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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렉트로닉 뮤직/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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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역사
2.1. 클래식(현대음악)계의 전자음악 도입2.2. 90년대 이후 테크노 무브먼트(1세대 일렉트로니카)2.3. 2005년 이후부터 지금까지(2~3세대 일렉트로니카)
3. 문제점4. 한국의 일렉트로니카 음악가들5. 한국의 일렉트로니카 레이블/크루6. 참고 자료

1. 개요

문제는 사람들이 기계에서 원음이 들린다고 믿는 것이다. 원음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기계의 왜곡을 사랑하라. 기계의 잡음을 사랑하라. 그것이 결국 우리가 말하는 음악이다.
모하비 3집, Machine Kid#

대한민국전자음악에 대한 개괄과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2. 역사

2.1. 클래식(현대음악)계의 전자음악 도입

참고자료
최초의 한국 전자 음악 시연은 클래식 작곡가 강석희[1]가 1966년 12월 9일 명동국립극장에서 초연한 <원색의 향연>이라고 한다. 해당 음악은 KBS 스튜디오에서 제작되었으며, 전봉건의 시를 두 사람이 낭독하고 무대의 푸른 조명을 비추는 20분짜리 곡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악조건으로 인해 전자음악의 맥을 이어지질 못했다.

이후 작곡가 나인용이 1973년 유학시절 작곡한 <전자음악과 플루트를 위한 십자가의 환상>을 발표하는 등 간간이 발표되어 왔는데, 1976년 강석희가 주관한 범음악제에서 전자음악과 컴퓨터 음악, 테이프 음악을 소개하면서 한국의 클래식 음악계에서 점점 알려지기 시작했고,[2] 1977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Roland의 System 100 아날로그 모듈러 신디사이저가 설치되면서 당시 황성호, 정덕산 등 작곡과 학도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한다. 당시 서울대 작곡과 학생들이 이 신디사이저로 작곡을 하기 시작했고, 이 작품들은 1979년 아시아 작곡가연맹 서울대회기간 중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중간 휴식시간 중 들려주는 형태로 발표 됐다고 한다.

이후 서울대를 졸업한 황성호 등 서울대 졸업생들 중심으로 공정실 낙원상가 기술자가 합세해 ‘전자음악연구회’를 만든다. 이후 전자음악연구회 회원 중심으로 ARP2600나 Roland SH5 등 아날로그 신디사이저로 전자음악 작품을 계속 작곡했고, 1980년대 중반에 들어 클래식 작곡계의 전자음악 발표가 눈에 띄게 증가하였다.

이후 전자음악연구회는 뎐롱패라는 이름으로 바뀌고 당시 개발 되었던 DX-7중심의 디지털 신디사이저와 Max(프로그래밍 언어)와 같은 프로그램을 활용한 컴퓨터음악 활동을 해오다가, 1993년 한국전자음악협회로 이어진다. 한국전자음악협회는 현재까지 에밀레 학술지를 발표하는 등 활발이 활동하고 있으며, 황성호 작곡가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작곡가 교수로 재직중이다.

2.2. 90년대 이후 테크노 무브먼트(1세대 일렉트로니카)

1985년 이재민(가수)은 '골목길'이라는 노래를 발표한다.

1986년 록밴드 산울림11집뉴웨이브의 영향을 받은 전자음악 요소를 담은 '내가 고백을 하면 깜짝 놀랄거야'를 발표한다.

신해철은 1990년에 전자음악 요소가 많이 들어간 1집과 2집, 1992년 환경파괴의 미래를 그린 '1999'라는 전자음악 반주의 노래를 발표한다. 그리고 1998년에는 한국 대중음악 최초의 일렉트로닉 음반 중 하나로 꼽히는 3번째 솔로 앨범 Crom's Techno Works을 낸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한국 최초로 테크노의 이름을 달고 앨범을 발표한다. 자신들의 1집을 리믹스한 'Live & techno mix'인데 이 안에는 환상 속의 그대가 여러 버전으로 테크노화 시킨 음악이 담겨있다.


1992년 환상 속의 그대 Part 4. '수시아'와 더불어 우리나라 테크노 음악의 시초격인 트랙. 5분 50초경에 사물놀이 사운드가 등장하기도 한다. 당시 해외 레이브 뮤직 씬의 트렌드인 Hoover와 Rave stab, TR-909 등의 음색을 훌륭히 활용했으며 보컬 파트까지 포함하여 일렉트로니카의 작법을 온전히 따른 것은 시대보정을 감안해도 이 장르에 대한 서태지의 이해도가 얼마나 뛰어났는지 알수 있다.

이후 1993년 서태지와 아이들 2집 수록곡 '수시아'는 본격적인 한국 최초의 레이브 트랙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수시아는 샘플 소스의 사용비중이 큰 편이다.

