 히로와 에리코의 경우 둘 다 고음을 크게 내지르는 창법이다 보니 마치 서로 경쟁하는 듯한 모습 때문에 '스피드의 해체 원인은 둘의 경쟁심리와 불화 때문 아니었냐?'는 루머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물론 재결성과 둘만의 유닛까지 나오며 현재는 완전히 부정된 루머. 노래에도 둘의 이러한 창법이 반영되어 'Body & Soul'의 클라이막스 후반부에서는 정말로 서로 경쟁하는 느낌을 강하게 주었다.
  • 일본 가요계에서 댄스 그룹의 역사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그룹이다.

3.2. 인기

  • 199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걸그룹으로 자료마다 차이는 있지만 2010년대 기준 약 1,950만 장이라는 음반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다.
  • 후배 걸그룹인 모닝구 무스메, Perfume, AKB48 등에도 영향을 미쳤다. 단순히 대선배[5]라서가 아니라, 메이저 걸그룹의 중역 멤버 다수가 SPEED를 동경해 연예계에 입문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Perfume 같은 경우만 해도 SPEED의 영향으로 연예인을 꿈꾸게 되었다. 다들 SPEED와 방송이라도 같이 출연하면 팬심을 주체 못하는 게 눈에 보일 정도. 시마부쿠로 히로코를 동경하던 AKB48의 전 멤버 카사이 토모미는 솔로 데뷔 당시 시마부쿠로가 축하의 편지를 써 주자 기쁨에 울먹이는 모습을 보였고, 코지마 하루나도 SPEED를 동경했었다.
  • 일본에서는 SPEED 해체 이후로 한동안 SPEED의 아류격인 그룹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같은 라이징 프로덕션 후배인 Folder5, EARTH 등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대부분 이렇다 할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사라졌다. 이후로 몇 년 간은 '춤과 노래에 능한 소녀' 컨셉의 가수는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다가[6], 2000년대 초반 보아가 그 빈자리를 적절히 파고들면서 대박을 터뜨렸다.[7]

4. 활동

4.1. 결성과 데뷔


싱글/앨범 CM 모음으로 보는 히스토리.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의 최정예 학생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특별반인 BBWAVES.

본래 아무로 나미에, MAX 등을 배출한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 출신의 7명으로 구성되었던 팀으로 본래 팀명은 'BRAND-NEW KIDS'. SPEED의 전 멤버들은 데뷔 전부터 쟁쟁하기로 손꼽히는 오키나와 액터즈 스쿨의 최정예 그룹이었다. 일명 BBWAVES[8]라는 그룹에 속했던걸로 알려져 있다.[9]

그러나 데뷔 전 3명이 탈퇴를 하였고, 최종적으로 4명만이 데뷔를 하게 된다.[10] 정식 데뷔 이전 당시 인기 심야 프로그램이었던 'THE 요루모힛빠레'라는 프로그램에 1995년 11월 11일 처음 등장. 12월 2일에 그룹명을 공모받는다는 소식을 알렸다. 참고로 이 당시 '류큐 걸즈', '허브와 몽구스', '오키나와 챠키챠키 무스메' 같은 독특한 닉네임이 추천되기도 했는데[11], 거의 유일하게 괜찮은 이름이었던 SPEED를 골랐다고 한다.

원래는 당시 유행하는 유로비트팝에 카우보이 모자 치마의상을 입고 데뷔하려고 했으나, SPEED의 멤버가 TLC의 광팬이었기 때문에 프로듀서에게 이런 그룹이 되고 싶다라고 해서 스트릿 패션, 힙합 의상의 댄스 그룹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데뷔곡 Body & Soul 역시 80년대 흑인가수인 Jody Watley - Real Love와 편곡이 다를 뿐 곡 구성은 거의 동일하며, 음악 전반부에 흐르는 반주와 인트로는 CHIC의 Le Freak와 거의 같다.


데뷔곡 'Body & Soul'

그렇게 4명의 소녀들은 1996년 8월 5일 이지치 히로마사[12]가 프로듀싱한 'Body & Soul' 싱글로 데뷔한다. 그리고 데뷔와 함께 상당한 인기를 끌며 당시 일본 여성 아이돌씬의 암흑기에 종지부를 찍는 시작을 알리게 된다.

