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 NBA 파이널 챔피언 | |
휴스턴 로키츠 | |
파이널 MVP | 하킴 올라주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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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1994 NBA FINALS | |
뉴욕 닉스 | 휴스턴 로키츠 |
1993-1994 NBA의 최종 우승팀을 둘러싼 휴스턴 로키츠와 뉴욕 닉스의 시리즈. 지난 3년간 쓰리핏을 기록하면서 불스 왕조를 이룩한 마이클 조던이 갑작스럽게 은퇴를 선언한 뒤에 열린 첫 파이널이어서 무주공산이 된 왕좌를 누가 차지할지에 많은 이목이 쏠렸으며, 당대 NBA 최고의 엘리트 센터였던 패트릭 유잉과 하킴 올라주원의 정면 대결로도 많은 이목을 끌었다.
2. 일정
- 1차전 - 6월 8일 : 더 서밋, 휴스턴
- 2차전 - 6월 10일 : 더 서밋, 휴스턴
- 3차전 - 6월 12일 : 매디슨 스퀘어 가든, 뉴욕
- 4차전 - 6월 15일 : 매디슨 스퀘어 가든, 뉴욕
- 5차전 - 6월 17일 : 매디슨 스퀘어 가든, 뉴욕
- 6차전 - 6월 19일 : 더 서밋, 휴스턴
- 7차전 - 6월 22일 : 더 서밋, 휴스턴
3. 진출팀
3.1. 뉴욕 닉스
뉴욕 닉스 라인업 | ||
3. 존 스탁스 (SG) | 4. 앤서니 보너 (SF) | 7. 코리 게인스 (SG) |
11. 데릭 하퍼 (PG) | 14. 앤서니 메이슨 (PF) | 20. 롤랜도 블랙맨 (SG) |
32. 허브 윌리엄스 (C) | 33. 패트릭 유잉 (C) | 34. 찰스 오클리 (PF) |
44. 휴버트 데이비스 (SG) | 50. 그렉 앤서니 (PG) | 54. 찰스 스미스 (SF) |
감독: 팻 라일리 어시스턴트 코치: 딕 하터ㆍ제프 닉스ㆍ밥 살미ㆍ제프 밴 건디 |
지난 3년간 마이클 조던의 불스 왕조를 번번히 위기로 몰아넣었음에도 마지막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던 뉴욕 닉스였다.[1] 조던이 은퇴한 상황에서 닉스를 막을 팀은 동부 컨퍼런스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보스 팻 라일리의 리더십 아래, 캡틴 패트릭 유잉을 중심으로 찰스 오클리, 찰스 스미스, 존 스탁스, 엔서니 메이슨에 이르는 Thug ball[2]은 건재했고, 기존까지 고질적인 약점이었던 적절한 포인트 가드의 부재[3] 역시 데릭 하퍼를 영입하면서 해소했다. 57승 25패를 기록하면서 동부 컨퍼런스 2번 시드[4][5], 2위를 차지한 뉴욕 닉스는,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숙적 시카고 불스와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접전 끝에 연이어 격파하고 꿈에 그리던 파이널 무대에 오르게 된다.
3.2. 휴스턴 로키츠
휴스턴 로키츠 라인업 | ||
1. 스캇 브룩스 (PG) | 3. 리처드 페트르슈카 (C) | 7. 칼 헤레라 (PF) |
10. 샘 카셀 (PG) | 11. 버논 맥스웰 (SG) | 17. 마리오 엘리 (SG) |
20. 래리 로빈슨 (SG) | 21. 크리스 젠트 (SF) | 25. 로버트 오리 (SF / PF) |
30. 케니 스미스 (PG) | 33. 오티스 소프 (PF) | 34. 하킴 올라주원 (C) |
35. 얼 큐레턴 (PF) | 42. 에릭 라일리 (C) | 50. 맷 불라드 (PF) |
감독: 루디 톰자노비치 어시스턴트 코치: 빌 베리ㆍ짐 보일런ㆍ캐럴 도슨 |
리그 정상급의 센터로 발돋움한지 오래였지만 우승과는 그 동안 거리가 멀었던 하킴 올라주원이었다.[6] 본인의 10번째 시즌을 맞이한 올라주원은 더 완벽한 선수로 발돋움했고, 생애첫 시즌 MVP와 2년연속 DPOY를 차지하면서 조던이 없으면 올라주원이 왕임을 보여주었다. 여기에 92년부터 정식 감독으로 부임한 루디 톰자노비치의 리더십이 결합하여 휴스턴 로키츠는 구단 역사상 최고 성적인 58승 24패[7]를 기록하면서 서부 컨퍼런스 2번 시드를 차지한다.[8] 이어진 플레이오프에서는 클라이드 드렉슬러의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 찰스 바클리의 피닉스 선즈 / 칼 말론 - 존 스탁턴의 유타 재즈를 연파하고 8년만에 파이널에 다시 오르게 된다.
