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ffffff,#081850><tablebgcolor=#ffffff> | 토트넘 홋스퍼 FC 감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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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브레텔 | 2대 캐머런 ★ | 3대 커크햄 | 4대 맥윌리엄 ★★ | 5대 민터 | |
6대 스미스 | 7대(대행) 하딘지 | 8대 트레사던 | 9대 맥윌리엄 | 10대 터너 | |
11대 흄 | 12대 로우 ★★ | 13대 앤더슨 | 14대 니콜슨 ★★★ ★★★★★★★★ | 15대 닐 | |
16대 버킨쇼 ★★★★ | 17대 쉬리브스 | 18대 플리트 | 19대(대행) 리버모어/하틀리 | 20대 베너블스 ★ | |
21대 쉬리브스 ★ | 22대 리버모어/클레멘스 | 23대 아르딜레스 | 24대(대행) 페리맨 | 25대 프란시스 | |
26대(대행) 휴튼 | 27대 그로스 | 28대(대행) 플리트 | 29대 그레이엄 ★ | 30대(대행) 플리트 | |
31대 호들 | 32대(대행) 플리트 | 33대 상티니 | 34대 욜 | 35대(대행) 알렌/잉글솔프 | |
36대 라모스 ★ | 37대(대행) 알렌/잉글솔프 | 38대 레드냅 (레드냅 체제) | 39대 빌라스보아스 | 40대 셔우드 | |
41대 포체티노 (포체티노 체제) | 42대 무리뉴 (무리뉴 체제) | 43대(대행) 메이슨 (무리뉴 체제) | 44대 누누 (누누 체제) | 45대 콘테 (콘테 체제) | |
46대(대행) 스텔리니 (콘테 체제) | 47대(대행) 메이슨 (콘테 체제) | 48대 포스테코글루 (포스테코글루 체제) | |||
★프리미어 리그 ★UEFA 유로파 리그 ★UEFA 컵 위너스컵 ★FA컵 ★EFL컵 ★FA 커뮤니티 실드 |
[[해리 레드냅| | |
제38대 감독 해리 레드냅 | |
<colbgcolor=#0b1c56><colcolor=#fff> 감독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해리 레드냅 / 제38대 감독 |
주장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레들리 킹 / 제31대 주장 |
코칭스태프 |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케빈 본드 (수석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팀 셔우드 (코치) [[스코틀랜드| ]][[틀:국기| ]][[틀:국기| ]] 조 조던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데릴 윌라드 (테크니컬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레스 퍼디난드 (테크니컬 코치) [[북아일랜드| ]][[틀:국기| ]][[틀:국기| ]] 팻 제닝스 (GK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토니 파크스 (GK 코치) [[잉글랜드| ]][[틀:국기| ]][[틀:국기| ]] 마이클 에드워즈 (총괄 분석관) |
계약 기간 | 2008년 10월 26일 ~ 2012년 6월 14일 (44개월 / 1328일) |
계약 종료 | |
연봉 | 미상 |
전술 스타일 | 정통 잉글랜드식 롱볼 축구 ┗ 클래식한 윙어들을 필두로 하는 빠른 템포의 역습 ┗ 단단한 하드웨어를 갖춘 코어 구성 ┗ 선수 맞춤 전술, 실리 중시 ┗ 4-2-2-2 포메이션 |
성적 | 전 승 무 패 (승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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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트넘 홋스퍼 FC의 제38대 감독 해리 레드냅 체제를 정리한 문서.2. 선임
포츠머스 FC를 이끌고 있던 2008년 10월, 2무6패로 꼴찌였던 토트넘 홋스퍼는 후안데 라모스 감독을 경질했고 레드냅은 공석이 된 토트넘의 감독으로 부임했다.[1]3. 활동
3.1. 2008-09 시즌
토트넘 감독 부임 첫 경기에서 볼튼 원더러스를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며 데뷔전에서 첫 승, 그리고 토트넘의 리그 첫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3일 후 아스날과의 북런던 더비였는데 난타전 끝에 4-4로 비겼다. 3일 뒤에는 무패로 리그 선두였던 리버풀에 2-1 역전승을 거두며 리그 첫 패배를 안겼다. 맨시티 원정에서도 승리하며 4경기 동안 3승1무를 거뒀고, 강등권에서 빠져나왔다. 에우렐류 고메스의 호러쇼로 풀럼에 패하자 골키퍼 코치를 교체했다.겨울이적시장에서 저메인 데포와 파스칼 심봉다, 로비 킨을 재영입했고 카를로 쿠디치니를 영입해 백업 골키퍼를 보강했다.
