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0.26 사건의 여담을 정리한 문서.2. 사진
재판에 증인으로 출두한 가수 심수봉(왼쪽 모자 눌러쓴 여성)과 신재순(오른쪽). |
10.26과 관련된 인물들.[1] |
사건의 전모를 브리핑하는 당시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 육군 소장. |
3. 기타
- 궁정동 안전가옥은 한때 백의사의 단장 염동진이 살았던 곳으로 선술했듯이 1993년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1980년 먼저 헐린 나동을 제외한 다동 등의 다른 가옥들도 모두 철거[2]되어 시민공원인 무궁화동산으로 바뀌었다.
- MBC에서 매년 12월 31일에 열리는 MBC 가요대제전의 전신은 10대 가수 가요제였는데 원래는 경향신문 합병일을 즈음한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열렸었다. 1979년 행사는 10월 27일에 열릴 예정이었는데 이 사건 때문에 연기되어 12월 31일에 열리게 되었고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3]
- 박근혜는 동생들인 박근령, 박지만과 함께 해마다 10월 26일 박정희 추도식에 참석했으나 18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에는 불참했다. 대통령 신분으로서 추도식에 참석하면 자칫 정치 논란이 발생하기 때문으로 추정되었다. 그리고 대통령 파면 이후에는 징역을 받고 있기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2021년 12월 사면되면서 2022년부터는 다시 참석할 가능성이 생겼지만 건강 악화로 인해 참석하지는 못했고, 회복된 2023년에는 11년만에 추도식에 참석했다.
-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1979년 10월 20일 신묘한 통찰력으로 박정희의 죽음을 예언했다고 하는 말도 안되는 선전을 한다. 이는 김정일의 충복이었던 대남비서 허담의 저작인 <김정일 위인상> 1권에 나오는 내용으로, 이 책에 따르면 김정일은 미국의 주구 박정희의 효용이 다 했으니 곧 미제국주의자들에게 용도폐기당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허담은 "박정희사살사건은 음모의 소굴인 미중앙정보국에서 은밀히 조직되였으나 천리혜안을 지니신 친애하는 지도자동지께서는 놈들의 음모의 소굴도 환히 들여다보신다."라고 온갖 후빨주접을 다 떨었다.
- 이 사건의 생생한 목격자였던 심수봉은 전두환이 집권한 후, 2년 동안 가수 활동을 강제 금지 당했고, 신재순은 주변의 따가운 눈총에 시달려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다. 김재규의 유족들도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또 김수환 추기경이 김재규와 그의 부하들 사후 유족들을 어느 정도 챙겨줬다고 한다.
- 사건 방생 전부터 여러가지 불길한 징조가 있었다고 한다. 삽교천 방조제 준공 치사를 박정희가 또박또박 읽어 내려갔으나, 참석자들의 말에 따르면 여느 때와 달리 힘이 없어 보였고[4] 준공비 제막식에서는 가림막이 벗겨지지 않아 경호원들이 뛰어올라가 낑낑거리며 가림막을 내렸으며,[5] 행사를 마치고 전용 헬기를 타고 도고온천으로 갔을 땐 근처 울타리에 갇혀 있던 사슴이 헬기 착륙 소리에 놀라 날뛰다 기둥에 머리를 부딪혀 뇌진탕으로 즉사하기도 했다.[6] 김종필도 그의 증언록 소이부답에서 한남동 음식점에서 얘기를 나누던 중 한 참석자가 “오늘 낮 아산 도고호텔 앞마당에 대통령 일행이 탄 헬기 세 대가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내렸답니다. 헬기가 착륙하는 소리에 놀라 사육장에서 키우던 새끼 밴 어미 사슴이 날뛰면서 헬기 뒤꼬리 프로펠러에 부딪쳐 죽었다고 하네요.”라고 말하자 순간 가슴에 서늘한 것이 스쳐가는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어 등이 오싹했다고 회고했다.
