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일본의 소설가 엔도 슈사쿠의 종교 소설[1] 중 가장 유명하며 현대 종교소설 분야에서는 손꼽히는 명작으로 평가받는다. 1966년작이다.
2. 줄거리
시마바라의 난이 진압된 이후, 포르투갈의 예수회의 사제이며 저명한 신학자인 크리스토발 페레이라 신부가 일본에서 혹독한 박해에 굴복하여 배교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진다. 페레이라 신부의 제자 세바스티안 로드리고 신부와 프란시스 카르베 신부는 일본에 잠입하기 위해 마카오[2]에 들르고, 안내를 맡은 일본인 키치지로와 만나게 된다.그들은 키치지로의 안내를 받아 일본에 잠입하게 된다. 로드리고 신부는 카쿠레키리시탄들에게 환영받았으나, 곧 나가사키 봉행소로부터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의 기적과 승리를 기원하지만, 하느님은 "침묵"할 뿐이었다. 도망치던 로드리고 신부는 키치지로의 배신으로 밀고되어 체포된다. 이 과정에서 로드리고 신부는 수많은 신자들의 죽음과 박해, 그리고 막부에 체포당해 몸이 묶인 채로 바다에 던져져 순교하는 신자들을 보고 무심코 그들에게 달려가서 익사하는 카르베 신부의 모습까지 보게 된다. 게다가 그들의 죽음에서는 전혀 영웅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고, 허무하게 죽은 뒤에도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며 하느님에 대해 점점 믿음을 잃어가게 된다.[3][4]
로드리고 신부의 혼란은 자신의 스승이자 선교 선배인 페리이라 신부를 직접 만나 그가 순교하지 않고 배교했다는 소문을 두 눈으로 확인하며 극에 달한다. 그리고 끝내 로드리고는 자신이 배교를 하지 않으면 고문당하는 신자들을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어 고뇌하게 된다. 결국 로드리고는 후미에를 밟게 되는데, 동판에 발을 가져다 대자 통증과 함께 그림으로 그려진 예수가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다. 예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밟아라. 아픔을 알기 위하여 십자가를 짊어지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나는 그 발의 아픔을 알고 있다."고 말한다. 로드리고 신부는 하느님이 침묵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과 함께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진심으로 하느님의 가르침을 이해하며, 자신을 배신한 키치지로 마저 용서하게 된다.[5]
3. 배경과 해석
우리는 순교한 사람들을 존경하지만, 배교한 사람들을 경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도 그런 상황에 놓였다면 밟았을지 모르니까요. 그들도 인간인 이상, 그들에게 목소리를 주고 싶었습니다. 그들을 침묵의 재 안에서 불러일으키고 싶었습니다. 침묵의 재를 긁어모아 그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침묵’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아울러 저는 박해 시대에 그렇게 많은 탄식과 피가 흘렀는데도 왜 신은 침묵했을까 하는 ‘신의 침묵’과도 겹쳐 놓았습니다.
엔도 슈사쿠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25쪽에서
엔도 슈사쿠 <엔도 슈사쿠의 문학 강의> 25쪽에서
17세기 일본의 에도 시대에 불었던 대대적인 '키리시탄' 박해, 즉 천주교 박해를 배경으로 한다. 좀 더 정확한 시대배경으로는 박해 말기로 이제는 거의 카쿠레키리시탄화된 일본 가톨릭 공동체들을 마지막으로 정리하는 시기의 모습으로 소설 결말부도 그 카쿠레키리시탄의 모습을 조금 보여주고 있다. 잔혹한 박해의 모습 뿐만 아니라 그들을 돌보기 위해 파견되었던 예수회 선교사제들의 모습, 신앙을 지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일본 신자들 ,그리고 수많은 고통과 번민 끝에 신앙을 버린 배교자들의 모습 등, 박해 시대의 일본 천주교회의 모습을 형상화함으로써 신앙에 대한 핵심적인 질문을 던지며 주제를 표현하였다.
소설의 제목 '침묵'은 바로 그 주제이며 질문이다. 이 '침묵'은 지상에서 살아가는 믿는 이들이 겪는 고통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하느님의 '침묵'을 의미한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한다. 하지만 저자는 자신은 가톨릭 신자이며 소설을 통해 침묵 속에서 하느님은 어떤 방식으로 말씀하고 계시는가를 말하고 싶었다며 제목을 '침묵'으로 정한 것에 대해 후회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믿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죽음을 맞는 사람들, 죽음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사람들, 한편으로는 그 공포로 인해 하느님을 떠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소설은 신앙인이라면 한번쯤 고통 속에서 침묵하는 하느님으로 인해 상처입는 것들을 역사적 박해 상황과 결합시켜 극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박해에 침묵하는 하느님에 대한 소재는 사실 무신론과 유신론의 근본적인 대립주제 중 하나인 신정론, 곧 하느님이 존재한다면 악은 왜 존재하는가?라는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사실 매우 형상화하기 힘든 주제를 그 어떠한 판단의 강요도 없이 자연스러우면서도 박해 가운데에서 신앙을 버릴 것이냐 지킬 것이냐 하는 쉽지 않는 딜레마를 긴장감있게 서술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신앙을 버리고 사람들을 살릴 것이냐, 아니면 죽음을 불사하고 순교정신으로 신앙을 지킬 것이냐라는 갈등에 달하는 것은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하느님의 침묵'으로 인해 빚어지는 갈등의 정점을 나타내고 있다.
