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2-24 16:16:57

조지 그레이엄

조지 그레이엄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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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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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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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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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역대 주장
보비 찰튼
(1968~1973)
조지 그레이엄
(1973~1974)
윌리 모건
(1974~1975)
}}} ||
스코틀랜드의 축구감독
파일:George Graham.jpg
이름 조지 그레이엄
George Graham
출생 1944년 11월 30일 ([age(1944-11-30)]세)
영국 스코틀랜드 노스래너크셔 바게딜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스코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70cm
직업 축구선수(미드필더, 공격수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첼시 FC (1964~1966)
아스날 FC (1966~197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72~1974)
포츠머스 FC (1974~1976)
크리스탈 팰리스 FC (1976~1977)
캘리포니아 서프 (1978)
감독 밀월 FC (1982~1986)
아스날 FC (1986~1995)
리즈 유나이티드 (1996~1998)
토트넘 홋스퍼 FC (1998~2001)
국가대표 12경기 3골 (스코틀랜드 / 1971~1973)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유스 시절2.1.2. 첼시 시절2.1.3. 아스날 시절2.1.4. 말년
2.2. 국가대표 경력
3. 감독 경력
3.1. 밀월 시절3.2. 아스날 시절3.3. 리즈 시절3.4. 토트넘 시절
4. 은퇴 이후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2. 감독
5.2.1. 대회 기록5.2.2.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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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 그레이엄의 일대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비디오 (1989년 제작.)

잉글랜드의 축구인으로, 아르센 벵거의 아스날의 기반을 다진 명장이지만 동시에 뇌물 수수로 인해 나락으로 떨어진 인물이다. 별명은 '산책자(Stroller)'.

조지 그레이엄은 선수 시절과 감독 시절 모두 아스날에서 전성기를 보냈다. 그는 선수 시절엔 아스날에서 스트라이커 및 인사이드 포워드로 활약하며 아스날의 컵 대회 우승에 기여했고 감독 시절엔 오랜 세월 리그 우승을 못하고 중위권을 전전했던 아스날에 우승 트로피를 선사하고 최강의 수비진을 갖추어 벵거의 아스날이 탄생하는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인생에 오점을 남기게 될 범죄를 저지른 후 나락으로 떨어져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가는 인물이기도 하다. 만약 뇌물을 받지 않았다면 계속 아스날에 남아서 감독 생활을 했을 지도 모른다.[1]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유스 시절

조지 그레이엄은 1944년 11월 30일 스코틀랜드 노스래너크셔 주의 바게딜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자식을 7명 두었는데, 그레이엄은 그 중 막내 아들이었다. 그가 태어난 지 한 달 밖에 안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가 폐결핵으로 인해 사망하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었고 그는 어머니에게 양육받으며 근근히 살아갔다. 1951년엔 그레이엄의 누나 또한 19살의 나이로 폐결핵에 걸려 사망하는 등, 그의 어린 시절은 매우 암울했다.

그는 집안 분위기를 가득 매운 우울과 번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축구에 전념했고 장차 프로 축구 선수가 되기를 꿈꾸었다. 뉴캐슬 유나이티드첼시 FC, 그리고 아스톤 빌라가 어린 그레이엄에게 재능이 있다고 보고 그에게 접근했다. 그레이엄은 그 중 아스톤 빌라를 택하여 1961년에 17살의 나이로 유스 계약을 체결했다. 그는 팀에서 3시즌을 뛰었지만 1963년 리그 컵에 데뷔한 이래 고작 8경기 밖에 나오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4년 7월, 첼시가 5천 파운드에 그를 영입했다.