9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1997년 후반 삐삐밴드 출신 이윤정의 솔로 명의로 <진화>라는 본격적인 전자 음악 음반이 출시되었고, 해를 넘겨 1998년 봄에는 모하비의 <테크노전자음악잡동사니=타나토스>가 발매된다. 이 음반은 한국에서 발매된 첫 테크노 음반으로 여겨진다. 한편 대중 음악 판도에서는 신해철의 1998년작 <Crom's Techno Works>나 윤상의 작업물 등 테크노 음악의 작법을 부분적으로 도입한 가요들이 등장하였다.

90년대 후반 한국에서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대한 담론은 주로 PC통신을 통해 이루어졌다. 특히 하이텔의 <21세기 그루브>라는 동호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규모면에서의 비교는 이쪽이 조금 밀리겠지만, 한국 힙합에 있어서 나우누리 SNP동호회가 가진 의미에 상응하는 동호회였다.[3] 1999년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일렉트로니카 컴필레이션 음반인 <techno@kr>[4]이 독립 레이블인 DMS TRAX를 통해 발매되었다. 앨범 리뷰 이 시기에는 음악뿐만 아니라 레이브 파티 등 클럽 문화에 대한 저변이 확대되기도 하였다.

1999년에 들어 이정현을 비롯한 소위 '테크노' 음악의 열풍으로 많은 이들에게 테크노와 일렉트로니카 음악이 알려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하지만 단순한 댄스 음악으로 여겨지는 등 일렉트로니카가 잘못 알려진 측면이 없지 않았다. 또한 마약, 문란한 성관계 등 클럽 문화에 대한 왜곡된 시각으로 인해, 일렉트로니카 음악까지 싸잡혀서 퇴폐 문화로 여겨지기도 하였다.


당시의 테크노 문화를 기록한 KBS 현장르포 제3지대의 영상. 달파란, 트랜지스터헤드, 모하비 등 1세대 한국 일렉트로니카의 거물들이 등장한다.

어쨌든 좋은 방향으로 지속될 것 같던 한국 일렉트로니카 음악의 흐름은 2000년대에 들어서자 거품처럼 꺼져버렸다. 이에 대해 추가설명을 하자면 상기 말한 DMS TRAX를 비롯해 펌프기록, E.F.O Groove K.E.M.F, 벌룬 앤 니들 (엄밀히는 노이즈 기반의) 등 일렉트로니카 전문 음반사들이 있었고 이너테크와 101레이버스, 02 프로덕션, 열반화 등 이벤트를 전문으로 하는 프로모터 집단들도 생겨나는 추세였다. 다만 문제는 이들 파티 프로모터, 혹은 디제잉 라인과 아티스트 라인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이정현 혹은 이윤정으로 테크노를 처음 접한 이들에게 달파란이나 모하비, 가재발, 트랜지스터헤드 등의 정통 테크노는 낯설었고, 전문 디제이 라인과 아티스트 라인의 교류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두 집단 모두 '노는 사람만 노는' 상황이 연출되었다. 당시 데이트리퍼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아티스트 류한길은 소음인가요의 인터뷰를 통해 이정현 등의 대중매체가 가져온 '테크노 이미지'의 여파가 너무 심해, 당시에 활동하던 언더그라운드 뮤지션들이 대중의 인식과 반대되는 (원래 자신들이 하던) 음악을 하기 힘들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박국 : (...) 그 후에 아우라소마, PLUR 등 클럽도 몇개 생기고 그러다 갑자기 뭔가 슉하고 사라졌죠.
류한길 : 제가 기억하기는 사라지는 원인 중 하나가 일단 이정현씨의 '와'.. 그 여파가 너무 심했어요. 그 때 무대 의상이랑 부채 기억하세요? (하박국: 아 예,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그 게 '테크노'란 이름으로 히트를 치면서 저희들은 완전히 도적놈들 같은 입장이 되어버린 거죠. 대중의 인식이라는 게.. 실제로 잘 알려지지 않은, 언더그라운드 기반의 다채로운 것이 일어나고 있었는데 (...) 외국에서 테크노 붐이 인다고 하니까 갑자기 기획사 사람들이 하나둘 공연장에 오기 시작한 거에요. 그러다가 분위기가 어떻게 됐냐면 '지금 여기서 활동하는 언더그라운드 테크노 뮤지션을 대중음악쪽으로 끌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면서 기존 대중음악 쪽에서 프로듀싱을 하던 분들이 해외의 스타일리즘을 가요 스타일에 적용시키고... (후략) - 소음인가요 : 아티스트토크_류한길(Ryu HanKil) 편에서 발췌함

이와 함께 2000년대에 들어서며 테크노의 주 무대였던 홍대 댄스클럽이 여러 가지 사정으로 문을 닫는 경우도 생겨났다. 한국 클럽문화 분석 국산 일렉트로니카 음반의 수가 줄어든 것은 레이블의 존속 문제도 있지만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가 매우 부족했다는 데 있었을 것이다. 아우라소마와 같은 레이브가 국내에서도 시도되었지만, 국내에서 생소한 이 문화는 특히나 월드컵 전후 미디어에서 레이브 음악을 약물과 연관지으며 #, # 논란이 심해졌고 결국 미디어의 철퇴를 맞고 시들시들해지게 되었다.