잠시 부침을 겪으며 2009년 2월 초까진 강등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FA컵과 UEFA컵을 포기하면서까지 리그에 집중하며 리그 성적을 반등시켰다. 첼시를 상대로는 1-0 승리를 거두며 거스 히딩크 감독에게 유일한 1패를 안기기도 했다. 특히 2006/07 시즌 54실점, 2007/08 시즌 61실점으로 자동문이었던 토트넘 수비를 크게 탈바꿈시켜 안방인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토트넘은 19경기에서 단 10골만 실점했다.[2]
토트넘에서 첫 시즌 전임 라모스 시절 흑역사인 초반 8경기 승점 2점의 암울했던 시기를 극복하며 유로파리그 마지노선인 7위 풀럼에 승점 1점 차로 뒤진 8위로 마감했다. 칼링컵에서 리버풀을 꺾는 등 승승장구하면서 결승에 진출[3], 팀이나 감독 개인이나 2년 연속 우승에 도전했으나 결승에서 맨유에 0-0 무승부 끝에 승부차기로 준우승했다.[4]
3.2. 2009-10 시즌
여름이적시장에서 피터 크라우치와 니코 크란차르를 포츠머스로부터 영입하며 재정난으로 고통받는 포츠머스의 공중분해에 일조했다. 강등된 뉴캐슬로부터 세바스티앵 바송을 영입해 수비진의 뎁스를 늘렸다.개막전 리버풀을 상대로 승리한 토트넘은 헐시티, 웨스트햄, 버밍엄을 잇따라 꺾고 4연승을 거두며 순항했다. 그러나 모드리치가 부상으로 이탈하는 악재를 맞았고 맨유와 첼시에 패배하며 상승세가 꺾인 토트넘은 이후 스토크와 아스날에도 패배하면서 11라운드까지 6승1무4패로 흔들렸다. 이후 데포의 5골로 위건에 9-1 대승을 거두지만 홈에서 승격팀 울브스에 패배하며 기복심한 행보를 이어갔다. 다행히 모드리치의 복귀 시점에 맞추어 2009년 연말 맨시티와 블랙번, 웨스트햄을 제압하며 4위로 2010년에 돌입했다. 칼링컵은 8강에서 맨유에 패배하며 탈락했다.
2010년 들어 홈에서 헐시티에 비기고 리버풀 원정에서 패배해 불안한 행보를 보였다. 여기에는 전반기의 활약상이 뛰어났던 아론 레넌의 부상 공백이 결정적. 그리고 울브스에게 또다시 패배하면서 좋지 않은 흐름이 이어졌다.
그런데 반등의 동력은 내부에 있었다. 가필패라는 불명예 별명을 가졌던 가레스 베일이 주전으로 도약하더니 4옵션으로 전락하며 모습을 보기 쉽지 않았던 로만 파블류첸코가 컵대회에서 득점을 가동하더니 리그에서도 위건과 에버튼, 블랙번을 상대로 3경기 5골로 토트넘의 3연승을 이끌어낸 것. 스토크와 포츠머스를 제압한 토트넘은 5연승에 성공하면서 맨시티와의 4위 경쟁을 이어갔고 FA컵에서는 연이은 재경기 끝에 준결승에서 최하위 포츠머스를 상대해 우승에 도전했다.
그러나 선덜랜드를 상대로 3-1 패배를 당하며 4위를 맨시티에 빼앗겼고 설상가상으로 아스날-첼시-맨유-맨시티로 이어지는 최악의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에 결승행이 유력했던 FA컵 준결승에서는 연장전 끝에 강등이 확정된 포츠머스에 2-0으로 패배하는 이변을 허용했다. 이제 남은 목표는 4위 탈환 뿐이었다.
하지만 토트넘은 아스날과의 리그 34차전에서 대니 로즈와 가레스 베일의 골로 2-1 승리를 거두며 라이벌을 상대로 무려 11년 만에 리그에서 승리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여기에 아스날의 우승 희망도 끝내는 일석이조. 3일 후에는 선두 첼시를 상대로 베일이 또다시 득점하면서 2-1로 승리, 맨시티를 제치고 4위 도약에 성공했다.
맨시티와의 사실상의 4위 결정전에서 토트넘은 원정경기임에도 피터 크라우치의 결승골로 1-0 승리, 4위를 확보하며 꿈에 그리던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마침내 성공했다. 잉글랜드 챔피언 자격으로 참가했던 1961-62 유로피언 컵 이후 구단의 48년 만의 챔스 진출이다. 최종전 결과에 따라 아스날을 제치고 챔스 직행인 3위 가능성이 조금 남았지만 최종전 번리전에서 4-2로 패배하며 4위 확정.
2009/10시즌 루카 모드리치나 가레스 베일[5] 등을 발굴하여 토트넘의 챔피언스리그 진출이라는 성과를 세운다. 개막 후 4경기를 전부 이겼고 이후 기복 있는 경기력으로 롤러코스터를 탔지만 시즌 막판 찬밥신세였던 파블류첸코가 살아난 것을 기점으로 상승세를 타며 '오일 머니' 맨시티와의 치열한 경쟁 끝에 직접 맞대결에서 1-0으로 제압하고 토트넘의 첫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이끌었다. 특히 베일을 앞세워 1999년 10월 이후 11년 만에 북런던 라이벌 아스날 FC를 제압한 뒤 리그 우승을 눈앞에 둔 첼시까지 2-1로 제압한건 압권.