4.2. 전성기


'STEADY'

'Go! Go! heaven'

1996년 11월 2번째 싱글 STEADY[13], 1997년 3월 3번째 싱글 Go! Go! heaven를 차례대로 발표하고 Go! Go! heaven은 66만장의 판매고와 더불어 SPEED 첫 오리콘 주간 차트 1위까지 기록하며 당대를 대표하는 스타 걸그룹으로 거듭나게 된다.[14]


일본 도쿄 오다이바 야외 공연장에서 열린 스피드의 첫 라이브 공연.

1997년 5월, 정규 1집 Starting over를 발매한다. 이 앨범은 레코드협회 기준 25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린 것으로 여겨지며[15], 골드 인증을 받았다. 워낙 싱글들이 대히트를 했기 때문에 판매도 호조. 도쿄 오다이바에서 치러진 야외공연은 무려 2만여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티켓 판매 개시 1시간만에 매진되는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었다.


4번째 싱글 'Wake me up'


SPEED의 최대 히트곡 'White love'

1997년 10월 15일, 스피드 최대 히트곡으로 통하는 5번째 싱글 'White Love'가 발매된다. 무려 184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 이 노래는 스피드 싱글 중 최고 판매량이자 그 해 일본 최고의 히트곡으로 지금도 겨울하면 떠오르는 캐롤송으로 사랑받고 있다. 이 노래로 처음 홍백가합전에 출전도 하고 지금도 Body & Soul과 함께 스피드 메들리에 꼭 빠지지 않는 레퍼토리에 들어갈 정도로 인기가 많다. 각종 앙케이트지에서 '겨울에 듣고 싶은 캐롤송은?'이라는 주제로 설문조사를 하면 대부분 열 손가락 안에는 드는 일본의 대표적인 겨울 명곡.


일본의 대표적인 졸업시즌송인 'My graduation'

기세를 이어가 98년에 발표한 6번째 싱글 my graduation 역시 큰 인기를 누리며 승승장구. 일본의 대표적인 졸업송으로 꼽히며 많은 학교에서는 졸업식 시즌이 다가오면 길거리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곡으로, 졸업 합창으로도 불릴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곡이다. SPEED의 대표적인 앵콜곡으로 평소 조용히 경청하는 걸로 알려진 일본 관객들조차 이 노래가 나오면 단체로 후렴구를 합창한다고 한다. 여담으로 멤버들이 싱글자켓과 PV에서 걸고 나온 목걸이가 예뻐 어디 제품이냐고 묻는 전화가 쇄도했다고 한다. 허나 SPEED 코디가 자체제작한 아이템이라 팬클럽 한정으로 판매했다고. 또 원래 이 곡으로 그 해 일본 레코드 대상에 출전할 예정이었는데, 당일날 자신들의 주연영화 주제가였던 ALIVE로 선곡을 바꿨다고 한다.

98년 4월에 발매한 정규 2집 앨범 RISE는 각종 신문에서도 다뤄질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판매량만 200만장 이상의[16] 판매고를 기록했다. 7월에도 싱글 ALIVE를 발매해 이 곡으로 그해 일본 레코드 대상에도 출전한다.


SPEED 최초 돔투어.

ALIVE의 발매에 맞춰 7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되었던 전국 투어는 도쿄돔을 포함한 일본의 4개의 돔을 투어하면서 걸그룹 유일, 최초 돔투어, 최연소 4대돔 순회 공연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또한 이 콘서트를 통해 20회차 공연에 30만명 동원이라는 대성공을 거두며 승승장구한다. 여담으로 최연소 돔투어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커리어이며, 걸그룹 유일 돔투어 성공은 한동안 깨지지 않다가 2013년 AKB48의 돔투어로 겨우 깨졌다.


'All my true love'

1998년 10월에 발매한 8번째 싱글 ALL MY TRUE LOVE 역시 122만장의 판매고를 기록. 그해 12월에 발매한 베스트 앨범 'MOMENT' 는 첫주에만 125만장이 넘는 판매고에 오리콘 기준 231만장이라는 판매고를 기록해 SPEED 활동기 최고 초동, 최고 누계 판매량을 기록한다. 그야말로 스피드 최전성기이자 정점인 시절이 1998년이었다.

4.3. 판매량 하락, 개인활동의 시작


'Breakin' out to the morning'

'Long Way Home'

1999년 2월과 5월에는 Preious Time와 Breakin' out to the morning을 발표. 멤버들이 모두 고등학생이 되었고 반항적인 스타일로 이미지 변신을 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처음으로 다카코와 히토에의 파트가 들어가기 시작한다. 11월 발매한 Long Way Home에서는 흑인음악적 색채가 더 진해졌다. 그러나 장르와 별개로 음악 자체가 이전보단 좀 별로였는지 이때부터 판매량이 60만장대로 확 꺾이기 시작. 오리콘 최고 순위도 1위를 못하고 주간 2위로 내려가기 시작한다.