2.1.2. 첼시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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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은 1964년 첼시에 이적한 후 2시 즌 동안 72경기에 출전하여 35골을 기록하며 자신의 진가를 드러냈다. 1965년엔 리그 컵 트로피를 들어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이 무렵 토미 도허티 첼시 감독과 갈등을 빚었다. 당시 도허티 감독은 팀의 주장 테리 베너블스를 비롯한 여러 선수들과 자주 마찰을 일으켰다. 구단주는 감독의 편을 항상 들어줬고 선수들은 일방적으로 감독 편을 들어주는 팀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1965년 4월 22일, 일이 터지고 말았다. 당시 첼시는 리버풀에게 FA컵에서 패하긴 했지만 아직 리그 우승의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블랙풀 원정을 가게 된 도허티는 블래풀 시내 호텔에 돌아와야 할 통금 시간을 어긴 8명의 선수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경기에 출전시키지 않는 조치를 취했다. 이때 그레이엄 또한 통금에 걸려서 다른 7명과 함께 경기에 배제되었다. 그 결과 첼시는 6:2 대패를 당하며 리그 우승이 좌절되었고 결국 3위에 그쳤다. 이후 통금에 걸려 경기에 나오지 못했던 첼시의 주장 테리 베너블스, 조지 그레이엄을 비롯한 8명의 선수들은 감독의 지침이 지나치다며 공동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우리는 이 일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점이 충격적이라고 생각하며 이 일을 공론화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우리가 통금 시간 후에도 호텔 외부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우린 새벽 2시까지 외부에 있었고 팀의 규율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중략)
그 날의 일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11시에 들어와서 한 방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가 일행 중 배가 고픈 선수가 있어서 뭘 좀 먹으러 가기로 결정했다. 레스토랑을 떠나서 다시 호텔에 돌아온 것이 2시였고 도허티 감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중에는 취한 사람도 없었고 돌아오는 길에 소란을 피운 것도 아니었다. 외출해서 돌아올 때까지 우린 다 함께 행동했고 여자와 함께 어울리지도 않았다.
(중략)
이 문제가 이미 결론이 난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왜 감독이 이 나라의 다른 모든 클럽이라면 조용히 처리하고 벌금을 부과했을 사안에 대해 그토록 극단적이고 공식적인 조치를 취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는 다시 감독을 만나기 전에 조 미어스 구단주를 직접 만나 이 사항에 대해 직접 논의하기를 요청한다. 우리는 모두 함께 행동할 것이다.

하지만 구단주는 이번에도 도허티 감독의 손을 들어줬고 선수들에게 감독에게 사과할 것을 요구했다. 결국 8명의 선수들과 감독은 억지로 화해하는 것으로 사태를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도허티 감독은 이 일을 잊지 않았다. 1965-66 시즌이 마무리 된 뒤, 도허티 감독은 8명 전원을 팀에서 방출했다. 이때 그레이엄 또한 첼시에서 쫓겨나 아스날로 이적했다.

2.1.3. 아스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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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은 1966년 6월 토미 볼드윈과 7만 5천 파운드를 첼시에 지불하고 조지 그레이엄을 영입했다. 그는 1996년 10월 1일 레스터 시티와의 홈경기에 데뷔했다. 비록 그 경기에선 4:2로 패했지만, 그는 이후 아스날의 주전 선수로서 활약했다. 1966-67 시즌, 그는 33경기 11골을 기록했고 이듬해에는 38경기 16골을 기록했다. 이 두 시즌 동안, 그는 팀 내에서 가장 많은 골을 기록한 선수였다.

하지만 1968년, 아스날은 존 레드포드에게 센터 포워드 자리를 맡기고 그레이엄은 측면에서 인사이드 포워드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했다. 그레이엄은 측면 공격수로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줬고 1969-70 시즌 인터-시티 페어 컵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1970-71 시즌엔 37경기에 출전하여 11골을 기록하여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고 FA컵에서도 리버풀을 상대로 동점골을 넣으며 팀의 2:1 역전승에 큰 공을 세워 더블 우승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1971-72 시즌 부터는 기량이 쇠퇴한 모습을 보이더니 1972-73 시즌엔 16경기 3골에 그쳤다. 아스날은 그의 전성기가 끝났다고 판단하고 1972년 12월 12만 파운드를 받고 맨유로 보냈다. 그는 아스날에서 308경기에 출전하여 77골을 넣었다. 이렇듯 그레이엄은 아스날의 레전드라고 하기에는 좀 부족했지만 아스날이 FA컵 우승을 거두는 데 기여를 하는 등 충분히 훌륭한 선수라고 불릴만 했다.