3.3. 2010-11 시즌
2010/11시즌 조별 라운드에서 인터 밀란, 16강에서 AC 밀란을 차례로 꺾으며 8강에 진출했다. 아쉽게도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준결승은 좌절되었다. 하지만 리그에서는 2월까지 4위권 싸움을 치열하게 전개했으나 챔피언스리그와 병행하며 경기력이 지난시즌만 못했고, 리그 10경기에서 1승만 거두는 부진에 빠지며 5위로 챔피언스리그 진출에 실패했다.3.4. 2011-12 시즌
2011/12시즌 초반 2경기 맨체스터의 두 팀을 만나 각각 0-3, 1-5로 대패를 당했지만, 모드리치의 이적을 간신히 막았다. 자유 계약으로 데려온 노장 골키퍼 브래드 프리델, 웨스트햄에서 영입한 살림꾼 스콧 파커와 맨시티에서 임대로 데려온 공격수 아데바요르가 맹활약을 펼쳤다. 여기에 라이트백 유망주 카일 워커가 포텐을 터뜨리며 전반기 20경기 동안 14승 3무 3패를 거두며 2위 맨유와 승점이 같은 3위를 기록했다. 9월과 11월에는 이 달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유로파리그는 철저하게 2군급으로 나서며 조3위로 조별리그 탈락, 챔피언스리그 복귀에 모든 것을 거는 행보를 보였다.토트넘에서의 성과로 인해 잉글랜드 감독 후보로도 거론되었고 본인도 잉글랜드 감독을 맡길 원했던 것 같지만 결국 2012년 4월 30일 웨스트브롬위치의 로이 호지슨이 선임되며 성사되지 못했다.[6]
25라운드 뉴캐슬에 5-0 대승을 거둘 때까지만 해도 4, 5위 권과 승점 10점 차로 넉넉하게 앞선 3위를 기록하며 챔스 직행이 유력했다. FA컵을 병행하기는 했지만 유로파리그에서 조별리그 탈락했기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여유가 있을 법했다. 하지만 아스날 원정 2-5 패배를 시작으로 9경기에서 1승에 그치며 같은 기간 7연승, 6연승을 거둔 아스날과 뉴캐슬에 밀려 5위로 내려갔다. 다행히 마지막 4경기를 잘 치러내며 4위를 기록하였으나 첼시 FC의 챔피언스리그 우승으로 인해 유로파로 밀려났다. FA컵에서도 준결승에서 첼시에 5:1 참패를 당했다. 시즌 종료 후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원한 토트넘은 후반기의 아쉬운 모습으로 인하여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목전에서 놓친 레드냅에게 한계를 느꼈는지[7] 첼시에서는 실패했지만 한창 젊은 감독었던 안드레 빌라스보아스를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그와 결별을 선언한다.
4. 경기 결과
5. 공격 포인트 순위
6. 평가
리그 최하위였던 팀을 리그 8위까지 끌어올렸고, 다음 시즌인 09/10 시즌에는 토트넘의 첫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이뤄냈다.그 이후 두 시즌들에서는 다소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나중에 토트넘 최고의 슈퍼스타로 올라서는 가레스 베일,루카 모드리치 등을 육성시켜 토트넘을 첫 챔피언스리그에 올려놓은 공로는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1] 그리고 그가 토트넘에 부임하면서 저메인 데포, 니코 크란차르, 유네 카불 같은 포츠머스 선수들을 헐값에 다 데려가는 바람에 포츠머스는 부진을 이기지 못하고 다음시즌 강등을 당하고 말았다.[2] 레드냅 부임 이후로는 15경기 5실점이었다.[3] 다만 준결승에서 챔피언십 팀 번리 FC를 만나 1차전 4-1 대승을 거두고도 2차전에서 3-0으로 끌려가 연장전 끝에 탈락 위기에 몰렸다가 겨우 생환했다.[4] 포츠머스에서 시즌을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커뮤니티실드에서 맨유에 승부차기로 졌다.[5] 원래 윙백이었던 베일을 수비력 문제로 인해 윙포워드로 포지션을 변경했는데, 이게 대박이 터졌다. 그러나 그는 베일을 다시 윙백으로 돌리려고 했었는데,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이 현재로써는 정말 천만다행이다.[6] 사실 한참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을때 위에서 말했던것처럼 극도로 부진한 성적을 내고 있었는데, 이것이 성사되지 못한 이유일 가능성도 있다.[7] 건강 이슈로 시즌 중 감독직을 비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