4. 시리즈 전망
두 팀 모두 오랜만에 파이널에 진출했던 만큼 승리에 대한 동기부여가 남달랐다. 특히 이 시리즈는 소개에서 언급되었듯이 패트릭 유잉과 하킴 올라주원이 정면충돌하게 되었는데, 사실 둘은 이미 대학시절에도 우승을 놓고 다투었던 적이 있었다. 유잉의 조지타운 대학과 올라주원의 휴스턴 대학이 바로 10년 전 NCAA 결승전에서 맞붙었던 것. 당시엔 조지타운 대학이 84대 75로 승리하여 유잉이 우승의 기쁨을 맛봤다. 두 엘리트 센터의 대결에 이런 사연이 있었던 탓에 언론도 유잉이 NCAA에 이어서 NBA에서도 다시 한 번 올라주원을 상대로 타이틀을 차지하느냐, 아니면 올라주원이 10년만에 설욕을 펼치느냐에 포커스를 맞추며 분위기를 고조시켰다.다만 이런 사연과 달리 시리즈 전망은 올라주원의 로키츠가 우세했다. 애초에 로키츠가 시즌 개막후 15연승, 이후 바로 7연승을 더해 시즌 초반 23게임에서 22승 1패를 기록하는 압도적인 페이스를 보여주며 우승 1순위로 꼽히기도 했고, 객관적인 전력에서도 로키츠가 모든 카테고리에서 닉스에 소폭 우위를 점하고 있었기 때문. 우선 센터간의 맞대결에 있어서 해당 시즌 올라주원은 올 NBA 퍼스트팀과 수비왕 타이틀을 동시에 차지할 만큼 절정의 기량을 뽐냈던 시즌이었기에 유잉에 근소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평가받었다.[9] 이외에도 센터를 보좌할 프론트코트에선 오티스 소프-로버트 오리에 칼 에레라가 백업으로 받쳐주던 로키츠가 찰스 오클리-찰스 스미스에 앤서니 메이슨이 백업으로 받쳐주던 닉스에 소폭 우위를, 백코드 역시 버논 맥스웰-케니 스미스에 샘 카셀과 마리오 엘리가 백업으로 받쳐주던 로키츠가 존 스탁스-데릭 하퍼에 의존하던 닉스에 양적 질적으로 모두 우위라는 평가를 받았다.[10] 그래서 시리즈 전망은 로키츠가 4승 2패 정도로 우승할 것 같다는 예측이 우세했다.
5. 전개
5.1. 1차전
파이널 1차전(현지시각 6월 8일, 더 서밋, 휴스턴) | ||||||
팀 | 1쿼터 | 2쿼터 | 3쿼터 | 4쿼터 | 최종스코어 | 시리즈 전적 |
휴스턴 로키츠 | 26 | 28 | 18 | 13 | 85 | 1승 |
뉴욕 닉스 | 24 | 22 | 17 | 15 | 78 | 1패 |
로키츠와 닉스는 다 센터를 중심으로 한 지공 위주의 공격을 펼치는 팀이었고, 두 팀 다 NBA 최강급 수비를 자랑하는 팀이었기 때문에 경기는 전반적으로 진흙탕 싸움으로 흘러갔다. 로키츠의 감독 루디 톰자노비치가 경기 후 인터뷰에서 "흙탕에서 미식축구 경기를 끝낸 기분이다."라고 소감을 밝힐 정도. 올라주원은 28점을 기록하면서 팀 공격을 이끌었지만, 닉스의 집중 마크에 고전하는 느낌이 역력했다. 특히 팻 라일리는 후반부부터 앤서니 메이슨을 팻 라일리의 전담 마크맨으로 붙였는데, 언더사이즈 파워포워드였던 메이슨은 올라주원보다 현저하게 작은 신체 사이즈에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올라주원을 수비했고,[11] 그 결과 올라주원은 3,4쿼터에 9번의 야투를 시도하면서 단 한 개를 성공시키는데 그쳤다. 유잉 역시 23점을 기록하면서 팀 내 최고 득점자였지만, 야투 26번 시도해서 단 10개만을 성공시키는 극악의 효율성을 보여주었다(...)
이렇게 막하막하의 공격력 대결 속에서, 승리는 조금 더 나은 공격력을 보여준 휴스턴에게로 돌아갔다.이 날 닉스는 34.1%의 야투율을 기록하였고, 무엇보다도 후반에는 24%(50개 시도, 12개 성공)라는 도무지 믿기 힘든 저조한 야투율 성공률을 보여주었다. 파이널 직전 외삼촌의 장례식에 참가하기 위해 고향 오클라호마에 들렸던 닉스의 주전 슈팅가드 존 스탁스가 특히 17%(야투 18개 시도, 3개 성공)의 야투율을 기록하는 최악의 컨디션을 보였다. 한편 경기 막판의 야투 난조가 닉스로서는 뼈아픈 결과를 낳았는데, 4쿼터 종료를 2분 앞두고 닉스는 로키츠를 79대76까지 추격하는데 성공하지만, 그 이후 존 스탁스의 에어볼과 그렉 앤서니의 턴오버, 유잉의 터프샷 실패와 같이 연이은 실책쇼로 인해 귀신같이 자멸하고 만다. 이처럼 양팀이 모두 엉망진창인 공격력을 보여주면서 1994 NBA 파이널 1차전의 후반전은 1955년 파이널 이후 40년만에 역대 최저 득점을 기록했다는 불명예 기록을 뒤집어쓰고 만다.
