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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나마 운하 지대

<nopad> 파나마 운하 지대
Panama Canal Zone
Zona del Canal de Panamá
파일:파나마 운하 지대 깃발.svg 파일:파나마 운하 지대 문장.svg
<rowcolor=#fff> 깃발 문장
파일:CanalZone.png
1903년 ~ 1979년
<rowcolor=#fff> 성립 이전 반환 이후
콜롬비아 합중국 파나마
<colbgcolor=#002664><colcolor=#fff> 위치 파나마 운하와 주변 8km 지역
국가 The Star-Spangled Banner
면적 1,432km2
수도 발보아
통화 미국 달러, 파나마 발보아
언어 영어, 스페인어

1. 개요2. 범위3. 운영4. 주민
4.1. 골드 롤4.2. 실버 롤
5. 역사6. 관련 문서

1. 개요

파나마 운하와 주변 8km 지역에 존재하던 미국조차지이다. 1903년부터[1] 1979년까지 지속되었다.#1

2. 범위

파나마 운하 지대는 파나마 운하의 중앙선을 기준으로 양쪽 8km(5마일)의 구간을 기준으로 해서 파나마 운하에 물을 공급하는 가툰 호와 마덴 호의 수역 전체와 내부의 섬 및 미국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구간이 포함되었다. 다만 파나마수도파나마시티와 중요 도시인 콜론은 파나마 운하 중앙선 양쪽 8km 범위에 들었음에도 미국령 운하 지대에서 제외되었고, 대신 미국이 파나마 운하의 운영에 필요하다 판단되는 섬들과 지역들이 일부 포함되었다. 전체 면적은 1,430㎢다.

파나마 운하 지대는 파나마라는 국가를 두 토막으로 나누어놓았으며 파나마령으로 남은 콜론 시는 미국령 운하 지대에 완전히 둘러쌓인 월경지가 되었고 대서양과 태평양 간 무역으로 탄생한 도시인 파나마시티는 운하 지대의 할양과 미군기지 건설로 인해 이 교역로에서 단절되었다.

특히 콜론 시는 파나마 다른 지역으로 가는 육상통로가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해로를 통해 선박으로 출입해야 했으며 1936년이 되어서야 미국과 파나마 간 조약으로 파나마 동부로 이어지는 육상통로인 '콜론 회랑'이 파나마에 이양되었다.

이에 더해 파나마 운하 건설 과정에 생긴 가툰 호와 마덴 호 등은 파나마 운하 운영을 위한 용수 공급에 필요하다 판단되어 파나마 운하 지대가 해당 호수의 수역까지 확대됐다. 파나마 운하 지대에 물로 이루어진 돌출부가 있는 것이 이런 이유 때문이다.

파나마 운하 지대의 설립 초기에는 파나마 국민이 파나마 운하 지대를 통과해서 이동하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제약이 없었다. 하지만 해당 시기에도 운하의 주요 시설이나 미군 시설등 중요한 보안이 걸린 곳에는 출입이나 접근이 통제되었다. 1950년대부터 파나마가 파나마 운하 지대의 반환을 요구하기 시작하고 파나마 국민들이 소요 사태를 일으키자 파나마 운하 장벽(Panama Canal fence)을 주요 도로를 따라 설치해서 통행로를 한정시키기 시작했으며 파나마 운하 장벽을 파괴하려는 파나마 국민들과 막으려는 운하 경찰간에 교전이 벌어지면서 최루탄이 발사되는 등 혼란이 발생했다.

시위가 없을 때에는 파나마시티 등 일부 지역에서 거리의 길을 건너는 방식으로 파나마 운하 지대에 출입이 가능하긴 했으나 통과 목적이나 관광 목적이 아니고 장기 체류하면 운하 경찰의 검문을 받을 가능성이 있었다. 미국과 파나마간의 반환 협상이 진행되면서 파나마 운하 지대에 대한 통제가 어느 정도는 약화되기도 했다.

3. 운영

파나마 운하 지대의 실질적인 수도는 파나마 운하 위원회가 위치한 발보아 시였다. 발보아 시는 파나마 운하 준공 과정에 생겨난 도시로, 현재는 파나마시티의 일부이다. 행정적으로는 가툰 호를 경계로 태평양 연안 지역과 대서양 연안 지역이 구분되어 운영되었다.