다만 이전과 비교해서 그렇다는거지 절대치로 보면 이 시기도 성적과 인기가 나빴다고 볼 순 없다. 실제로 두 곡은 각각 그 해 연간차트 32위, 36위로 결코 나쁜 인기가 아니었다. 다만 이전 성적들이 너무 좋다보니 상대적으로 더 낮아보이는 느낌이 드는건 사실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각자 개인 활동을 시작한다. 사실 98년 말 ALL MY TRUE LOVE 때도 메인보컬 두명의 솔로곡이 수록되어 있었고, 라이브로도 선보인 바 있어 개인 활동 수순이 예상되고 있기는 했다. 그렇게 99년부턴 멤버들이 각자 드라마, 영화에 출연하거나 솔로 데뷔를 하는 등 개인 활동도 활발해졌다. 이 역시 상당한 지지를 받아 히로, 다카코, 에리코는 싱글들도 나름대로 히트하였고, 히토에는 R&B/힙합 성격의 'Inori'로 활동하면서 매니아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단, 다카코는 솔로 활동 초기에 부실한 보컬/라이브 실력이 드러나기도 하였다.[17]

4.4. 그룹 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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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0월 돌연 해산을 발표한다. 소속사 사장이 밝힌 바에 따르면 실은 SPEED 자체가 솔로 데뷔하기엔 어린 멤버들을 위한 일종의 '프로젝트성 그룹'이었고, 다만 본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그룹이 초대박이 나는 바람에 오히려 예상보다 길게 활동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본래는 1997년 즈음부터 이듬해 해산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이미 최전성기던 98년 정규 2집 시절부터 멤버들간의 그룹 해산이 논의되고 있었으며, 해산 발표 1달 전쯤 가서야 최종 결정이 되었다고 한다.

갑작스러운 해산이라 많은 추측들이 난무했다. 가장 많은 추측은 멤버간의 불화설이었는데 그룹내 메인보컬이었던 시마부쿠로 히로코와 이마이 에리코 간의 불화설이 가장 많은 의혹을 샀다. 메인보컬이 두명이다 보니 파트 배분 문제에 있어 서로 갈등이 있지 않았나 하는 추측. 하지만 몇 년 뒤 이벤트성 싱글을 내기도 하고 콘서트 투어도 여는 모습을 통해 이런 의혹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어졌다.

11월에는 아키히토 덴노 즉위 10주년 기념식에 초청되어 참석했다. 각계 각층에서 공로와 활약을 인정받은 이들이 초청되었으며, 연예인으로는 아무로 나미에, 쿠로키 히토미, GLAY 같은 유명인들과 함께 자리에 초청되는 영광을 얻었다. 참고로 여가수 중에서는 아무로 나미에와 SPEED만 초청받았으며, SPEED는 전체 참석자 중에서 최연소 참석자였다고 한다.


SPEED의 마지막 돔투어

연말에는 스피드의 마지막 돔투어를 개최하고, 99년 12월 정규 3집 앨범을 발표하며 활동을 마무리한다.[18] 홍백가합전에도 출전하였는데, 그 당시 스피드 해체 소식 등과 맞물려 화제성이 높았다. 덕분에 홍백 1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해산 바로 직전, 에리코가 가장 늦게 솔로로 데뷔한다. 그리고 마침내 2000년 3월 31일 정식으로 해산하게 되었다.

4.5. 해산 이후

맏언니이자 리더였던 히토에TLC같은 미국 흑인풍 블랙뮤직을 선보였던 그룹 때의 모습을 이어갔고, 히로는 Coco d´Or 라는 명의로 발매한 팝, 재즈 풍의 편집 음반이 히트하는 등 보컬리스트로서의 역량을 한껏 보여줬다. 특히 히토에는 보컬 연습을 열심히 했는지 첫 솔로싱글인 inori와 두번째 싱글인 I got you때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마냥 보컬이 급성장했다. 다만 안타깝게도 히토에는 첫 싱글 이후 미국 유학 등으로 공백기가 상당히 길었고, 좋은 퀄리티에도 불구하고 음반 판매량은 매우 저조했다. 활동량도 매우 적어서,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음악방송이나 단독투어 등도 없었다.

우에하라 타카코는 2010년 한국 드라마 도망자 Plan.B에도 출연했었다.