5.2. 2차전
파이널 2차전(현지시각 6월 10일, 더 서밋, 휴스턴) | ||||||
팀 | 1쿼터 | 2쿼터 | 3쿼터 | 4쿼터 | 최종스코어 | 시리즈 전적 |
휴스턴 로키츠 | 20 | 22 | 23 | 18 | 83 | 1승1패 |
뉴욕 닉스 | 24 | 18 | 30 | 19 | 91 | 1승1패 |
1988년 이후로 로키츠의 홈 경기장인 더 서밋에서 닉스는 승리를 거둔 적이 없었다. 2차전까지 내줄 경우 시리즈 자체의 판도가 완연히 로키츠에게 기울기 때문에 닉스로서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고, 결과적으로 시리즈를 동률로 가지고 오는데 성공한다. 로키츠의 에이스 올라주원은 25득점 12리바운드를 기록하면서 로키츠를 진두지휘했지만, 1차전에 이어 다시 한 번 에이스 스타퍼로 나섰던 메이슨의 탁월한 수비를 바탕으로 올라주원의 폭발력이 휴스턴 선수단 전체에 긍정적인 연쇄작용을 가져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한편 닉스의 에이스 유잉은 이 날도 저조한 야투감에 시달리면서 16득점에 묶였지만, 6개의 블락 및 클러치 타임에서 올라주원의 레이업 블락 & 샘 카셀의 엔트리 패스 스틸과 같이 수비에서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체면을 세웠다.
1차전에서 닉스에서 두 자리 수 득점자가 겨우 세 명에 불과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2차전에서는 6명의 선수가 득점을 기록하면서 공격력이 불을 뿜었는데 이 날 닉스 선수단은 무려 52%의 야투 성공률을 기록했다.(69번 시도 36번 득점) 하지만 휴스턴의 반격 역시 만만치 않았는데, 72대65로 앞서던 닉스가 4쿼터 초반 방심하는 기세를 보이자 연이어서 턴오버에서 파생한 속공 득점을 성공시키면서 72대71로 1점차까지 추격했고 이후로도 치열한 추격전이 반복됐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불붙은 닉스 선수단의 야투감이 경기를 닉스의 승리로 이끌었다. 스탁스가 19득점을 기록하면서 힘을 보탠 가운데, 경기 종료 2분을 남기고 84대81로 닉스가 원 포제션 차이로 앞서던 상황에서 데릭 하퍼가 결정적인 3점슛이 림을 가르면서 6점차로 앞서나갈 수 있었고, 이어서 경기 종료 40초를 앞두고 앤서니 메이슨의 속공 덩크로 쐐기를 박는데 성공하면서 닉스가 홈코트 어드벤티지를 갖고 매디슨 스퀘어 가드로 돌아가는데 성공한다. 사실상 로키츠가 4쿼터에서 자멸했던 경기로 올라주원 또한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자멸했다."는 표현으로 패배에 속상한 심정을 드러났다.
5.3. 3차전
파이널 3차전(현지시각 6월 12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뉴욕) | ||||||
팀 | 1쿼터 | 2쿼터 | 3쿼터 | 4쿼터 | 최종스코어 | 시리즈 전적 |
휴스턴 로키츠 | 26 | 19 | 24 | 24 | 93 | 2승1패 |
뉴욕 닉스 | 18 | 20 | 25 | 26 | 89 | 1승2패 |
닉스가 2차전을 승리해 홈 어드밴티지를 가져왔기 때문에 로키츠의 우세로 점쳐졌던 시리즈 예측이 닉스쪽으로 기우는 예측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심지어 국내 일간지에서조차도 이제는 닉스가 우세했다는 심층분석 기사를 내보냈을 정도. 플레이오프 시리즈 동안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진행된 홈경기에서 단 한 차례만 패했을 정도로 닉스가 홈에서 극강의 포스를 보여왔기 때문에 3, 4, 5차전을 잇달아 홈에서 치르게 되는 닉스쪽이 유리해 보였던 것은 나름 일리있는 예측이었다.