대부분의 일렉트로니카 음악가들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였는데, 정확히 말하면 평가받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열악한 환경에서 활동하고 있거나 은퇴하였다. 대표적인 한국 일렉트로니카 1세대 뮤지션인 모하비는 음반을 내다가 파산하는 등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2011년까지만 해도 공사판에서 육체 노동을 하다가 그나마도 폐렴으로 그만 둘 수밖에 없었다. 기타 음악가들도 활동을 접거나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2.3. 2005년 이후부터 지금까지(2~3세대 일렉트로니카)

2000년대 중반에 들어서 하우스/라운지 음악이 대중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들 음악가들이 많은 인기를 끌면서 마치 하우스나 라운지 음악이 일렉트로니카의 전부인양 여겨지는 풍조를 낳기도 했다.

일렉트로니카의 시선이 바뀌게 된 시기는 2010년 이후로, 이 시기는 해외에서도 기존의 전자음악에 EDM이라는 태그가 새로 달리며 댄스음악을 다시 조명하는 때였다. We No Speak Americano와 Party Rock Anthum의 흥행시기 이 두 곡은 과거의 666 - Amok에 버금가는 만큼 흥행을 거두었으며 이를 통해 클럽 음악의 장벽이 낮아지며 사람들이 댄스음악을 더 쉽게 접하게 되었고, 글로벌 게더링과 월드 디제이 페스티벌, 넥스트 플로어 08 등의 페스티벌이 전자음악 매니아들을 결집시키며 전자음악 커뮤니티의 부흥이 일어났다. 2012년 경 Seoul Electronic City라는 라디오쇼가 지역방송인 마포FM에서 송출되어 국내 전자음악을 소개하였으며, 비슷한 시기 언더그라운드 미디어&레이블인 영기획의 창단과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의 등장으로 인해 사람들의 전자음악에 대한 접근성이 조금 더 높아졌다. 2013년에는 와트엠이라는 라이브 전자음악을 위한 공연 무대와 대안적 음원 유통 플랫폼인 오디오로그가 등장하여 아티스트의 접근성이 더욱 높아졌고 전자음악 세미나 - 이매진, 디제잉/프로듀싱 특화 교육과정을 전수하는 SEMC도 생겨나게 되었다. 대중적으로도 무한도전에서 EDM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이기도 하고, 전자음악이라는 장르 내에서 가장 많은 앨범이 발매된 해이기도 하다. 이 현상은 페이스북과 사운드클라우드, 밴드캠프를 비롯한 SNS 페이지가 아티스트에 대한 소개 및 작업 정보를 더욱 쉽게 정리하고 공개할 수 있게 됨으로써 대부분의 아티스트가 이를 활용한 것으로 보이며 2014년 현재까지 이런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한국에선 일렉트로니카란 장르를 왜곡된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꽤 있다. 예를 들면 클럽 DJ는 그냥 동네 양아치가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든지 단순히 클럽에서 추는 댄스음악으로 생각한다든지, 일렉트로니카는 그냥 컴퓨터로 뚝딱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다든지. 이것은 실제로 한국에 알려진 일렉트로니카 음악이 대부분 EDM 위주의 댄스 음악인 탓이 크다. EDM 아티스트 가운데서도 훌륭한 음악을 만드는 이들이 있지만, 클럽에서 몇 번 틀고 버리려고 만드는 양산형 음악이 많은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14년 현재 국내의 전자음악은 사운드아트, 미디어아트와 결합된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 있다. WeSA라는 사운드아티스트 네트워크의 창립 및 MAX/MSP의 사용, 소리왕, 소음인가요, 무잔향 등의 전시로 전자음악, 혹은 그 작법이 미디어아트와 결합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한편 EDM쪽에서는 인터넷의 발달로 국내의 아티스트가 해외 레이블에 데모를 보내거나 비트포트에 곡을 등록하며 해외 매체에 노출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는 기존 클럽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새로운 무대와 활로를 모색하던 중 예술과 관련이 있는 갤러리와 연이 닿아 좀 더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며 이런 형태로 변하게 되었다는 견해도 존재한다.

