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레이 가와쿠보 川久保玲 | Rei Kawakubo | |
이름 | 카와쿠보 레이 ([ruby(川久保, ruby=かわくぼ)] [ruby(玲, ruby=れい)], Rei Kawakubo) |
출생 | 1942년 10월 11일 ([age(1942-10-11)]세) |
일본 도쿄도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패션 디자이너 |
소속 | 꼼데가르송 (1969년~ ) |
학력 |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미학미술사학 / 학사) |
남편 | 아드리안 조프[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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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국적의 패션 디자이너. 일본의 대표적인 1세대 디자이너 브랜드 꼼데가르송을 설립했으며, 남편과 도버 스트리트 마켓을 설립했다.가와쿠보는 단순히 옷과 액세서리에만 집중하기보다는 자신의 사업의 모든 측면에 집중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의 비전의 일부분이고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믿고 그래픽 디자인, 광고, 상점 인테리어 등 다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크게 관여하고 있다. 도쿄 아오야마에 위치한 꼼데가르송 스토어는 파란 점으로 장식된 경사진 유리 파사드로 유명하다. 이것은 가와쿠보와 건축가 퓨처 시스템즈(Future Systems), 인테리어 디자이너 가와사키 타카오가 협업해 설계했다.
한편 상당히 은둔적이고 언론계에서는 수줍음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신의 혁신적인 창작물에 대해 더 집중하는 것을 선호하고 있다.
2. 디자인 특징
아방가르드계의 대모라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기존 패션계의 불문율을 깨부수며 과감한 실루엣, 해체주의적인 의상을 선보였다. 이로 인해 마틴 마르지엘라와 벨기에의 안트베르펜 식스 등 당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디자이너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2]이 말은 달리 본다면 대중성, 즉 상업성 측면에서는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한번은 상업성의 극치를 달리는 마크 제이콥스를 디스한 적도 있다. 제이콥스가 다소 예술성을 강화한 디자인을 발표했을 때, '어설픈 드리스 반 노튼'이라 말했다고... 이에 제이콥스는 "내 작품이 싫은 사람은 그냥 구경을 마라."고 응수했다. 하지만 플레이 라인을 통해 상당한 상업성까지 잡은 결과, 현재에 이르러서는 가와쿠보 본연의 아방가르드한 면모보다는 로고플레이 의류들이 대중들에게는 익숙해졌다.
3. 생애
레이 가와쿠보는 1942년 10월 11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게이오기주쿠대학의 행정관으로 일했으며, 모친은 교사였다.처음부터 패션 디자이너로서의 공부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1960년도에 부친이 근무하고 있던 게이오기주쿠대학에 입학해 1964년 미학미술사학 학사를 수여받았다.
졸업 이후에는 일본의 섬유 회사 아사히카세이의 마케팅 부서에서 근무했고, 1967년에는 프리랜서 스타일리스트로 일하기 시작했다.
3.1. 꼼데가르송 창업 이후
1969년 도쿄에서 꼼데가르송이라는 본인의 패션 업체를 설립했다. 이후 1975년에 그곳에서 여성복으로 그녀의 첫 부티크를 열었다.1978년에는 남성복 라인을 추가했다.
1982년 프랑스 파리에도 부티크를 열면서 블라디슬라브 바친스키와 함께 매 시즌 파리 패션위크에서 그녀의 패션 라인을 선보이기 시작했다.[3] 기존 패션계의 규칙과 관습들을 거부하고 해체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일본 자국에서도 요지 야마모토, 이세이 미야케, 야마모토 간사이 등의 디자이너 브랜드들과 더불어 유행을 이끌었다. 이는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로 인해 일본 국민들의 소비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던 덕이 컸다.[4]
1980년대 동안 가와쿠보가 의상에 주로 사용했던 색상은 검은색과 짙은 회색, 흰색이었다. 이러한 가와쿠보의 검은 색상의 옷에 대한 강조는 일본 언론들이 그녀를 '까마귀'라고 묘사하는 계기가 된다. 이 시기에 의상들은 종종 몸에 두르는 형태와 미완성된 가장자리와 함께 구멍과 일반적인 비대칭 형태를 띠고 있다. 파리 패션쇼에서의 데뷔부터 미(美)에 대한 기존의 관념에 도전한 그녀는 기자들이 가와쿠보가 디자인한 옷에 "히로시마 시크 (Hiroshima Chic)"라고 이름붙인 바 있다. 1980년대 후반부터 가와쿠보는 자신의 의상에 컬러 팔레트를 늘려갔으며, 이로 인해 그녀의 의상들은 이전보다 더욱 다채로워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가와쿠보의 꼼데가르송을 비롯한 1세대 일본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비교적 힘든 시기를 맞았다. 일본 버블경제가 본격적으로 붕괴하기 시작했으며, 자국 내에서는 아메카지 패션과 후지와라 히로시를 비롯한 우라하라 디자이너들이 득세했기 때문이다.