2.1.4. 말년

당시로서는 꽤 거금인 12만 파운드를 받고 맨유로 이적한 그레이엄은 맨유에서 2시즌을 뛰었지만 단 2골에 그치는 위대한(...) 업적을 세운다. 1972-73 시즌엔 18경기 1골에 그쳤고 그 다음 시즌엔 24경기 1골을 기록하며 팀의 2부 리그 강등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러한 그의 먹튀짓에 질릴 대로 질린 맨유는 1974-75 시즌이 개막하자마자 단 한경기만 뛴 그를 포츠머스로 보내 버린다.

그는 포츠머스에서도 진가를 발휘하지 못했다. 1974-75 시즌엔 19경기 3골에 그쳤고 다음 시즌엔 한술 더 떠서 39경기 출장 2골에 그치며 팀을 3부 리그 강등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결국 포츠머스는 그를 크리스탈 팰리스로 방출했다. 그레이엄은 거기서도 별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1978년 여름에 미국의 캘리포니아 서프로 이적하여 반시즌을 뛴 뒤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70-71 시즌 아스날의 더블을 이끌어낸 활약은 그가 국가대표로 발탁되기에 충분했다. 그는 1971년 10월 13일 포르투갈과의 평가전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다.

그레이엄은 국가대표로서 12경기에 출전하여 3골을 넣었다. 하지만 이후 그의 기량은 급격히 쇠퇴했고 결국 더 이상 국가대표로 발탁되지 못했다.

3. 감독 경력

3.1. 밀월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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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85 시즌의 밀월 선수단. 맨 오른쪽이 그레이엄 감독.

선수 생활을 은퇴한 후, 그레이엄은 크리스탈 팰리스에서 코치 생활을 시작했고 이후에는 퀸즈 파크 레인저스 FC에서 코치 수업을 받았다. 그러던 1982년 12월 6일, 그는 밀월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밀월은 3부 리그에서 꼴지를 찍고 있어서 자칫하면 4부 리그에 강등될 지도 모를 중대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그레이엄은 빈약한 예산으로도 선수들을 잘 추스려서 성적을 향상시켜서 강등을 모면했고 그 해에 축구 리그 트로피를 수상했다. 이후 그는 유스들을 대폭 기용하거나 무명선수 테디 셰링엄을 발굴해 팀의 리빌딩을 성공시켰고 1984-85 시즌에 마침내 밀월을 2부 리그로 승격시켰다. 그는 1986년에 밀월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선수들은 좋은 활약을 계속 이어갔고 밀월은 1987-88 시즌에 1부 리그 승격을 달성했다.

3.2. 아스날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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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엄이 밀월에서 보여준 대활약은 빅클럽들의 주목을 받기에 충분했다. 아스날은 1986년 3월에 돈 하워를 경질한 후 그를 차기 감독 후보로 삼고 물밑작업을 벌였다. 사실 아스날은 처음에는 에버딘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여주고 있던 알렉스 퍼거슨을 선임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퍼거슨은 당시 스코틀랜드 국가대표팀을 맡아 월드컵에 참여하고 있었고 그는 월드컵이 끝난 뒤에 그의 미래를 결정하기로 정했다. 이에 아스날은 퍼거슨 대신 그레이엄을 선임했다.

당시 아스날은 1978-79 시즌 FA컵 우승 이래 트로피를 획득하지 못하고 있었고 리그 우승은 오래전부터 못하고 있었다. 이에 그레이엄은 나이가 많은 선수들을 모조리 방출하고 유스들을 대거 1군에 올려서 포텐을 터트리는 데 집중했으며 양질의 선수들을 영입하여 전력을 보강했다. 또한 그는 당시 느슨했던 라커룸 분위기를 장악하기 위해 엄격한 규정을 실시했다. 이때 그는 통금 시간을 정해놓고 이를 준수하지 않는 이들에게 막대한 벌금을 물렸다.