파나마 운하가 건설되는 초창기에는 파나마 운하법에 따라 전쟁장관(United States Secretary of War)의 지휘 아래에서 이스미안 운하 위원회(Isthmian Canal Commission)가 파나마 운하 지대를 통치했으며 1912년 5월 24일부터 파나마 운하법에 따라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1914년 1월 27일 행정명령 1885호를 발표하여 1914년 4월 1일부터 시행함에 따라 기존의 통치기관이 해산되고 당시에 미국 전쟁부로 불렸던 미국 육군부의 장관이 지휘하는 파나마 운하(The Panama Canal)라는 기관이 설립되면서 본격적인 통치가 시작된다.

파나마 운하 지대를 통치하는 정부는 기본적으로는 주지사에 해당되는 인물을 포함해서 민간인으로 구성된 조직이며 행정명령에서도 파나마 운하 주지사에게 파나마 운하와 그 부속 시설, 그리고 운하 구역의 관리, 유지, 운영, 관리 및 위생을 위탁했고 기본적인 임무를 담당할 부서가 지정되었으며 추가적인 부서가 필요하면 파나마 운하 주지사가 미국 대통령의 승인을 받고 미국 육군부의 장관의 감독 아래에서 부서의 설치가 가능했다.

하지만 실질적으로는 파나마 운하 지대는 미국 육군부에서 직접 관할했으며 파나마 운하 방어를 미국 육군부 장관의 책임으로 지정해놓았고 전쟁중인 전시 상황에서는 대통령이 미국 육군 장교를 임명해서 파나마 운하 및 파나마 운하 정부에 대한 독점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조항이 존재했다. 앞서 설명한 행정명령에서도 마무리 부분에서 파나마 운하의 영구 조직 운영에 대한 감독은 전쟁부 장관이 담당해야 한다는 언급을 넣어놓았을 정도이므로 사실상 군정의 형태에 가깝게 운영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1939년 9월 5일에 발동한 행정 명령 8232에 따라 파나마 운하와 운하 지대 관리를 포함한 모든 부속 시설 및 부속 기관의 관리가 파나마 주둔군 사령관의 전적인 통제 하에 놓이면서 완전한 군정체제로 돌입했다.

이러한 상황은 1950년 9월 26일자 의회 법률(64 Stat. 1038)에 따라 1951년 7월 1일부터 시행된 조치에 의해서 완화되었다. 파나마 운하 지대의 관리는 파나마 운하 회사라는 사업체가 담당하게 되었고 파나마 운하 정부는 회사 아래에서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이 되었다. 하지만 겉만 바뀌었지 속은 전혀 아니라서 미국 육군부 장관이 직접 파나마 운하 회사의 이사회의 조직원을 임명했으며 파나마 운하 회사는 파나마 운하 정부의 운영자금을 조달해줘야 했고 파나마 운하 정부의 주지사 직위는 파나마 운하 회사의 사장을 겸직하면서 동시에 현지에 주둔한 미국 육군 공병대의 현역 장군에게 주어지는 자리였다.

따라서 실질적으로는 군정이 지속되는 상황이었으며 현지의 민간인들을 위해서 자체적인 경찰인 운하지대 경찰(Canal Zone Police)과 법원 조직인 미국 운하지대 지방법원(United States District Court for the Canal Zone)이 설립되었기 때문에 민간인은 군대와 관련된 중범죄가 아니라면 군법 적용을 받지 않고 민간 조직에 의한 사법처리를 받을 뿐이었다.

실제로도 1952년에 파나마 운하 회사는 법률에 지정한 것에 따라 미국 의회에 제출되는 대통령 예산안의 형태로 발표된 내용에 따라 재정 보고를 올리고 손익분기점을 달성하는 지 여부를 검사받아야 했다. 하지만 미국 관리예산국(Office of Management and Budget)이 주도해서 파나마 운하 회사의 임원진들이 참여하는 논의가 미리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1952년 3월 1일에 발동하는 새로운 운영방식이 전혀 공개되지 않았다.

파나마 운하 회사는 3가지 부문으로 나누어졌는데 파나마 운하를 직접 관리하는 운하 부문과 자금을 관리하는 상업 부문과 행정 및 서비스를 제공하는 서비스 부문으로 나누어진다. 서비스 부문은 다른 두 부문에 서비스를 제공하고 비용을 받아서 조직을 운영한다. 이렇게 부문을 분할함으로서 의회의 법률에 따라서 재정상황과 손익분기점을 보고할 수 있음과 동시에 서비스 부문을 통해서 파나마 운하 회사를 계속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사실상 군정이 이루어지는 상태가 파나마 운하 지대의 종말까지 계속 이어진다.