- 김종필은 훗날 10.26 사건을 회고하면서 1961년 5.16 군사정변 뒤 서울 다동 한 음식점에서 박정희와 함께 유명 역술가인 백운학을 만났을 때가 기억났다고 한다.[7] 그 자리에서 백운학은 박정희에게 “각하, (정권이) 20년쯤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라고 했고, 박정희는 빙그레 웃으며 좋아했다고 한다. 이후 식사를 마치고 마루 끝에 앉아 신발끈을 매던 자신에게 백운학이 슬그머니 다가와 “차마 본인한테 직접 말씀드릴 수 없었는데…. 각하께서 마지막은 퍽 험하게 돌아가실 명운입니다.”라고 말했다고 말하며 "백운학의 말이 맞아서는 안 되겠기에 내가 얘기하지 못했고, 안 맞으면 싱거운 사람이 되겠기에 얘기하지 못했던 예언이었다. 그 예언은 18년 뒤 참혹한 현실로 찾아왔다."며 회고했다. [발굴특종] 10·26 그날 … 김재규, 박정희 향해 "야, 너두 죽어봐"
- 박근혜 대통령에게 탄핵 주문을 선고한 이정미 헌법재판관(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임명 청문회에서 "고등학생 때 원래 수학교사가 꿈이었는데, 10.26 사건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보고 법률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고 말한 바 있다. # 운명의 장난이라면 장난일 수 있다.
- 박정희의 동거녀였던 이현란[8]은 前 동거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식사하던 중에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접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밥을 다 먹었다고.
- 사건 당시 김재규가 사용한 총기인 PPK와 M36 리볼버는 증거품으로 보안사령부에서 몰수하였는데, 이후의 행적이 묘연하다. 당시 수사기록을 보면 원래 서류상 중앙정보부 소유 총기여서 중앙정보부에 반납했다고 나온다. 정작 국가정보원에서 확인 결과 이들 총기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에 연루된 총기이고 수사기록에서 총기번호까지 다 명시되어 있는데도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은 큰 미스테리이다.
-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중앙정보부의 활동을 장악했고 중정 사무실에 요원들을 배치했다는 미국 문건이 나왔다.#
- 김재규의 셋째 여동생인 김정숙이 프랑스 AFP통신 인터뷰에서 "사람을 죽였다면 벌을 받는 게 마땅하다."며 "그러나 오빠는 스스로 대통령이 되고자 대통령을 죽이지 않았으며, 국가에 반역을 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 김재규가 의도한 일은 아니였겠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또 다시 전쟁터가 될 뻔했다. 당시 서울에 있던 북한의 대남공작원들은 육군병원으로 실려간 위급환자의 차량 행렬로 미루어, 어쩌면 최고지도자인 박정희 대통령 자신이 부상했을지도 모른다고 정확히 보고했기 때문이다. 쿠테타가 진행 중인 것일 수도 있다는 보고는 덤이다. 그리고 보고를 들은 다음 날인 10월 27일 아침, 북한은 전군에 전쟁준비돌입 비상령을 내려 군병력과 항공기를 재배치시키며 대대적인 침공 준비에 들어갔다. 천만다행히도 전쟁은 발발하지 않았지만 만일 진짜로 휴전선을 넘어왔다면 휴전이 깨지고 전쟁이 재개됐을 가능성도 있다. 김재규가 '거사의 이유'라고 주장했던 민주주의가 전혀 다른 의미로 실현되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이었던 존 위컴이 발간한 회고록에도 위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9]
- 일본의 혼노지의 변과 비슷하다. 박정희와 오다 노부나가, 김재규와 아케치 미츠히데가 서로 비슷하다. 그리고 이후에 전두환이 쿠데타를 한 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실권을 잡은 것과 흡사하다. 한 일본인이 이 시기를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 혼노지의 변을 엮은 색다른 평론을 한 경우도 있었다.[10] 사실 일본에서는 드라마 제5공화국 매니아가 있는 것처럼, 이런 장르를 좋아하는 일본인들 또한 한국의 박정희, 전두환 군부 정권 시절 이야기를 좋아하는 매니아들이 있는 편이다.