아스날은 그의 탁월한 통솔력으로 기강을 바로잡고 전력 또한 즉각적으로 강화되어 리그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다. 1986년 크리스마스 때 아스날은 1위를 거두었는데, 이는 아스날이 1980년대 들어 처음으로 도달한 1위였다고 한다. (그전에는 시즌 중에도 최대 2위까지밖에 올라오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성적이 떨어져 그레이엄의 아스날 부임 이래 첫 시즌인 1986-87 시즌은 4위에 그쳤다. 그래도 아스날은 이 시즌 때 리그컵 우승을 달성하여 트로피를 오랜만에 획득했다.

아스날은 다음 시즌에선 리그컵에서 절대 열세로 평가받았던 루튼 타운에게 3:2로 패하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지만 곧 패배의 상처를 씼어버리고 리그를 순항했다. 그레이엄은 이 시기 팀의 주장 토니 아담스, 리 딕슨, 스티브 볼드, 그리고 나이젤 윈터번으로 이른바 '철의 포백'을 구축하고 압도적인 수비력으로서 상대의 공격을 모조리 차단했다. 한편으로, 그는 공격진에서도 보강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미들필더 미카엘 토마스과 폴 마슨, 스트라이커 앨런 스미스가 이 시기 아스날에 합류했다. 아스날은 이 적절한 보강에 힘입어 리그 2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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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89 시즌, 아스날은 나이가 젊고 재능이 뛰어난 선수들의 활약에 힘입어 리그를 순항했고 마지막 경기에서 리버풀과의 마지막 경기를 갖게 되었다. 당시 리버풀은 아스날보다 승점이 3점 앞섰고 골득실은 1골 더 많았다. 아스날이 우승을 차지하려면 리버풀을 적어도 2골 이상의 차이로 이겨야 했다. 그러나 이 경기는 리버풀의 홈구장 안필드에서 치러야 했기에 여러모로 아스날이 불리했다.

경기 시작 후 앨런 스미스가 선제골을 넣으면서 아스날이 1:0으로 앞서나갔다. 그러나 이후 골은 좀처럼 터지지 않았고 90분이 다 되어갔을 때에도 점수는 여전히 1:0이었다. 이제 리버풀이 아스날을 골득실 차로 제치고 우승을 차지하는 듯했다. 그런데 경기 종료 1분전, 미카엘 토마스가 리버풀 수비진을 뚫고 앨런 스미스에게 패스를 찔러줬다. 앨런 스미스는 공을 곧바로 브루스 그롭벨러에게 전달했고, 그롭벨러는 강력한 슈팅을 날려 리버풀의 골망을 갈랐다. 이로서 아스날은 리버풀을 2:0으로 꺾고 안필드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하지만 아스날은 1989-90시즌에서는 골 가뭄에 시달려 4위에 그쳤다. 이에 그레이엄은 골키퍼 데이비드 시먼과 윙어 안드레스 림퍼를 전격 영입했다. 두 선수들은 각각 아스날의 골문과 공격을 책임져줬고 아스날은 1990-91 시즌에 리그를 우승했고 FA컵에선 4강에 진출했으나 토트넘에게 패하고 말았다. 이 시기 아스날은 리버풀과 우승 경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1991년 2월, 리버풀의 감독 케니 달글리시가 갑자기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자 언론은 그레이엄이 달글리시의 뒤를 이어 리버풀 감독이 될 거라는 추측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아스날을 떠나 리버풀로 갈 생각이 없다고 밝혔고 리버풀은 그 대신 그레이엄 수네스를 선임했다.

1991년 여름, 그레이엄은 크리스탈 팰리스로부터 공격수 이안 라이트를 영입했다. 이 영입은 아스날에게 실로 대박이었다. 이안 라이트는 아스날 역사상 최고의 공격수로 거듭나 리그를 지배하며 아스날의 호성적을 이끌었다. 그렇게 아스날이 라이트의 활약에 힘입어 리그에서 순항하는 동안, 그레이엄은 헤이젤 참사 이후 6년 만에 유러피언 컵에 출전하여 국제 대회에서 자신의 능력을 검증받게 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아스날은 벤피카에게 일방적으로 농락당하고 예선 2라운드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이 패배로 아스날의 기세는 꺾였고 그 여파로 FA컵 3라운드에서 5부 리그 팀인 렉섬 FC에게 패하는 충격적인 패배를 당했고 리그에선 4위에 그치고 말았다.