4.6. 재결성과 현재


'One more dream'

'Be my love'

해체 후에도 '재결성을 바라는 그룹 1위'를 많이 기록하며, 많은 팬들이 그리워했다. 그 결과 2003년, 기간 한정으로 부활하여 ‘Save the children’ 자선 라이브 투어를 하였다. 전국 9개소에서 13만명을 동원하였으며, 파이널 공연은 요코하마 아레나에서 개최되었다. 2003년 11월에는 정규 4집 BRIDGE도 발매했으나 일본 음반 시장도 침체기로 접어들었는지 최고 순위 9위에 판매량 약 9만 8천장을 기록했다.

2008년 거의 10년만에 재결성하여 솔로 활동과 병행하며 활동했다. 그러나 2013년에 리더 아라카키 히토에가 결혼하면서 소속사와의 계약종료한 사실이 이듬해 밝혀졌고, 이마이 에리코와 시마부쿠로 히로코가 "히토에가 없는 SPEED의 부활은 있을 수 없다"라고 공언하면서 SPEED는 다시 한 번 해체한 셈이 됐다. 다만 소속사에서는 공식적으로 해체를 발표하지는 않았다.

2015년 7월 소속사에서 멤버인 히로와 에리코가 'ERIHIRO'라는 이름의 유닛을 결성할 것을 발표하였다. 8월 26일에 발매된 데뷔 싱글의 제목은 'Stars'. 이미 전성기를 훨씬 지난 그룹이다보니 챠트성적이나 판매량은 저조했지만 팬들도 그렇고 본인들도 계속적으로 음악활동을 한다는 것에 의미를 두고 있기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2017년 멤버 이마이 에리코와 우에하라 타카코의 불륜이 들통났고, 심지어 우에하라는 불륜으로 남편을 자살에 이르게 했음이 밝혀져 연예계에서 사실상 매장당했다. 정작 활동 당시 숱한 염문을 뿌리고 다녔던 히로코는 2016년 약혼 이후에 무탈하게 살고 있어서 그나마 팬들을 안심시키는 중이었으나 2023년 이혼하긴 했다.

그리고 2016년 이마이 에리코가 뜬금포 정계에 진출하면서, 이마이 에리코의 참의원 임기가 6년이라 아무리 빨라도 2022년 이후에나 완전체 활동이 가능해졌다. 참의원은 형식적으로 겸직이 가능하나, 일본 본토와 오키나와에서 SPEED가 갖는 사회적 위치 및 정치인으로서의 위치를 감안했을 때는 2022년까지는 활동이 실질적으로 어렵다. 게다가 이 와중에 불륜 논란까지 터져버렸으니 사실 정계 은퇴를 하더라도 활동하기가 매우 난감해졌다.

2021년 1월 13일, 25주년 기념 앨범인 'SPEED Music Box - All The Memories -'를 발매하였다.

5. 음반

5.1. 싱글

발매일제목순위판매량수록 앨범비고
1996.08.05Body & Soul4위 637,880장Starting Over
1996.11.18STEADY2위 1,278,660장
1997.03.26Go! Go! Heaven1위 664,940장
1997.08.06Wake Me UP!2위 671,280장RISE
1997.10.15White Love1위 1,844,790장[19]
1998.02.18my graduation1위 1,474,700장
1998.07.01ALIVE1위 965,000장MOMENT
1998.10.28ALL MY TRUE LOVE1위 1,221,090장
1999.02.17Precious Time[20]2위 622,580장Carry On my way
1999.05.19Breaking' out to the morning2위 579,680장
1999.11.03Long Way Home2위 613,360장
2001.12.12ONE MORE DREAM5위 136,310장미수록일시 재결성
2003.08.27Be My Love2위 126,147장BRIDGE
2003.11.27Walking In The Rain
/Stars To Shine Again
13위 29,378장리컷 싱글
2008.11.12あしたの空3위 75,223장SPEEDLAND
2009.05.27S.P.D.8위 28,900장4 Colors
2010.04.21ヒマワリ-Growing Sunflower-9위 20,630장
2010.09.01指環10위 14,757장
2010.11.10Let's Heat Up!15위 13,778장
2011.08.10リトルダンサー18위 10,498장

5.2. 앨범

발매일제목순위판매량비고
1997.05.21Starting Over1위1,925,500장
1998.04.29RISE1위2,048,270장
1999.12.22Carry On my way1위 884,980장
2003.11.27BRIDGE9위 98,242장
2012.11.144 Colors16위 9,343장