전자음악 커뮤니티 중 하나인 ESCAPE의 서비스 ESC WIKI에서 각 사건들을 타임라인 형식으로 정리하고 있기도 하다. 다음 링크를 참고. #

3. 문제점

현재는 조금씩 고쳐지고 있는 문제이기는 하나 아직 대한민국의 일렉트로닉 뮤직씬은 다른 전반적인 국가들[5]과는 다르게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EDM이 대중적인 인식 또는 음악의 한 종류로 듣는 장르로까지는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그에 대한 이유는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 먼저 대한민국에 제대로 된 일렉트로닉 음악이 들어온 시기가 길진 않다. 일단 대한민국에서 미디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기가 신해철 정도가 거의 초창기 시기로 뽑히며[6], 조금 더 가서 서태지와 아이들 정도가 제대로 일렉트로니카 장르에 대한 도전이 시작된 시기였다. 그러니 우리나라에 일렉트로닉 음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가 30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당연히 역사가 길지 않은 만큼 매우 세분화된 전반적인 일렉트로니카 음악에 대한 대중의 이해도도 낮을 수 밖에 없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일렉트로닉 뮤직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도 개선이 상당히 지지부진하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내에서 일렉트로닉 뮤직은 유행의 흐름에 따라 특정 한정적인 장르에만 관심이 급속하게 쏠리는 편으로 당장 대한민국에서 일렉트로니카에 깊은 관심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어떤 일렉트로닉 음악을 좋아하는 질문에 거의 대다수가 EDM 내지 일렉트로 하우스 음악을 좋아한다고 답하며[7], 테크노 음악에 대해서 질문하면 십중팔구로 20년이 훨씬 지난 이정현의 1집 아니면 클론을 떠올리는 편이다. 심한 경우에는 장르에 따라 전자음악의 형태로 보지 않고, 단순히 시끄럽고 정신 없는 비정상적인 소음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 또한 전자 음악의 온전한 형태를 가지고 즐기는 것이 아닌, 전자 음악이 가지고 있는 일부 요소를 차용해 다른 형태의 예술로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관심이 쏠려 상대적으로 주목도가 떨어진 것도 영향이 크다. 결국 음악은 대중이 듣고 해당 음악에 대한 소비가 있어야 발전하는 것이다. 물론 지금도 수많은 K-POP 음악들이 EDM 장르의 일부를 차용하여 곡을 만들고 있으나, 그것이 정녕 전자 음악 자체만을 즐기기 위해서 탄생한 음악이라고 보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고 실제로 지금도 크고작은 논쟁이 벌어지는 편이다.[8][9]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주류에 속하는 EDM 장르들은 관심을 받기 힘들어지게 되니, 다양한 장르를 선보일 수 있는 작곡가들이 주목받지 못하고, 실력이 있어도 돈을 벌어야 하기에 현실과 타협하고 쉽게 대중적으로 먹힐 수 있는 클럽 음악에 손을 뻗친것도 한 몫 했다. 결국 실력 있는 프로듀서들이 그저 신나는 클럽 음악 계열의 장르로만 들어가게 되다보니, 사람들의 인식도 그러한 방향으로 굳어져 간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다른 형태로 생겨난 전자 음악은 큰 발전이 되었으나, 본질에 가까운 음악은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어필되지 못한 것이다.
  • 위의 연장선으로 음악의 감성과 기교를 즐기는 문화가 자리잡지 못하고, 절대적으로 클럽이나 파티 문화가 그 빈자리를 차지해 EDM씬을 이끌게 되었다. 문제는 국내에서 클럽과 파티 문화에 대한 인식이 매우 나쁘다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은 클럽이나 파티 문화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늦은 밤 어둑어둑한 클럽에서 비싼 술을 마시며 음악을 즐기는 것만이 파티가 아니다. 햇살이 비추는 여유로운 낮에 미니멀한 테크노나 딥 하우스 등의 차분한 음악을 틀면서, 주변 사람들과 도란도란 얘기할 수 있는 장소 또한 파티다.[10] 사실 클럽의 이미지는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고 그 전에도 딱히 긍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한민국 한정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속화 시키는 사건이 너무나도 컸기에 상대적으로 인식이 더욱 나락을 찍게 되었다.

    일렉트로닉 뮤직씬에서 수요과 공급이 가장 큰 곳은 결국 본질적으로 클럽과 파티 문화에서 발생하는 것인데[11] 디제이들이 자신이 직접 만든 곡을 믹싱하며, 자신들의 디제잉 스킬이나 프로듀싱한 음악의 실력을 뽐내며 유명세를 타고, 앨범을 발매하면서 팬층을 키워나간다는 것인데 대한민국은 그럴만한 클럽과 파티 문화에 대한 인식이 자리잡지 못했다. 결국 좀 더 대중적이지 못해진 것이 발목을 잡은 셈이다.[12]
  • 부정적인 인식만 가득하고 제대로 여물지 못한 문화에서 너무 급진적으로 EDM 시장이 열리면서, 이스포츠매드무비 유행 등 인터넷 방송 문화가 국내에서의 EDM이 본격적으로 대중들에게 올라온 시기가 겹친 것도 크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또한 EDM을 게임 하이라이트에 쓰이는 음악 또는 클럽에서 쓰이는 음악으로만 소모하는 경향이 늘어나 절대적인 수요는 증가했으나, 그것을 국내 아티스트들이 제대로 뒤집지 못했다. 일본처럼 서브컬쳐 시장이 매우 활발했다면 성장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겠지만 이 정도가 정기적으로 열리는 최대 서브컬쳐 행사인 대한민국 입장에서는 대중적으로 활발해지기에는 힘든 상황이었다.[13]