실망스러웠던 1991-92 시즌이 끝난 후, 그레이엄은 전술을 바꿨다. 그는 덜 공격적이고 더욱 수비적인 전술을 택했다. 안 그래도 강력햇던 수비진은 훨씬 견고해진 반면, 공격은 오로지 이안 라이트에게 맡겨졌다. 1986년에서 1992년까지 6년간, 아스날은 평균 66골을 기록했고 1991-92 시즌엔 81골을 거두었다. 그러나 1992년에서 1995년까지 3년간, 아스날은 평균 48골을 기록했고 1992-93 시즌엔 고작 40골을 기록했다.(이는 1992-93 시즌의 팀들 중 가장 적은 골 기록이다.) 아스날은 리그 최강의 수비진으로서 상대의 공격을 원천 봉쇄했지만 이안 라이트를 향해 롱볼 패스를 보내서 라이트가 알아서 공격하는, 이른바 '롱볼 전술'을 채택했다. 그 결과 실점은 극도로 줄어들었지만 골은 잘 터지지 않았고 관중들은 경기 내내 지루해했다. 안티팬들은 아스날이 너무 지루한 축구를 한다며 '보링 보링 아스날'이라고 비웃었다. 또 선수들은 그의 엄격한 선수단 관리에 반발하며 '카다피'란 별명을 붙여줬다.

그래도 이 전술은 아스날이 컵 대회에서 호성적을 거두는 데 기여했다. 아스날은 1992-93 시즌에 셰필드 웬즈데이를 꺾고 리그컵 우승을 달성했고 뒤이어 FA컵에서도 역시 셰필드 웬즈데이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94년, 아스날은 UEFA 위너스 컵에서 파르마를 1:0으로 격파하고 우승을 차지했다. 반면 리그에서는 골이 잘 나오지 않는 바람에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전술은 확실히 컵 대회 같은 단기전에서는 위력을 발휘했지만 장기전인 리그에서는 우승컵을 들어올리기엔 부족했다. 그래도 아스날 팬들은 그에게 만족했고 그의 아스날 감독 인생은 오랫동안 계속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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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그레이엄의 몰락을 이끌어낸 루네 하우겐 에이전트

1994-95 시즌이 한창이던 1995년 2월, 그레이엄은 충격적인 진실에 직면했다. 그는 1992년에 폴 뤼데르센과 욘 옌센을 영입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의 에이전트인 루네 하우게가 그레이엄에게 42만 5천 파운드의 뇌물을 전달했다. 그런데 1995년 2월에 이 에이전트가 갑자기 이 일이 있었다고 폭로해버린 것이다. 그레이엄은 처음에는 이를 부인했지만 명백한 증거 앞에 결국 "원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결국 그는 FA로부터 1년 감독 정지라는 처벌을 받았고 아스날은 곧바로 그를 경질했다. 근데 정작 그레이엄에게 뇌물을 건넨 에이전트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얼마 후 피터 슈마이켈과 에이전트 계약을 맺었다.

조지 그레이엄 부임 시기, 아스날은 트로피를 획득하지 못하는 평범한 팀에서 벗어나 리그 최강의 수비진을 구축하고 여러 우승컵들을 획득했다. 그가 유스들을 잘 키우고 양질의 선수들을 영입하여 리빌딩을 완성하지 않았다면, 벵거의 아스날은 결코 등장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확실히 아스날 팬들의 추앙을 받을 만한 명장이었다. 그러나 한 순간의 그릇된 선택이 이 모든 업적을 말아먹고 말았다. 오늘날 아스날 팬들은 뇌물을 받아 챙긴 그의 행위를 비판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래도 아스날을 잘 이끌었던 명장의 몰락에 가슴 아파하고 있다.