4. 주민

파나마 운하 지대의 인구구성은 파나마 운하 건설 과정의 인부 유입을 통해 파나마 타 지역들과는 구분되는 인구구성을 보였다. 특히 영어권이고 저임금으로 고용가능한 자메이카, 바베이도스, 세인트루시아카리브해 도서 지역의 해방노예 흑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파나마 운하 건설 과정의 사망자들의 주축을 이루었다.

파나마 운하 지대의 미국계 주민들은 '조니언' (Zonian)이라 불렸으며 이들은 주로 파나마 운영을 위해 유입된 미국 민간인들이나 그 자녀들로, 파나마 운하 지대에서 태어나거나 학창시절을 보냈다. 조니언들은 미국 시민권자들이었으나 파나마로부터 생활에 밀접한 영향을 받은 관계로 미국인인 동시에 파나마인인 복합적인 정체성을 지녔으나 파나마 운하 반환 이후 대부분 귀국하였다. 귀국 이후에도 '파나마 운하 협회' (Panama Canal Society)라는 실향면 협회가 활동하고 있으며 올랜도에서 매년 조니언들의 모임을 주최하고 있다.

유명한 조니언들로는 상원의원 존 매케인, 농구선수 로드 캐류, 국무차관 캐런 휴즈 등이 있다.

파나마 운하 지대 내부에서는 파나마 운하 회사가 사실상 독점기업의 위치를 차지하며 주민들의 생활에 깊숙하게 관련된다. 파나마 운하 지대의 원주민들은 모조리 밖으로 쫒겨났으며 파나마 운하 지대에 거주권을 가진 모든 인원은 어떤 형태로든 파나마 운하 회사나 파나마 운하 지대 정부에 근무하는 직원이며 토지와 주택 소유의 권리가 없었다.

그래서 직원들은 해당 지역의 직장에서의 근속연수나 공적을 통해서 배정된 주택에서 임대생활을 하며 생활했고 해당 직원이 이사하면 주택은 회수당한 후에 등기부에 등재되면서 다른 직원이 주택 배정을 신청할 수 있었다. 공공서비스도 파나마 운하 회사에 소속된 업체가 담당하며 상품판매나 상점 운영도 모두 파나마 운하 회사가 운영하는 상점에서 담당했다.

4.1. 골드 롤

골드 롤은 금색 급여대장(payroll)의 줄임말로 파나마 운하 철도에서 미국 백인 근무자에게 미국 달러 금화로 임금을 지급하던 관행에서 비롯된 말이다. 처음에는 말 그대로 금화로 월급을 받았고 1918년에 미국 달러로 모든 직원이 임금을 받을 때에도 골드 롤 직원은 많은 금액을 월급으로 받았다.

미국 국적의 백인 근무자가 기본이지만 외모가 백인이면 가능하기에 북유럽계나 서유럽계 백인도 골드 롤에 들어갈 수 있었다. 초창기에는 실버 롤 근무자중에서 실적이 좋은 사람을 골드 롤로 올려주는 제도도 있었지만 인종이 주요 구분점이 되면서 제도가 사라지고 기존의 유색인종 골드 롤 근무자의 대다수가 실버 롤로 도로 하락했다. 당장 1906년 11월에 수석 엔지니어인 존 프랭크 스티븐스(John Frank Stevens)는 유색인종 골드 롤 근무자를 실버 롤로 강등시키라고 지시했고 1달 후에 운하위원회는 골드 롤에 있는 3,700명의 인원 중 대다수가 미국 백인이며 실버 롤에 있는 13,000명은 대부분 외국인이라고 보고하는 상태였으며 1908년 2월 8일에는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직접 미국인이 아닌 사람은 골드 롤에 올리지 말라고 지시했다가 파나마에서 대규모 항의가 발생하자 1908년 12월에 형식적으로는 다시 파나마인에게도 골드 롤이 개방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여러가지 이유를 들면서 어떻게든 골드 롤에 미국 백인만 올라가도록 조치를 취했다.