- 중국에서 이 사건을 다룬 매체가 정식 공개는 못하더라도 그 영상이 돌아다니는 것은 인터넷상에서 큰 검열은 하지 않는다. 중국 동영상 사이트 빌리빌리에서는 이 사건을 묘사한 드라마 제4공화국과 제5공화국의 초반부 내용은 검열되지 않으나, 광주 민주화 운동을 묘사한 화는 아예 검열 때문에 영상 자체를 올릴 수 없다. 중국 배우 이현은 이 사건을 다룬 영화 남산의 부장들을 '2020년 최고의 한국 영화'라고 극찬하였다. 이 영화를 통해 한국의 역사에 대해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고 코멘트를 남겼으며, 이병헌의 연기력 또한 극찬했다. 그 영화는 중국에서 정식 개봉을 하지 않았다. 사실 영화 내용이 독재 중인 중국에선 상당히 민감할 법도 한데 얘기를 했다.[11]
- 사건 발생 42년 후, 정확히 10월 26일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사망하였는데, 박정희 전 대통령과 동일한 사망일과 노태우의 수인번호 1042가 주목받아 대중들에게 다시금 이 사건이 환기되었다.
- 만찬 당시 상에 올렸던 술 중 시바스 리갈이 있어서 유명해졌다. 10.26 사건을 상징하는 물건 중 하나로 꼽힐 정도. 시바스 리갈은 12년산, 18년산, 25년산 총 3가지 종류가 있는데 18년산은 1997년부터 생산하였고, 25년산은 1920년대까지 제조하였다가 미국 금주법으로 인해 생산을 중단하고 2007년부터 제조를 재개했으므로 만찬 때 올라온 시바스 리갈은 12년산으로 봐야 한다.
- 해당 사건 이후 약 45년 동안 계엄은 없었지만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사태가 발생하였다.
[1] 박정희를 중심으로 왼쪽에서 두 번째가 김재규, 오른쪽 끝이 차지철이다. 사진 로고에 가려서 눈치채기 어려운데 사진 맨 왼쪽은 비서실장 김계원이다. 박정희 머리 위에 얼굴을 돌리고 서있는 인물은 박상범 경호관으로 추정된다. 10.26 사건 4년 전 사방공사 시찰 때의 모습이다. 사진에 나와 있는 김재규, 차지철의 위치가 박정희의 왼팔과 오른팔의 위치와 같다는 점이 흥미롭다.[2] 여기서 공개된 장소는 다동으로 불렸던 한옥으로 거기서 정승화가 김정섭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김재규를 기다렸다.[3] 참고로 당시 최고인기가수상은 혜은이가 수상했다.[4] 1979년 10월 28일자 동아일보.[5] 이때 준공비에서 가림막이 내려가지 않고 걸려있는건 당시 대한뉴스 등 기록 영상에서도 확인된다.[6] 준공비 제막식 및 사슴 즉사 에피소드 출처: 조갑제 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제1권. 이건 드라마 제4공화국에서도 묘사된다.[7] 백운학은 쿠데타 전 자신을 찾아온 김종필에게 대뜸 “당신, 혁명하려고? 그거 성공하니 밀어 붙이시오”라고 말하여 김종필을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8] 김호남과 이혼하기 전~육영수와 재혼하기 전 사이에 동거했다.[9] 다만 6. 25 당시에는 국군의 역량이 크지 못했고, 북한이 소련, 중국의 원조와 치밀한 준비를 했기에 몰아붙일 수 있었던 것이지, 이 시점에서는 국군의 역량도 커져있었고 북한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상태로 어택땅을 하게 되니 북한이 박정희가 죽었으니 이긴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오히려 미군과 한국의 명분만 주어서 역으로 박살났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10] 이런 연장선상에서 보면 간혹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노태우나 김영삼에 비견되기도 한다. 도요토미의 라이벌 혹은 경쟁자였다가 도요토미에게 협력하여 2인자 자리를 얻어내고 이후 1인자의 자리에 올라서자 도요토미 가를 박살냈다는 점에서 착안한 듯.[11] 의외로 중국 본토 연예인들 중 한국의 사회파 영화를 칭찬하는 사람들도 제법 있는데(장쯔이도 영화 변호인을 극찬하기도 했다), 이런 거 보면 중공독재에 입도 못여는 중국 연예계라고 욕도 먹지만, 중국 연예계도 내심 자국 사회를 비판하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구는 있는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