3.3. 리즈 시절

1년 감독 정지가 풀린 후, 그레이엄은 1996년 9월에 리즈로 옮기면서 하워드 윌킨슨 감독의 후임으로 부임했다. 그는 리즈에서도 수비 덕후(...)답게 수비력 강화에 집중했다. 리즈는 1996-97 시즌에 고작 28골(...)을 넣었는데, 이 기록은 당시 리그에서 가장 적은 골 기록이었다. 이렇듯 골 가뭄에 시달린 리즈는 결국 11위에 그쳤다.

이에 그레이엄은 다음 시즌에 공격수 지미 플로이드 하셀바잉크를 영입했고, 이 영입은 대성공을 거두어 리즈가 5위를 거두어 UEFA컵에 진출하는 데 기여했다. 1998년에도 리즈를 잘 이끌던 그레이엄은 그해 10월 토트넘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3.4. 토트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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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경력 최악의 흑역사
토트넘 팬들의 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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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0월에 아스날 팬들이 조지 그레이엄을 배신자(Traitor)라고 까는 모습.[2]

그레이엄은 토트넘에 부임한 후 팀을 이끌고 1999년 레스터를 격파하고 리그컵 우승을 차지했다. 여기까지만 해도 그가 아스날에 이어 토트넘에서도 능력을 발휘할 것으로 보였는데... 1999-2000 시즌, 그레이엄은 '롱볼 축구'를 토트넘에도 접목시켰지만 불행히도 토트넘 선수진은 아스날 선수진과는 달리 수비적 기량이 부족했다. 결국 토트넘은 골은 골대로 터지질 않고 수비는 계속 뻥뻥 뚫리는 상황에 직면했고 결국 10위에 그치고 말았다.

2000년 여름, 그레이엄은 선수진 보강을 위해 대대적인 영입을 단행했다. 하지만 선수를 보는 눈이 노쇠해진 건지, 그가 영입한 선수들은 대거 실패하고 말았다. 그 중에서도 최악은 세르히 레브로프 영입이었다. 그레이엄은 이 우크라이나 출신 공격형 미드필더에게 천 백만 파운드를 지불하며 데려왔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정작 그를 제대로 쓰지 않았다. 이렇듯 그레이엄이 무리하게 영입을 진행한 결과, 토트넘의 재정은 매우 악화되었고 급기야 파산 직전까지 몰리고 말았다.

이에 토트넘은 앨런 슈가 회장이 떠나고 다니엘 레비를 회장으로 둔 ENIC를 새 구단주로 맞아들였다. 레비는 그레이엄이 약속된 예산을 초과하여 지나치게 많은 돈을 썼으면서도 성적이 10위 이상을 거두지 못한 책임을 물어 그를 2001년 3월 15일에 전격 경질했다. 그레이엄은 부당한 해고라며 법적 대응에 나설 뜻을 밝혔지만 얼마 후 소송을 취하했다.

4. 은퇴 이후

그는 토트넘에서 해고된 후 감독 생활을 접고 스카이 스포츠에서 축구 평론가로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종종 감독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링크가 걸리고 있다. 2001년 10월에 레스터 시티가 그를 데려온다는 루머가 돌았지만 그는 레스터에 부임하지 않았다. 또한 2002년엔 웨스트햄이 그를 선임한다는 루머가 있었고 2003년엔 아스톤 빌라가 그를 데려온다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루머는 헛소문으로 끝났고 그는 여전히 감독 자리에 복귀하지 않고 있다.

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2.2. 개인 수상

  • 스코틀랜드 명예의 전당: 2015년

[1] 하지만 팬들은 그레이엄이 뇌물을 받지않고 감독직을 유지했으면 아르센 벵거가 올 일도 없었고 현재 잉글랜드는 롱볼이나 주고받는 리그가 될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고 있다. 물론 이게 무조건적인 팩트는 아니지만 벵거가 잉글랜드 축구를 뒤흔든건 팩트이기에 이런 말이 나오는 듯.[2] 가톨릭, 개신교, 성공회 등 종파를 불문하고 모든 기독교권 문화에서 유다(Judas)는 배신자에게 붙여지는 가장 심한 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