4. 이야깃거리
소설 결말부가 주제의 대립항 중 어느 한 부분에 대한 큰 강요 없이 맺어지긴 하지만, 결말부의 모습은 사실 작가 스스로도 인정한 '가톨릭의 가르침과 상반된 부분'이며 '프로테스탄트'적 면모를 띈다고 할 수 있다.하지만, 작가도 말했듯이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며 '진정한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 나름의 소신이라는 점에서 가톨릭계에서도 이 소설을 가톨릭 소설의 명작으로 꼽히고 있다. 실제로 종교소설 중에서도 상당히 유명하고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작품이다.
처음 이 소설을 번역한 건 개신교 계통 출판사 홍성사다. 홍성사는 1982년 번역가 공문혜 역본을 출간했다. '하느님'을 모조리 '하나님'으로 번역하는 등, 천주교적인 용어 대부분을 개신교 식으로 번역하였다. 한국 가톨릭에서는 1992년 '성 바오로 출판사'를 통해서 번역하였다. 성 바오로 출판사는 홍성사 판에선 개신교 식으로 바뀌거나 뭉그러뜨린 가톨릭 용어, 직책들을 제대로 살렸다. 다만 이쪽이 홍성사판보다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냐면 그러지만은 않다. 성 바오로 출판사에서 '정부', '수령'하는 식으로 뭉그러뜨린 부분을 홍성사 역에선 '막부', '부교'(봉행) 등으로 번역하는 식으로 관직, 제도, 풍속 등 가톨릭 외에 일본에 관한 부분은 홍성사 판이 다 잘 번역했기 때문. 다만 홍성사 판본은 원작 9장의 마지막 단락의 단어를 바꾸고, 내용을 추가하는 적극적 개입을 통해 완결된 형태의 굳건한 신앙고백으로 끝나게 함으로써 원작의 실존적 신앙 갈등을 약화시키고 한국의 기독교인이 편안하게 작품을 수용하도록 의도한 것으로 보이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원작을 왜곡하고 저자의 집필 의도를 훼손한 것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2번 영화화됐다. 1971년 시노다 마사히로 감독이 엔도와 함께 각색해 영화화됐다. 각색이 많이 된 편이며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소소한 여담으로 내용상 영어 연기가 등장하지만 소위 말하는 일본식 영어어서 정작 영어권 사람들은 못 알아들을 정도라고 한다. 나머지 하나는 사일런스(2016) 참조.
한국에서 현지화 버전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엉뚱한 이유로 희대의 괴작이 되었다. 왜 그런가는 그 영화인 시선 문서를 보라.
[1] 이모의 영향으로 가톨릭 신자로 유명했으며 이외에도 <사해 부근에서>, <예수의 생애> 등 가톨릭색이 짙은 작품들을 다수 발표했다.[2] 한국 가톨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2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가 유학한 곳이다.[3] 더군다나 자신은 비록 붙잡힌 뒤에도 예상했던 것처럼 고문을 당하거나 참혹하게 순교하기는커녕 매일매일 독방에서 3끼 식사를 받으며 편안한 삶을 누리고, 악랄하고 표독스러울 거라 생각했던 막부의 고관 이노우에나 부하들이 자신을 인간 대 인간으로 예의를 갖추어 대하는 모습에 더욱 혼란을 느낀다.[4] 작중 이노우에 지쿠고노카미는 실존인물로 본명은 이노우에 마사시게(井上正重, 1585~1661)이다. # 본인도 배교한 기리시탄이었던 탓에 기리시탄을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고, "무턱대고 잡아서 고문하고 죽이면서 신앙을 버리고 개종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오히려 기리시탄들의 반발만 더욱 불러일으킬 뿐인 하책(下策)"이라며 기리시탄에 대한 폭압적인 대책보다는 정신적인 압박을 더욱 중시했으며, 그리고 일반 신자들에 대한 개종보다는 선교사로 온 신부들을 개종시키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예를 들면 귀 뒤쪽을 살짝 찢어서 구덩이에 거꾸로 매달아서 피가 한 방울씩 찔끔찔끔 떨어지게 해놓은 다음, 결국 괴로워하던 기리시탄이 무의식적으로 "나무아미타불"이라고 한 마디만 중얼거려도 배교한 것으로 간주하고 풀어주는 식이었다. # 감옥에 갇혀서 옆방에서 들려오는 (고문 당하는 중인) 기리시탄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괴로워하는 로드리고 신부에게 "당신이 배교하겠다고 한 마디만 하면 저 기리시탄 세 사람을 지금이라도 살릴 수 있는데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싶으냐? 왜 그렇게 사람이 이기적이냐?"라며 분개하는 옥졸들의 원망 소리는 덤이다.[5] 물론 이마저도 이노우에 지쿠고노카미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래봤자 배교는 배교인데 뭘 혼자서 정신승리하고 있어?"라는 비웃음의 대상밖에 되지 않았지만. 후미에 항목에서도 언급되었듯 기독교에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의 불가피한 배교"도 배교로 간주된다.