5.3. 베스트 앨범

발매일제목순위판매량비고
1998.12.16MOMENT1위2,318,970장
2000.03.29Dear Friends 14위 505,610장
2000.03.29Dear Friends 23위 522,470장
2009.08.05SPEEDLAND -The Premium Best Re Tracks-2위 107,307장리메이크 앨범

6. 여담

  • SPEED는 당시 일본에 드물었던 메인보컬, 리드보컬, 비주얼, 댄스 등 포지션이 있는 걸그룹을 내세웠는데, 착각하지 말아야 할 점은 저런 담당 자체가 SPEED가 원조는 아니다. 엄밀히 따지면 음악적 역할 분담은 TLC가 원조고, 멤버들 간의 캐릭터성에 따른 분담은 스파이스 걸스가 그 모태이다. SPEED도 엄연히 이 두 그룹의 후발주자인데다 애초에 TLC를 롤모델로 한 그룹이었다.
  • 다만 당시만 해도 제이팝이 동아시아에선 상대적으로 흥하던 시기였기 때문에[21], 이를 참고한 몇몇 한국 제작자들이[22] 걸그룹을 만들 때 당시 일본에서 잘 나가던 스피드도 참고했지 않겠냐는 주장도 일부 있는데, 정확히 따지면 영향을 받은 그룹이 있고 안 받은 그룹이 있다. 일단 1세대 당시 아이돌 걸그룹 3대장이었던 S.E.S.핑클, 베이비복스는 큰 영향을 받았다고 보긴 어렵고[23], 2군 이하 걸그룹 중에선 SPEED를 벤치마킹했다고 밝힌 바 있는 티티마가 있었다.# 다만 기사에도 나오듯 정확하겐 SPEED만 참고한건 아니고 소속사 사모님이 일본 문화를 좋아해 아무로 나미에 춤 등도 참고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그 티티마조차 사실 영상 보면 알겠지만 SPEED랑 똑같진 않고 특히 곡 컨셉은 많이 달랐다. 굳이 영향을 받았다면 춤이나 동선에서 영향을 받은 느낌이 있는 정도라 어찌보면 벤치마킹 호소 느낌도 있다. 즉, 완전히 영향이 없었다고 하기도 SPEED만 참조했다고 하기도 비약이 많은 애매한 팀이 티티마였다.
  • 이후 시간이 지나 진짜 SPEED의 컨셉 자체를 대놓고 가져와서 차용한 팀이 있긴 했는데 바로 2002년 10월에 데뷔하였던 Dejavu라는 걸그룹이었다. 당시 박화요비가 '신인그룹 데자부 정말 뜰 것 같다. 지금껏 나온 국내 그룹이 아닌, 일본 걸그룹을 보는 것처럼 새로운 느낌이 든다.'고 언급했을 정도로 티티마랑 달리 스피드의 일부 컨셉이 확실히 느껴지는 무대를 구사했다. 유일하게 알려진 활동곡인 Run 뮤직비디오를 보면 멤버수와 의상, 컨셉, 곡의 분위기는 Go go heaven을, 세트장은 Breakin’ out to the morning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시기와 소속사 문제 등이 겹쳤는지 오래 가지 못하고 2003년 소리소문없이 사라진다.
  • 대중적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한국에도 매니아층이 있어서, 2001년 개설된 연예 커뮤니티 베스티즈가 원래 SPEED 팬사이트로 시작하였다. 이후 커뮤니티가 다양화되면서 SPEED 팬들은 멀티레모니아(현 더쿠)로 옮겨갔다고. 현재는 이미 연차가 오래되었고 본국에서도 활동이 뜸한 그룹이라 활발히 팬 활동을 하는 이들은 드물다.
  • 한화 이글스의 단장이었던 정민철이 현역 시절 팬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단 정민철의 일본 진출 시기는 SPEED 해체 후인 2000년이므로 신뢰도는 낮다. 다만 97년 말부터 몇년 동안 대전 지역 케이블(또는 중계유선) 방송에서 채널 V나 Vibe(MTV Japan)를 무단 송출하였으므로 일본 진출 전 SPEED의 PV를 접할 여지는 있었다.