    여기에 인터넷 방송 쪽에서 리액션 등을 위해 빈약한 완성도를 가진 음악들이 소모가 되기 시작했고, 그 음악들이 대중들에게 어필[14] 되면서 더더욱 음악의 질과 인식이 떨어졌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들의 많은 조회수나 분위기를 유도해야 하기 때문에 음악성보다 중독성과 분위기를 띄우는 것에 이용되고, 그것이 기존의 이미지를 더욱 확고화시키는 형태로 번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대중들은 단디라면먹고갈래 와 DJ한민의 Show Me Your BBA SAE 등을 대표적인 국내 EDM음악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또한 EDM 음악의 수요가 늘어난 것에 맞추어, 유행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국 음원시장 특성상 다른 작곡가들도 대중들의 입맞에 맞추기 위해 빅 룸 스타일이나 하우스 장르에만 치중되어 음악을 만들었다.[15]
  • 그나마 국내 일렉트로닉 뮤직에 가지고 있는 리스너들의 관심들도, 클럽음악 내지 신나는 음악 정도로만 인식하는 것은 물론 음악에는 관심이 없고 유행의 기류에 탑승하기 위해 뛰어들었던 셀럽들의 언행으로 인해 지지를 잃어버렸다. 2012년 울트라 코리아에 게스트 초청으로 라인업에 이름을 올렸던 장근석이 머리만 흔드는 페이크 디제잉을 하다 걸렸고[16] 대한민국에서는 여기에 저작권 인식까지도 처참해, 2017년 박명수하드웰 팟캐스트를 허락 없이 컨버트해서 영리적 목적으로 클럽에서 튼 것이 걸려 이와 관련해서 여러 번 해외 프로듀서들에게 박제와 조롱거리가 되었을 정도로 엄청난 나라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으나, 크게 대수롭지 않은 문제로 넘어갔다.[17][18][19]

이러한 여러 요인이 겹치고 겹쳐 리스너들도 해외 아티스트에게는 환호할 뿐, 국내 아티스트들에게는 등을 돌리고 그나마 음악을 만들던 국내 아티스트들도 더 이상 국내 활동보다 해외로 계속 나가다 보니 결국 시간이 지날수록 국내에는 그저, 위에 설명한 사람들만이 남아 음악을 만드는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음악 시장 규모에서 단순 비교하기엔 힘든 면도 있지만 옆나라 일본과 비교했을 때 그 차이가 특히 도드라진다. 일본의 대중가요의 경우 또한 거의 밴드 음악 또는 J-POP 위주로 차트를 형성할 만큼 우리나라와 크게 다른 점은 없지만, 대중가요를 벗어난 마이너한 장르를 깊게 소비하는 비율 또한 매우 높다. 또한 동인음악 시장도 매우 발달해 리듬게임의 성장과 함께 내수음악 시장이 제대로 성장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시도들이 모여 북미에서 EDM이 유행을 일어난 시기 이전부터 이미 일본 특유의 하드 코어 테크노퓨쳐 베이스 등의 장르들을 만들어 낼 수 있었고 특히 퓨처 베이스는 2010년대 후반에서 2020년대 초반 세계를 휩쓸기도 했다.[20][21] 하지만 국내에 그러한 기회가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니다. 런치패드 등으로 대표되는 미디건반이 유행을 타면서 리스너들이 잠시 늘었던 시기가 있었지만[22] 그 시기의 좋을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날려먹은 것도 큰 부분이기도 했다.[23]

종합하자면 돌파구가 아예 전무한 상황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여러 의미에서 쉽지는 않은 상태라고 볼 수 있다. 그나마 게임음악으로 접하게 되는 경우나 대형 기획사의 작곡가로 영입돼서 K-POP 아이돌이 부르는 댄스음악 노래들의 반주를 이용하는 것이 그나마 대중적인 인식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고[24] 그게 아니면 해외 메인스트림의 유행에 기생하는 방법밖에 없는, 말 그대로 순수 내수 시장으로써 소비되는 음악성으로는 타파하기 힘든 암울한 시장이 되었다.[25] 아니면 해외에서 진출해 해외에서 나름대로 입지를 갖추는 경우도 많으니 이는 인재유출 문제라고 볼 소지도 있다.