그리고 역시나 3차전에서도 지난 1,2차전과 마찬가지로 엎치락 뒤치락하는 대혼전이 이어졌다. 올라주원은 21득점 11리바운드를 기록하였고, 나머지 동료들도 네 명이나 두 자리수 득점을 기록하면서 올라주원의 짐을 덜어주었고 그 결과 로키츠는 3쿼터 한 때 14점 차이로 앞서나갈 수 있었다. 한편, 휴스턴의 집중수비에 고전했던 유잉은 이 날도 29개의 야투 가운데 9개만을 성공하면서 18득점에 묶였다.[12] 시리즈 내내 야투가 말을 듣지 않는 유잉을 대신해서 2차전의 영웅이었던 데릭 하퍼와 존 스탁스가 이 날도 21점과 20점을 각각 기록하면서 마침내 닉스는 14점의 열세를 딛고 4쿼터 종료 1분을 앞두고 88대86으로 경기를 뒤집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날 경기의 영웅은 케니 스미스의 백업 포인트가드였던 데뷔 1년차 신인 샘 카셀이었다. 포지션 맞상대였던 데릭 하퍼가 자신 앞에서 역전 4미터 미드레인지를 성공시킨지 불과 25초 뒤, 샘 카셀은 올라주원의 렛아웃 패스를 침착하게 3점으로 성공시키면서 경기를 다시 역전시키는데 성공한다. 경기 종료까지 29초가 남은 상황에서 닉스는 다시 반격에 나서는데 3차전, 나아가 시리즈 전체의 향방을 뒤흔든 논란의 판정이 발생한다. 닉스가 픽앤롤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유잉이 로키츠의 가드 맥스웰에게 걸었던 스크린이 일리걸 무빙 스크린이었다면서 주심이 공격자 반칙을 선언했던 것. 유잉과 닉스 선수단은 격하게 항의하였지만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이미 경기 종료까지는 24초가 채 남지 않았던 상황에서 닉스는 울며 겨자먹기로 파울 작전에 들어갈 수 밖에 없었고, 샘 카셀이 자유투 두 개를 모두 성공시키면서 로키츠는 91대88로 3점을 앞서가게 된다.
경기를 연장으로 끌고가기 위해 존 스탁스가 시도한 필사의 삼점슛이 불발되었지만, 오클리가 공격 리바운드를 따낸다. 그 직후 스탁스가 다시 삼점슛을 시도하고 착지하는 과정에서 올라주원의 반칙으로 인해 닉스에게는 자유투가 주어진다. 하지만 경기종료 4초를 앞두고 타임아웃이 없었던 닉스에게는 단 하나의 선택지만이 있었다. 자유투 두 개[13] 가운데 하나만을 성공한 후, 두 번째 시도는 고의로 실패한 후 공격 리바운드를 따내 야투를 시도할 것. 닉스에게는 야속하게도, 스탁스가 고의로 실패한 자유투의 리바운드는 로키츠에게 돌아갔고 다시 한 번 이어진 파울 작전에서 카셀이 자유투를 모두 성공시키면서 경기는 그렇게 로키츠의 신승으로 끝이 났다.
5.4. 4차전
파이널 4차전(현지시각 6월 15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뉴욕) | ||||||
팀 | 1쿼터 | 2쿼터 | 3쿼터 | 4쿼터 | 최종스코어 | 시리즈 전적 |
휴스턴 로키츠 | 14 | 19 | 28 | 20 | 82 | 2승2패 |
뉴욕 닉스 | 19 | 21 | 20 | 31 | 91 | 2승2패 |
전날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뉴욕 레인저스는 스탠리 컵 우승을 차지했고 (참고로 레인저스 역시 닉스와 같이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사용한다!), 마치 그 기운을 받은 것처럼 닉스는 1쿼터 처음 7분 동안 17대2로 휴스턴을 압도했다. 하지만 닉스의 주전 가운데 오클리(PF), 하퍼(PG), 스미스(SF) 세 명이 1쿼터 중반에 일찌감치 파울을 2개씩이나 저지르면서 파울 트러블에 빠지고 말았고, 이 틈을 놓치지 않고 휴스턴이 닉스를 맹추격했다.올라주원은 3/4쿼터에만 22점을 기록하면서 도합 32점을 기록하면서 닉스의 페인트존을 맹폭격했다. 반면 시리즈 내내 부진한 야투감을 선보였던 패트릭 유잉은 이 날도 16득점에 빈공에 시달리다가 경기 종료를 1분 앞두고 6반칙을 범하면서 조기 퇴근을 했고, 유잉을 대신해서 데릭 하퍼가 이 날도 5개의 삼점슛을 포함해서 21점을 기록하면서 닉스를 캐리했다.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하는 양상이 이어지던 가운데, 로키츠의 주전 스몰포워드인 로버트 오리가 3쿼터 막판 덩크를 시도하다가 앤서니 메이슨의 플래그런트 파울에 의해 심한 등부상을 입고 경기를 이탈하게 됐던 것이 경기의 향방을 좌우했다. 오리의 부상 이탈 이후 찰스 스미스가 공수 양면에서 살아나면서 로키츠의 백코트 진에 부담감을 더했고[14], 닉스의 파워포워드 찰스 오클리는 발목 부상에도 불구하고 9개의 공격 리바운드를 포함해 20개의 리바운드를 따내면서 힘을 보탰다. 그렇게 경기는 91대82로 끝이 났고 닉스는 시리즈를 동률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5.5. 5차전