가와쿠보는 1990년대 초에 자신만의 매거진, 'Six'를 출판했다. 이 잡지의 특징은 텍스트가 거의 없고 주로 그녀가 영감을 준다고 생각하는 사진과 이미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1993년 꼼데가르송 Parfums를 런칭했다.
1996년 미술 출판사인 'VISIONAIRE'의 객원 편집자로 임명되었다.
2002년 이전부터, 가와쿠보는 LGBT와 관련된 많은 자료들을 그녀의 의류와 액세서리를 홍보하는 광고 캠페인에 사진을 인용하며 LGBT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을 해왔다.
2004년 영국인 남편 아드리안 조프와 함께 리테일샵인 도버 스트리트 마켓을 런던에 설립했다. 도버 스트리트 마켓은 전세계에 매장을 두고 패션 리테일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이하게 매장 내 브랜드별 구획을 별도로 구분해두지 않고 있다. 현재 매장은 일곱 곳[5]이 있으며 현재로선 더 이상 늘릴 생각이 없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꼼데가르송 한남스토어가 사실상 도버 스트리트 마켓의 역할을 대체하고 있다.
4. 논란
- 1995년 컬렉션에서 선보인 줄무늬 파자마 의상이 아우슈비츠를 연상케 한다 하여 유태인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링크 다만 뉴욕타임스 기사는 그런 의도가 있다고 단정 짓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링크
[1] 꼼데가르송의 CEO를 맡고 있으며 가와쿠보와 함께 리테일샵인 도버 스트리트 마켓을 설립했다. 하우스와 신진 디자이너들의 브랜드들 묶어서 차별 없이 동등하게 취급하고 이들과 협업도 종종 진행한다는 점이 특징이며, 건물 디자인도 매우 개성있는 편이다. 덕분에 도버 스트리트 마켓은 1990년대부터 새로운 디자이너 브랜드들의 등장과 트렌트 변화로 인해 조금씩 흔들리던 꼼데가르송을 지탱해주는 하나의 축이 되었다. 또한 고샤 루브친스키의 생산 및 유통, 홍보 등을 지원해주면서 브랜드 대중화를 이끌었다. 고샤 외에도 오프화이트, 자크뮈스 등의 흥행에 꽤나 영향을 미치는 등 신진 디자이너 등용문 역할도 톡톡히 해냈다.[2] 꼼데가르송은 기성복 쇼가 통상적으로 대중들이 난해하다고 생각하는 오트쿠튀르 스타일로 진행된다. 지금이야 패션 산업 자체가 성숙화되면서, 대중들도 이러한 아방가르드적인 면모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게 되었으나 당대의 대중들이 받았을 충격을 상당했을 것이다.[3] 1982년, 꼼데가르송을 설립한지 약 10년이 지난 후, 가와쿠보는 "3년 전 나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불만족스러워졌다. 나는 내가 좀 더 방향적이고, 더 강력한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느꼈다. 패션에서 우리는 1920년대나 1930년대에 행해진 일의 영향에서 벗어나야 했다. 우리는 민속적인것에서 벗어나야 했다. 0부터, 무(無)에서부터, 전에 하지 않았던 일, 이미지가 강한 일부터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고 언급한다.[4] 1980년까지 꼼데가르송은 많이 번창했으며 주디스 서먼에 따르면 "일본 전역에 150개의 프랜차이즈 상점, 80여명의 직원, 그리고 연간 3천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고 한다.[5] 런던을 비롯하여 도쿄, 베이징, 싱가포르, 뉴욕, LA,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