하지만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돌파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점차 갈라파고스화된 한국 음악들이 세계 트랜드들을 따라감으로서 현재는 위에 서술한 것들이 많이 완화되고 있는 상태다. 지금도 클럽 현장에서 열심히 자신들의 곡을 프로듀싱하면서 믹싱하고 세계 레이블에 문을 두드리는 시도들이 꾸준하게 이루어지고 있으며, 페기 구가 해외시장에서 상업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두어 충분히 가능성이 있음을 증명했다.[26] 그리고 비록 단독내한 공연 형태가 아닌 롤드컵 초청 공연이었지만 2023년 앨런 워커의 광화문 광장 공연이 대중적으로도 큰 반응을 얻었고 대한민국에서도 2010년대를 시작으로 많은 EDM 행사가 열리는 등 점점 나아지고 있는 추세다. 특히, 젊은층들부터 시작된 클럽 파티문화와 일렉트로닉 뮤직 페스티벌 시장의 꾸준한 성장세로 인해 혐오감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

또한 DJMAX RESPECT V, EZ2ON REBOOT : R, 펌프 잇 업 PHOENIX, Sixtar Gate: STARTRAIL 등의 국산 리듬 게임인디 게임 등을 통해 동인 음악 시장에 여러 곡들을 활발하게 투고하는 신예 일렉트로닉 뮤지션들과 현역 프로듀서[27] 뮤지션들 또한 양질의 퀄리티 음악을 제공해 좋은 평을 듣고 있고 인지도를 넓혀가고 있다는 점이 상당히 고무적이다. 로키 스튜디오, 네오노비스, 스퀘어픽셀즈, 안다미로 등 이러한 게임을 개발하는 게임사에서 수록곡들의 장르 다양성을 위해 신인 일렉트로닉 뮤지션들과 매우 적극적으로 협업하고 있어 한국의 일렉트로닉 뮤직의 발전을 꾀하고 있다.

언더그라운드씬에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데, 이센스 등 다양한 뮤지션들이 주최하는 리스닝파티의 횟수가 점점 늘고 있으며, 아예 VIP석을 모두 빼고 디제잉부스와 관객석의 경계를 없애거나 특정 장르 음악만 선곡해 음악의 본질에 집중하는 클럽들이 점차 늘고 있는 추세다.

그리고 위에서 단점 중 하나로 꼽았으나, 대중적으로 유명한 뮤지션들와의 지속적인 협업을 통해 EDM 음악을 알리는 시도가 대한민국의 일렉트로닉 뮤직 시장과 수요를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증가시켰다는 것은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당장 EDM씬이 북미시장에서 큰 흥행을 할 수 있던 것 또한 음악성 자체에도 있지만 수많은 팝스타들과의 피처링이나 보컬 참여 혹은 협업을 통해 폭넓은 인지도를 올려 가능했던 것으로, 이는 EDM 음악이 하나의 메이저시장까지 도달한 지금까지도 현재진행형이다. 때문에 이러한 대중적인 행보를 통해 인지도를 크게 널리는 시도와 다양한 일렉트로닉 음악의 기반이 함께 성장하는 시도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4. 한국의 일렉트로니카 음악가들

국내에 발매된 앨범의 목록은 다음 페이지에서 확인해볼 것 # - by loop-o-mat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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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의 일렉트로니카 레이블/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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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6. 참고 자료

  • 한국 테크노 음악의 '정돈되지 않은' 연대기, 장호연, 웹진 weiv #
  • 디시인사이드 일렉트로니카 갤러리 '잃어버린 한국의 소리를 찾아서' 연작#