파이널 5차전(현지시각 6월 17일, 매디슨 스퀘어 가든, 뉴욕) | ||||||
팀 | 1쿼터 | 2쿼터 | 3쿼터 | 4쿼터 | 최종스코어 | 시리즈 전적 |
휴스턴 로키츠 | 21 | 16 | 24 | 23 | 84 | 2승3패 |
뉴욕 닉스 | 22 | 26 | 13 | 30 | 91 | 3승2패 |
4차전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닉스는 메이슨과 스탁스를 필두로 로키츠를 맹공격했고, 유잉 역시 드디어 야투감이 살아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 전반을 37대48로 11점이라는 상당히 큰 점수차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하지만 5차전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던 휴스턴 역시 가만히 물러서지는 않았고, 2쿼터 종료 후에 빠르게 수비진을 재정비하고 닉스의 백코트진에게 오픈 기회를 주지 않고 터프샷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3쿼터에 닉스의 야투는 극심한 난조를 보이면서
결국 지난 네 차례의 경기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승부는 4쿼터에 향방이 가려졌다. 존 스탁스가 경기 종료를 2분 앞두고 역전 3점슛을 꽂으면서 닉스에게 81-80 한 점 차 리드를 안긴데 이어, 유잉의 블락 샷 직후 이어진 속공 찬스를 데릭 하퍼가 득점으로 연결시켰다. 연이은 실점에 로키츠 선수들은 흔들렸고, 경기 종료를 1분 앞두고 로버트 오리의 에어볼 이후 메이슨이 속공 덩크를 성공시키면서 사실상 승부의 추가 기울게 된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가득 매운 뉴욕 팬들이 "One More", "Knicks in Six"를 연호하는 가운데 닉스는 21년만의 우승에 단 한 걸음만을 남겨놓게 되었다.
한편 4차전에 있었던 메이슨의 플래그런트 파울의 여파는 이 날 경기에도 남아있었는데, 올라주원이 포스트업을 치는 과정에서 메이슨의 얼굴을 팔꿈치로 가격하는 한편으로, 4차전 당시 메이슨의 희생자였던 오리가 메이슨의 레이업 시도를 똑같이 더티 플레이[15]로 갚아주면서 경기가 과열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올라주원의 팔꿈치 가격 당시에는 NBA 전체에서 한성깔하는 메이슨이 발끈하면서 벤치 클리어링이 일어날 뻔 했으나 올라주원이 현명하게도 메이슨과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무시(...)하면서 조용히 넘어갈 수 있었다.
이 경기의 의미는 시리즈 내내 올라주원에게 밀리던 유잉이 최초로 올라주원을 능가하는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최종 성적은 비슷했지만 유잉은 승부처 때마다 좋은 모습을 보였고, 4쿼터 전까진 스탯 상으로도 명확한 우위였다.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수비. 당시 파이널 한경기 최다 블럭 기록이던 빌 월튼의 8블럭과 타이를 이루는 8블럭을 찍으며, 매치업 올라주원부터 시작해 골밑으로 접근하는 선수들은 족족 찍어버리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줬다. [16] 마지막 홈경기에서 에이스 유잉이 드디어 살아나는 모습을 보이며 팬들을 흥분시켰기에 더 우승에 대한 기대가 커지기도 했다.
5.6. 6차전
파이널 6차전(현지시각 6월 19일, 더 서밋, 휴스턴) | ||||||
팀 | 1쿼터 | 2쿼터 | 3쿼터 | 4쿼터 | 최종스코어 | 시리즈 전적 |
휴스턴 로키츠 | 21 | 25 | 26 | 22 | 86 | 3승3패 |
뉴욕 닉스 | 21 | 15 | 25 | 31 | 84 | 3승3패 |
1982년 이후로 NBA 플레이오프 역사상 7차전까지 치러진 19번의 경기에서 홈팀이 진 적은 없었다.[17] 이 사실을 두 팀 모두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5차전 종료 후 인터뷰에서 양팀 선수단은 반드시 6차전을 승리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고, 이러한 의지에 걸맞게 6차전은 대접전으로 전개되었다.
올라주원의 블락 장면. 역사상 최고의 블락 중 하나다. 그 어마어마한 덩치로 가드의 속도를 따라간 것도 모자라서 타이밍을 뺏겨 한 발로 겨우 점프했는데도 공의 방향을 틀어버린, 역사상 최고의 수비수라 평가받는 올라주원의 위대함을 한순간에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렇게 경기는 7차전으로 간다.