파나마 운하 지대에 충분한 숫자의 미국 백인이 있어야 하므로 골드 롤에 들어간 직원들에게는 주거환경을 최대한 좋게 맞추어주었다. 위에서 언급한 존 프랭크 스티븐스의 지시하에 독신 남성들의 경우에는 호텔과 같은 숙소가 지급되었으며 방충망이 있는 베란다와 최신형 배관이 설치되는 등 품질이 좋았다. 직원들이 아내와 자식을 파나마 운하 지대에 데려오도록 하기 위해서 부부와 가족들에게는 소나무 판자로 건축한 2층 단독주택이 제공되었으며 아내가 전업주부라고 해도 골드 롤 직원처럼 거주기간에 따라서 증가하는 별도의 주택 포인트가 부여되었다. 그리고 고위 직원은 더 좋은 주택을 지급받았다. 그리고 파나마 운하 정부는 전기, 수도, 취사용 석탄, 아이스박스용 얼음, 잔디 관리, 정원 관리, 쓰레기 처리등의 고급 편의를 제공했으며 독신 남성들에게는 여기에 더해서 객실 청소 서비스까지 지원해주었다. 1900년대에 미국 본토의 노동자들이 얼마나 열악한 상황에서 생활했는지 감안해본다면 엄청난 복지 혜택이다.

식량의 경우에도 초기에는 직원들이 파나마 현지의 상인들로부터 품질이 낮은 식량을 비싼 가격에 사먹어야 했으나 존 프랭크 스티븐스가 1905년에 부임한 후에 일단 식품 납품업자에게 식량을 원가로 공급하도록 압박을 넣었으며 곧 운하 지대 관리소를 설립해서 미국으로부터 직접 양질의 식량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도록 했다. 운하 지대 관리소는 대규모 확장을 거듭해서 1913년까지 22개의 잡화점, 7개의 시가 가게, 22개의 호스텔, 2개의 호텔, 그리고 통신 판매 부서로 구성되었다. 이 식당은 근로자들에게는 저렴한 비용으로 고품질의 식사를 제공했고, 운하의 고위직 직원과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비싼 식사를 제공했다. 그리고 식량의 품질도 크게 올라가서 운하 지대 관리소는 시카고 도축장에서 여기까지 고기를 냉장해서 운반 및 보관한다고 선전할 정도였다. 당시 기준에서 미국 본토의 백인 노동자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을 한참 뛰어넘은 수준이었다.

이렇게 일이 전개되는 바람에 파나마 상인들의 수입이 격감하고 오히려 파나마 운하 지대로부터 양질의 식량과 상품이 밀수등의 방법으로 파나마 국내에 유입되며 해당 물품들이 고급품으로 인정받는 바람에 파나마의 손실이 커졌다. 그래서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에게 독점적으로 물품을 판매하는 매점(commissary)에는 미군, 파나마 운하 회사 직원, 파나마 운하 지역 정부 직원, 그리고/또는 그 부양가족이 출입할 수 없었는데 파나마 정부가 파나마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요청한 것 때문이었다. 그 외에도 파나마 운하 지대로부터 파나마로 물건을 수입하는 것을 제한하는 파나마 법률도 있을 정도였다.

복지시설의 경우에는 시스토발의 도서관, 각 지역의 클럽하우스, 극장, 체육관 등 다양한 오락 및 레크리에이션 시설을 이용할 수 있었다.

골드 롤 직원들에게는 교육의 기회도 제공되었다. 고등학교는 발보아 고등학교와 크리스토발 고등학교라는 2개의 고등학교가 존재했다. 1933년부터는 운하 구역 주니어 칼리지(Canal Zone Junior College)라는 단과대학도 설립되었다. 해당 대학에서는 야간 수업도 제공되었으며, 1960년대에 이 대학에는 천 명이 넘는 학생이 있었고, 학생들을 위한 기숙사도 있었다. 이후 해당 대학은 민간 정부에서 미국 국방부로 이관되었다.

파나마 운하 지대에 주둔한 미군에게는 미군 내부 시설로 별도의 복지를 누릴 수 있었으며 해당 시설들은 파나마 운하 회사나 파나마 운하 정부의 직원 및 가족이 이용할 수 없었다.

미국 시민권에서도 골드 롤 직원은 혜택이 주어진다. 파나마 운하 지대는 공식적으로는 조차지라서 미국 영토가 아니지만 법률을 계속 개정한 끝에 1904년 2월 26일 파나마 이후 운하 지대에서 부모 중 한 명 이상이 미국 시민인 사람에게 법적, 선언적 출생 시민권을 부여할 뿐만 아니라, 이 법이 제정되기 전에 운하 지대에서 부모 중 한 명 이상이 미국 시민인 사람에게 태어난 모든 자녀에게도 소급하여 미국 시민권을 부여했다. 해당 미국 시민권은 참정권이 포함된 것이므로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모두 보유한다. 존 매케인이 상원의원이 되고 미국 대통령 후보까지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4.2. 실버 롤

실버 롤은 은색 급여대장(payroll)의 줄임말로 파나마 운하 철도에서 유색인종 근무자에게 현지의 은화로 임금을 지급하던 관행에서 비롯된 말이다. 처음에는 콜롬비아 페소로 지급되었으나 나중에는 여러 국가의 은화가 혼합되어 지급되었고 미국에서 동전을 수입해서 지급하기도 했다. 1918년에 미국 달러로 월급 지급이 일원화된 뒤에도 실버 롤 직원의 임금은 매우 낮았다.