[1] 2020년 8월 16일로 별세.[2] 이후 일 년 뒤 제2회 범음악제에선 강석희는 타악기 연주자 마이클 란타와 가야금 연주자인 황병기와 함께 신디사이저를 활용한 즉흥연주를 시도했다.[3] PC통신이 사멸하면서 이들 동호회 역시 사멸한 것으로 보인다. 2020년대 네이버 카페에 당 동호회를 승계한다는 명분으로 21세기 그루브라는 이름 그대로 개설한 카페가 존재하나, 사실 그 실체는 어느 조현병 환우의 갤기장에 불과하다. 단, 이와 별개로 해당 카페의 주인장이 PC통신 시절에 작곡한 미디 파일이 발굴되어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것으로 보아, 하이텔에 실존했던 21세기 그루브 동호회에서 활동이력 자체는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PC통신 시대가 저문 이후 어느 순간 조현병이 발병해서 지금의 싸구려 싸이트랜스 트랙을 양산하고 일렉트로니카 갤러리-전자음악 마이너 갤러리의 밈으로 전락한것으로 보인다.[4] 한국의 1세대 일렉트로니카의 주역이라 할 수 있는 웬만한 사람들은 이 앨범에 참여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의 의미를 지녔다. 가재발, 산소박사, 전자맨, 캐스커, 데이트리퍼 등등. 이외에도 PLUR:New Techno Movement라는 이름의 컴필레이션 앨범 시리즈도 있다. PLUR 컴필 시리즈중 하나는 한일 양국의 일렉트로닉 뮤직을 컴필레이션했는데, 일본의 Leopaldon이 가재발을 피쳐링한 오방이라는 특이한 곡도 있고 일본내 UK하드트랜스 대가인 Nish의 소싯적 악곡활동도 엿보인다.(산소박사의 월광천녀 Nish 리믹스.)[5] 물론 이는 일본, 미국, 프랑스, 독일 등 문화적으로나 대중적으로 전자 음악 시장이 매우 발전한 국가들과 비교한 것이다.[6] 항목에도 나와있는 사실이지만 무한궤도가 탄생한 시기인 1988년은 국내에 정식출시한 신디사이저 브랜드가 있기는 커녕, 현역 음악인들조차도 이에 대한 지식이 턱없이 부족할 정도였다. 때문에 신해철은 지금은 이름만 대면 아는 많은 프로듀서들이 직접 찾아가 자문과 도움을 요청했을 정도로 지식이 해박한 선구자였다.[7] 물론 EDM 음악 중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장르가 하우스 장르인건 사실이지만, 그 이외의 장르가 있다는 사실은 대부분 잘 모른다.[8] K-POP을 EDM으로 칭하지 말자는 것이 아닌, 대중가요 속에 스며들어간 형태라 EDM으로 치기에는 애매한 면이 있다 정도로 해석을 하면 된다.[9] 그나마 최근에 그루비룸, 코드 쿤스트 등의 프로듀서들이 잘 녹아들게 쓰고 있으며 국내에서 나온 일렉트릭 하우스 명곡중 하나인 BLUE MOON(효린과 창모)을 발매한 것도 크다고 볼 수 있다.[10] 세계적으로 히트한 다프트 펑크만 해도 자신들의 라이브 앨범중 하나인 Alive 1997 앨범은 야외 공연장이 아닌 클럽에서 녹음한 것을 앨범으로 사용한 것이며, 다른 프로듀서들도 클럽 음악을 아예 안하는 것은 아니다.[11] 일렉트로닉 뮤직 페스티벌은 이러한 클럽과 파티에서 경력과 인지도를 쌓아야 비로소 공연을 할 수 있는 곳이다.[12]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인데, 폐막식 당시 모든 일렉트로닉 뮤직 페스티벌에서 헤드라이너로 클로징 무대를 독식하다시피했던 마틴 개릭스가 자진해서 노게런티로 폐막식에 참여했음에도, 국내에서 EDM을 좋아하는 사람들 외에는 왜 왔는지도, 누구인지도 잘 몰랐다.[13] 2020년대 들어서 젊은층들의 서브컬쳐 진입이 많아지고 있지만 그 해에 유명하는 메이저한 애니메이션이나 서브컬쳐에 집중되고 아직까지는 다양한 분야의 예술 형태로 넓어지지는 않았다. 때문에 대한민국이 서브컬쳐에 대한 인식의 개선보다는 양덕후 문화가 들어온 것에 가깝다는 의견도 있다.[14] 사실 이것도 긍정적인 쪽에서 어필이 되었다기보다 굉장히 자극적인 형태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다.[15] 대표적으로 싸이Everyday, PICK ME 같은 프로듀스101 시리즈들의 음악이 그 예라고 볼 수 있다.[16] 당시 트위터로 리스너들과 설전을 벌어다가 deadmau5를 데드마파이브라고 말해 더 큰 비웃음을 사기도 했다.#[17] 국내에서는 크게 화제되지 않았지만 당연하게 지켜야 하는 것을 당연하다시피 어긴데다가,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에 하드웰은 씬에서 최고로 몸값이 비싼 디제이였기 때문에 EDM씬 내에서 수많은 프로듀서들에게 수도 없이 박제와 조롱을 당했다. 심지어 반년이 넘어 같은 해 울트라 코리아에 참가했던 Jewelz & Sparks가 대놓고 또 조롱했는데도 해당 사건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18] 박명수 본인도 사과문을 작성하면서 일단락 하고 넘어갔지만 해당 항목에서도 나와있다시피 제대로 해명되지 않은 채 유야무야 넘어갔다.