5.7. 7차전
파이널 7차전(현지시각 6월 22일, 더 서밋, 휴스턴) | ||||||
팀 | 1쿼터 | 2쿼터 | 3쿼터 | 4쿼터 | 최종스코어 | 시리즈 전적 |
휴스턴 로키츠 | 22 | 23 | 18 | 27 | 90 | 4승3패 |
뉴욕 닉스 | 21 | 22 | 17 | 24 | 84 | 3승4패 |
6차전까지 양팀 경기는 약간의 과장을 보태서 올라주원이 이끄는 휴스턴의 프런트코트진 vs. 하퍼와 스탁스가 이끄는 닉스의 백코트진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19] 그리고 이 날 경기를 가른 것은 바로 닉스 백코트진의 중추였던 스탁스의 야투감이었다. 올라주원이 25득점 10리바운드 7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공격 세 지표에서 모두 팀 내 1위를 기록했던 반면, 존 스탁스는 이 날 야투 전체 2/18, 3점슛 0/11이라는 극악의 슛감을 보여주었다.
직전 경기였던 6차전까지 로키츠의 주전 포인트가드였던 케니 스미스는 시리즈 내내 삽을 푸고 있었는데, 톰자노비치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를 클러치 타임에 샘 카셀 대신 기용하는 패기를 보여주었고, 스미스는 6차전 클러치 타임에 결정적인 3점슛을 성공시키면서 이러한 신뢰에 보답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닉스의 팻 라일리 역시 이러한 모습에 자극을 받았는지 극히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었음에도 스탁스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다. 하지만 스탁스는 이러한 신뢰에 부응하지 못한채 4쿼터에만 무려 8개의 슛을 시도해서 모두 놓쳐버리면서 로키츠 팬들에게는 희열을, 닉스 팬들에게는 절망을 안겨주었다. 스탁스를 대신해서 데릭 하퍼가 돌파를 중심으로 23점을 올리면서 분전했고, 그 결과 4쿼터 막판 파울 작전으로 점수차가 벌어지기 전까지는 원포제션 차이의 대접전이 이어졌지만 끝끝내 스탁스의 야투부진으로 인한 점수차를 닉스는 회복할 수 없었고 결국 90대 84, 로키츠가 6점차로 승리하면서 감격의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한다.
6. 파이널 MVP
하킴 올라주원기록 : 7경기 출장 / 야투율 50.0% / 평균 26.9득점 / 9.1 리바운드 / 3.6 어시스트 / 3.9 블락
동 포지션의 라이벌 패트릭 유잉을 7경기 내내 압도했던[20] 올라주원은 10년 전 대학시절 NCAA 결승전 패배에 대한 설욕을 더 큰 무대에서 갚는데 성공한다. [21]
1994년의 하킴 올라주원은 시즌 MVP와 파이널 MVP 동시 석권은 물론, DPOY까지 수상한 역대 최고의 단일 시즌 중 하나를 보냈다고 평가받는다.
7. 우승 반지
8. 여담
- 시리즈가 최종 7차전까지 진행되는 동안 어느 팀도 100득점을 넘긴 경기가 없었다. 그나마 아슬아슬한 차이도 아닌 3차전에서 로키츠가 기록한 93점이 시리즈 동안 가장 높은 팀 득점이였다. 그만큼 양팀의 수비력이 뛰어났던 탓에 끈적끈적한 진흙탕 농구가 시리즈 내내 이어져서 수비 농구를 선호하는 팬들에게는 이 시리즈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90년대 들어 NBA 사무국이 골치를 앓던 팀득점 감소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리즈로 결국 다음 시즌부터 NBA는 3점 슛 라인을 앞당기는 병크를 저지르는 등 그 여파가 좀 있었다.[22]
- 시리즈 5차전 도중에 OJ 심슨 사건 직후 심슨이 경찰의 추적을 피해 도망치는 사건이 있었는데, 이 장면이 전국으로 생방송됐다. 이로 인해서 당시 미국에서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있던 2만명을 빼고는 죄다 채널을 돌렸다."라는 조크가 있기도 했다.