[1] 실질적인 전성기 활동 기간은 싱글 데뷔한 1996년 8월부터 1차 해산하는 2000년 3월까지였다. 이전에는 1995년 11월 첫 방송에 나가 12월 그룹명 공모 받는다는 수준의 활동이었고, 1차 해산 이후부턴 사실상 이벤트성 활동 수준.[2] 같은 그룹의 맏언니 아라카키 히토에와 생일이 똑같다.[3] 주로 w-inds 등 아이돌 그룹에 곡을 제공하던 송라이터. 3인조 유닛 Tourbillon의 리더이기도 하다.[4] 다만 비음이 상당히 섞인 창법을 구사해 안티들에겐 코창력이라고 까이기도 했다.[5] 2020년 기준 해체 없이 현역으로 활동중인 메이저 걸그룹 최고참이 아무로 나미에의 서포트 멤버로 데뷔했던 걸그룹 MAX인데, 스피드는 바로 그 다음 해인 96년에 데뷔했다.[6] 이같은 아이돌 침체기를 '아이돌 빙하기'라고 한다. 그 침체기에 모닝구 무스메1999년 LOVEマシーン으로 일약 대박을 터뜨린다.[7] 다만 그 보아도 엄밀히 따지면 아무로 나미에 느낌의 솔로 가수였지 걸그룹은 아니었기에, SPEED 해체 이후 일본 아이돌 그룹계는 실력은 지워지고 성 상품화만 남는 현상이 지속되어 특히 아키모토 야스시가 기획한 AKB48 전성기 시절 절정에 이르게 된다.[8] Beautiful Beat Waves의 약자로 오키나와의 아름다운 비트의 물결이 세상을 향해 뻗어나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9] 이 그룹은 지금 봐도 일본에서 유명한 연예인들이 굉장히 많다. 현재도 배우로 활발히 활동하는 야마다 유, 쿠로키 메이사를 비롯, DA PUMP, day after tomorrow의 보컬이자 코다 쿠미의 동생인 코다 미소노. SKE48의 멤버인 사이토 마키코 등이 대표적인 BBWAVES 출신들.[10] 참고로 이 당시 탈퇴했던 3명 중 한명은 '센다 아이'라는 연예인으로 현재 대만과 일본에서 연예계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11] 멤버들이 전부 오키나와 출신이다. 그래서 거의 반장난식으로 추천하는 닉네임이 많았다고 한다.[12] 일본의 유명 음악 프로듀서이다.[13] 무려 127만장을 팔아치웠지만 정작 오리콘 최고 순위는 2위였다. 참고로 Body & Soul은 63만장, 최고 순위 4위.[14] 여담으로 선배인 B'z의 마츠모토 타카히로가 고고헤븐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심지어 97년 본인 무대의 라이브 제목으로 인용도 했을 정도.[15] 다만 후술되어있듯 그 정도는 아니고 약 192만장을 판매했다는 기록도 있다.[16] 후술되어있듯 (아마도) 오리콘 기준 약 205만장을 판매했다. 300만장을 판매했다는 말도 있는데 출처가 필요해보인다.[17] 사실상 다카코는 비주얼 담당 멤버였기 때문에, 가수보다는 배우 겸 모델로서 활동이 더 활발했다.[18] 스피드의 싱글/앨범 통틀어 마지막 주간 1위 작품이다. 판매량은 약 88만장.[19] 역대 일본 여자 아이돌 싱글 판매량 1위 기록을 가지고 있었으나 2013년 AKB48さよならクロール로 인해 깨졌다.[20] 수록곡인 季節がいく時가 1999년에 개봉한 도라에몽 극장판인 노비타의 우주표류기 엔딩곡으로 타이업되었다.[21] 사실 이것도 좀 애매한게, 한국은 98년부터 일본 대중문화가 개방되어 이때부터 본격적인 일본 문화 유입이 시작되었고, 중국 역시 한류가 더 인기긴 했다. 결국 서구권에 소개할만한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문화 선진국으로 일본이 조명받던 시기였던건 맞지만, 그 한계 역시 명확하던 시절이었다. 다만 그와 별개로 업계 차원에선 아무래도 동아시아 음악을 리드해가는듯한 인상이 있던 시기긴 했다.[22] 1세대 아이돌 시장의 주요 제작자들과 제이팝의 영향력이 떨어진 2세대 이후 아이돌 시장을 주도한 주요 제작자(양현석, 박진영 등)들의 연령대부터가 다르다는 것을 감안하자.[23] 애초에 SPEED와 마찬가지로 S.E.S.와 핑클은 TLC를 벤치마킹해 만든 팀이었고, 베이비복스는 스파이스 걸스를 많이 참고했다. 게다가 그룹 구성 과정에서 변화를 거듭해 음악적으로도 SPEED 계열과는 차이가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