[19] 특히 NCS면 몰라도 나이트코어처럼 128-130BPM의 음악들을 140, 심한 경우 160BPM까지 올린 후 그것을 떡춤이라고 하며 올리는것도 좋은 행위는 아니지만 특히 나이트코어의 문제점 중 하나인 저작권 관련 의식은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20] 다만 일본의 경우 앞서 말했듯이 동인시장 및 EDM을 이끈 리듬게임 시장이 대한민국보다 훨씬 더 컸고 미디에 대한 사용도 대한민국보다 훨씬 더 빨랐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당장 근처 오락실을 가서 국산 게임과 일본산 게임들을 비교해보면 조금 큰 규모의 오락실의 경우 대한민국산 기체의 경우 펌프 잇 업 정도가 남았을 뿐이다.[21] 물론 일본도 사람들이 모여드는 선순환이 반복되었을 뿐, 일본 내부에서의 동인시장 이미지가 유토피아 마냥 썩 좋은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본 같은 경우는 서브컬쳐의 시장이 어마어마하게 크고 다프트 펑크, deadmau5, 포터 로빈슨 등 일본 서브컬쳐에 꽂혀있는 아티스트들이 줄로 줄로 서 있을 정도로 문화적으로도 큰 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본 아티스트들과의 협업이 생기고,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지금도 계속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22] 이 시기 동인시장에 있었던 TAK이 이를 발판삼아 대중음악 시장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루었다.[23] 대표적으로 게임음악을 상정하고 제작한 것은 아니었지만 알렌 워커의 Fade는 들으면 바로 알아챌 정도로 많은 인지도를 보유했고 알렌은 이 기회를 통해 전세계급 인지도를 가진 프로듀서로 발돋움했지만, 국내에는 해당 음악이 그저 게임음악으로만 인식되었다.[24] 실제로 이에 제대로 부합하는 케이스가 NewJeans로 국내 케이팝 시장에서는 선보인 경우가 없었던 저지 클럽을 내밀어, 하나의 장르적 유행을 만들어냈다.[25] 그나마도 대형 기획사에서 자본으로써 외국 작곡가들을 다수 외주로 주는 일도 많아지면서 이들과 협업하거나 경쟁해야하는 상황이다.[26] 다만 해외 리스너들 사이에서는 음악성에 대해선 꽤나 박한 편을 듣고 있다.[27] 20년 가까이 현역으로 디제잉 활동을 하며 국내 테크노 뮤지션으로써는 가장 인지도가 높은 사람 중 한 명인 Bagagee Viphex13, 그리고 같은 davotab 소속인 VoidRover, Pierre BlancheDJMAX RESPECT V에 꾸준히 곡을 제공해 다보탑의 인지도가 크게 올라가는 계기가 되었다.[28] 국내에서는 드물게 IDM을 프로듀스했던 아티스트.[29] 2013년부터 활동한 익스페리멘틀/IDM 아티스트. 고트 앤 멍키의 후계자?[30] 유튜브활동 중지[31] DJ 바가지. 본명에서 유래한 별명이라 한다. 어느날부터 Viphex 13으로 이름을 바꿔서 밀고있는데 애석하게도 별로 호응이 없는 듯.[32] 익스페리멘틀 아티스트. 국풍81을 패러디한 자켓의 국풍 13 앨범이 있으며, 신촌에 주파수라는 작업실도 있고 영등포에는 다소유라는 LP음악카페/바를 운영중이다. 단순 카페뿐만 아니라 인디즈 공연 대관도 한다는듯. M/V도 본인이 만드는데 대부분의 영상 컨셉은 80~90년대 영상을 연상케 하는 화질과 구도가 특징이다.[33] 공중도둑으로 활동명을 바꿨다.[34] 본 명의인 KATOMORI가 유명하지만, 해외 활동 위주의 특성상 ATMOX가 KATOMORI의 국내활동용 명의임을 감안해서 이쪽으로 기재함.[전] DJ Silent, 이후에 J.fitz란 이름으로 활동하다 다시 DJ Bowlcut으로 이름을 바꿨다[36] 과거에는 miao, AID 등의 명의로 동인 음악 씬을 넘나들며 활동했지만 예의 그 커리어를 기점으로 非동인 씬으로 진출한듯. 영기획 레이블 직속 아티스트.[37] BMS 제작시에는 보통 KHTP라는 명의로 활동했었다.[38] 재키 와이의 1집에도 참여한적이 있다.[39] 데뷔하기 전에는 일렉트로니카 갤러리에서 고정닉급으로 활동했었다 한다.[40] 2000년대 초중반 유럽 유로댄스차트 컴필레이션 음반등을 리믹스,프로듀싱했던 작곡가 김영준과 싱어송라이터 김효문dj 효 이 2006년 볼케이노디제이팀이라는 그룹으로 활동 하였다가 해체후 2007년에 결성한 신비주의 프로젝트 그룹으로 디제이효의 싱글 'Party Time'을 시작으로 '만남2008' '가리워진길' '검은고양이네로' 같은 가요리메이크 앨범을 많이 만들었으며 2009년 유명했던 드라마 아내의 유혹 Ost앨범에 리믹스로 참여한 경력이 있다. 지금현재는 터보트로닉이라는 프로젝트로 많이알려져 있으며 감스트거울춤으로 유명한 '디스코몬스터' '붕가댄스' 같은 곡으로 유명하다.[41] 레디, 스월비, 요시, 수이 개개인은 힙합 음반을 발매하지만, 이들의 하트코어 그룹 합작은 일렉트로니카 장르로 발매하였다.[42] 원래 영쿡과 하두리의 2인그룹이었으나 하두리 탈퇴후 사실상 영쿡의 다른명의 취급. 영기획 정식 소속 아티스트이기도 하며 힙합에서는 오버클래스에도 소속[43] 이후 SM 엔터테인먼트의 아티스트진으로 메이저 진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