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
미국 의회도서관 영구 보존 영화 2010년 등재 |
The Pink Panther[1]
미국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 1963년에 제작한 코미디 영화. 감독은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로 유명한 블레이크 에드워즈다.
프랑스 파리 경시청의 경감 자크 클루조가 커다란 분홍색 다이아몬드 핑크 팬더를 놓고 도둑과 벌이는 이야기로, 도둑을 멋모르고 오해하여 보석 훔쳐가는 걸 도와준 뒤 신고받은 경찰이 와서 도둑들에게 총을 쏘자 오히려 그 경찰을 범죄자라고 때려 구속한다. 이에 징계도 받고 도둑과 한패 아니냐는 언론의 폭격도 무수히 받아 보석을 되찾고 범인도 잡는다. 이후 어떤 일로 간 일본인 거리에서 기모노를 입고 지나가는 일본인과 사소한 시비가 붙어 그에게 무술을 보여주려하니 그 일본인은 별 미친놈 다 보겠다는 듯이 무시하고 가버린다. 그러자 그 사람 뒤에서 날아차기를 하는데 엉뚱한 벽을 부수는 등 원맨쇼로 결국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애니메이션 캐릭터 핑크 팬더가 그를 찾아와 인터뷰한다.
데이비드 니븐이 찰스 리튼(Charles Lytton) 역, 피터 셀러스가 자크 클루조(Jacques Clouseau) 역, 로버트 와그너가 찰스 리튼의 조카 조지 리튼(George Lytton) 역, 카푸치네가 시몬 클루조(Simone Clouseau) 역,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가 달라 공주(Princess Dala) 역을 연기했다.
원래는 피터 유스티노프와 에바 가드너가 캐스팅됐으나 가드너가 하차하자 유스티노프도 덩달아 물러났다. 자넷 리에게도 여주인공 제안이 갔는데 촬영 장소가 미국에서 멀다는 이유로 고사하였다.
촬영을 시작하기 2주일 전에 갑자기 하차한 피터 유스티노프의 대타로 급히 섭외된 피터 셀러스는 촬영장에 도착한 후 블레이크의 디렉팅을 따르지 않고 애드리브를 연발해 블레이크와 계속 다투었다고 한다. 이후 셀러스의 애드립으로 완성된 장면을 보고 훌륭하다고 생각한 블레이크는 자신의 고집을 꺾고 셀러스 멋대로 연기하게 나둬 영화를 원만히 완성시켰다. 블레이크 에드워즈의 생각대로 핑크 팬더는 시사회장에서 곧바로 후속작 제작 얘기가 나올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았는데 정작 피터 셀러스는 시사회가 끝난 후 영화가 형편없다고 블레이크 면전에다 욕설을 내뱉으며 화를 냈다고 한다.
120만 달러의 제작비로 1000만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거뒀다.
1.1. 속편
이듬해 <핑크 팬더 2: 어둠 속에 총성이(A Shot In The Dark)>가 개봉했다. 500만 달러의 제작비를 들인 속편은 12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데 그쳤다. 각본은 엑소시스트 시리즈의 원작자 윌리엄 피터 블래티가 집필했다.
1968년에는 감독과 배우가 바뀐 영화 <형사 클루조(Inspector Clouseau)>가 개봉했다. 클루조 역은 알란 아킨이 연기했다.
기존 감독과 배우가 11년 만에 다시 모여 만든 <돌아온 핑크 팬더(The Return of the Pink Panther)>(1975)가 500만 달러의 제작비로 4200만 달러에 가까운 수익을 거둬들여 대성공을 거뒀고, 1976년작 <핑크 팬더의 재역습(The Pink Panther Strikes Again)>은 600만 달러의 제작비로 3300만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1978년작 <핑크 팬더의 복수(Revenge of the Pink Panther)>도 연이어 성공했다.
하지만 <핑크 팬더의 추적(Trail of the Pink Panther>(1982)이 600만 달러의 제작비로 9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데 그쳐 흥행에 실패했는데, 피터 셀러스가 1980년에 사망한 후 전편에 쓰지 않은 그의 푸티지들을 어거지로 끼워맞춰 완성시킨 영화다.