실버 롤 직원의 경우에는 위에서 언급한 골드 롤 직원이 누리는 복지와 혜택이 전혀 없었다.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에 따라 파나마 운하 지대는 1945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엄격한 인종분리정책에 따라 운영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 백인이 사용하는 골드 롤 직원용 시설을 실버 롤 직원은 전혀 사용할 수 없었으며 심지어 우체국에도 별도의 출입구가 마련될 정도였다.

이에 따라 파업이 발생했으나 1920년 파업 이후, 파나마 운하 지대 정부는 흑인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을 금지했다. 따라서 실버 롤 직원들은 우회를 할 방법을 찾았고, 1924년 파나마 운하 서인도 제도 노동자 협회(PCWIEA)가 설립되었다. 하지만 PCWIEA는 조합원 가입이 제한적이었고 1920년대의 파업으로 인한 여파 및 피해로 인해 파나마 운하 지대 내부에서 큰 지지를 얻지 못했으며 미국 본토의 노조들과 힘을 합쳐서 싸우려고 했으나 냉전이 시작되면서 공산주의와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사실상 분쇄된다. 짐 크로우 법이 무너지는 등 인종차별주의가 해소되기 시작할 무렵에는 이미 파나마 운하 지대 자체가 파나마의 반환요구에 시달리기 시작할 때였으며 결국 파나마 운하 지대가 최종적으로 반환될 때까지 실버 롤 직원의 복지는 크게 향상되지 못했다.

5. 역사

미국중남미의 세력 확장과 파나마의 전략적 위치를 고려해 파나마 운하를 착공하려 하였다. 미국은 1903년 1월 22일, 파나마를 영유하던 콜롬비아 측에 1000만 달러를 즉시 제공하고 연간 25만 달러 씩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파나마 운하 지대를 100년간 양도한다는 내용의 헤이-헤란 조약을 맺었지만 콜롬비아 상원이 이를 비준하지 않고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하면서 무산되었다. 결국 미국은 파나마의 분리주의 세력에 접근했고, 파나마는 1903년 11월 3일 독립을 선언했다. 콜롬비아군은 당장 개입을 하려했으나 미국 해군의 저지로 결국 파나마가 독립했다.

파나마 독립 이후인 1903년 11월 18일, 헤이-뷔노 바리야 조약이 미국과 파나마 양국 간에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미국은 1000만 달러를 파나마 측에 제공하고 파나마 운하를 무기한 임대했다. 이후 파나마 운하가 건축되었다. 건축 과정은 파나마 운하 문서의 문단 참조.

파나마 운하 건설 이후 파나마 운하는 미국이 잘 써먹었다. 미국인들은 파나마 운하로 많이 이주하기도 했으며, 이들을 위한 인프라가 많이 세워졌다. 파나마 운하에는 미국 남부사령부(USSOUTHCOM)가 설치되기도 하여 미국의 군사적 요충지로도 쓰였다.[2] 파나마는 미국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놓였다.