- 7차전에서 어마어마한 빈공에 시달렸던 존 스탁스는 당연히 극성맞은 뉴욕 언론과 팬들의 집중 포격을 받았다. 스탁스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았던 팻 라일리에게도 많은 비난이 쏟아졌는데, 라일리는
간지가 폭발하는명언 한 마디로 언론들을 조금은 잠재우는데 성공했다. "춤은 나를 파티에 초대해준 사람과 함께 춰야하는 것이다." 사실상 유잉이 공격지표에서 워낙 부진한 탓에 일찌감치 끝날 수 있었던 시리즈를 존 스탁스-데릭 하퍼 콤비의 백코트진이 하드캐리한 탓에 7차전까지 몰아갈 수 있었고, 이 탓에 만약 닉스가 우승해도 MVP는 유잉이 아닌 스탁스나 하퍼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기에 스탁스에게만 책임을 지우는 건 가혹한 상황이긴 했다. 그래도 마지막 7차전 3점슛 11개 시도에 0개라는 임팩트가 너무 커서... 이 중에 2개만 들어갔어도 닉스가 우승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 이 시리즈를 포함해서 뉴욕 연고지의 프로 스포츠 팀들은 휴스턴 연고지의 프로 스포츠 팀만 플레이오프에서 만나면 쪽을 못 쓰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 1975 동부 컨퍼런스 1라운드 : 뉴욕 닉스(敗) : 휴스턴 애스트로스 (勝)
- 1991 AFC 와일드카드 : 뉴욕 제츠 (敗) : 휴스턴 오일러스 (勝)
- 2015 ALWC : 뉴욕 양키스 (敗) : 휴스턴 애스트로스 (勝)
- 2017 ALCS : 뉴욕 양키스 (敗) : 휴스턴 애스트로스 (勝)
- 2019 ALCS : 뉴욕 양키스 (敗) : 휴스턴 애스트로스 (勝)
- 2022 ALCS : 뉴욕 양키스 (敗) : 휴스턴 애스트로스 (勝)
- 정규시즌 스탯만 보더라도 이 시리즈는 진흙탕 농구로 흘러갈 것이 예상되었는데, 뉴욕 닉스는 디펜스 레이팅(공격권 100번당 상대팀 실점)에서 92-93시즌부터 94-95시즌까지 3년 연속 1위를 했으며, 92-93시즌과 93-94시즌은 페이스를 고려하지 않은 상대팀 최소실점까지 1위였다. 그리고 로키츠는 92-93시즌에 디펜스레이팅 3위, 93-94시즌에 2위였다.(95시즌엔 수비가 많이 약해지며 12위). 반면 두 팀의 오펜스 레이팅은 (27개팀 중) 로키츠 15위, 닉스는 16위였다. 즉, 94년 파이널리스트 두팀은 리그에서 수비를 가장 잘하는 팀들인 동시에 공격력은 중간도 채 못가는 팀들이었던 것. 이러니 진흙탕 시리즈가 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닉스는 수비도 잘했지만 90년대 팀들 중 독보적으로 가장 거칠었다.
9. 관련 문서
[1] 1992 동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 7차전 패배, 1993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2연승 후 4연패.[2] 한국어로 적나라하게 직역하면 깡패 농구. 원체 거칠었던 90년대 NBA에서도 특히 악명 높게 거칠고 끈적한 뉴욕 닉스의 수비 조직력을 보여주는 표현.[3] 사실 닉스는 원래 마크 잭슨이라는 걸출한 포인트 가드가 있었으나 팻 라일리가 수비력이 부족하다면서 트레이드했다. 그리고 잭슨은 인디애나 페이서스로 옮겨가서 두고두고 뉴욕 닉스를 괴롭혔다. 라일리가 뉴욕 닉스에서 범한 몇 안되는 큰 실책 중 한가지로 평가되는 무브.[4] 애틀랜타 호크스도 57승 25패를 기록하면서 뉴욕 닉스와 동률의 승률이었지만, 상대전적에서 앞서서 1번 시드를 차지. 그리고 정작 호크스는 세미파이널에서 레지 밀러의 인디애나 페이서스에게 처절히 털리면서 광탈(...)[5] 당시 호크스는 정말 좋은 팀이었다. 에이스 도미니크 윌킨스가 전성기는 지났지만 실력이 아직 건재한 가운데, 케빈 윌리스는 (올스타는 아깝게 놓쳤지만) 무려 19.1점 12리바운드를 기록, 무키 블레이락이 처음으로 올디펜스 퍼스트팀에 오르며 90년대 최고의 가드 수비수 중 하나로서 전성기에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좋은 팀인데도 시즌 후반으로 넘어가는 2월 말에 갑자기 윌킨스를 트래이드해버리면서 대니 매닝을 데려와 에이스를 사실상 교체한 것. 정규시즌은 괜찮게 마무리하긴 했으나, 이 시리즈를 보면 호크스 선수들의 기록이 그리 좋지 않다. 시즌 중 야투 46.4%를 기록한 블레이락은 야투율이 37%에 그쳤으며, 케빈 윌리스는 득점이 11점으로 8점이나 떨어졌다. 호크스가 상위권 팀임에도 시리즈 내내 끌려다닌 형색으로, 갑작스레 에이스가 교체되어 팀케미스트리에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6] 아직 신인이였던 1986년에 매직 존슨의 LA 레이커스를 꺾고 결승에 가지만 상대가 최전성기의 래리 버드가 이끄는 보스턴 셀틱스였던지라.. 