피터 셀러스와 1편에서 함께 한 데이비드 니븐이 출연한 <핑크 팬더의 저주(Curse of the Pink Panther)>가 1983년에 개봉했으나, 1100만 달러를 들인 제작비의 반도 안 되는 450만 달러의 수익으로 시리즈 최악의 흥행 성적을 거뒀다. 공교롭게도 이 영화 또한 데이비드 니븐의 유작이 되었는데 영화가 개봉한 1983년에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1993년에 이탈리아 배우 로베르토 베니니가 주연을 맡은 <핑크 팬더의 아들(Son of the Pink Panther)>로 부활했으나 2800만 달러를 들인 제작비의 1/10 수준인 300만 달러만 벌어들이며 연이어 흥행에 실패했다. 그동안 시리즈를 연출한 감독 에드워즈의 마지막 영화가 되었다.
숀 레비 감독 장편 연출 작품 (TV 드라마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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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드레스 언노운 (1997) 저스트 인 타임 (1997) 빅 팻 라이어 (2002) 우리 방금 결혼했어요 (2003) 열두 명의 웬수들 (2003) 핑크 팬더 (2006) <bgcolor=#644013> <bgcolor=#1f599c> <bgcolor=#969792> 박물관이 살아있다! (2006) 박물관이 살아있다 2 (2009) 브로큰 데이트 (2010) <bgcolor=#000000> 리얼 스틸 (2011) 인턴십 (2013) 당신 없는 일주일 (2014) <bgcolor=#080c2a> <bgcolor=#043c7b> <bgcolor=#215490> 박물관이 살아있다: 비밀의 무덤 (2014) 프리 가이 (2021) 애덤 프로젝트 (2022) <bgcolor=#000> 데드풀과 울버린 (2024)
2006년에 숀 레비가 연출한 리메이크 영화 시리즈는 프랑스풍의 미국 탐정 코미디 영화로, 스티브 마틴이 주인공을 연기했고 장 르노도 출연했다. 리메이크는 8천만 달러의 제작비로 1억 6천만 달러의 수익을 거둬 본전치기 흥행에 그쳤으나 2차 매체 수익으로 흑자를 봤다. 2009년에 개봉한 후속작은 <베스트 키드> 리메이크(2010)를 연출한 해럴드 즈윅이 연출했다. 하지만 7천만 달러의 제작비로 7500만 달러를 벌어들이는데 그쳐 리메이크 시리즈도 제작이 중단됐다.
두번째 리부트를 한다. #
1.2. 파생한 만화 및 캐릭터
자세한 내용은 핑크 팬더(애니메이션) 문서 참고하십시오.1.3. 기타
실존하는 유명 국제보석강도단 핑크 팬더스의 이름은 인터폴이 이 영화 제목에서 따와 붙였다.한국에는 1981년 11월 7일에 돌아온 핑크 팬더, 1989년 8월 26일에 핑크 팬더 1편, 1991년 12월 14일에 핑크 팬더의 복수를 KBS 토요명화에서 더빙 방영했다. 그리고 1990년대 초중반 핑크 팬더의 아들까지 SKC를 통하여 VHS 비디오로 정식 발매했다.
2. 영국 특수부대 SAS가 사용한 랜드로버의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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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기(1914~1945) | 냉전기(1945~1991) | 현대전(1991~) |
Land Rover series IIa 'Pink Panther' SAS desert car
The 'Pink Panther'
1967년에서 1985년 사이, SAS는 사막 지형에서 장거리 정찰용으로 랜드로버 Series IIA 90을 데저트 핑크색으로 도색해 사용했다. 어떤 의미에선 2차 세계대전에 창설한 LRDG(Long Range Desert Group)의 후속으로, LRDG도 미국제 쉐보레 트럭 등에 데저트 핑크를 칠하고 다녔다. 웬 핑크색인가 싶겠지만 사막의 일몰 즈음의 노을이 깔릴 때엔 상당히 좋은 위장색이 되며, 평상시에도 암반, 자연광과 섞여 꽤나 자연스러운 위장력을 보인다. FN MAG와 브라우닝 .50구경 기관총 등을 주렁주렁 매달고 다녔다.
3. 걸그룹 Apink의 팬덤 PANDA의 前 명칭
자세한 내용은 PANDA(Apink) 문서 참고하십시오.2011년에 데뷔한 에이핑크 팬덤의 전 명칭이다. 에이핑크의 '핑크'와 前 매니저 이정아의 별명 '쿵푸팬더'의 '팬더'를 따 핑크 팬더라고 지었다고 한다. 공식 팬클럽이 출범한 이후에는 PANDA라는 명칭을 쓴다.
[1] 문서명은 핑크 팬서가 아닌 핑크 팬더인데, 이는 과거에는 Panther를 팬더로 표기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