파나마 내에서는 파나마 운하 지대를 반환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으며 파나마 운하 지대에 살던 파나마인들도 파나마로 돌아가길 원했다. 파나마 국기도 파나마 운하 내에서 게양이 금지되었다. 게다가 파나마 운하에서 근무하던 노동자들은 "골드 롤"과 "실버 롤"로 분류되었는데, 골드 롤은 미국인 노동자들이었고, 실버 롤은 비미국인 노동자들이었다.[3] 실버 롤 노동자들은 급여, 주택, 교육 측면에서 차별을 받았다. 결국 1959년 11월 3일 파나마 독립 기념일에 맞춰 파나마인들이 파나마 운하 지역으로 몰려가 반미 폭동을 일어켰다. 미국경찰군대를 동원해 진압했고 시위대 2명을 체포했으며, 9명이 사망했다. 1963년에는 존 F. 케네디가 파나마 운하에서 파나마 국기와 성조기를 둘 다 게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케네디가 사망하면서 파나마 운하 지대 주지사인 로버트 존 플레밍은 둘 다 게양하지 말라는 방침을 내렸다. 이에 미국인들은 성조기를 게양할 수 없다는 것에 반발했고 파나마 운하 지대의 발보아고등학교에 성조기를 단독으로 게양하자, 파나마인 학생들이 몰려가 파나마 국기를 게양하겠다고 요구했다. 당연히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충돌 속에서 파나마 국기가 찢어졌다. 결국 다시 폭동이 벌어졌다. 1964년 1월 9일의 일이었다.[4] 이번엔 1959년 사건과 달리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사건이 번졌다. 미국 기업의 공장들을 불태우고, 5000명 정도의 시위대가 모였다고 한다. 결국 28명이 사망했고, 324명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으로 중국소련, 쿠바 같은 공산주의 국가는 물론, 영국프랑스 같은 전통적인 북대서양 조약 기구 소속 우방국과 베네수엘라, 브라질 같은 남미의 친미 국가들도[5] 입을 모아 미국을 비난했다. 파나마 정부도 미국을 강력하게 비난했고, 1964년 1월 10일 미국과 단교했다.[6] 결국 파나마 운하 지역 반환을 결정하게 되고, 1977년 9월 7일 토리호스-카터 조약을 맺었다. 1979년 10월 1일 파나마 운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파나마 측에 반환했다. 이 조약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던 지미 카터가 자신의 공약으로(파나마 주둔 미군 철수 공약) 열성적으로 추진했다. 파나마에서는 이 조약 비준을 국민투표에 회부해 67%의 찬성(투표율 96%)을 얻어 조약을 비준했으며[7] 미국에서는 상원에서 찬성 68 대 반대 32로 비준 동의에 필요한 2/3 찬성(67명 찬성)을 가까스로 넘어 비준되었다.

당시 미국은 몰랐던 사실로, 파나마 내 과격파들은 만약 이 조약이 체결되지 않을 경우 운하 자체를 파괴해버릴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이는 파나마군의 장교로서 나중에 파나마의 실권자 자리에 오른 마누엘 노리에가가 세운 계획으로, 노리에가는 이미 수년 전부터 운하 주변 마을에 자기 심복들을 심어두고 폭약사보타주에 필요한 장비를 운하 주변에 묻어두기까지 했다. 이 계획의 암호명은 "huele a quemado"(타는 냄새)였으며, 만약 조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파나마 라디오 방송을 통해 작전 개시를 알리는 암구호가 송출되고, 노리에가의 부하들이 한밤중에 운하의 중요 시설을 모두 파괴해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갑문을 모두 수리해도 운하를 다시 사용하려면 3년간에 걸쳐 빗물을 받아야 하는데다, 노리에가는 미국이 운하를 수리하는 것을 지켜볼 생각이 없었다. 미국을 상대로 베트남 전쟁을 방불케하는 정글 게릴라전을 전개할 계획이었다. 조약이 미국 상원을 통과한 것은 미국과 파나마뿐 아니라 전 세계에 큰 행운이었다.

1979년 10월 1일 파나마 운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지역을 파나마 측에 반환하면서 파나마 운하 지대는 소멸했고 파나마 운하는 미국과 파나마가 공동소유 및 관리를 진행했으나 파나마인들은 운하 자체를 반환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고, 1999년 12월 14일 파나마 운하 반환 협정을 맺고 그해 12월 31일 파나마 운하를 반환했다. 1914년에 완공된 이후 85년 만에 이뤄진 일이였다. 권한 이양 행사 당시 미국 정부의 고위 공직자는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아서 미국이 파나마 운하에 가진 미련을 드러내기도 했다.

6. 관련 문서


[1] 실질적으로는 1904년 5월 4일.[2] 파나마 운하 반환 이후 1999년 마이애미로 이전되었다.[3] 카리브 해와 파나마 현지 출신들로 이루어졌다.[4] 파나마에선 이 날을 순교자의 날이라며 기념일로 삼고 있다.[5] 베네수엘라는 당시 친미였다.[6] 같은 해 4월 3일 재수교했다.[7] 당시 파나마는 오마르 토리호스의 독재 치하에 있어 미국 내에서는 비민주적인 파나마가 투표 결과를 조작할 것이라는 이유로 조약에 반대하는 여론이 있었는데, 이에 토리호스는 투표 몇 주 전을 앞두고 일시적으로 정당 활동 탄압 및 언론 검열을 완화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