탈탈탈..[7] 이 기록은 2017-2018 시즌 제임스 하든 - 크리스 폴 콤비에 의해 깨지게 된다. 하지만 그 둘은 반지가 없잖아[8] 서부 1번 시드는 63승을 기록한 게리 페이튼과 숀 켐프의 시애틀 슈퍼소닉스. 하지만 시애틀은 1라운드에서 디켐베 무톰보의 덴버 너기츠에게 충격의 업셋을 당하면서 광탈(...)[9] 유잉의 전성기는 사실상 90년대 초반이었다. 유잉은 올라주원과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안 좋은 무릎으로 기동력을 상실하며 최전성기 시절은 꽤 짧았다. 반면 올라주원은 이런 건강 문제에선 비교적 자유로웠고, 오히려 팀플레이어로서 성장하며 (개인기량만 따지면 최고였던)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보다 더욱 위력적인 선수가 되어 있었다.[10] 멤버를 보면 알겠지만 닉스는 유잉 외엔 득점을 만들어줄 수 있는 선수가 부족하다. 닉스는 마크 잭슨이 PG로 있던 시절 이후 시원하게 공격하는 농구를 한 적이 없으며 항상 진흙탕 농구를 만든 뒤 살아남는 방식이었다.[11] 특히 경이로운 점은 승부처였던 4쿼터 6분을 남기고 5파울에 몰렸음에도 올라주원을 매우 효율적으로 수비해냈다는 점이다.[12] 그나마 13리바운드에 7블락을 기록하면서 수비에서는 기대했던 몫을 충분히 해주었다.[13] 당시 nba에서는 삼점슛 파울일때도 자유투가 2개만 주어졌다.[14] 닉스의 두 가드 둘이 미쳐 날뛰었던 반면, 로키츠의 주전 포인트가드였던 케니 스미스는 단 2점에 그쳤다. 오죽하면 백코트 파트너였던 맥스웰이 경기 종료 후 인터뷰에서 "이기려면 스미스가 분발해야 한다"라고 했을 정도. 여기에 포지션 매치업 상대인 스탁스 역시 "이 시리즈는 가드진에 의해 승부가 좌우될 것이다."라며 스미스의 속을 슬쩍(?) 긁었다.[15] 메이슨이 점프를 하자 팔을 잡아챘다.[16] 사실 공격에서 부진이 컸지만 유잉은 수비와 리바운드에선 올라주원과 대등 이상인 모습을 보여줬다. 리바운드와 블럭 모두 더 수치가 높았으며, 특히 블럭은 당시 한 시리즈 기준 신기록인 30블럭을 기록. 다만 올라주원이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었고 유잉의 수비 파트너들이 더 훌륭했기에 수비에선 유잉이 더 도움을 많이 받았다. 1대1로 유잉을 많이 막았던 올라주원과 달리 유잉은 1대1로도 막았지만, 다른 선수들이 더블팀을 오거나 아예 매치업을 맡긴 적도 있었다. 물론 이와 별개로 두 센터 모두 수비와 리바운드에선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17] 참고로 이 기록은 다음해에 깨진다. 바로 로키츠 본인들이 피닉스 선즈와의 서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 원정 7차전을 이기면서.[18] 6/6. 12득점[19] 물론 유잉이 못했다는 것은 아니다. 특히 수비에서 유잉이 공헌한 바는 어마어마했다. 그렇지만 팀에 1옵션이라는 사실을 고려할 때 유잉의 공격적 기여도가 극히 저조했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다.[20] 그나마 유잉이 분전한 것은 5차전이었는데, 그 5차전조차도 올라주원이 더 많은 득점을 기록했다. 그러나 올라주원은 막판에 유잉이 쉴 때 득점을 조금 쌓은게 있었고, 승부가 갈릴 때까지 둘의 득점을 비교하면 유잉의 근소 우위였다. 5차전은 유잉이 확실히 더 잘 했다고 할만한 유일한 경기로 꼽힌다. 워낙 올라주원이 잘해 그마저도 큰 차이는 아니었지만.[21] 유잉의 경우에는 당시 파이널 최대 블락인 30블락을 기록했고, 수비 지표(경기당 12.4리바운드, 4.3블락)에서 올라주원을 압도했지만 워낙 공격이 부진했고 결정적으로 시리즈에서 패했기 때문에 묻히고 말았다.[22] 3점 슛 라인을 7.24미터에서 6.71로 당기면서 당연히 3점 슛 시도와 성공수가 엄청나게 늘었다. 문제는 3점 슛 라인을 앞당긴 목적이 팀 평균 득점의 상승을 위해서였는데 정작 팀 평균득점은 이전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줄어든 라인때문에 기존에 3점 슛을 던지지 않던 센터나 파워포워드들이 3점 슛을 시도해 빗나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으로 당장 패트릭 유잉만 해도 94-95 정규시즌에서 3점슛을 21개나 시도했을 정도였다. 결국 97-98시즌부터 3점 슛 라인이 원래대로인 7.24미터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